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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24화 (24/324)

24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진짜로 차가 있긴 있었다. 차 앞에 한 글자를 더 붙여야할 것 같았지만.

“이런걸 보통 폐차라고 하는데.”

“실례네! 산지 2년 밖에 안됐어! 쌩쌩하다고!”

셀레나가 끌고 온 차는 국산 중형 승용차였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딱 봐도 아 저거 할만한 그런 차였는데, 천후는 처음에 그 차를 보고서 잠깐 못 알아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무슨 짓을 했는지 보닛이 움푹 파여 있었던 것이다. 범퍼는 뭐 말할 것도 없다. 뿐만 아니라 프레임 자체가 좀 뒤틀리고, 뒤쪽 문 중 하나는 열리지도 않게 찌그러져 있었다.

생긴 것 뿐 아니라 저쪽에서 셀레나가 운전해서 앞에 세우는데, 그 잠깐 동안에도 덜컹덩컹 동체가 위아래로 흔들리는 게 인상 깊었다.

“솔직히 말해도 돼. 회사가 영세한 건 네 탓이 아니잖아.”

“진짜라니까!”

눈썹을 치켜 뜬 셀레나는 천후의 옆구리를 꽉 하고 꼬집었다. 갸아 하고 비명을 내지른 천후는 눈물을 찔끔거렸다.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진짜인 모양이다. 그런데 그럼 완전히 다른 문제가 생기고 만다.

‘대체 2년 만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차 생김새만 보면 무슨 교통사고 난 직후의 예시 사진으로 써도 될 정돈데.

“자. 그럼 운전은 내가 할 테니까 타.”

“…….”

마른침을 꿀꺽 삼킨 천후는 보조석에 타고선 안전벨트를 단단히 맸다. 희주 역시 불길한 기색을 느꼈는지 평소보다 눈빛이 조금 더 날카로워져 있었다.

“음. 그러면…수만 화살에서 정병을 지켰던 코린토스의 방패는 시간을 넘어 내 앞을 지키라.”

손짓을 하며 영창을 하자, 그녀의 몸에 희끄무레한 막 같은 게 쳐졌다. 그게 방어마법이라는 것을 깨달은 천후의 안색이 시퍼레졌다. 왜 운전하는데 저런 걸? 하지만 셀레나는 태연하게 운전대를 잡더니 경쾌하게 말했다.

“자. 그럼 출발할게. 어디…그러니까 엑셀이 왼쪽. 브레이크가 오른쪽이었지.”

“야. 그거 반대―”

깜짝 놀라 외쳐봤지만 그 순간 이미 차는 출발해서 바로 앞의 전봇대를 박아버렸다.

“크악! 야! 뭐하는 짓이야!”

“와. 깜짝이야.”

자기가 저질러 놓고도 놀랐는지 셀레나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깜빡거렸다. 하지만 곧 다시 미소를 되찾은 그녀는 천후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안심시켰다.

“에이. 화내지마. 종종 하는 실수잖아, 다들.”

“웃기지마!”

“헤헤. 그럼. 후진, 후진.”

그렇게 중얼거린 셀레나는 기어 쪽으로 손을 가져가는가 싶더니 사이드 브레이크를 걸었다. 그 모습에 천후는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랐다.

“응? 이거 왜 후진이 안 돼?”

사이드 브레이크를 건채로 엑셀을 밟아대던 셀레나는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아. 이거 사이드였구나. 나도 참. 에잇.”

“야. 엑셀 밟으면서 풀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차가 덜컹거리면서 전봇대에 한 번 더 들이박았다. 간신히 몸을 지탱한 천후는 공포에 질려서 셀레나를 바라보았다.

김 여사다! 김 여사가 여기 있어!

“아. 오늘따라 왜 이러지? 아. 괜찮아. 괜찮아. 세 번 정도 하면 보통 잘 하거든?”

그 말에 천후는 기겁했다. 이 짓거리를 한번 더하려고? 그렇게 놀라고 있을 때, 갑자기 운전석 문이 열렸다. 보조석에 있던 희주가 나온 것이다.

“어? 희주 씨?”

“내리세요.”

희주는 운전석 옆에서 셀레나를 내려 보면서 말했다. 표정이나 톤 변화가 전혀 없이 말하고 있었지만, 어째선지 굉장히 화난 것처럼 보였다.

“아니…. 그래도 이 차 제건데.”

“내.리.세.요.”

한 글자 한 글자 끊어 말한 희주는 스윽 하고 셀레나 얼굴 바로 앞에 얼굴을 들이 댔다. 셀레나는 그 행동에 깜짝 놀라 몸을 옆으로 피했다가, 곧 꼬리 내린 강아지가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그렇게 셀레나는 뒷좌석으로 쫒아내 버린 희주는 운전석에 앉으려다가, 천후를 보고는 잠시 멈춰서는 물었다.

“…주인님께서 하시겠습니까?”

아무래도 아까 차를 보면서 좋아했던 것 때문에 인상이 깊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천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뇨. 전 아직 운전면허가 없어서요. 언제 한번 날 잡아서 따야지 싶긴 한데.”

“그렇군요. 그럼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10년간 보호시설에 가둬져있었는데 면허가 있을 리가 없다. 납득한 희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운전대를 잡았다. 여자는 보통 스틱형은 선호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녀는 전혀 문제없이 다뤄서 상가를 빠져나갔다.

“능숙하시네요.”

“서포터라면 당연합니다.”

희주는 담담하게 대답하고는 말을 이었다.

“먼저 정비소부터 들렀다 가겠습니다.”

“네? 수리하시려고요? 이 차 수리 하루 이틀에 안 끝날 거 같은데….”

하루 이틀에 안 끝나는 정도가 아니라, 가져가면 폐차하잔 소리가 나올 게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희주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엔진오일 교체만 할 생각입니다. 분명 한 번도 교체한 적이 없을 것 같아서요.”

기분 탓인지 살짝 힐난하는 듯한 기색이 든 말투였지만, 셀레나는 오히려 눈을 깜빡거리며 물어왔다.

“응? 엔진오일 이란 거 교체해줘야 해?”

“…….”

이쯤 되면 무섭다. 천후는 희주와 눈빛으로 뜻을 맞추고는 정비소로 향했다.

*

목적지 인근에 도착하자 이미 저녁이 다 된지라, 세 사람은 읍내에서 식사를 해결하고서 의뢰주가 사는 마을로 찾아갔다.

그곳은 읍내에서도 한참 들어가야 하는 요즘 세상에 얼마 없는 진짜 시골이었다. 길도 포장 비포장이 섞여 있어서, 안 그래도 부실한 차가 요동을 쳤다.

그걸 어떻게든 고생고생해서 뚫고 마을회관까지 가자, 미리 연락을 받은 의뢰인이 달려나왔다.

“어이구. 먼 길까지 고생해서 오셨습니다.”

“아…아닙니다. 의뢰주인 오봉식 씨 맞으시죠? 잠시…. 사장님. 어서 일어나봐.”

“으…. 어지러워. 미안한데 자세한 사정은 영사원이 들어줘…. 나 지금 못나가….”

식사 직후 비포장도로의 위력에 완전히 녹다운된 셀레나는 안색이 새파래져서는 드러누워 버렸다. 그 표정변화 없는 희주도 지금은 운전대를 잡고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아. 정말 엉망이네.”

혼자서 살짝 어지러운 것 빼고 말짱한 천후는 뒷머리를 벅벅 긁다가 의뢰주에게 시선을 옮겼다. 봉식은 차 안의 미녀 둘을 보고서 얼굴을 붉히고 있다가, 그가 바라보자 정신을 차렸다.

이 두 사람이 미녀인 건 맞지만, 지금 그에게는 그런 것 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저를 따라오십시오. 눈으로 보면서 이야기하는 게 빠를 겁니다.”

“네. 아, 저희 사장님이랑 직원은 마을 회관에 들어가 있어도 괜찮을까요?”

“네. 그러세요.”

대답을 받아낸 천후는 고개를 끄덕이고 봉식을 따라갔다. 현장으로 가는 동안 천후는 그가 이 마을의 이장이며, 2세대에 걸친 영농후계자라는 것. 큰 토지를 가지고 있고, 그 중 논은 사람을 써서 소작을 하고 있다는 것 등을 들었다.

“그리고 재작년에 3억 원을 들여서 비닐하우스를 차렸습니다. 온도조절이 되고, 태풍이나 재난에도 강하게 만들어진 거라 든든했었는데…그놈이 나타난 겁니다. 보십쇼.”

비닐하우스에 도착한 봉식은 조명을 켜고서 천후와 함께 안쪽으로 들어갔다. 천후는 들어간 순간 인상을 팍 찌푸렸다.

“세상에….”

비닐하우스 자체가 크게 손상된 것부터가 이미 큰일이었다. 하지만 천후가 놀란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비닐하우스 내에서는 마치 동물이 침범한 듯 수많은 발자국이 마구 찍혀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하우스 내의 작물이 죄다 말라 죽어있었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 방어마법을 걸고 만져보니 그대로 가루가 되며 부스러져 내렸다.

“한해농사를 완전히 망쳐버렸습니다. 아니, 사람을 불러와봐야 알겠지만 최악의 경우엔 이 땅 자체를 못 쓸지도 모르죠.”

“그렇게까진….”

“농약 같은 것을 크게 잘못 썼을 경우엔 종종 있는 일입니다. 각오는 하고 있어요. 하지만…그게 제 손으로 한 게 아니라 다른 놈이 한 짓이면 이야기가 다르죠. 전 놈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봉식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빠드득하고 이를 갈았다.

“이 비닐하우스에 제 결혼이 달려있었습니다. 그 자식이 제 미래를 망친 거예요. 그놈만 잡을 수 있다면 전 돈이 아깝지 않습니다. 꼭 잡아 주십쇼.”

“그런…!”

결혼이 걸려있었단 말에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같이 주먹을 꽉 쥐었다. 같은 남자로서 분노를 공유한 것이다. 그런 천인공노할 놈이 있나!

“걱정 마세요. 꼭 해결해드리겠습니다. 저희를 부르셨단 건 상대가 디제스터라는 걸 확신하셨단 거죠? 놈은 어떤 녀석이었나요?”

“그게….”

천후의 물음에 봉식의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아직도 그 날, 숙자가 떠나간 날 보았던 희끄무레하게 보였던 놈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멧돼지였습니다. 커다란 멧돼지요.”

*

마을회관으로 돌아온 천후는 여전히 지친 기색인 둘을 보고서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아직도 어지러워?”

“아니…. 그게 아니라 쉬고 있던 할머니들이 막…콩글리쉬 하면서 엉덩이 툭툭 치고 가잖아. 외국인 처음 본다구.”

“…어쩌겠어. 이해해야지.”

그나마 할머니라니 다행이네.

“젊은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다고…. 먹을 걸 잔뜩 주시면서….”

말하다 만 희주는 웁 하면서 살짝 입을 손으로 가렸다.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었구만…. 안쓰럽게 그녀들을 바라본 천후는 턱짓으로 마을회관의 안쪽 계단을 가리켰다.

“여기서 있는 동안은 마을회관 2층 방 쓰래. 숙식할 건 다 있다고 하더라고. 처음 볼 때부터 회관이라기 보단 집처럼 생겼다 싶었는데.”

“노인 분들 지내기 편하라고 그래놨나 보다. 그래서 어땠어? 현장은?”

천후는 둘에게 봉식에게 들은 모든 것. 즉, 디제스터가 멧돼지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점. 그것이 밤에만 나타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점점 활동 빈도수가 늘어나고 있는데, 그때마다 농작물을 죽이고 있다는 점 등을 말해주었다.

“그래? 음…. 그래도 사람이 아니라 농작물을 해치는 게 그나마 다행이네.”

“그래도 빨리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보니까 피해범위가 상당하더라. 3억이나 주는 이유를 알 것 같았어.”

“그렇겠지. 그럼 이렇게 하자. 일단 오늘은 밤을 새우면서 기다려. 그리고 안 나타나면 내일 오전에 좀 자두고, 오후에 탐지마법을 펼치면서 찾는 거야.”

셀레나가 곰곰이 생각해보다 이야기 하자, 천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놀랐다.

“그럴싸한데?”

“상식적인 의견이군요.”

“너어! 그리고 희주 씨까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셀레나는 약간 삐져서 흥 하고 코웃음을 치고는, 사무실에서 가져왔던 가방 안에서 뭔가를 꺼내 천후에게 던져주었다.

“뭐야, 이건?”

“서브 퀘스트 디제스터의 파워 측정기. 200m 이내로 들어오면 수치가 확정되고, 경보가 들어와. 방향까진 못 잡지만. 야간엔 쓸 만할 거야.”

“오오…. 왠지 오퍼레이터 같은걸.”

“오퍼레이터거든?”

끌어안고 있던 베개를 휙 하고 던진 셀레나는 아랫입술을 쭉 내밀었다가 넣었다. 그 모습에 킥킥 하고 웃은 천후는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근데 이게 어떻게 표시되는데?”

“디제스터의 파워가 파급에 근접할수록 수치가 1에 가까워져. 그러니까 소수점으로 뜰 거야. 보통 0.3정도가 서브 퀘스트 평균치라고 생각하면 돼. 일반 일리미네이터들은 0.3 정도를 단독으로 잡는 편이고.”

“그렇구나. 오케이. 자. 돌려줄게.”

“어?”

날아오는 측정기를 얼떨결에 잡은 셀레나는 멍하니 올려보았다.

“밤새우자며. 12시부터 한다 치고 2시간씩 불침번 서면되겠네. 내가 마지막에 할게.”

“…….”

다음날 오후에 움직일 걸 감안해보자면 당연히 말번초가 가장 힘들다. 게다가 듣기로는 항상 그 시간에 디제스터가 나타났다고 했다. 하지만 천후는 별로 그것에 대해 내색하지 않고는 이불을 꺼내 옆방으로 들어갔다.

*

그날 새벽. 결국 놈은 천후의 차례가 올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새벽 4시가 되어서 일어난 천후는 마을회관 옥상에 올라가서 놈을 기다렸다. 이 마을에선 전봇대나 송전탑을 제외하면 이게 가장 높은 건물이었던 것이다.

“밝네.”

서울 시내와는 다르게 밤하늘에 별이 잔뜩 보였다. 그 때문인지,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시야가 확보되었다. 이 정도라면 놈의 형체정도는 포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때였다.

삐삐삐. 작은 비프음이 울리는 소리에 천후는 감각을 집중했다. 200m 내에 놈이 나타났다는 신호. 표시된 숫자는 0.6.

과연 그의 눈에 커다란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그것은 봉식이 말했던 대로 거대한 멧돼지였다. 온 몸에서 꿈틀꿈틀 대는 역겨운 무언가가 털 대신 달려있는 것 빼고는.

“왔군.”

자리에서 일어난 천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일할 시간이 찾아왔다.

조용히, 빙그레 비틀어진 웃음을 지은 천후는 조용히 읊조렸다.

“―강화 주문 봉인 해제. 마력 완전 개방.”

푸확!

순간, 빛이 터져 나오며 그의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힘이 샘솟으며, 도저히 질 것 같지가 않다. 그래. 저런 괴물 따위에게.

일합으로…끝을 보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주먹을 쥔 그 순간.

“꾸웨에에에엑!”

어슬렁거리다 천후의 기척을 발견한 놈은 괴성을 내지르더니, 몸을 급하게 돌려 반대방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뭣?! 야! 거기 안서?!”

깜짝 놀란 천후는 옥상에서 뛰어내려 놈의 뒤를 쫒았다.

============================ 작품 후기 ============================

추천, 선작, 코멘트 감사합니다!!!

셀레나는 19살 땡 치자마자 면허를 땄고, 차는 그 전부터 구매한 경우입니다.

아마도 앞으로의 연재 방향은 하루에 1화씩 올리고, 주말에 연참하는 방식이 될 것 같네요.

그럼 좋은 하루되세요! 12시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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