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농촌총각의 설움을 너희가 아느냐>
- 막간 -
늦은 밤.
희주는 가만히 눈을 떴다. 눈앞에는 한 남성의 가슴팍이 보였다. 주인님의 몸.
“…….”
그 뿐 아니라, 그녀가 머리를 두고 있는 것도 그의 팔이었다. 단단한 팔. 평소의 단련을 말해주는 듯하다.
그녀의 주인, 영천후는 사장대리를 만나고 오더니 지하 헬스장에서 땀을 있는대로 흘리고는 씻고서 잠을 청했다. 언제나 하루에 일정 시간 운동을 하는 그이지만 오늘은 조금 더 격했다.
특이한 일이었지만, 희주는 그 경위를 쉽게 도출할 수 있었다.
향수냄새가 났다. 세탁을 위해 받은 그의 옷가지에서 금발 몇 가닥이 보였다.
“…….”
깜빡깜빡. 눈을 감았다 뜬다. 눈물샘 유지를 위한 당연한 행동. 얼굴에 변화는 없었다. 변화 없이, 한 손을 뻗어 그의 볼가에 대었다.
“음….”
기척에 민감한 주인은 그것을 느낀 건지 눈썹을 움직였지만, 곧 잦아들었다. 처음 며칠간은 이것만으로도 크게 뒤척이곤 했었다.
좋은 변화.
“…….”
살살. 차가운 손으로 그의 얼굴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첫날…. 그 날 이후로도. 그는 아직 그녀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함께 자긴 했지만 옷을 입고서, 팔베개를 하고 그렇게 정말 잘 뿐이다.
신체적인 반응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뿐이다. 가끔, 잠들기 전 이렇게 누워서 빤히 바라보면 볼가에 입을 맞춰주곤 했다.
“…….”
깜빡깜빡. 눈을 감았다 뜬다. 얼굴에 변화는 없었다. 시선이 그의 입가로 향했다가, 그대로 닫혔다.
밤이 너무 늦었다.
희주는 눈을 감고서 그의 팔 안쪽으로 좀 더 파고들었다. 그러자 천후는 몸을 옆으로 누이며, 머리를 와락하고 끌어안았다.
처음으로, 그녀의 눈썹이 살짝 튀어 올랐다 돌아왔다. 눈은 다시 떠지고 만다. 차가운 몸이 그의 체온에 조금은 따듯해졌다.
보이는 것은 그의 턱과 목, 그리고 가슴 뿐. 그것들을 평소보다 약간 가늘게 뜬 눈으로 보던 그녀는, 다시금 눈을 감으며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입술이 구부러지며 곡선을 맺었다.
“…조금만 더…힘을 내시길.”
갈망을 담아 입에 올린 그녀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하늘 위 은빛이 구름에 가려졌다.
<농촌총각의 설움을 너희가 아느냐?>
“숙자. 좋아? 좋아?”
“응. 하응. 오빠, 오빠 너무 세!”
야심한 밤. 이불 몇 겹을 깔아놓고 사랑하는 여자를 눕힌 봉식이는 희열에 젖었다. 그렇게 특출나게 예쁘지는 않지만, 지금 자기 아래서 비음 지르는 이 여자가 이렇게 사랑스러울 리가 없다.
‘씨발. 당연하지. 이년한테 얼마를 꼴아 박았는데?’
이 마을 유일한 젊은이(40대)이자 총각(다시 말하지만 40대)인 그는 국제결혼은 죽어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부모한테 외국인 며느리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읍내 농협에서 근무하는 숙자와 선을 보았다. 이 여자다 싶었다. 이 여자를 놓치면 장가갈 기회는 영영 안 온다 싶어 그는 그녀에게 끊임없이 구애를 했다.
그런데 이년이 보통 여우가 아니다. 마음이 있는 듯 없는 듯하면서, 계속해서 명품이니 뭐니 하며 그의 재산을 훑어갔다.
그러면서 집에 선이 들어오니 어쩌니 하면서 그를 담가대자 봉식이는 맘이 급해졌다. 여기까지 꼴아 박았는데 놓치면 놓쳤지 딴 새끼한테 뺏길 순 없었다.
그래서 봉식이는 자신과 결혼하면 비닐하우스를 그녀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다. 비닐하우스라니까 우습게 보일지 모르지만, 봉식이네 비닐하우스는 온갖 최첨단 농업 기술이 집약되어있는 현대 문명의 산물이었다.
거기서 매년 나오는 특화작물을 제외하더라도, 그냥 비닐하우스 자체 가격만도 3억이 넘었다. 그것에 눈이 돌아간 숙자는 결국 오늘 몸을 허락했다.
“앙! 하앙! 오빠, 정말 그거 나 주는 거지?”
“준다니까! 준다고! 그러니까 너 내 여자 하는 거다! 씨발년 돈만 밝혀서는! 이년! 이년!”
“아아앙!”
봉식이는 이 여자가 자신보다 돈이 더 좋아서 자신과 결합하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살집 있는 년에게 3억 쯤 쏟아 부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뜨겁게 끓어오르는 애정을 그녀의 안에 쏟아 내었다.
“끄흐으으응!”
“아흐으윽!”
절대 거부하지 못하게 양 허릴 꽉 쥐고서 마지막 한줌까지 쏟아낸 그는 그대로 그 위에 쓰러지며 몸을 겹쳤다.
이제부터는 장밋빛 미래만 자신을 기다린다고 여겼다. 이제 애만 좀 까면, 이 돈 밝히는 년이랑도 길게 길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 때였다.
뿌지직! 빠지지지지직! 삐요삐요삐요!
“오빠. 이게 무슨 소리야?”
“엉? …비닐하우스에서 나는 소리 같은데. 누가 모르고 들어갔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 인근 주민 중에선 야간에 남의 비닐하우스에 함부로 들어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리라도 온 건가? 아니, 그렇게 생각하기엔 경보음 이전에 들린 소리가 심상치 않다. 그럼 멧돼지?
“저번 달에 사냥꾼 불러다 잡았는데….”
“오빠, 어서 나가봐. 요즘 서리 차 끌고 와서 해간다잖아.”
“…씨발.”
여운을 다 즐기지도 못했는데 이게 뭐지? 성질이 난 봉식이는 거칠게 옷을 입고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미래의 자기 재산을 염려한 숙자도 같이 나왔다.
그리고 비닐하우스 앞에 도착했을 때, 그 둘은 아연실색했다.
“이, 이게 뭐야?”
봉식이네 비닐하우스는 2단 구조에 특수비닐, 그리고 특수한 고정법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어지간한 자연재해로도 무너지지 않았다. 사람이 전력으로 들이 받아도 튕겨져 나올 정도다.
그런데 지금은 비닐하우스가 완전히 박살나 있었다. 정말 멧돼지라도 지나간 것처럼 가운데에 구멍이 뻥 뚫린데다가, 작물은 죄다 엉망진창. 심지어 그 충격으로 프레임도 크게 휘어있었다.
“이, 이거…!”
그 모습에 봉식이는 바들바들 떨었다. 이걸 수리하려면 얼마나 들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게다가 그 직후, 숙자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입에서 꺼냈다.
“오빠…. 아까 했던 말 취소야.”
“수, 숙자야.”
“비닐하우스 다 망가졌잖아. 이거 새로 어느 세월에 지을 건데. 미안해. 나중에 연락 해.”
“수, 숙자!”
봉식이는 다급하게 그녀를 잡으려 했지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의 집을 떠났다.
“숙자아아아아아!”
농촌에 여자를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메아리 쳤지만, 그녀는 다시 되돌아오지 않았다. 봉식이는 그대로 고개를 푹 꺾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들어올렸다.
“이…개 씨발 새끼…!”
치켜든 그의 눈에는 눈물과 함께 분노가 가득 끓어오르고 있었다.
*
붉은 BMW 6 컨버터블이 고속도로 위를 달린다. 표시되어 있는 시속은 180km. 국내 어느 고속도로에서도 쉽게 낼 수 없는 속도이지만, 차는 멈추지 않는다.
그러는 도중, 좌석에 앉아있던 선글라스 쓴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그러자 그 손끝에서 불꽃이 피어나더니 그대로 앞으로 폭사되어나갔다.
고속도로의 정면을 틀어막고 있던 시꺼먼 사자는 날렵하게 그것을 피해냈지만, 그 직후 다시 한 번 날아온 공격에 맞고서 그대로 주저앉아버린다.
그 직후, BMW가 그 옆을 훅하고 통과하면서, 차에 타고 있는 4명의 늘씬한 미녀 중 하나가 입가에 두 손가락을 겹쳤다가 떼면서 쪽하고 키스를 날리며 휙 하고 지평선 저 끝으로 사라졌다.
<<격이 다르다. 엔체스터 콜로니.>>
“와우….”
트란제비야 마법 사무소. 그러니까 직장에서 TV를 틀어서 보고 있던 천후는 광고를 보면서 탄성을 내질렀다.
엔체스터 콜로니라면 세상 물정 잘 모르는 천후도 알고 있는 유명한 디제스터 퇴치 기업이었다. 그가 방금 보던 것은 그곳의 새 광고였다.
뭐 광고야 과장되기 마련이고, 방금 저 장면자체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눈을 혹하는 것이 있었다.
‘디제스터 퇴치 기업에서는 차량으로 BMW를 쓰는 거야?’
그도 일단 남자인지라, 차에는 좀 관심이 있는 편이었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연봉도 1억 5천. 2년만 어떻게 일하면 6정도는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니 조금 두근거리고 만 것이다.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희주는 살짝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저런 쪽이 취향이십니까?”
“아∼. 네. 좀 그렇죠. 저런 오픈된 게. 붉은 색인 것도 마음에 들고요.”
“그렇군요…. 참고 하겠습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희주는 지체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어디가세요?”
“옷을 갈아입고 오려 합니다.”
“응? 옷? 왜요?”
“그런 취향이라고 하셔서.”
진지한 목소리로 답해오는 희주의 말에 천후는 잠시 멍해졌다가 하하하 웃었다. 그러고 보니 화면 중 4명의 여성 중 하나가 빨간 옷을 입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옷 이야기 아니에요. 차요. 차. 오픈카가 좋다구요.”
“그렇습니까?”
“네. 그리고 희주 씨는 취향 같은 거 가릴 필요 없이 뭘 입어도 예뻐요.”
“…너무 칭찬이 헤프십니다.”
천후의 대답에 눈을 한차례 느릿하게 감았다 뜬 희주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기분 탓일까? 아까보다 앉은 위치가 좀 더 가까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셀레나가 들어왔다.
“휴우. 사원. 영 사원. 사장님 오셨는데 인사 안 해?”
“…….”
인사를 해야 하는 게 맞는 거 같긴 한데 뭘까. 이 미묘한 느낌은. 천후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들자, 셀레나는 꺄하하 웃으며 그의 등을 팡팡 쳤다.
“아하하. 진짜 인사 하려고 해. 아 웃겨. 장난이야, 장난,”
“윽….”
“에이. 노려보긴. 자자. 더웠지? 쨘. 아이스크림 사왔다?”
셀레나는 검은 봉투를 열어 천후와 희주에게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쥐어주었다. 아닌 게 아니라, 초여름인데도 30도가 넘는 더위에 늘어져 있던 참이라 천후는 금세 얼굴을 풀고는 포장을 뜯어 입에 물었다.
“잘 먹을게.”
“잘 먹겠습니다.”
“음음. 어서 들도록 하게나.”
셀레나는 생긋 웃고는 자기도 막대형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사장용 의자에 앉았다.
천후가 이 회사에 들어온 지도 사흘 가량이 지났다. 그 동안 그녀의 행동을 지켜본 결과, 그녀는 하루에 한 번, 한 시간 정도씩 꼭 업무시간에 외출을 하곤 했다.
그렇다고 뭔가 엄청 멀리 나가는 건 아니고, 근처 마트 등지에 나가서 먹을 걸 사오는 정도. 아무래도 사무실에 하루 종일 박혀있으면 좀이 쑤시는 모양이었다.
다만 오늘은 다른 날과는 약간 달랐는데, 보통 외출하고 오면 그녀는 기진맥진해서 쳐져 있곤 했는데, 지금은 왠지 굉장히 들떠있었다.
“뭐야? 되게 기분 좋아 보인다?”
“응∼. 강호 씨 중국 출장 가는 거 바래다주고 왔잖아. 아. 인천공항까지 갔다 오니까 막 기분 좋은 거 있지?”
“그걸로 기분이 좋아지나….”
“우후후후. 사장이란 명목으로 합법적으로 업무시간에 장기간 외출하는 이 재미를 평사원인 너는 모를 것이야.”
자랑이다. 아주. 천후는 어처구니없어 입가를 씰룩댔지만, 그녀는 여전히 싱글벙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기분 좋은 이유는 하나 더 있지롱.”
“응?”
“우리 천후사원이 해줄 첫 일이 들어왔거든. 오늘부터 우리 셋은 며칠 간 지방 출장입니다~.”
“오∼. 드디어?”
셀레나의 말에 천후 역시 안색이 확 밝아졌다. 요 사흘 동안은 일이 없어서 잡일만 했던 것이다.
사무실 청소라거나. 사무실 전구 갈기라거나. 사무실에 기어 다니는 검은색에 날개 달린 그 녀석 잡기라거나….
몸값이 월 1250으로 이런 일이나 하자니 좀이 쑤셨었는데, 오늘 와서야 일이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웬 지방? 우리 서울 일만 하는 거 아니었어?”
“보통 그런데 유그드라실 쪽에서 첫 일이라고 우리 꽂아주더라고. 이야. 영 사원 인맥 짱짱하네. 사장님 깜짝 놀랐어요.”
“그래? 잘됐네. 근데 또 엄청 떼먹는 거 아냐?”
“뭐. 중계료를 떼이긴 하겠지만 이번엔 의뢰비도 꽤 되더라고. 서브 퀘스트 치곤. 그래서 한댔지.”
“응? 얼마 길래?”
천후의 질문에 셀레나는 베시시 웃더니, 몸을 뒤로 쭉 누이고, 탁자에 다리를 꼬아 올리며 거만하게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삼천만원? 와. 서브 퀘스트만 해도 인건비 뽑는단 게 정말이었구나.”
“에헤이. 영사원 아직 통이 작네. 삼천이라니. 어디서 지금 그런 코딱지만한 돈을.”
“어? 그럼?”
“삼억.”
“와우.”
“나도 좀 놀랐어. 보통 억대까지 잘 안 가는데. 완전 대박난 거지. 후우. 그럼 잠깐 나 한번 씻고 나서 출발하자.”
휙 하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 셀레나는 금발을 흩날리며 욕실로 향했다.
천후는 잠깐 얼굴을 붉혔다가, 곧 중요한 걸 떠올리고는 그녀를 불렀다.
“잠깐만! 지방 어딘데? 씻는 동안 기차표 예매해놓을게.”
그 말에 셀레나는 발걸음을 멈추고는 뒤돌아보았는데, 표정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응? 기차표는 왜?”
“기차 타고 갈 거 아냐?”
“아니? 차타고 갈 건데?”
“차?”
“응. 우리 회사 차 있어. 그럼 기다리고 있어∼.”
그 말을 셀레나는 몸을 돌려서 욕실로 들어갔다.
진짜? 이런 회사에? 천후는 순간 방금 전 보았던 광고를 떠올리고는 눈을 빛냈다. 대체 어떤 차일까? 천후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셀레나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과도한 기대는 안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희주의 조언이 들려왔지만, 지금 천후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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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릿짜릿해!
오후에 한 화 정도 더 올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