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트라이앵글>
1차로 유그드라실에서 정밀 체크를 받고 지상 병원으로 이송된 영천후는 즉시 특실로 옮겨졌다.
현재 천후의 상태에 대해선 메디컬 센터 소장인 이미연과 병원의 의사들 모두 극심한 탈진 상태라는 진단을 내렸다.
워낙 튼튼한 몸이니 며칠 정도 잘 요양하면 금세 회복할 거라는 이야기에 희주와 셀레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울 하늘에 오로라를 만들어낸 그 직후 쓰러진 천후는 그 뒤로 늦은 밤이 된 지금까지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두 여자는 침대 옆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서 그를 간병하고 있었다.
“바보네…. 병원비로 회사 돈을 얼마나 까먹는 거람?”
“…….”
셀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희주의 손을 잡아왔다. 희주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주었다. 희주 자신의 손만큼이나 차가워져 있는 그것은 크게 떨리고 있었다.
“이렇게 멀쩡할 것 같으면 그냥 좀 걸어 와서 집에 가서 잘 것이지….”
“…….”
희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셀레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말은 이렇게 밉게 하고 있었지만, 그가 막 유그드라실에서 내려왔을 땐 반쯤 이성을 잃고서 병원 특실로 옮긴 것이 바로 그녀였다.
현재 천후의 증상은 심한, 하지만 그래도 단순한 탈진. S급 서포터인 희주라면 관련 의약품(이라고 해도 링겔 정도)만 구비하면 자택에서도 얼마든지 요양과 간호가 가능했지만 셀레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서도 막무가내였다.
서울에서도 손에 꼽히는 종합병원이다. 특실 이용료는 1박에 60만원이 넘어간다. 하지만 셀레나는 망설임이 없었다. 이제 와서도 저런 소리를 하고 있지만….
정말로 아까워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목소리에 묻어있는 감정이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것을 알기에 희주는 셀레나가 하는 말을 전부 들어주며, 그녀를 다독여주고 있었다.
“희주. 희주는 알고 있었어? 천후가…저렇다는 거?”
“…조금은.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몸을 떨며 희주의 팔을 끌어안고 있던 셀레나가 물어온 말에 그녀는 나직이 대답했다.
천후가 사무소를 나간 이후에도, 두 사람은 TV로 나오는 화면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최초 상황부터가 최악이었다. 천후가 도착한 시점에선 이미 공격대가 아니라 제대로 된 4인 파티조차 형성되지 않는.
그럼에도 3인 파티로 디제스터를 압박하여 이윽고는 B랭크 일리미네이터의 풀 캐스팅 마법이 꽂히는 장면에선 소리까지 질렀다.
영천후가 대단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기까지 해낼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뻐하는 것도 잠시….
여력을 숨기고 있던 놈이 천후의 심장을 꿰뚫은 그 순간, 사무실에 정적이 맴돌았다. 기뻐서 일어나있던 셀레나는 다리가 풀려서 주저 앉아버렸다. 눈물이 나오는 것을 막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멍하니 화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자신보다 훨씬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으리라 생각한 희주가 고개를 저으며 셀레나를 다잡았다.
그때부터였다.
그가 변한 건.
마력의 방출이 더욱 거세지며 아지랑이가 흑색으로 뒤덮이고, 머리카락이 길어지고, 옷이 터져나가는 걸 보고서 셀레나는 아연실색했다.
오퍼레이터라지만 그녀도 마법사다. 저게 지금 말도 안 되는 광경이란 건 보는 그 즉시 깨달았다.
셀레나는 대체 왜 천후가 대참사에서 살아남았다는 그 단 한 가지의 이유만으로 유그드라실에서 10년이나 지내야 했는지, 그리고 그와 처음 만났던 그날 이력서가 왜 변조되어있는지를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는…현재 마련되어있는 어떤 규격으로도 잴 수 없는 존재니까.
마법을 쓸 수 있으니 그냥 인간은 아니다.
하지만 마법사도 아니다.
둘 다 아닌 무언가.
그렇다면 그는 무엇일까? 인류라는 종 안에 해당되긴 하는 걸까? 유그드라실에선 그걸 확인해본 것이리라. 오랜 시간에 걸쳐서….
“좀 신기하다곤 생각했지만, 저럴 줄은 몰랐어…. 희주는 용케 짐작하고 있었네?”
셀레나가 어지러운 목소리로 물어오자, 희주는 허공에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곳엔 어느새 그녀의 칼, 월하홍취가 나타나 그 손에 쥐여져 있었다.
“판단 근거가 있었을 뿐입니다. 제 월하홍취에도 신체 능력을 증가시키는 강화마법이 걸려있습니다. 이 정도가 강화계가 주특기인 D랭크 마법사가 걸어둔 강화마법의 평균적인 성능입니다.”
“…….”
“주인님께선…스스로 D랭크 마법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이 정도로는 결코 주인님처럼 디제스터와 교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역량을 숨기시고 계시거나…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닌가 하고.”
“그랬구나….”
한숨을 내쉰 셀레나는 고개를 꺾었다. 이렇게 보니 자신이 정말 천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단 생각에 자괴감이 든 것이다.
사실 이건 셀레나의 탓은 아니었다. 강화계 주특기의 마법사는 보기 드물다. 일리미네이터 중에서 몇 없다. 덕분에 그들을 만날 기회가 그녀에게는 없었다. 판단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디제스터가 나타난 그 직후부터 활동한 레이나드 조차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이니. 하지만 그래도…. 셀레나는 조금 풀이 죽었다.
눈동자에, 조금 다른 감정이 맺혔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떨림이 조금 달라지는 것을 느낀 희주는 담담히 그녀에게 물었다.
“무서우십니까? 주인님이?”
“…….”
셀레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미 대답이 되었다. 희주는 입을 다물었다. 시선을 자신의 주인에게 가져갔다.
스으. 스으. 낮은 숨소리가 병실에 흐른다. 온 몸에 있던 상처는 전부 나았지만, 모든 힘을 다 때려부어 지쳐버린 몸으로 간신히 살아와 이 자리에 누워있는 그. 그를 보며 희주는 가만히, 흑진주와 같은 눈동자를 빛냈다.
분홍 입이 열렸다.
“…싫어지셨습니까?”
달싹이며 내놓은 말이 허공에 다 새어나오기도 전에, 긴 금발이 붕붕 하고 흔들린다. 미세하게…백옥무정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그렇다면 문제없지 않습니까?”
“그…그치만…. 모른단 말야. 정말 앞으로 어떻게 될지. 난 조금 그냥 작게…소소하게 회사를 운영하고 싶었어. 그러다…쟤가 나가고 싶다고 언젠가 말하면, 그때 그냥 보내줄 생각이었어. 트란제비야는 그냥 저 녀석의 발판이었다는 것만으로도 괜찮았다고.”
“…….”
“안 그래도 컸다고. 그런데 생각보다 더 크잖아. 나, 나는….”
“셀레나.”
꼬옥. 정리되지 않은 말을 더듬으며 내놓는 그녀의 얼굴을 희주는 가만히 안아주었다. 격하게 떨리던 그녀의 호흡이 조금은 가다듬어졌다.
“주인님께선…강하십니다만, 아직 많이 미숙하십니다. 많은 것들이…. 아주 많은 것들이.”
“…….”
“지금까지 저희가 보아왔던 것처럼…. 그러니 그 곁에서 도와줄 사람도 아주. 아주 많이 필요할 겁니다.”
섬섬옥수가 볼가를 쓰다듬었다.
“당신 역시도…. 언젠가 주인님께서 정점에 서실 그날을 위해….”
셀레나는 힐끗 시선을 던졌다. 희주가 하고 있는 이 말들은…허언이 아니다. 시일과 형태의 차이만이 있으리라. 그리고 그 형태를 좌우하는 것은….
“내가…필요할까? 희주만 있어도 되지 않아?”
“저는…주인님께 미운 소리를 잘 못합니다. 그래서 셀레나가 필요합니다.”
“…너무해. 자기만 좋은 사람 역할이네.”
“죄송합니다.”
살짝 그녀에게 눈을 흘겼던 셀레나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희주는…무섭지 않아?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 정말로 유전적으로도.”
“그랬다면 유그드라실에서 인간사회에 풀어 두질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유전적인 면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죠. 그렇다면 상관없습니다.”
“그래?”
“네. 그리고 평범한 인간인 제 입장에선…손에서 불이 나가는 마법사나, 머리카락이 길어지는 주인님이나…. 그리 큰 차이를 느끼기 힘들군요. 어차피 둘 다 그냥 다른 인류이니.”
“그건…그렇네.”
하긴. 생각해보면 이 차이를 가지고 크게 놀라는 건 마법사들이지, 인간 입장에서야 똑같이 손에서 불나가는 거 무슨 차이가 있을까? 둘 다 이상한 놈들이지. 도찐개찐일 뿐이다.
“그리고…그렇다면 어떻단 말입니까? 주인님께선 이렇게…약속을 지키시고 돌아오셨습니다. 저에게는 그걸로 충분합니다.”
“…….”
“돌아오지 못하셨다면 이런 이야기로 고민할 여지조차 없었겠죠.”
“응….”
그래. 정말로 그렇다. 그냥 거기서 심장이 뚫려서…그대로 죽어버렸다면. 지금 하고 있는 이런 고민들조차 하지 못했으리라. 그렇다면 이 모든 것들이 사치. 필요 없는 고민일 뿐.
희주의 말에 잡념을 떨친 셀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흔들리는 마음이 잡혔다. 그래. 영천후는 영천후일 뿐이다. 머리카락 좀 나서 뭐 어떻다고. 살아온 게 어디야?
그렇게 생각하자, 이제야 비로소 장난기가 조금 돌아왔다.
“요 녀석. 허리가 휘도록 돈을 벌어야 할 사원이 사장 말도 안 듣고 막 나가놓고서 다치고나 들어오고 말이야.”
자리에서 일어난 셀레나는 잠들어있는 그의 볼을 검지로 쿡쿡 찔렀다. 천후는 정말로 깊게 잠들었는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셀레나는 그것을 웃으며, 사랑스럽단 눈으로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때.
스륵…. 셀레나의 등 뒤를 희주가 감싸 안으며, 천후의 볼에 올린 손 위에도 함께 손을 포갰다. 그리고는 은밀한,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니 셀레나…. 주인님께서 약속을 지키셨으니…저희들도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아….”
지워졌던 잡념이 다른 방향으로 돌아왔다. 약속.
그날의…계속.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몸이…조금씩 달아올랐다. 그의 얼굴이 달리 보인다. 입술.
얼굴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워졌다.
답은 정해져있었다. 그것을 입에…아주 작게 담았다.
“응….”
등 뒤를 끌어안은 차가운 몸이, 조금 따듯해졌다.
*
다음날 병원에서 나온 천후는 그 뒤로 일주일이나 집에서 요양해야했다. 그의 몸 상태 자체는 닷새가 지나자 평소대로 돌아왔지만, 희주와 셀레나가 극구 움직이지 못하게 막았다.
그동안 식단도 사흘은 죽만 먹이다가, 그 뒤로는 보양식이니 뭐니 하며 몸에 좋다는 것들을 있는 대로 먹였다.
온천에 갔을 때 있었던 사건을 기억하는 천후는 어떻게든 사양하려했지만, 두 여자가 절대 물러나지 않을 기세로 양보하지 않으니 별 수가 없었다.
덕분에 일주일이 지난 오늘, 천후는 완전히 펄펄 날았다. 여러 가지 의미로.
“끝났습니다.”
“아. 고마워요, 희주 씨. 아! 살 것 같다!”
오후가 지나 밤이 되어서야 회주에게 완쾌를 인정받은 천후는 그 즉시 길어진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원래는 헤어숍에 가서 처리하려고 했지만, 이야기를 꺼내자 희주는 어디선가 이발도구들을 가져와 직접 머리를 잘라주었다.
“잔재주입니다. 하지만 아쉽군요. 이렇게 고운데….”
희주는 자른 머리카락들을 들고서 머릿결을 만져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천후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에이. 됐어요. 전 장발 불편해서 못하겠더라고요. 어릴 때는 그러고 다녔었던 모양인데.”
“그렇습니까?”
“어릴 땐 귀여웠다나 뭐라나. 근데 지금은 안어울리잖아요. 하하.”
아무것도 모를 때 미연에게 꽃단장을 당했었던 기억이 남아있는 천후는 쓰게 웃었다. 그 말에 희주는 아주 살짝 고개를 갸웃하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럼…씻으시겠습니까?”
“그래야죠. 아무래도 옷 안쪽에 좀 들어갔는지 간지러워서.”
“그럼…혹시 씻고 나서 어디 나가보실 생각이신지요?”
“네? 아뇨. 밤인데 어딜 가겠어요. 오늘은 그냥 이대로 자야죠. 운동도 내일부터 할 생각이에요.”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인 희주는 순식간에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들을 정리해내고는 그의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실은…1층 욕실을 손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죄송합니다만, 2층에서 씻어주실 수 있으신지요?”
“아아~. 그래서 물어보신 거구나. 네. 그럼 그럴게요. 정말 고마워요, 희주 씨.”
고개를 끄덕인 천후는 금세 2층으로 성큼성큼 올라가 욕실로 들어가 몸을 씻었다. 그동안 그는 콧노래가 나오는 것을 참지 않고 흥얼거렸다.
사실 천후는 지금 기분이 매우 좋았다. 사실 그날, 자신의 본모습을 보인 그 때, 그는 희주나 셀레나가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각오했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그의 생각은 기우였다는 듯이 희주는 이전과 똑같이 자신을 대해주고 있었다. 셀레나 역시. 그것이 너무나 기뻤다. 그 어떤 누구에게 인정받았을 때보다도.
두 사람이 고맙고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아래쪽이 엄청나게 부풀어올라있는 것을 본 천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일부러 박박 문질러 닦았다.
둘 중 하나도 아니고, 두 사람을 동시에 떠올리면서 이런 생각들을 했단 걸 알면 대체 얼마나 실망할까? 그걸 생각하니 조금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뭐 그도 장성한 남자고, 머릿속으로야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자유라지만…그래도 조금 양심에 찔리긴 했다.
“후우….”
그것을 간신히 가라앉히고 씻고 나온 천후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으로 들어왔다. 둘이서 쓰는데도 역시 큰 트리플 베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천후는 그 위로 붕 하고 뛰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침대에 몸을 묻은 천후는 문득 그날 했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돌아오면……저번에 하다가 멈췄던 거…계속 하자?’
“으…아아아! 뭘 또 그걸 생각하고 앉았냐? 그걸 또 그래서 내가 내입으로 말하시게요?”
쿵쿵쿵. 매트리스를 주먹으로 두드리며 얼굴을 묻은 천후는 얼굴을 붉혔다. 일주일간 셀레나가 찾아올 때마다 그걸 어떻게 말해야할지 입에서 굴리다 만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땐 그냥…정말 동기부여 해주려고 해본 말이겠지? 그런 걸 거야. 천후는 애써 머릿속을 맴도는 그 말을 지워냈다. 그러다가 문득, 뭔가를 떠올렸다.
“어? 근데 희주 씨는 어디 갔지?”
그녀는 보통 그의 곁에서 한사코 떨어지지 않았다. 자택에 있는 경우에도 그건 마찬가지여서, 그가 어디에 가있던 그녀는 근처에 있었다.
그런데 씻고 온지도 꽤 지났는데 그녀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천후는 의아해져서는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그 때였다.
“주인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똑똑하고. 작은 노크소리와 함께 언제나의 감정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행동에 천후는 더더욱 의아해졌다.
이 방은 그와 희주가 함께 쓰는 공동의 방이었다. 여기에 들어올 때 그녀는 굳이 노크를 하지 않는다. 첫날부터 그러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노크라니?
“네. 들어오세요.”
그래도 오래 기다리게 할 순 없는지라, 천후는 금세 생각을 지우고 승낙했다. 그와 동시에…반쯤 흐트러진 가운 차림의 희주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
꿀꺽…. 절로 침이 넘어가버린다. 첫날 이후로, 그녀는 천후와 함께 잠을 자더라도 저 가운을 끈으로 잘 여몄었다. 그런데 오늘…지금 이 순간은 이미 허리끈이 반 쯤 흘러내릴 정도로 풀려있었다.
머리카락 역시 촉촉하게 젖은 채 풀어져 만져달라고 속삭인다.
완전한 백옥에서 약간 더 색이 더해진, 연분홍빛 띈 양 볼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희, 희주 씨?”
깜짝 놀라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희주는 일언반구 하지 않고 오히려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러자…문 쪽에서 차박 차박 하는 맨발로 장판을 밟는 소리가 나며 또 한명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웨이브 진 금발의 여성.
“셀레나?”
“…….”
천후의 놀란 목소리에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숙인 체 방문을 잠갔다. 그리곤 마찬가지로 반쯤 풀린 가운의 벌려진 부분을 살짝 가리면서, 희주와 함께 침대에 올랐다.
“아? 뭐, 뭐하는 거야, 셀레나!”
말하는 것이 무색하게, 둘은 천후의 양쪽으로 다가와 그의 팔을 하나씩 나눠서 감싸 안았다. 물컹하고…팔에 감싸이는 촉감에 천후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셀레나는 살짝 물기 머금은 목소리로 그를 올려보며 반들거리는 작은 입술을 열며 속삭였다.
“…약속, 했었잖아?”
……가라앉혔던 것이 그대로 치솟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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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숙함의 제곱으로...
내일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