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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31화 (31/324)

31화

“희주 씨.”

“존명.”

팟. 어느새 다가왔는지, 긴 흑발의 여성이 나타나 정소라를 안아들었다. 그러고는 꾸벅 하고 남자에게 인사하더니, 그대로 달려서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군대에서 구급법 시간에 부축법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자신과 비슷한 체중의 사람을 양 손으로 떠받치고 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어깨법이나 업치기법도 아니고 그냥 얇디얇은 두 팔에 그녀를 번쩍 안아들고는 나온 것이다.

“다, 당신은?”

“저 분의 서포터입니다.”

다른 일리미네이터들이 정비하고 있는 곳까지 퇴각한 그녀는 소라의 치료를 맡기고는 천후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쿼드라 콩가와 천후는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최초 격돌 때 오른쪽 위쪽 팔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놈은 전의를 불태우면서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녀석을 천후는 여유 있게 노려보며 파이팅 포즈를 취하고 있다가 고개를 양 옆으로 우둑우둑 꺾었다.

그가 놈에게 보내는 신호는 간단했다.

나는 너보다 강하다.

“우훠어어어어어!”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 놈이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기 위해 허리를 낮춘 그 순간이었다.

뻐걱!

다리를 뒤로 크게 치켜들었던 천후는 그 즉시 구르다가 발 앞에 멈춘 다른 쿼드라 콩가의 머리를 세게 차 올렸다. 그러자 모션에 막 들어가기 직전이라 그것을 피하지 못한 놈은 그대로 쿵 하고 뒤로 넘어졌다.

머리와 머리가 부딪히며, 안면이 박살났다. 큰 상처는 아니지만, 시각에 문제가 생겼다.

그것을 놓칠 천후가 아니었다.

까각. 까가각. 두꺼운 워커가 아스팔트를 비비듯이 누르며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이 얼마나 강한지, 아스팔트가 타는 냄새를 내면서 녹아내린다.

천후는 탄내와 아지랑이를 동시에 두르며, 놈이 넘어졌음에도 몸을 빠듯빠듯이 움직여 허공에 스웨이하며 접근해갔다.

그러자 놈은 바로 자리에서 쿵 하고 허리만 튕겨 일어나더니 크게 주먹을 내질렀다. 공기가 찢어지며 맞기만 한다면 덤프트럭조차 쭈그러뜨릴 만한 일격이 스쳐지나갔다.

“하하! 약은 자식!”

예상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타격을 입었을 리가 없잖아?

말이 터져 나오기가 무섭게 놈은 아직 재생되지 않은 한 팔을 제외한 3개의 팔을 마구 내찔러 천후를 공격해왔다.

쾅쾅쾅쾅쾅! 자신보다 훨씬 작은 상대를 맞추기 위해, 위에서 내려찍는 형태가 된 그것은 지면에 주먹보다 훨씬 큰 크레이터를 만들어간다. 맞는다면, 맞기만 한다면 저 작은 놈은 한방에 찌그러지리라. 하지만….

맞지 않는다.

도저히 맞지 않는다.

무슨 분신 같은 것도 아니다. 놈은 분명히 하나. 몸 안에 충만한 마력의 현현 때문에 무색투명한 아지랑이를 흘리고 있어 윤곽선을 잡기 힘든 면은 있었지만, 충분히 보이고 때릴 수 있는 위치에 있는데도…맞질 않아!

바닥을 짓이기는 듯한 스텝과 허리를 뒤로 젖히는 스웨이 동작. 이 두 개가 겹쳐지자 놈은 눈앞에 있는데도 잡을 수 없는 잔영이 되어있었다.

이렇게…이렇게 가까워지고 있는데도!

어느새 자신의 팔이 완전히 뻗을 수 없는 거리까지 천후의 접근을 허용한 쿼드라 콩가는 무심코 물러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휘두르는 자세의 균형이 무너진 순간….

퍼…콰직! 스르르 몇 미터나 되는 거리를 미끄러지듯 파고 든 천후의 주먹이 놈이 복부에 박혔다. 폭음조차 나지 않으며, 그의 팔이 뱃속을 뚫고 들어가 박힌다. 그리고 그 직후…내부에서 폭발했다.

“쿠워에에에에에!”

통각에 둔한 디제스터조차 이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인지, 그 자리에서 허리를 꺾으며 오열한다. 내장기관이 완전히 폭사되어, 척추만을 남기고는 완전히 고깃물이 되어 가죽 속에 줄줄 흘렀다.

하지만 아직도 터프하게 움직임을 멈추지 않은 놈은 비틀거리면서도 뒤로 물러나, 이제야 재생한 다른 한 팔까지 합쳐서 다시금 천후에게 주먹질을 해왔다.

“그건 안 통한다고!”

배때기가 박살난 이상, 그건 이제 피해줄 필요도 없다. 아니…처음부터 주먹과 주먹의 맞싸움으로 이겨서 팔을 날려먹은 놈이 이런 식의 패턴으로 응대한다는 것 자체가 흥분했단 증거.

옆으로 선 천후는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는….

잽.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잽!

툭. 툭. 투두두두두두두!

날아오는 4개의 주먹을 단 한손만으로 모두 쳐낸다. 그때마다 쿼드라 콩가의 몸이 뒤로 튕겨나갔다. 주먹과 주먹이 맞닿은 순간, 접촉부가 찢겨나가며 뼈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이르러서야, 쿼드라 콩가는 자신이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단 걸 깨달았다. 다른 하나가 당한 이유를 통감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새겨진 본능, 존재 이유, 인간을 살해하는 오직 그것만을 위한 괴물로 태어난 숙명에 저항하지 못하고 놈은 도망이 아니라 다른 패턴으로의 선회를 선택한다.

뿌드드드드득!

조금이나마 물러난 놈은 피투성이가 된 네 손으로 전신주를 뽑았다. 아까 정소라에게 했었던 공격을 재현하려 한 것이다. 그것을 보고 천후는 코웃음을 쳤다.

“하. 까불지 마!”

그에 응하여 천후는 근처에 박혀있는 교통표지판을 뽑아들었다. 맨 위쪽의 교통 표지는 손날로 잘라내 버리고, 철봉만을 남긴 그는 쿼드라 콩가와 동시에 투척 자세를 취했다.

크게 와인드업. 멀리 던질 필요도 없다. 오직 직선. 야구의 직구를 던지듯 한쪽 다리를 치켜든 천후는 먼저 던져 날아오기 시작한 전신주를 향해 철봉을 던졌다.

푸가가각!

은색 선이 내달린다. 철봉은 돌로 된 전신주를 파고들어 운동에너지를 죄다 받아내고선, 반대편 출구까지 관통했다.

“!”

돌로 된 장해물을 뛰쳐나온 선은 처음 던져진 그 기세를 멈추지 않고, 반대편에 있는 괴물의 심장에 박히며 놈을 끌고 반대편에 있는 트럭에 굳게 박혔다.

아무리 디제스터라고 해도 뇌, 심장 등은 신체 주요기관이다. 그것들이 손상되면 아무리 적어도 일시적인 기능장애가 일어나 틈이 생긴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천후는 고개를 치켜들어 외쳤다.

“마무리를!”

“아, 아, 네!”

둘의 싸움을 멀찍이서 치를 떨며 지켜보고 있던 다른 일리미네이터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문을 외워 공격을 퍼부었다.

그 순간 낙뢰와 화염, 돌과 냉기의 창이 떨어져 내려 놈을 짓이겨 갈가리 찢어버렸다.

놈이 확실하게 시체가 된 것을 확인한 천후는 후우 하고 숨을 한번 크게 내쉬었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던 무색의 아지랑이가 훅 하고 사라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선글라스의 남자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느 쪽이 괴물이야?”

적어도 그로서는 판별할 수 없었다.

*

전투가 끝나고서 얼마 지난 이후. 일리미네이터들이 한 자리로 모여들었다. 그 중 포인트맨으로 쫒겨 다녔던 정소라는 천후가 다가오자 벌떡 하고 일어나서는 그에가 달려가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으며 입을 맞췄다.

“으앗?!”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음!”

“자, 잠깐. 진정하세요! 읍!”

160도 안 되는 키의 여자가 폴짝 뛰어서 이러자 천후는 당황하며 희주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말려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희주는 평소의 무표정 그대로 그의 양태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계속 입을 맞춰오자 이대론 안되겠다 생각한 천후는 조금 힘을 써서 강제로 그녀를 떨어뜨려놓았다가, 그녀의 상반신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아까 쿼드라 콩가에게 찢겨지고서 아직까지 옷을 갈아입지 않아 앞이 훤히 노출된 것이다. 그녀는 그것에 대한 자각이 없어보였다.

얼굴을 붉힌 천후는 몸을 돌리더니, 주섬주섬 옷을 벗어서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이, 일단 이거 입으세요.”

“아….”

그의 행동을 보고나서야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파악한 그녀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그 옷을 입었다. 옷이 한참커서 무릎까지 닿는다.

그녀는 피투성이인 그 옷을 잡고 꼼지락꼼지락 대다가, 아무소리도 내지 못하고 저쪽 편에 가서 섰다.

그때 즈음해서 번개주문이 주특기이던 선글라스의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아…. 정말 큰일 날 뻔했어. 당신이 없었으면 분명 전멸했을 거야. 정말로 고마워.”

“아, 아니에요. 전멸은 무슨.”

천후는 부끄러워져서 겸양을 떨었지만, 남자는 오히려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정말이다. 우린 이 일을 생업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이야. 특히 이번엔 두 마리라고 해서 다들 경력 있는 일리미네이터들만 고르고 골라 온 상태라고. 그런 우리가 보기에 이건 분명 전멸위기였다.”

“네, 네에.”

“그래서 말인데…. 그, 이번에 1팀 포인트 맨 맡았던 유호그룹 아가씨. 이름이 정소라랬나?”

“네. 맞는데요.”

“이건 자네 좀 쉬는 동안 우리끼리 말을 맞춘 건데, 자네만 동의한다면 포인트 맨 분배비율을 저 친구에게 줘도 될까?”

포인트맨 분배비율.

일리미네이터들은 메인 디제스터를 상대할 때, 가장 위험한 역할을 맡는 포인트맨은 다른 이들보다 좀 더 높은 비율로 현상금을 분배받는다. 이것은 생명을 담보로 싸우는 동업자를 위한 오래된 업계의 관례였다.

이번에 포인트 맨 역할을 맡게 되었던 정소라 역시 25%가 아니라 40%의 현상금을 분배받기로 되어있었다. 그 15%의 비율을 양도해줄 수 있는지를 그는 물은 것이다.

“아. 저는 괜찮은데 아마 회사에서 뭐라고 할지도….”

“괜찮을 거야. 오늘 파티 플레이는 유그드라실에서 위성촬영을 한다고 했으니까 기록이 확실하게 남을 거고. 그걸 보면 누구나 납득할걸?”

“하긴.”

고개를 끄덕인 소라는 천후를 올려보며 말했다.

“받아주세요. 목숨을 구해주신 대가라고 생각하시고.”

“네? 아니, 별로 위험하지도 않았고 괜찮―”

부담스러운 분위기에 천후는 손짓발짓을 해가며 사양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때, 지켜보고 있던 희주가 그의 옆에 다가와 입을 막고는 대신 대답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웁? 우우웁?”

천후는 당황해서 그녀를 돌아봤지만, 그 대답을 들은 소라나 다른 일리미네이터들은 오히려 안심했다는 듯이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아. 거절 하는 줄 알았네.”

“…주인님께서 아직 사회경험이 미숙하셔서.”

“하하하. 역시 서포터가 없으면 안 된다니까. 일리미네이터는.”

“…….”

뭐지 이 분위기는. 내가 큰 실수 할 뻔한건가? 천후는 뭔가 이상했지만,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희주도 입을 막은 손을 놔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선글라스의 남자는 웃으면서 다시 말을 꺼냈다.

“아. 그런데 정말 놀랐어. 2팀은 두 명이서 처리한다길레 나는 B랭크라도 행차하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근접전투라니. 당신 정말 D랭크 맞아?”

“음. 그게. 하하.”

대답하기 곤란했던 천후는 어물거리면서 그저 웃었다.

남자는 그 모습에 살짝 선글라스를 빛냈다. 그도 이 바닥에서 오래도 굴렀다.

10년 전 최초 디제스터 출현 직후부터 활동을 시작해, 경驚급 디제스터 토벌에도 참가해본 적이 있을 정도인 그는 강화마법이 주특기인 마법사 역시 몇 명 만나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평균적인 능력을 생각해볼 때…저건 철저한 오버 스펙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들도 가능은 해도 저렇게 활용할 엄두를 못내는 걸지도 모르지만….’

마법과 무술이 조화가 되어야 발휘할 수 있는 전투법. 저건 정말 아무나 못한다. 국내의 일리미네이터를 통틀어도 저게 되는 인간은 그가 아는 선에선 천후 하나뿐이었다. 아니…하나가 더 있긴 했지만, 그 사람은….

어쨌든 그렇게 생각하자니 정말 대단한 인재인지라, 남자는 조금 그가 탐났다.

“후. 사업 비밀이라 이건가? 어쩔 수 없지. 그럼 음…. 우리 빌라이저에 오지 않겠어? 자네라면 정말 잘 쳐줄 거야. 아마 들어오자마자 내 배는 받을 걸?”

“빌라이저…. 아! 거기 저 면접 볼 때 있던 회산데.”

“어?”

“저 거기 떨어졌는데요?”

“…….”

미친 거 아냐? 이 씨발 놈의 인사담당자 새끼가? 눈깔은 어따두고 다니는 거야? 돌아가면 아주 목을 비틀어버려야지! 남자는 잠시 이를 빠드드득 갈았다가, 어떻게 어떻게 미소만은 회복해내고는 사근사근 물었다.

“…내 쪽에서 말해주면 될 거야? 어때?”

“하하. 그게…저 어려울 때 받아준 회사를 쉽게 나오긴 좀….”

“아…. 하긴 그렇겠군. 젠장.”

세상일 돈으로 돌아간다지만, 고액연봉자인 일리미네이터들의 경우 그것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저런 개인사가 얽히면 돈으로도 빼내지 못하는 법이다. 진짜 돌아가서 인사담당자 목을 뽑아버리던가 해야지.

아쉬움에 머리를 벅벅 긁은 그는 선글라스를 고쳐 쓰며 물었다.

“어쩔 수 없지…. 아 그럼 자네 다닌다는 회사라도 알려줘. 다음에 일 들어오면 꼭 자네랑 같이 하고 싶거든? 아마 여기 있는 다들 그렇게 생각할 걸? 그렇지?”

그의 말에 다른 다섯 명 모두가 한결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후는 그 모습에 쑥스럽게 웃다가, 가슴을 쭉 펴고 대답했다. ‘홍보는 당당하게’가 셀레나의 모토였지?

“트란제비야입니다.”

트란제비야라…. 기억해둬야겠군. 반드시.

그 자리에 있던 다섯 명은 똑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 이름을 스마트 폰에 새겨두었다.

============================ 작품 후기 ============================

선글라스 부들부들 피꺼솟

선작, 추천, 코멘트 모두모두 감사드려요!

오늘 일일 조회수가 처음으로 3500을 넘었어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내일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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