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빌라이저의 베테랑 일리미네이터, 레이나드는 인상을 굳히며 선글라스를 고쳐 썼다.
이른 아침. 서울에 경급 디제스터가 출현했다는 소식과 함께 군과 유그드라실에서 협조요청이 들어왔다. 말이 협조요청이지…이것은 명령이다.
거부가 아주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그로인해 들어올 페널티가 얼마나 클지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아마 어용 언론을 동원해서 빌라이저가 군과 유그드라실의 정식요청을 거부했다는 뉴스를 마구 띄울 테고, 그와 동시에 중계로 들어오는 일은 죄다 끊길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쿼드라 콩가 때는 체면을 좀 구겼지만 그는 정말 이 업계에서 오래 구른 베테랑 중 베테랑. 처음 디제스터가 날뛰기 시작한 시점부터 일리미네이터로 활동했던 사람이 레이나드였다. 사실상 빌라이저의 기둥과도 같은 남자다.
경급 디제스터 레이드 경험도 몇 차례 있는 만큼 참여하란 소리가 나오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어차피 자신이 피해도 업계의 다른 누군가는 해야 한다.
그럼 새파란 애송이들을 내보내느니 내가 가는 게 낫지. 그런 생각으로 레이나드는 레이드 참여를 수락했다. 그런데….
“크윽…! 죽을 때까지 무조건 싸워야하다니…!”
문제가 생겼다. 상대는 보통 디제스터가 아니었다. 던전화가 가능한 놈이었던 것이다.
던전화.
던전화란 일부 특수한 디제스터가 펼치는 결계를 말한다. 던전화가 시작되면 안과 밖이 유리되어 출입이 불가능해진다.
이렇게 형성된 던전은 외부에서의 공격으로는 거의 파괴할 수 없다.
즉,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해놓고 인간을 마구 학살하는 것이다.
하지만 던전을 해제시키는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방법은 아래와 같다.
첫째. 디제스터에 의해 던전 내부의 모든 인간이 사망했을 때.
던전 내의 인간을 모두 죽이면 디제스터는 던전화를 해제하고 다시 다른 인간이 있는 지역으로 이동 후에 던전을 생성한다.
그러므로 던전화가 해제되었을 때 일리미네이터를 투입하여 쓰러뜨리는 것이 첫 번째 방법이 된다. 하지만 당연히…이것은 피해가 크다.
던전의 범위란 건 각양각색이지만, 보통 디제스터 등급이 높을수록 넓어지는 경향이 있다. 경급 정도가 되면 적어도 동 하나는 전부 감쌀 정도가 된다.
예를 들어 서울의 미아동에 나타났다면 2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건데, 그걸 던전 좀 펼쳐져 있다고 손가락 빨고 기다리라고?
그럴 순 없기 때문에, 마법기관 유그드라실에서는 또 하나의 방법을 냈다.
두 번째 방법.
한정된 수의 일리미네이터만 어떻게든 강제로 던전 안으로 쑤셔 넣는다.
정확히는 디제스터의 본능, 위협적인 외적을 먼저 제거하고자 하는 행동을 이용해 결계 밖에서 ‘배틀 시그널’이라 부르는 특수한 유그드라실 제작 마법, 간단히 말해서 ‘쫄았냐 한판 붙자’ 라는 의미의 디제스터를 도발하는 마법을 사용한다.
그럼 디제스터는 그것에 도발당하여 완전히 자신의 영역화 시켜놓은 던전 안에 일정 숫자의 일리미네이터들을 출입시켜 살해를 꾀한다.
그 때 출입할 수 있는 인원수가 바로 파급이 4명, 경급 25명이다. 그 이하는 가능해도 이상은 들어갈 수 없다. 이렇게 어떻게든 들어간 일리미네이터들이 디제스터와 교전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에 아주 중대한 문제점이 발생한다.
퇴각이 불가능하다는 문제점이.
한번 들어온 던전에선 나갈 수 없다. 디제스터를 퇴치하기 전까지는. 패배하면? 죽는 것이다. 평소 레이드 때와는 다르게, 던전에서 싸우면 예비 인원으로 교체도, 전장이탈도 불가능하다.
퇴치. 아니면 전멸.
완벽한 모 아니면 도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레이나드가 속해있는 이 공격대는 지금…도를 던졌다.
*
“으윽! 빌어먹을 애송이 새끼!”
상황은 처음부터 그다지 좋지 않았다. 구성한 공격대의 인원 구성은 B랭크 2명, C랭크 23명. 이것을 들은 그 순간부터 레이나드의 표정은 썩어 들어갔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이런 강력한 디제스터가 나타났으면 국내 서울에 거주하는 B랭크 전원이 전부 튀어나와서 B랭크 10명이상, 나머지 C랭크 정도로 이루어지는 게 맞다.
그 정도의 화력이라면 레이나드의 경험상 경급 디제스터도 어렵지 않게 순삭 시킬 수 있다. 하지만…B랭크 마마님들은 서울 시민 2,3만의 목숨이 걸려있는데도 2명씩 로테이션을 주장했다.
B랭크가 여럿 참여하면 현상금을 나눠가져야 하는 문제라거나, 이걸 나랑 다른 한명이서 쓰러뜨렸다…같은 명예문제가 걸린다는 이유였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 하나같이 반대해서 구성이 이 모양이 된 것이다.
이게 일반적인 경급 디제스터라면 표준적인 구성에 가깝지만, 던전화가 가능한 디제스터다. 던전 내에서는 디제스터가 더욱 강해진다. 레이나드는 몇 번이나 항변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였다.
“설마 제 실력을 의심하시는 거예요, 공대장님? 아니시죠?”
씨발….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날 때부터 가지고 나온 재능 하나 믿고 깝치는 꼬라지를 보니 배알이 뒤틀렸다.
디제스터 퇴치 원년 맴버인 점을 높게 사서 레이나드는 공격대에 지시를 내리고 통제하는 공격대장의 지위를 부여받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보여주기일 뿐 실제적으론 B랭크 두 명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 중 하나는 막 일리미네이터 데뷔를 했던 시점부터 알고 지낸 사람이라 고분고분 따라주었지만, 다른 하나는 달랐다.
국내 굴지의 디제스터 퇴치 업체 엔체스터 콜로니 소속인 그 애송이는 이제 일리미네이터가 된지 한 달도 되지 않았지만 그 새 꼴갑이 되어있었다.
‘참자. 참아야하느니라.’
하지만 레이나드는 이것까지도 참을 수 있었다. 어찌되었던 수많은 민간인의 목숨이 달린 일이다. 가장 강력한 딜러인 이자식이 태업이라도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런 생각에 레이나드는 온갖 인내심을 끌어 모아, 이제 스물 갓 된 놈이 멋대로 툭툭 던지는 말을 웃으면서 받아냈다.
그러나…. 문제는 던전에 들어가기 직전에 발생했다.
“일단 최대한 주의하겠습니다. 사전에 걸어둔 강화마법의 유지시간 유의하시고요. 다섯 분은 익숙하진 않겠지만, 최대한 회복마법과 강화마법에 전념해주세요.”
“네. 절대 죽지 않게 할게요!”
25인의 일리미네이터 공격대는 4인 파티플레이와는 조금 양상이 다르다. 주요 능력은 아니지만 힐도, 버프도 가능한 인력이 모인 것이니 역할이 나뉘는 것이다.
B랭크 마법사 둘은 가장 강력한 보호를 받는 딜러. C랭크 23명 중 5명은 힐과 보조마법에 전념. 그리고 나머지 18명은…디제스터의 딜을 빼면서 주의를 끄는 역할이다.
자신이 가능한 최대의 방어마법을 두르고, 딜도 하면서 죽지 않을 만큼 쳐 맞으며 도망 다니는 방식이 된다. 포인트 맨이 18명인 것과 같달까?
목숨을 내놓는 방식이지만 원래가 공격&이탈에 특화된 것이 일리미네이터인 만큼, 이탈에 중점을 두면서 진행하면 의외로 안정도는 높다.
죄다 날벌레처럼 도망 다니면 어그로가 분산될 수밖에 없으니까. 그럼 한명에게 오는 공격은 자연스레 약해진다.
확고하게 디제스터와 제자리에 말뚝 박혀서 싸울 수 있는 존재, MMORPG의 탱커 같은 마법사가 없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는 문제이기도 했다.
포지션 나누기를 완료한 레이나드는 그들을 이끌고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그 때….
“시…싫어! 이런 미친 짓거리 나는 할 수 없어!”
“아니. 이봐!”
일리미네이터 중 하나가 던전으로 들어가기 직전, 패닉에 빠지더니 그대로 전력을 다해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미 던전에 들어온 다른 일리미네이터들은 그를 잡으러 나갈 수 없었다.
“제길! 저 개자식!”
더 데려오지 못해 안달일 지경인데 한명이 도주하다니? 저 자식은 금세 군이나 유그드라실에 잡히고, 업계에서 매장 당할 테지만 지금 당장 전력이 부족한건 문제가 컸다.
하지만 바로 사람을 섭외해올 수는 없는 상황. 축차 투입될 2차 공격대는 아직 제대로 조직 되지 조차 않았을 것이다. 지금 이대로 가는 수밖에 없다.
레이나드는 입속에 탄 나뭇조각이라도 삼킨 것처럼 쓴 표정을 지었다가 정신을 바로 했다. 지금은 레이드에 집중해야한다.
“끔찍하군….”
던전 내부는 지옥으로 변해있었다.
먹구름이 가려서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다지만 그래도 해가 떠오르고 있는 아침이다. 마냥 어두울 수만은 없다.
그러나 던전 안팎을 나누는 경계를 넘어서자마자 그들에게 보인 것은 핏빛 머금은 어둠이 짙게 깔린 모습이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돌아다니던 도시인데, 지금은 붉은 안개가 끼어 희뿌옇게 보였다.
맞으면 아프다 싶을 정도로 비가 내리고 있는데도 그 안개는 전혀 걷힐 생각을 하지 않고 시계(視界)를 차단하고 있었다.
조심스레 시선을 돌리면 왕복 4차선 도로에 차들이 전부 멈춰서있는 게 보였다. 그 중 앞쪽의 차량들은 무슨 나무뿌리 같은 것에라도 관통당한 것처럼 찌그러져 구멍이 숭숭 뚫려있었고, 그 뒤쪽으론 사람들이 도망쳤기 때문인지 차 문이 전부 열려있었다.
그런데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
무사히 대피했을 거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실시간으로 유그드라실의 위성에서 보내지고 있는 영상 정보를 보면 던전 내에서 놈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최초 등장 시점의 화면을 보았던 레이나드는 그것을 납득하기 힘들었다. 처음 나타났을 때, 놈의 크기는 장장 15m가 넘었다. 그런데 아파트 건물 5층 높이에 가까웠던 놈은 점점 몸 크기가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사라져버린 것이다.
핏빛 안개는 놈이 사라지고 나서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바보라도 연관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호흡조차 주의해야할 판이다.
그렇게 걱정하던 때였다.
질척…. 발에 밟히는 느낌을 받은 레이나드는 움찔하면서 시선을 내렸다. 그곳에는 마치 젤리가 녹은 것처럼 땅바닥에 딱 붙어 있는 것이 있었다. 레이나드는 처음엔 그것이 무언지 알아보지 못하다가, 꼼꼼히 살펴본 후에야 경악을 토해냈다.
“빌어먹을!”
그것은 인간…아니 한때 인간이었던 이들의 가죽이었다. 뼈와 근육이 모두 사라지고, 가죽만이 남아 바닥에 깔려있었던 것이다. 자세히 둘러보니, 그런 식의 시체가 지천에 깔려있었다.
이것만으로도 끔찍한데, 레이나드가 소리를 치자마자 가죽을 뚫고 검붉은 색의 실선 같은 것들이 그의 안면을 향해 날아왔다.
“!”
몸을 뒤로 젖혀서 간신히 그것을 피해낸 레이나드는 식은땀을 흘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 실선과도 같은 것들은 바닥 곳곳에서 꿈틀거리며 피어올라, 아직 상황파악이 되지 않은 일리미네이터들의 신발을 타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산개! 비행 가능한 인원은 비행! 그 외는 전부 건물 옥상으로 피합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각자 어느 정도 강화마법을 걸어두었던 이들이 건물 위로 치솟아 올랐다.
그러자 실선들은 제들끼리 꼬이며 뭉치더니, 좀 더 굵은 줄기가 되어서 건물 옆면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도시 전체에 퍼져있었던 거군!”
레이나드는 그 순간 놈이 15미터의 거체를 나누고 나눠, 보도블럭이나 갈라진 아스팔트 틈새 같은 곳까지 빈틈없이 지면을 장악하여 사람들의 피와 뼈를 빨아먹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아마 일반 사람들은 그저 땅바닥에 발을 붙이고 있는 것만으로도 피부를 통해 혈액이 빠져나가고 있으리라. 이 피 안개는 정말로 사람들이 흘린 피고!
‘어쩐지 쇠 냄새가 나더라니!’
부정형의 촉수 디제스터, ‘텐타클 뱀파이어’이라 임시명칭이 정해진 그놈은 이미 던전 전체를 장악하여, 인간들을 피 뽑아내는 공장으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얼마나 많은 민간인 피해가 일어났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까드득 하고 이빨이 부서질 것 같이 갈아댄 레이나드는 그러면서도 냉정하게 외쳤다.
“놈에게 우리 화력이 강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줘야합니다. 그래야 이 ‘뱀파이어릭 필드’가 해제되고 최대한 촉수를 뭉쳐서 우리들을 상대할 거에요! 놈을 최초 본체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저희의 우선 목표입니다. C랭크만 딜 시작! B랭크 대기!”
말을 끝내기도 전에 손에 전격을 생성한 레이나드는 그대로 건물을 타고 올라오는 촉수에 꽂았다. 사전에 미리 외워놓은 지연주문을 푼 것이다. 그러자 전격은 비에 젖은 바닥까지 타고 내려가, 아직 실선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촉수들을 태워버렸다.
쾅! 콰쾅! 강렬한 폭음이 울려 퍼지며 거리에 있던 자동차들이 장난감처럼 날아간다. 그곳에 꽂힌 화염과 에너지 구체들이 사방에 폭사되며, 놈의 신체 일부를 박살내갔다.
그것에 위기감을 느낀 것일까?
슈르륵. 슈르르륵. 일리미네이터들이 있는 주변의 모든 실선들이 점점 모이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3m가 넘는 거대한 촉수로 변화했다. 그리고 중앙 촉수 옆면으로 가는 촉수들이 꿈틀 거리다 일리미네이터들에게 쇄도했다.
“광역공격! 피하던가 버티세요! 쿠헉!”
레이나드는 그렇게 말하다가 촉수의 공격을 맞고서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보조마법에 전념한 이들이 쳐준 방어마법으로 간신히 버틴 그는 다시금 주문을 읊으며 전격을 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로 그 때.
“아아아아! 천공에서 내리치라, 신벌의 노여움이여! 나의 노래 곧 힘이 될지니!”
번쩍! 영창이 끝남과 함께, 먹구름으로 가려져있던 하늘이 원형으로 열리며 거기에서 흰색 빛줄기가 떨어져 내렸다.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폭음이 터지고, 빛줄기가 떨어진 지면은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커다란 크레이터가 생겼다.
그곳에는 3미터짜리 촉수가 완전히 박살나 쥐포처럼 널찍하게 펼쳐져 바닥에 들러 붙어있었다.
굉장한 전과. 하지만 레이나드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외쳤다.
“병신아! 피해!”
============================ 작품 후기 ============================
영원히 고통받는 선글라스
아. 레이나드는 가명입니다. 한국인이에요.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금요일이니까 오후에 시간 봐서 한 화 더 올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