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그날 저녁. 셀레나의 아버지는 천후가 트란제비야 마법 사무소의 새 직원임을 듣고는 아주 기뻐하면서 그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한참 연장자인데다가 방금 전까지…이것저것 해버리려고 했던 여자의 아버지다.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는 노릇이라, 천후는 그것에 응하고 말았다.
“그래서 오늘은 저녁을 먹고 들어갈 거 같아요.”
<그렇습니까?>
그 사실을 천후는 희주에게 전화로 보고했다. 아무 연락도 안 해두면 그녀는 분명 식사도 거르고 석상처럼 그를 기다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조심해서 들어오세요.>
처음 대답할 때는 전혀 변화 없었던 목소리가 마지막 인사 할 때는 살짝 낮아져서 부드럽게 들렸다. 그리고 집에서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자, 자기도 모르게 천후는 기분이 좋아져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자 그럼….”
천후는 전화기를 집어넣고는 거실로 나왔다. 거실에는 셀레나와 그녀의 아버지 황권복, 그녀의 어머니인 케이트가 상을 펼쳐놓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하하. 정말 놀랐네. 우리 회사에 신입 일리미네이터가 들어올 줄이야! 자자. 어서 앉아서 들게나.”
“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새삼스레 다시 꾸벅하고 인사한 천후는 황권복과 마주하여 앉았다. 그러자 셀레나의 양친은 앉은 자세에서도 한참 큰 그를 보고 놀라고서는 자기들끼리 웃었다.
“이야. 세상에. 훤칠하구만!”
“믿음직스럽네요. 정말로.”
“하하하. 감사합니다.”
마법사가 되어놔서 키로 칭찬받을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이런 소리를 듣자 천후는 왠지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권복은 앞에 나란히 앉은 셀레나와 천후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흐뭇하게 웃었다.
“자자. 어서 들게나. 식겠네.”
“잘 먹겠습니다.”
천후는 고개를 쳐 박고 밥을 먹는데에 집중했다. 딱히 상다리가 휘어져라 차린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손님이 오셨다고 소불고기에, 온갖 나물에 집 안에 있는 좋은 반찬이란 것들은 많이도 꺼내 놨다.
처음에는 양친의 시선과 옆자리에 앉은 셀레나가 주는 묘한 압박감을 털어내고자 입을 다물고 먹었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긴장이 풀린 그는 정말로 맛있게 밥을 먹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한 그릇이 싹 비워졌다.
“죄송한데 한 그릇 더 주시겠어요?”
“호호. 처음 온 집에서 잘도 먹네. 더 있으니까 많이 들어요.”
셀레나의 어머니답게 아직도 젊은 시절의 미모를 간직하고 있는 케이트는 밥공기에 밥을 한가득 퍼다가 담았다.
“음식이 맛있어서….”
“어휴. 젊은 사람이 금칠해주니까 좋네. 당신도 저래봐요.”
“허허허. 나도 젊을 땐 그랬잖아. 식성이 좋은 게 보기 좋구만. 체격이 커서 그런가? 그거지? 근육이 많을수록 기초 대사량이 높다던데.”
“아, 네. 그래서 평소에도 좀 다른 사람보다 양이 많은 편이예요.”
부끄럽게 고백한 천후는 몸 둘 바를 몰라 하면서도 계속에서 입에 음식을 담았다. 사실 평소에도 양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왠지 모르게 잘 먹으면 먹을수록 분위기가 좋아지는 것 같아 계속 쑤셔 넣은 것도 있었다.
천후가 식사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황권복은 페이스가 좀 느려지는 듯하자, 셀레나에게 시선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이야…. 정말 다행이야. 회사 일은 셀레나에게 완전히 맡겨놨었지만, 그래도 걱정됐었는데 자네가 와줬으니 안심이네.”
“아, 아버님. 무슨 그런 말씀을.”
“아니야. 그래도 사무실에 남자 하나는 있어야지. 나는 늘 여자들끼리만 운영하는 걸 걱정하고 있었단다. 안 그래도 거기 위치도 그리 좋지 않은데.”
“으…. 그건.”
확실히 사무실 위치가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밤이 되면 향락과 퇴폐의 거리로 변하는 그곳에 말만한 처자들이 반 가정집을 차려놓고 산단 건 부모 입장에서는 걱정되는 일이리라.
한편 천후는 다른 부분에서 궁금증을 느꼈다.
“저…. 그런데 회사의 사장님은 아버님 아니셨나요?”
“아버님?”
뜻밖의 호칭에 황권복은 눈을 꿈뻑꿈뻑 뜨다가 껄껄 웃었다. 셀레나 역시 그 모르게 도끼눈을 뜨고는 그의 발가락을 꼬집어댔다.
“아. 아야야. 제가 말실수 한건가요? 셀레나 사장 대리의 아버님 아니신가요?”
“아니. 맞지. 그냥 내 딸 옆에서 다 큰 남자가 아버님이라고 부르니까 잠깐 깜짝 놀랐지.”
“…….”
그러네. 놀라는 게 당연하네. 천후가 얼굴을 붉히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자, 케이트는 권복의 등을 팡 때렸다.
“어휴. 무슨 그런 소릴 해요. 이 사람도.”
“허허허. 미안하네. 으음…. 나는 5년 정도 전부터 사무실 운영에서는 완전히 손을 놨어. 좀 문제가 있었거든. 그런데 셀레나가 한사코 고집을 부려서 일단 회사 자체는 굴러가게는 해놨었지.”
트란제비야 마법 사무실은 5년 전까지는 괜찮게 운영되던 디제스터 퇴치 업체였지만, 몇 가지 사정이 생겨 일리미네이터의 수가 줄어들면서 쇠퇴했다고 했다.
황권복은 그 시점에서 회사를 접으려고 했지만, 당시 중학생이던 셀레나가 고집을 부려서 건물만 바꾸고서 유지는 계속했었다.
하지만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 운영하는 회사라는 게 제대로 굴러갈 리가 만무해서, 결국 의뢰를 받지 못해 점점 더 작은 사무실로 옮기더니 이제 거의 월세가 없다시피 한 지금의 사무실로 옮겼다는 것이다.
“그래도 작년에 강호 군이 들어와 준 게 다행이었지. 실력도 대단하고. 덕분에 중국 쪽 일이 뚫려서 셀레나가 기뻐했었지.”
“아, 아버님도 참. 그런 걸 다 말씀해주시면 어떻게 해요.”
과거사들이 속속들이 튀어나오자 셀레나는 얼굴을 붉히며 채근했다. 하지만 황권복은 되려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런 이야기는 해둬야지. 사실상 이제부터 국내 사업은 저 친구가 혼자서 하게 되잖니? 사실상 부하직원이 아니라 파트너라고 생각해야 하는 게 맞아.”
“그렇지만요…. 그런 건 제가 때를 봐서 말할 생각이었단 말이에요. 아버님은 아직도 셀레나를 아이처럼 생각하시나요?”
셀레나르을? 말만한 처녀가 왠 삼인칭이야? 천후는 팔뚝에 닭살이 돋아 오들오들 떨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시선을 눈치 챈 그녀는 부모들이 보지 못하게 손을 움직여 그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천후는 아픔에 눈을 크게 떴지만, 이 분위기에 비명을 지를 수도 없어, 입술을 앙 다물고 버텨야만 했다.
막상 범인인 셀레나는 그래놓고는 삐진 듯이 연기를 해댔다. 내숭이 몇 단인지 모르겠다.
“허허허. 내 딸은 내가 보면 언제나 아이지. 지금도 이렇게 예쁘잖니?”
“아이. 아버님도.”
호호호 웃는 모습에 천후는 오글거린다 싶었지만, 문득 세 사람을 보면서 자기도 슬쩍 웃었다.
과연. 이런 게 가족인가….
“좋네…. 이런 거.”
무심코 중얼거린 천후는 움찔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왜 이런 말을 꺼냈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음? 뭐가 좋단 건가?”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해보게나, 어서. 자자자. 우리 신입 사원 이야기도 좀 들어봐야지.”
“…….”
왠지 그 한마디에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천후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면서 입을 열었다.
“그냥…가족이란 게 좋구나 싶어서요.”
“음? 자네 가족이 없는 겐가?”
“네. 10년 전에….”
“10년 전…? 가만. 10년 전에 영천후라…. 아! 그럼 자네가 그?”
“…네.”
“세상에…. 그랬구만.”
대참사의 유일 생존자. 10년 전, 그가 살아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수많은 매스컴들이 달려들어 그에 대한 기사들을 쏟아냈었다.
그의 이름 등의 개인 정보는 지켜져야 했지만, 그 정도의 큰 이슈다. 알 권리라는 이름으로 그의 이름, 키, 몸무게, 나이. 파낼 수 있는 모든 정보는 전부 언론에 공개되었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많이 잊혔지만, 지금도 이름을 말해주면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곤 했다.
“그랬구만…. 그랬어…. 이것도 인연이란 건가?”
뭔가에 홀린 듯이 중얼거린 황권복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찬장에서 양주를 꺼내와 뜯었다.
“마시게나. 나와 한잔 하세.”
“…….”
왠지 물기가 스며들어있는 그의 목소리를 듣자, 천후는 거절하지 못하고 잔을 받았다.
“미안하네. 양친을 잃은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
“아닙니다. 다 지난 일인걸요.”
“그래도 내 마음이 편치 않아.”
잔을 들고 고개를 푹 숙이는 그 모습에, 천후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릴 적부터 나이차 나는 연장자…부모와 살았던 적이 없었던 그는 이럴 때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몰랐다.
다만 어떻게든 고개를 들게끔 하고 싶어서, 천후는 애써 웃음 지으며 지금껏 다른 사람들에게 잘 말해주지 않았던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부모님이라고 해도…저는 사실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걸요.”
“그게 무슨 소린가?”
“저에겐…그날 이전의 기억이 없거든요.”
“!”
천후에게는 그날 이전의 기억이 없다.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정확히 대참사 당일 날의 기억만이 남아있을 뿐. 그래서 꿈에서 아무리 부모님이 죽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들…그것은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는 게 괴로울 뿐이지. 거기에 가족의 정이 개입될 요소가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죽는 것과 차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괴롭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담당의인 고인규는 그것이 방어기제라고 하였다. 10년간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그 꼴을 매일 봤다간 무슨 일을 일으킬지 몰라 뇌가 차단한 것이라고.
천후는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당장 매일같이 보는 꿈만으로도 돌아버릴 것 같은 걸.
“…….”
그는 이 이야기를 하면 조금은 분위기가 편해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황권복은 입을 벌린 채 아무소리도 하지 않고 덜덜 떨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옆자리에 앉아있는 셀레나 역시 입을 가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천후는 자신이 다시 말실수를 했단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되돌릴 길은 없었다.
그 뒤로 긴 시간, 거실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
저녁식사가 끝나고 돌아갈 때 황권복과 케이트는 무슨 일이 있으면 자신들에게 의지하라고, 부모님처럼 여겨도 좋다는 말을 해주었다.
왠지 그들의 눈빛이 처음 상에 앉았을 때보다 더욱 강해져있는 것 같아, 천후는 부담스러우면서도 기뻤다.
최대한 예의를 지켜 알겠노라고 대답한 천후는 배웅 나온 셀레나와 함께 아파트 단지를 나왔다.
“몰랐어. 네가 그렇게 살아온 지는.”
“이야기를 안했으니까.”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한 후, 천후는 황권복의 채근으로 자신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뒤 10년간 유그드라실에서 살아왔다는 것.
수많은 조사와 실험을 받았다는 것.
지금도 정신 약물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 등을 털어놓았다.
자신에겐 일상이나 다름없는 이야기였는데, 그들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고 천후는 이것이 일반 사회에서 쉽게 통용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절감했다.
앞으로는 말을 조심해야겠다고 천후는 속으로 다짐했다.
“…….”
덕분에 셀레나도 함께 나온 이후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까부터 이런 분위기는 그로서도 답답했다. 부모님 앞도 아니고, 단둘이 있을 때도 앞으로 계속 이런 분위기이고 싶진 않았다.
“너 아까 내숭 엄청 부리더라?”
“…왜. 부리면 안 돼?”
천후의 의향을 읽었는지, 셀레나는 약간 과도하게 입술을 샐쭉거리며 마주봐왔다. 금발을 찰랑거리면서 그러는 게 귀여워, 천후는 씩 웃었다.
“굳이 부모님한테 그럴 필요 있어?”
“있지. 난 언제까지고 우리 아빠, 엄마한테는 귀여운 딸이고 싶단 말이야. 그러려고 얼마나 노력하는데.”
“노력이라.”
“그럼. 노력이지.”
흥 하며 몸을 휙 돌린 셀레나는 발걸음을 멈추더니,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를 발로 살살 건드리다가, 이윽고 툭 찼다.
“네가 자기 이야기를 해줬으니까…나도 우리 이야기를 해줄게.”
“응?”
“우리 아빠, 엄마가 너 보면서 표정이 되게 좋았지?”
“그랬지.”
딸이 외간남자를 자기들 없는 사이에 집에 데려왔었는데, 밥까지 먹이면서 좋아한단 게 사실 쉽게 보기 힘든 일이다. 상식 없는 천후로서도 그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대답에 피식 웃은 셀레나는 말을 이었다.
“그거, 우리 오빠 생각나서 그랬던 거야.”
오빠? 그러고 보니 가족사진에는…그녀보다 몇 살 더 많아 보이는 남자 아이가 찍혀있었다.
“오빠가 어디 멀리 출장이라도 가있어?”
“응. 가 있지.”
셀레나의 대답은 가벼웠다. 이미 그 대답에 대해선 마음속에서 내려놓은 지 오래된 것처럼. 그렇게 하늘을 올려보며 말한다.
“저 하늘나라에.”
“…….”
“죽었어. 5년 전에. 디제스터 때문에.”
휙. 돌아 서있던 셀레나는 다시 몸을 돌려 마주봐왔다. 금발이 나부끼며, 새하얀 얼굴에 웃음이 실려 있다.
아픈 웃음.
“그날 내가 너한테 화낸 이유야.”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사진 안에서 분홍 토끼인형을 안고 있던 그 소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들이 자신을 보면서 느꼈을 감정을, 지금에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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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선작,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그럼 12시에 뵙겠습니다~!
아. 셀레나는 사정이 있어서 모계쪽 성을 따르고 있다는 설정입니다. 그 관련은 나중에 차차 나오지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