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몇 안되는 공간이었지만, 저녁시간이 되어서인지 아이들은 전혀 없고 한 쌍의 남녀만이 벤치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천후와 셀레나였다.
“우리 오빠는 일리미네이터였어. 업계에서 황정태라고 하면 나름 알아줬었어. 오빠가 있을 때가 우리 회사 최고 호황기였지.”
천후가 사온 음료를 한 모금 마신 그녀는 이야기를 계속 했다.
“그러다가…경驚급 디제스터가 지방에 출현했었어. 우리는 먼 지역이니까 당연히 말렸지만…우리오빠는 바보였거든. 정의감 같은 게 있어서 한 명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필요할 테니까 가봐야겠다고 말하더라. 바보 같은 게.”
“멋진 사람이었네.”
“멋있지 않아. 그래놓고 그렇게 내려가서 다음에 봤을 땐…관 속에 있었는걸..”
“…….”
“바보지…. 그게 바보가 아니면 뭐야? 그때 동원된 일리미네이터가 25명이야. 그 중에서 둘이 죽었는데 그 둘 중 하나가 걔였다고. 그걸 어떻게 참아줘.”
“셀레나.”
“이야기 들어보니까 여자나 감싸다가 그랬대. 죽으면 다 무슨 소용이야!”
“셀레나.”
그녀의 어투가 격해지자, 천후는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셀레나는 힘없이 딸려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아빠는 사업을 접었어…. 사상자가 나왔고, 그게 친인척이란 게 알려지니까 사람들이 순식간에 떨어져 나가더라. 가족한테도 저러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떨 거냐고.”
“…….”
“아빠는 강한 사람이야. 술에 절어 지내지도 않았고…오빠가 죽고서도 눈을 피하지 않았어. 다른 일도 꾸준히 하셨고. 그치만 그래도…다시는 당신께서 긴 세월 투자하신 이쪽으론 눈을 두지 않으시더라.”
“…….”
“그게 싫었어. 아빠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 그래서…억지를 부렸어. 내가 해보겠다고. 그래서…여기까지 왔어.”
셀레나는 힘없이 웃다가, 일렁이는 눈동자로 천후를 마주보았다.
“아빠, 엄마한테 내숭을 부리는 건…나만 있어도 된다고 생각해줬으면 해서야. 오빠가 없어도…아빠, 엄마 예쁘고 귀여운 딸이 요렇게 있잖아요. 하고.”
“……잊을 수 없는 거야. 부모로선.”
“알아.”
베시시 하고, 눈까지 감아가며 크게 웃는다. 분명 웃음인데도, 천후는 어쩐지 그것이 너무나 아파보였다.
“알고 있어. 나도 다 컸고. 어른이고. 어떤 마음인지 알아. 그래도…그러고 싶어.”
“그래.”
“그래서 오늘 조금 기분이 상했어.”
“…….”
“널 보고 오빠 생각하는 티가 풀풀 나서. 좋겠네. 듬직하게 생각 되서.”
말없이, 손을 들어 그녀의 귀밑머리를 넘겼다. 찬연한 청색 눈동자가 호수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건드리면 지금이라도 못 밖으로 넘쳐 나올 듯이. 그것이 안쓰러워, 천후는 천천히 얼굴을 가져갔다.
그녀의 눈동자에 살짝 파문이 일었다가 사라졌다. 떨리던 눈썹이 호선을 그린다. 입가에 조금은 다른, 따듯한 미소가 맺혔다. 그것을 입안에 담고 싶어 천후는 조금 더 서둘렀다. 하지만….
“…지금은 싫어.”
셀레나는 꾸욱 하고 왼손의 고운 검지와 중지를 세워서 그의 입술을 막았다.
“왜?”
“엉큼해서.”
“그게 싫은 게 아니잖아.”
“…….”
입이 눌린 채로 천후는 속삭였다. 그 말에 셀레나는 살짝 시선을 떨궜다.
“지금 하면 불쌍해서 하는 거잖아.”
“…….”
“나를…온전하게 나를 원해서, 막 참지 못할 때가 아니면 싫어.”
“…….”
“…엉큼하지 않아서 싫어.”
기분 맞춰주기 힘든 여자다. 눈을 가늘게 뜬 천후는 잠깐 떨어졌다가, 이번엔 기습적으로 그녀를 꽈악 하고 끌어안았다.
“시, 싫다니까!”
“이러고만 있을게.”
두껍고 단단한 팔로 그는 그녀의 몸을 옭아매듯 안았다. 셀레나의 안색이 붉어졌다.
“바, 바보야. 이런데서 누가 보면….”
“그러니까 이러고만 있을게. 안된다고 하지 마. 안들을 거니까.”
“…….”
확 하고 얼굴을 붉힌 셀레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천후는 그 귓가에 달싹였다.
“네 오빠는…멋있는 사람이야. 남자로서 존경스러워.”
“…그냥 바보라니까.”
“정말이야.”
“…응.”
개미 기어가듯 작은 답변을 내놓은 셀레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러쥐듯 세게 껴안은 팔 때문에 조금은 아픈데도…따듯했다.
*
“잘 바래다주고 왔니?”
셀레나가 집으로 들어오자, 설거지를 막 마친 케이트가 다가왔다.
“네.”
“후후. 놀랐네. 직원이라지만 네가 남자를 집에 데려올 줄은 몰랐지 뭐니?”
“아∼. 조금 어벙해서요. 나머지 수업이라고 해야 하나? 오호호.”
입을 가리고 조신하게 웃던 셀레나는 케이트가 싱글벙글 웃고만 있는 것을 보며 얼굴을 붉혔다.
“왜, 왜 그러세요?”
“아니. 너희 아빠 생각이 나서.”
“아빠…아버님이요? 오라버니가 아니라?”
“정태 생각도 났지. 그치만 엄마는 네 아빠 젊을 때 생각이 더 나네.”
“…….”
“우리 가문에 쳐들어와서는 엄마를 내놓으라고 막 날뛰었었어. 그러다 우리 아빠한테 샷 건까지 겨눠지고 난리가 아니었지.”
백번은 더 들은 이야기였지만 그녀는 여전히 어제 기억 같은지 그리운 눈을 했다가,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셀레나는 그 눈을 응시 못하고 머뭇머뭇 댔다. 의도가 서서히 파악되어 갔다.
“좀 더 예뻐지고 싶겠네.”
“엄마…. 그렇게 티나?”
“엄마가 보기엔.”
양손으로 셀레나의 얼굴을 감싼 그녀는 사랑스러움에 웃으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모르겠어. 아직 확실하지 않아.”
“그래?”
케이트는 그저 웃으며 그녀의 어깨춤에 손을 올렸다 땠다. 검은 머리카락이 집혀있었다.
“우후후후후.”
“…으.”
못 당하겠다. 얼굴을 시뻘겋게 붉힌 셀레나는 입을 꾹 다물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녀를 케이트는 살짝 끌어안았다 놔주었다. 그러고선 살짝 딸에게 귀띔해주는 걸 잊지 않았다.
“네 아빠는 정말 그냥 데려온 건 줄 알아. 당분간은 괜찮아.”
결국 셀레나는 자기 방으로 도망쳐 버렸다.
‘다 들켰어….’
성인의 연애다. 이런 걸로 부끄러워 할 것도 아니리라. 하지만…. 그래도 부끄럽다.
처음이니까.
“정말…완전 변태. 남잔 다 그런가?”
중학교 때부터 학업과 회사 양쪽으로 바빴다. 외모와는 달리 남자들과 엮일 시간은 거의 없었다.
흑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그녀는 마법사고 커트해내는 건 간단했다. 멀찍이서 지켜보는 시선 정도야 자신감으로 연결될 뿐이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셀레나는 잠시 자신의 입술을 매만져보았다. 영화와는 다르게, 격렬했다. 마구 빨아들여서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그에게 만져진 다른 부위들도, 한 번씩 짚어보았다.
거칠었다. 손이 조금 까끌까끌하기도 하다. 그렇게 멋대로 굴고 있을 때의 그의 얼굴은 조금 무서웠다. 눈동자가 충혈 되어 있는 게, 콧김을 내뿜는 게 웃겼다.
그런데 놀랍게도…그게 싫지만은 않다.
나를 보고 그러고 있다는 것이 묘하게 기쁘다.
‘바보. 나는 바보야.’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폭주했다. 아빠가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엉큼하지 않아서 싫다느니는 대체 무슨 소리람. 그의 말마따나 내가 변태일지도 모른다.
“하아….”
헤픈 여자라고 생각했을지도…. 나에겐 모든 것이 처음이었는데. 그의 말은 진짜였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문득 검은 머리의 여자가 생각났다.
그의 서포터.
그 여자와…잤을까?
아까 본 그걸로…나에게 하려고 했던 것처럼…마구….
그거…컸었지. 그림으로 본적은 있지만, 실제로 보긴 처음이었다. 남자는 다들…그렇게 큰가?
뭔가를 떠올리며 손바닥을 쫙 펴본 셀레나는 멍하니 그걸 보고 있다가 스스로에게 흠칫 놀랐다.
“…….”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셀레나는 자기도 모르게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발소리 내지 않고 일어나 문을 잠갔다.
그리고는 연식이 오래되어 잘 사용하지 않는 컴퓨터를 켰다. 검색 엔진에 들어가, 오늘 겪었던 것에 대한 글자를 몰래몰래 쳤다.
잠깐 찾아오는 배덕감. 하지만 그녀는 눈을 꾹 감으며 클릭을 했다.
신세계가 열렸다. 성인인증을 하자마자, 수많은 적나라한 이미지들이 나타났다.
“우와….”
수없이 마구 날아다니는 연관검색어들 중 그녀는 신경 쓰이는 것들만 하나씩 눌러보았다.
“더, 더러워. 어떻게 입으로….”
깜짝 놀란 셀레나는 눈을 꼭 감았다. 말도 안 돼. 하지만…아까 봤던 것을 떠올렸다. …….
“이렇게…하나?”
그 중에서 조금 깔끔한 사진 한 장을 확대한 그녀는 조심히 그 행위를 허공에 따라해 보았다. 이런 게 기분 좋을까?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다, 자기 검지에 입술이 닿자 셀레나는 흠칫하고 그것을 그만 두었다.
‘더워…….’
머리가 멍해져서, 이번엔 다른 것을 검색했다. 몸을 겹치고 있는 영상들이 나왔다. 셀레나는 이것들이 전부 과장된, 남성의 성적 쾌감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알고는 있었다.
“…….”
소리를 끄고 그것을 실행시킨 셀레나는 몰입하여 보다가, 고개를 붕붕 흔들며 컴퓨터를 꺼버렸다.
“뭐하는 거람.”
털썩. 침대위에 몸을 던진 셀레나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이제 진정하고 자야지. 자야지. 자야하는데….
그의 체취가 났다.
“…….”
그의 손이 마지막으로 짚었던 곳을, 스스로 향했다. 옷 위에서도 조금 더 솟아 올라있는 곳이 느껴졌다. 그리고 아래로 그가 마지막으로 탐하려했던 곳이…그때와 같아져있었다.
“하아….”
숨결이 뜨거워지며, 손으로 더듬어갔다. 그의 거친 손과 달리 스스로의 몸을 만지는 그녀는 그보다 훨씬 더 자세하고 확실하게…그녀가 지금 손에 넣고 싶어 하는 감각을 가져다주었다.
“으음….”
비음이 새어나왔다. 셀레나는 이불에서 얼굴만을 내밀어, 문 쪽으로 시선을 둔 채 누웠다. 누군가 들어올 기색은 없다. 이정도의 목소리가 밖에 들릴 리도 없다.
“흐응. 하아….”
다른 손으론 오늘 그가 가장 탐했던 것을 조심스럽게 손에 쥐었다. 그것은 이미 평소보다 훨씬 부풀고, 발갛게 서있었다. 처음에는 가장 기분이 좋게, 자신이 느끼기에 좋은 세기로 쥐었다.
하지만 조금 지나자, 그것이 못내 아쉽다. 기분은 좋지만 그와는 다르다. 그래서 그의 손짓을 흉내 냈다. 거칠어졌다.
“아. 아흐응!”
머릿속이 타들어갈 것 같은 느낌에 셀레나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했다. 이제 문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손길. 그의 말소리. 그의 체온…. 그것을 가공해내어 가상의 그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곧 이것이 가짜임을 안다. 그것을 직시한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한번 흔들렸다.
그때. 입을 맞춰야했을지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어야 했을지도. 그랬다면….
IF. IF. 가정의 이야기. 자신의 마음가짐을 우선시해 꺾었던 감정들이 샘솟아 나온다. 그러다 어느 순간, 머릿속 모든 생각이 창백해질 만한 감각이 덮쳐왔다.
“으…하아아아앙!”
파르르르…. 양 허벅지를 꾸욱 조이고 허리를 굽히며 몸을 떤 셀레나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머리를 대고 있던 베개가 땀범벅이 된 게 느껴졌다. 아니. 젖지 않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옷도. 이불도. 시트도. 그리고…….
셀레나는 손을 끌어 올려 보고는, 그 엄지와 검지를 붙였다 땠다 해보았다. 점성 있는 호선이 흘러내리지 않고 머물러 있었다.
“…변태는 나네. 미안해, 천후.”
그녀는 살짝 물기 묻은 눈이 되어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금쇠를 풀고 문을 살짝 여니, 다행이도 거실엔 아무도 없었다.
셀레나는 갈아입을 옷가지들을 챙기고 욕실로 빠르게 들어갔다. 이대로 잠든다는 것은 불가능 했다.
쏴아아아…. 샤워기의 물을 맞으며, 셀레나는 거울로 자신을 확인 했다.
누군가에게 밀린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오만이 아니라 정말로.
하지만 그 여자라면 어떨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내가…이럴 정도니까.’
남자라면 더 심하지 않을까? 그렇다면…지금쯤은 그 여자와…. 셀레나의 손이 아래를 향하다가 흠칫하고 멈췄다.
“우. 그만! 그만이야, 셀레나!”
방금 전 진행됐던 알고리즘이 고스란히 반복되는 것에 깜짝 놀란 셀레나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물을 맞고 있던 금발에서 물방울이 비산되며 거울에 튀었다.
셀레나는 그 물기를 손으로 닦아내며, 꽁해진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다 그 남자 때문이야.”
나쁜 남자.
그녀는 책임을 그에게 전가시키고는 욕실을 나오면서 몇 안되는 옷가지를 세탁기에 집어넣다가, 마지막으로 분홍에서 일부가 젖어들어 진홍으로 물든 팬티를 휙 넣어버리곤 돌려버렸다.
드럼 세탁기가 웅웅 하고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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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선작,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이걸로 끝입니다. 이유는 내용 보시면(웃음)그럼 내일 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