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32화 (32/324)

32화

돌아가는 일리미네이터들에게 인사를 마친 천후는 몸을 돌렸다. 그가 향한 곳은 교전 장소에서 조금 떨어진 차도였는데, 대피령이 내려진 직후 버려진 차들이 이곳저곳에 멈춰 서있었다.

그 중에서도 디제스터의 교전에 휩싸인 건가 싶은 이곳저곳이 찌그러져 움푹움푹 파여있는 차로 다가간 그는 보조석 문을 억지로 힘으로 열고는 탑승했다.

“오올∼. 영 사원. 좋겠어? 모르는 여자한테 키스도 당하고. 응?”

“…….”

쿡쿡 하고 뒷머리를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찌르는 감각에 천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백미러를 통해 보니, 금발에 정장 차림의 여성이 장난스런 표정으로 그의 뒷통수를 간질여대고 있었다. 셀레나였다.

“어땠어? 막 레몬맛 났어?”

“중딩이냐, 내가… 너무 갑작스러워서 아무 생각 없었어.”

“진짜? 영 사원 몸에 문제 있는 거 아냐? 비뇨기과 갈래?”

“아우. 진짜.”

듣자듣자 하니 희롱의 범위가 마구 확장되자 천후는 도끼눈을 뜨고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명백하게 전혀 안무서워하는 표정으로 호들갑을 떨면서 외쳤다.

“꺄∼. 사원이 사장 폭행한다! 직장 내 폭력 반대!”

“너 말야…….”

한참이나 지켜보던 천후는 으휴 하고 한숨을 쉬면서 앞으로 몸을 획 돌리며 창가에 턱을 괴었다.

아. 삐졌다. 그 모습이 사뭇 귀여워서 꺄르르 웃은 셀레나는 앞좌석에 몸을 기대며 그의 귀와 볼가를 찌르며 말했다.

“에이. 장난이야, 장난. 남자애가 이런 것도 못 받아주니? 천후는 좀 회화스킬이랑 유머감각을 키워야해.”

“………그래보여?”

꽁한 기색이던 그는 그녀의 말에 혹했는지, 살짝 뒤를 돌아보며 조심스레 되물어왔다. 안 그래도 사실 꽤 신경 쓰던 부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셀레나는 그 모습에 파아앗 하고 지금까지 본 어떤 얼굴보다 해맑게 웃으며 천후의 얼굴을 손가락질했다.

“아. 아하하하하! 그래보여래! 아. 배 아파. 희주야. 그래보여래. 얘 어떻게 하니, 진짜.”

“…귀여우십니다.”

심지어 운전석에 들어온 희주까지 살짝 한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그렇게 말하자, 천후는 귀까지 새빨개져서는 고개와 몸을 문 쪽으로 팍 돌리며 외쳤다.

“아, 진짜. 계속 놀리기만 하고! 난 진지하게 물어본 거였는데!”

“아하하! 아, 배야! 아, 삐지지 마, 천후. 진짜 귀여워서 그러니까.”

“…….”

단단히 골이 난 천후는 입을 꾹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셀레나는 그런 그를 보고 씨익 웃더니 그의 뜨거워진 귓바퀴를 살살 매만졌다.

“당장 너무 급하게 생각 안 해도 돼. 10년 동안 이상한데 있다 왔으니까. 그리고 나나 희주는 지금 이런 너도 충분히 귀엽다고 생각하거든? 놀리는 재미가 있어서?”

“뭐야, 그게….”

“그러니까 이런 걸로 진짜 삐지지는 마. 여자가 놀리는 것도 좀 받아주고 그러는 게 남자다운 거잖아. 응?”

“…진짜 삐지진 않았어.”

“후후후. 알아. 근데 천후. 그래서 좋았어 어땠어? 말을 해봐.”

“야!”

“꺄하하하!”

아오. 진짜 이 여자가. 살 수가 없네, 내가. 천후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도 간신히 몸을 정자세로 되돌렸다. 하긴 이런 걸로 남자가 진짜 삐지면 찌질하지. 좀 기분이 상하긴 했다만.

그 모습을 쿡쿡거리면서 지켜보던 셀레나는 잠시 숨을 고르다가, 이번엔 조금 진지한 기색으로 그의 양 어깨를 짚으며 은근히 물었다.

“그런데 왜 빌라이저에 오라는 거 거절했어? 우리 연봉 3배는 줄 거 같던데.”

“…네가 빤히 여기서 오퍼레이터 하고 있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받아 들이냐?”

오늘 전투 역시 셀레나는 오퍼레이터로 참가했다. 하지만 전투 자체엔 정말 아무 도움이 안된단 걸 이전 블랙 레오파드 건에서 확실하게 느낀 셀레나는 차 속에서 염화로 지원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전투 후 일리미네이터들 간에 있었던 대화도 전부 듣고 있는 걸 빤히 알고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흐응∼. 그게 다야?”

천후는 셀레나가 목에 팔을 감아오면서 묻자, 조금 표정을 풀면서 대답했다.

“…것도 있고. 그 사람한테 내가 했던 말도 진심이고.”

“응? 어려울 때 말 걸어왔단 거?”

“어.”

어느새 귓가에 닿을 듯이 밀착한 셀레나의 입에서 살짝 뜨거운 숨이 새어나왔다. 그 기색을 눈치 채지 못하고 천후는 담담히 말해갔다.

“뭐…. 면접날 이후로 나한텐 정말 아무 연락도 안 왔었거든. 혹시 남아있는 회사 있나 해서 내 쪽에서도 다 한 번씩 전화정돈 걸어봤는데 바로 끊기더라.”

“그런….”

“다치고 쉬면서 그렇게 계속 그러고 있자니 막 정말 화도 나고, 내가 뭐하고 있나 생각도 하고 그랬었어. 그런데…경위가 어쨌건 너는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나한테 제의를 해왔잖아. 뭐 직접 눈으로 봤으니까 그렇긴 했지만…가장 먼저 내 가치를 인정해준 거라고. 솔직히…좀 고마웠었어.”

“아….”

“나한텐 날 알아봐주는 사람이 더 중요해. 어차피 돈은 어느 회사던 1년만 있다가 나온 다음 프리랜서로 뛰면 저깟 연봉차이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게 벌 수 있어. 나한테 별로 돈은 그렇게 큰 메리트가 아니야.”

“…….”

“그러니까 뭐…. 겸사겸사 네 회사. 크게 한번 키워줘 볼게.”

그 이야기를 들은 셀레나는 꾸욱 하고 그의 목을 감싼 팔에 더 힘을 주었다. 얼굴은 좌석 뒤로 파묻고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한쪽 손을 들어, 장난스럽게 그의 볼을 찔러오며 말했다.

“후후후. 이거 천상 호구네. 어쩐다니, 정말.”

“…뭐야. 그럼 나 빌라이저 가버려?”

“아니. 누가 그러랬니?”

살짝 뚱한 목소리로 하는 말에 셀레나는 쿠쿡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 기색에 천후는 살짝 눈을 가늘게 뜨고 백미러를 흘겨보다가, 큼큼 하고 헛기침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뭐 그리고….”

“응?”

“…우리 회사는 사장님이 미인이잖아.”

“어쭈∼. 쪼끔 말재주가 괜찮아졌는데∼.”

와락! 목에서 팔을 끌어올려 그의 얼굴을 끌어 올린 셀레나는 백미러로 보이는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아아. 정말이지. 얘는 왜 이럴까? 내 이런 얼굴 못 보여주잖아. 빨개진 게 멈추질 않아.

“야. 안보여!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후후후.”

셀레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곤 얼굴을 놔주지 않았다. 싱글벙글, 발그레해진 얼굴이 수습되질 않았다.

가슴이…두근거린다. 너무나. 옆자리에 있었다면, 그대로 끌어안고 마구 키스를 퍼붓고 말았으리라.

셀레나의 그런 기색을 어느 정도 눈치 챈 천후는 얼굴을 붉히면서 화제를 전환했다.

“아…. 그러고 보니 희주 씨. 아까 전엔 왜 그러셨던 거예요? 굳이 그걸 제가 받을 필요는 없었던 거 같은데.”

“…….”

천후는 자신이 포인트맨 지정비율을 받게 된 것을 아직도 신경 쓰고 있었다. 희주는 잠시 어떻게 말해야할지 고민하듯, 입을 다물고 눈만을 깜박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분홍 입술을 달싹였다.

“그 비율제는….”

사거리 근처에서 신호대기가 걸리자 차를 멈춰 세운 희주는 검게 빛나는 눈동자로 천후를 마주보았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아주 소중한…이 업계가 막 시작 될 때부터 세운 철칙입니다. C랭크 일리미네이터들에게 있어 그 비율을 받는다는 것은 곧 명예이며,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셋을 위해 가장 위험한 포지션을 소화해야 받게 되는 비율. 그것은 말 그대로 목숨 값이기도 하다.

“그것을 위험하지 않았다며 거절한단 건, ‘난 너희와 격이 다르다. 동렬에 놓지 말아라’ 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그런! 전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고 해도…단순하게 진심으로 주고 싶은 걸 받아주지 않으면 누구라도 서운해 하는 법입니다.”

“그…런가?”

“네.”

단언하듯 고개를 끄덕인 희주는 오른손을 들어 그의 왼손에 포개며 말을 이었다.

“주인님. 세상 모든 사람이 주인님처럼 강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그들도…알고 있었습니다. 주인님이 자신들보다 훨씬 강하고…어쩌면 도움조차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하지만 주인님께서 옷을 벗어주시고…겸손한 모습을 보여주시니 나름대로 용기를 내어서 제안한 내용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받아들이시게끔 한 겁니다.”

“…….”

천후가 뭐라 말을 맺지 못하자, 희주는 이윽고 다른 한손도 마저 가져와, 그의 손을 들어 감싸 쥐었다.

“주인님…. 주인님께선 앞으로도…이 사회에서 저희 셋만을 아는 채로 살아가고 싶으신지요?”

“그런 건…!”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었다면 그냥 유그드라실에서 지냈어도 충분했을 겁니다. 굳이 내려오신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닐 겁니다.”

“…….”

“그러니…주인님께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짐작하기 위해 노력해주세요.”

“…….”

“주인님께서 그것에 익숙해질 때까지…제가 곁에서 도와드리겠습니다.”

“네…. 명심할게요. 고마워요, 희주 씨.”

살짝, 입가에 호선을 그린 희주는 천천히 운전대를 다시 잡았다. 그와 동시에 신호대기가 풀리며 차가 앞으로 나아갔다.

‘다른 사람의 마음….’

신경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아직 한참 멀었던 모양이다. 천후는 스스로에게 반성하며 그녀의 말을 소중히 가슴속에 새겨 담았다.

그녀는 정말…그에게 있어 최고의 서포터였다.

그 모습을 운전을 하며 간간히 바라보던 희주는 그의 생각이 좀 정리되어 보인다 싶을 때 가만히 입을 열었다.

“주인님.”

“아. 네?”

“사실 제 쪽에서도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급료에 대한 부분입니다만….”

“아아∼.”

그러고 보니 5회 퇴치 이후에 재협상하자고 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 ‘쿼드라 콩가’ 두 마리를 한꺼번에 퇴치한 대금은 워낙 거금이다.

한 마리당 6억. 그 중 1팀에서 40%, 2팀에서 70%의 비율을 배당받았다.(2팀 회복주문 마법사는 꿀을 빨았다고 할 수 있다.) 이걸로 6.6억. 중계료와 세금을 빼면 4억. 이 중에서 15퍼센트 인센티브를 천후가 받으니 이 한건으로 6천만 원을 번 것이다.

이 정도면 어쩔 수 없이 낮은 월급을 줄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과는 전혀 다르다. 천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올려드릴게요.”

이런 조언을 해주는 희주 씨라면 당연히 올려 받을 만하지. 하지만 희주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답했다.

“아니요.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었습니다만….”

“네? 그럼?”

“오랫동안 생각했습니다만…급료 수령방식 자체를 수정할 수 있을지요?”

“음? 어떤 식으로?”

“어차피…저는 주인님의 자택에서 지내고, 소비도 함께 합니다. 제 월급도 사실 주인님의 소득에서 떼어서 주시는 거고요.”

“그렇죠.”

“그렇다면…굳이 월마다 저에게 월급을 주시는 게 아니라, 주인님의 재산을 공동으로 사용하다가 제가…피치 못 할 사정으로 주인님을 떠나게 되면 그 때에 제가 기여한 정도에 따라서 일괄적으로 지급해주실 수 있을 지요?”

“어…….”

뭔가 어려운데. 천후가 멍하니 고개를 갸웃거리자, 희주는 추가적으로 설명했다.

“그렇게 하면 매월 나가는 세금적인 부분이나…이런 저런 것들이 편해집니다. 주인님의 재산 규모도 점점 늘어날 텐데, 그때마다 재협상을 할 필요도 없을 테고요.”

그런가? 천후는 그녀의 말이 왠지 그럴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아, 네, 뭐…. 그럴까요? 어차피 사실상 제 재산관리는 이미 희주 씨가 전부 하고 계시니까 그게 편하시다면야….”

“네. 대신에…제 개인적으로 쓸 돈은 조금씩 주인님의 통장에서 빼 쓰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아. 괜찮아요. 괜찮아. 그 정도야 당연한 거고! 이미 통장 맡겨놨는데요, 뭐.”

“감사합니다.”

희주는 천후가 손을 살레살레 저으며 그녀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자,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감사를 표했다.

한편 그 이야기를 뒤에서 듣고 있던 셀레나는 몸을 덜덜 떨면서 희주를 바라보았다.

‘희주, 이 무서운 아이…!’

빙빙 돌려 말했는데, 재산의 공동관리…이건 결혼이고, 은퇴나 헤어질 시 기여분을 받는다…이건 위자료를 다르게 표현한 게 아닌가? 재산면에서만큼은 결혼한 것과 똑같이 취급해달라고 대놓고 말한 것이다.

천후는 그것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는지 쾌히 승낙했는데, 덕분에 백미러를 통해 보이는 희주의 입술은 여느 때보다 약간 붉어져있었다.

게다가 셀레나가 보기엔, 그에게 했던 피치 못 할 사정으로 헤어지게 됐을 때니 어쩌니 했던 건 전부 그럴싸하게 들리게끔 마련한 페이크고, 그녀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전자, 그 중에서도 그 의미를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것 그 자체에 있어보였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기뻐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셀레나는 근래에 새로 생긴 친구이자 연적을 복잡한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작품 후기 ============================

추천, 선작, 코멘트 감사드립니다~당분간은 새벽 1시에 업할 거 같네요!

아. 잔심단인님이 하신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드리자면 일단 당분간은 그릇이 큰 호구 정도로 가보려고 합니다.(속닥속닥)페이스가 느린 만큼 주인공의 성장 속도도 느리니 넓은 아량으로 지켜봐주세요~아. 연참은 매주 금요일에 고정적으로 해볼 생각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