19화
셀레나는 그 뒤로 30분 정도 지나서야 사무실에 나타났다. 그녀는 왠지 피곤에 절어있는 천후를 보면서 갸웃했지만, 딱히 별 문제는 없어보여서 욕실 옆의 방으로 안내했다.
“용케 잘 찾아왔네? 보통 잘 못 찾던데.”
“…그럴 거 같더라.”
아마 못 찾는 게 아니라 들어오는 입구를 보고 안 오는 거겠지만. 천후는 뒷말은 속으로 꾸욱 삼켰다.
들어온 방은 옷장과 화장대, 그리고 2인용 메트리스 하나와 이불들이 놓여있는 마찬가지로 생활감 넘치는 공간이었다.
그 안에 그냥 봐도 오늘 어디 버려져있는 걸 주워온 것 같은 탁자와 의자가 놓여있었는데, 이렇게나 이질적일 수가 없다.
하지만 그녀는 예의 정장 차림으로 익숙하다는 듯이 의자 하나에 걸터앉더니, 눈짓으로 앉을 것을 권했다. 마지못해 앉으니 삐걱삐걱 거리는 게, 주워온 것 같다는 심증이 깊어져만 갔다.
“끄으으응.”
“왜 그래? 안색이 안 좋은데.”
“아니…. 좀 내 미래와 안녕이 걱정되서 그런다. 여기 진짜 사무실 맞아?”
“응? 그러엄. 좀 영세하다고 했었잖아.”
아니…. 이건 좀 영세한 정도가 아닌데. 누가 봐도 명백하게 이 상가 월 임대료가 주택 월세보다 낮으니까 들어와서 집으로 개조해서 살고 있는 걸로 보이는데.
그렇게 딴지를 걸고 싶었지만, 흐흥 하고 가슴을 활짝 벌리고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어때서 그래. 갈 곳 없는 사원들을 위해서 방을 마련해주고 생활공간을 지원해주는 회사! 이 얼마나 가족적인 회사니?”
“그. 그래. 와아아.”
이런 모양새라지만 그녀는 나름대로의 자긍심이 있는지 장점이라고 어필하고 있었다. 그걸 가지고 뭐라 할 수도 없어서, 천후는 성의 없이 박수를 짝짝 치며 호응해 주다가 말했다.
“그런데…갈 곳 없는 사원이라니? 설마 강호 누…형?”
잠깐 누나라고 하려고 했던 천후는 그 순간, 문이 살짝 열리며 눈동자 하나가 번뜩이는 것을 보고 황급히 말을 바꿨다.
대화해본 결과 그녀의 나이는 23살. 3살이나 연상인데다 직장 내에서 선배니 자연스럽게 존칭을 쓰게 되었는데, 처음엔 누나라고 불렀다가 호되게 혼나고는 형으로 교정 당해버렸다.
“아∼. 뭐 그렇지. 강호 씨는 해외파견을 자주 나가거든. 주로 중국으로. 그래서 한국에 들어와 있을 땐 여기서 숙식하곤 해.”
“아니 왜…? 서울에 갈만한 오피스텔 같은 곳도 많은데 굳이 이런데서?”
“전자기기에 약해서 사전예약을 잘 못하거든. 직접 찾아가는 건 부끄러워하고.”
뭐야. 그거. 귀엽잖아. 잠깐 그런 생각을 하던 천후는 살짝 한번 고개를 저었다.
“그럼 서포터한테 예약하게 하면 되잖아?”
“아. 강호 씨 서포터는 미성년자거든. 뭐 못할 건 아니지만 어린애가 숙박시설 예약하게 하는 건 싫다나봐.”
“그건 좀…그럴 만하군.”
“그리고 본인 성격도 좀. 저렇잖아? 그래서 그런 거 전부 받아주는 사무실에서 그냥 지내는 거지. 숙박비도 굳으니까.”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셀레나의 몸짓을 보며 천후는 애매하지만 납득했다. 그래, 뭐. 사무실에서 좀 살면 어떠랴. 될 대로 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 뭐…. 그렇다 치고 그런데 왜 저 사람은 자기가 남자라고 우기는 거야?”
“몰라. 무슨 집안이 어쩌네 하는데, 난 별 관심 없어서. 근데 계속 강호 씨 이야기만 한다? 왜? 관심 있어?”
우후후 하고 말아진 주먹을 입가에 대면서 장난스레 물어오는 말에 천후는 흠칫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야! 그냥 앞으로 오래 봐야 할 사람이고, 같은 일리미네이터라고 하니까 궁금했던 거지.”
“그래? 뭐 그렇다고 쳐줄게.”
그렇게 말하며 베시시 웃은 셀레나는 거실(…) 탁자에서 가지고 나온 파일철들을 꺼내놓았다.
한 눈에 봐도 고용계약서와 보험관련 계약서였기 때문에 천후는 그제야 자신이 취직하러 왔다는 것을 실감하고 살짝 긴장했다. 잠시 해당 건마다 서류를 분류한 셀레나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뭐 그럼 기본적인 이야기를 좀 할게? 어차피 사인이 확정된 이야기지만, 업무에 대한 건 서로 알아야하니까.”
“으, 응.”
“일단 우리 회사에서 너를 고용하는 건 일리미네이터로서야. 일리미네이터의 직무. 그건 디제스터 퇴치 의뢰가 들어오면 그것을 퇴치하는 것. 여기까지는 이해가 가지?”
“그야 뭐 당연히.”
“좋아. 중요한건 이제부턴데, 디제스터 퇴치에는 메인 퀘스트와 서브 퀘스트가 있다는 건 알 테고.”
“어? 잠깐, 뭐라고? 메인, 서브?”
“어? 몰라?”
당연한 부분이라 생각하고 빠르게 넘기려고 했던 셀레나는 그의 반응에 말을 멈췄다. 잠깐 고개를 갸웃하던 셀레나는 살짝 얼굴을 굳혔다.
“너 설마…. 잠깐만. 너 지금까지 퇴치했었다는 디제스터 목록이랑 날짜 좀 말해봐.”
“응. 그러니까….”
천후는 자신이 지금까지 퇴치했던 18건, 아니 19건에 대해서 모두 말해주었다. 그러자 셀레나는 방을 뛰쳐나가 컴퓨터를 켜고 뭔가를 검색해보고 돌아왔다.
다시 자리에 앉은 그녀는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머리를 확 하고 쓸어 넘기며 손으로 자기 얼굴을 부채질하며 말했다.
“세상에…. 전부 메인 퀘스트네? 너 진짜 괴물이구나?”
“무슨 소리야?”
“네가 진짜 호구였단 소리지, 바보야. 와…. 유그드라실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날도둑이네?”
“??”
무슨 소린지 영문을 알 수가 없는 천후가 어리둥절해있자, 셀레나는 의자를 들어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아서는, 따로 종이를 한 장 더 꺼내 그림을 그려가면서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바보야. 잘 들어. 디제스터 등급은 신, 천, 멸, 경, 파. 5단계. 이 녀석들은 기본적으로 사전 측정이 불가능하게,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인간을 공격하지. 네가 얼마 전에 잡은 게 파 등급이고.”
“응.”
“근데 말야…. 파 등급이 다 같은 파 등급이 아니거든. 갑자기 나타나긴 나타났는데 힘이 약한 디제스터도 있어요. 얘네 들은 보통 자기 힘이 일정 수준이 되기까지 인간을 습격하지 않고, 대신 다른 징후를 보이면서 힘을 기르거든? 이런 애들을 서브 퀘스트라고 해.”
“…처음 듣는 이야긴데.”
“…….”
그 말에 셀레나는 정말 불쌍한 사람 보는 눈으로 그를 올려보았다.
“진짜…. 에휴. 하여간 말야. 간단하게 말해서 당장 나타나서 날뛰는 놈들은 메인 퀘스트. 너무 약해서 시간을 두고 숨어 지내는 애들이 서브 퀘스트야. 오케이?”
“어.”
“이 중에서 메인은 너도 알다시피 군에서 의뢰를 하고, 유그드라실 쪽에서도 무조건 기업에 연락을 다 돌려. 국가 일리미네이터는 무조건 차출되고 기업에서도 근방 일리미네이터 협조를 안 하면 페널티가 들어와.”
“하긴 뭐…. 디제스터가 한번 날뛰면 민간인 백 명, 이백 명 사상자 나는 건 우스우니까 당연하네.”
“그래. 하지만 그래서 기업 입장에선 좀 꺼려. 메인은 현상금도 높고, 기업 네임 벨류도 한 번에 크게 높여주지만 강하고 위험하니까. 그래서 저렇게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보내기 싫어해. 그래서 보통 일리미네이터의 주요 사냥감은 서브 퀘스트야.”
전혀 몰랐다. 천후는 정말 어안이 벙벙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아니 그럼 나는 몇 년간 남들이 마지못해 하는 일들, 가장 위험한 일들만 골라서 해왔단 건가?
그것도 건당 700받고? 아니 유그드라실에 있을 땐 그것도 못 받고?
그제야 왜 그녀가 자신을 불쌍하단 듯이 대했는지를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
“그러니까 서브 퀘는 메인 퀘 파급 보다 발생 빈도도 20배 이상 높고, 의뢰도 민간에서 들어와서 현상금 폭도 커서 이득이 더 된다? 약하고?”
“그렇지. 서브 퀘만 잘 챙겨도 너희 인건비는 뽑고도 남아.”
꼼꼼히 그림까지 그려가며 해주는 설명을 차근차근 들은 천후는 가만히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지금까지의 인생이 억울하다 생각되는 건 정말 오늘이 처음이었다.
“…혹시나 해서 말인데. 메인 파급, 그러니까 엊그제 잡은 녀석 정도면 현상금이 얼마 정도 돼?”
“아무리 낮게 잡아도 5억은 할걸? 보자…. 7억이었네. 이것도 네가 조기 퇴치해서고, 아마 인명피해가 나기 시작했으면 배로 뛰었을 거 같은데?”
“유그드라시이이이이일!”
10년간 길러준 정이고 나발이고 모든 게 다 부질없다. 7억짜리를 잡아다 줬더니 팔만 좀 붙여놓고서 6억 9천 3백을 떼어먹었다니?! 세금이 빠져나갈 테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말도 안 되는 착취에 천후는 오열했다.
“으휴. 불쌍! 유그드라실 직속, 그리고 군 소속 일리미네이터가 적은 게 그 이유지. 당장 네가 프리랜서로 뛰면서 잡았으면 그거 너 혼자 전부 다 먹었을 거 아냐? 소득세율로 때가니까 세금 때면 4억 5천이네. 중계비 때더라도 4억이 넘을걸.”
“으허허허헝!”
그렇게 19마리면 대체 돈이 얼마야? 천후는 저 하늘로 날아가는 5만 원짜리 심사임당 철새무리가 어른어른 보였다. 이 와중에도 수표가 아니라 지폐다발이 날아다닌다는 환영이나 보고 있는 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프다.
“뭐…. 하여간 돌아와서. 우리 회사도 그렇게 서브 퀘스트 위주로 갈 거야. 그렇게 해서 연봉 세후 1억5천. 그리고 메인 퀘스트 한정으로 너한테 인센티브를 줄게. 퇴치 후 세금 공제 실 수령액의 15%. 대신 여러 명이 잡으면 분배 후 금액이고.”
“어제는 그냥 디제스터 퇴치 건당이라며?”
“어머나. 급해서 말을 재대로 못했나보네 세상에나. 미안∼.”
이 요망한 게? 천후는 쌍심지를 켰지만, 그 순간 셀레나는 찰딱 하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더니 팔을 꾸욱 하고 끌어안아왔다.
“에이∼. 실수 할 수도 있지∼. 왜 그래 우리 사이에.”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니거든요, 사장님?”
“아무 사이도 아니긴∼. 내 속살을 전부 봐놓고선.”
뭉클하고 노골적으로 팔이 파묻혀 들어가는 감각에 천후는 살짝 흥분했지만,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면서 말투를 바꿨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목덜미와 다리 사이를 흘낏 바라보고는 씨익 웃으며 더욱 안겨들었다.
“그러지 말구. 잘 생각해봐. 우리만한데 없다? 돈은 더 쳐줄지 몰라도 방금 전처럼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으면 바로 호구 잡으려고 했을 걸? 그리고 취업사기가 얼마나 무서운데.”
“…….”
솔직히 한번 이미 당했던 입장이다 보니 아니라고 못하겠다. 게다가 이렇게 딱 달라붙어 있으니, 몸의 감촉 뿐 아니라 귓가에 닿는 숨결과 몸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체취가 파고들어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그래도 간신히 이성을 잡은 천후는 어느새 바싹 맞닿을 정도로 다가와 있는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피하면서 마지막으로 한번 튕겨보았다.
“그래도 나한텐 이득이 없잖아.”
하지만 그 말에 셀레나는 배시시 웃더니 그의 다른 한 손을 가져와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리면서 자신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없기는. 사장님이 이렇게 착하고 예쁘잖아.”
“퍽이나…. 알았다. 졌다, 졌어. 사인 어디에 하면 돼?”
“우후훗.”
승낙이 떨어지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난 셀레나는 다시 앞자리로 가서는 각 문서들에 기입해야할 칸들을 알려주었다.
“아. 힘들다, 힘들어. 어차피 갈 데도 없으면서 뭐 그리 튕기니?”
“쳇.”
천후는 방금 전까지 온몸에 가득했던 감촉들을 내심 아쉬워하면서도 펜을 놀렸다. 전부 적어서 그녀에게 주자, 셀레나는 문서들을 파일철에 넣어 딱 하고 닿으며 손을 내밀었다.
“좋아! 그럼 오늘부터 우리 회사 사원이 된 걸 축하해, 영천후 사원.”
“아이고. 고맙습니다, 셀레나 사장님.”
의례상의 악수와 인사를 주고받은 둘은 서로를 마주보며 웃었다.
천후는 내심 여기에 들어오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긴, 다른 데보다 좀 덜 받더라도 이정도로 프리한 분위기인 곳도 없으리라. 그리고 아직 블랙리스트에 올라있을테고.
“그럼 오늘은 가보면 돼?”
“아. 잠깐만.”
그렇게 몸을 돌리려고 하던 때 그때, 문서를 정리하고 잠깐 뒤돌아서고 있던 셀레나가 그를 멈춰 세웠다.
“응? 아직 더 볼일 남았어?”
“공적인 볼일은 다 끝났고…이건 내 개인적인 용건인데. 들어줄 수 있을까?”
“응? 뭔데?”
“그게…. 음. 별건 아니고…. 잠깐…우리 집에 같이 가지 않을래? 네 서포터 빼고.”
전혀 별거 아닌 부탁이 아닌데?
말의 내용에 놀란 천후는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시 마주본 그녀의 얼굴은 어째선지 살짝 분홍빛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 작품 후기 ============================
추천, 선작, 코멘트 감사드려욧! 조회수가 쪼끔쪼끔씩 오른다 와이~.
아. 오늘은 이거 하나인걸로...(털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