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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50화 (50/324)

50화

세간은 경급 디제스터 건으로 이래저래 시끄러웠지만, 천후는 다른 쪽에 신경이 가있었다.

“셀레나. 뭐 좀 물어볼 게 있는데….”

“아. 아아아아∼. 미안. 나 좀 일이 있어서! 나중에 이야기 할래?”

“…….”

며칠 전. 그…조금 부끄러운 일이 있었던 그 날 이후로 셀레나가 그를 피해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좁다란 사무실인지라 피할 곳이라곤 있지도 않은데 그녀는 극구 방 안으로 들어가거나, 지금처럼 말을 걸면 밖으로 나가버리곤 했다.

“왜 저런대….”

어떻게 기껏 말을 걸어도 더듬대며 얼굴도 마주보지 못하고 대답하기 일쑤였다. 덕분에 그녀와는 그 뒤로 조금 어색한 관계가 되어버렸다.

“조금 지나면 다시 괜찮아질 겁니다.”

“그래요?”

“네. …주인님은 조금 더, 여자 마음을 생각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

그냥 보통 사람 마음도 잘 모르는데 여자마음을 생각하라고 한들. 뒷머리를 벅벅 긁은 천후는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아…. 정말 물어볼 게 있었는데.”

“꼭 필요한 거라면 제가 듣고서 전해드리겠습니다.”

희주는 조심스레 자신의 왼 가슴께에 손을 가져간 그를 올려 봐왔다. 그녀는 그날 이후에도 여전해서, 혈관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희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올려보고 있었다.

이렇게 내려 보고 있으면, 저 얼굴에 어떻게든 생기가 돌게끔 하고 싶단 생각을 하고 만다. 그리고 이제는 그 방법도 알고 있다.

발간 입술이 탐스럽다.

“주인님?”

자기도 모르게 자기 입술을 핥았던 천후는 다시금 물어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퍼뜩하고 정신을 차렸다.

“아. 죄송해요. 잠깐 딴 생각을 하느라. 무슨 말 하고 있었죠?”

“셀레나에게 물어볼 게 있다면 전해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아. 그거였죠. 음…. 사실은 제가 이번에 첫 월급을 받잖아요. 그래서 선물이나 좀 돌릴까 하는데. 뭐가 받고 싶은지 물어보려고 했거든요.”

“…….”

깜빡. 깜빡. 느린 속도로 흑진주 같은 검은 눈동자를 가렸다가 드러냈다 한 그녀는 아주 살짝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주인님. 그런 것은…직접 고르셔서 주시면 더 기뻐할 겁니다.”

“네? 아니, 그래도 전 셀레나가 뭘 좋아하고 그런 것도 잘 모르는데.”

“그래도 괜찮습니다. 이런 것에 중요한건 마음입니다.”

그런가? 그녀가 말하니까 왠지 이상하게 그럴싸하게 들린다. 고개를 끄덕인 천후는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 물었다.

“그럼…희주 씨 것도 물어보면 안 되나요?”

그의 말에 그녀는 살짝 닫혀있던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들어 검지를 자신의 입가에 가져갔다.

“네. 비밀입니다. 직접 생각해주세요.”

“…….”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아. 이 사람은 정말 이럴 때 보면 확 얼굴을 내거로 덮어버리고 싶다. 저 손가락을 치워버리고 싶어. 천후는 근질근질해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이상한 거 사와도 실망하지 마세요?”

그가 자신 없는 태도로 말하자, 희주는 살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할 겁니다.”

“윽.”

언제나 YES일색이던 그녀답지 않은 대답에 천후가 당황했지만, 그녀는 물러나지 않고 조용히 입을 달싹였다.

“그러니까….”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덩치에 안 맞게 당황해 움츠러든 그의 양 어깨에 손을 올려 펴주며 말을 맺었다.

“잘 생각해서 결정해주세요.”

“…넵.”

왠지 조련당하는 느낌인데. 그런데도 기분이 안 나쁜 게 참 신기하다. 고개를 깊이 꾸벅인 천후는 잘 안돌아가는 머리를 풀 회전시키면서 사무실을 나섰다.

*

천후가 첫 월급으로 받은 돈은 1억이 넘었다. 여기에 영천후는 안 그래도 혼자서 뭘 사본 적이 없는 놈이다. 이 두가지 요소가 퓨전하자 완전히 금전감각을 상실한 그의 입에선 이런 혼잣말이 나오고 있었다.

“음…. 예산을 한 5천만으로 잡으면 되나?”

희주랑 셀레나에게 하는 선물이니까 이 정도는…. 멍하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핸드폰에서 메시지 수신음이 울렸다.

<한 명 당 최대 50만원 내외로 생각해주세요. 저희들이 받고 싶어할만한 선물은 그 정도 선에서 거의 다 구매할 수 있습니다.>

“…….”

혼잣말을 듣기라도 한 듯이 도착한 메시지를 보고 천후는 흠칫 놀라서 사방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희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으음. 50만원이라. 그 정도면 뭘 살 수 있지?”

내심 차나 뭐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있던 천후는 골치가 아파졌다. 50만원이면 옷 살 수 있나? 그런 기본적인 개념조차 잡히지 않은 그는 상가 입구 벽에 기대서는 끙끙하고 혼자 머리를 싸맸다.

그 때였다.

“음? 자네는.”

“?”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천후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챙이 넓은 대나무 삿갓을 쓴 여성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후는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하다가, 그녀가 입고 있는 푸른 색 도복을 보고…그리고 도저히 그런 남자 옷으로도 숨겨지지 않는 바스트를 보고서는 그녀를 기억해냈다.

“어. 안녕하세요. 으, 죄송한데 성함이…….”

“하하하. 이강호. 이강호다. 너무하잖나? 영천후. 선배 이름도 기억 못하다니.”

쾌활하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그녀는 삿갓을 벗으며 자신의 얼굴을 완전히 드러내보였다.

어디 청학동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길게 땋은 댕기머리. 이마를 훤히 내보이고 있음에도 작달만한 얼굴이 아름다운 그녀는 감정을 전혀 숨기지 않아 크게 웃고 있었다.

보통 여자들은 미간이나 입가에 주름이 질까봐 감정표현을 자제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녀는 전혀 그런 것을 숨기지 않는데도 미운 점을 찾기 어려웠다.

말짱하게만 하고 다닌다면 길가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만한 미인일 텐데…. 물론 지금도 한 몸에 받고 있긴 하지만 그건 해괴하다는 시선이니 의미가 전혀 다르다.

볼 때마다 아까운 사람이다. 잠깐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던 천후는 그녀가 서글서글 웃으며 반응을 기다리는 모양새이자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죄송해요. 제가 좀 기억력이 나빠서….”

“하하. 괜찮다. 하루밖에 못 봤으니 그럴 수도 있지. 중요한 것 하나만 기억하면 돼. 자. 나를 어떻게 불러야 한다고 했는지는 기억나겠지?”

꾸우욱. 그녀는 천후의 어깨에 짚은 손에 힘을 주며 은근히 물어왔다. 여자치고 장신이어서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악력이 상당…아니 굉장하다. 어깨가 쥐여 짜이는 것 같다. 그 기세에 침을 꿀꺽 삼킨 천후는 조심스레 답했다.

“기억나죠. 강호…형.”

“응! 응! 좋아. 아주 괜찮은 후배가 들어왔군. 하하하!”

탁탁탁.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그녀는 그의 어깨를 부서져라 두들기며 좋아했다. 한참을 그렇게 웃어대던 그녀는 조금이 지나서야 진정했는지 웃음 지으며 물어왔다.

“그런데 이런데서 뭐하는 거냐? 사무실에 들어가지 않고.”

“아. 그게….”

이걸 말해도 되려나? 천후는 잠깐 고민했지만, 정말 궁금한지 강아지처럼 말똥말똥한 눈으로 올려보는 그녀를 보고서 마음이 기울었다.

어찌되었던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렇게 생각한 천후는 사정을 설명했다.

“오오. 첫 월급 선물! 으음. 그런데 굳이 사원들에게 돌릴 필요가 있나? 커피나 사면 될 것 같다만.”

“그게….”

이걸 어떻게 말해야하나 천후가 막 고민하려고 하자, 강호는 다시 그의 어깨를 탁탁 치면서 웃었다.

“하하하. 아니다, 아니야. 생각해보니 남자라면 그 정도 배포는 있어야지!”

“…….”

이 사람 머릿속 남자의 정의는 뭔가 좀 잘못된 느낌이 드는데. 하지만 그걸 말했다간 또 울기 직전까지 화를 내겠지? 입을 꾹 다문 천후는 그냥 그녀가 알아서 지레짐작하도록 놔뒀다.

그동안 천후에 대한 뇌 내 평가치를 올리기라도 한 건지, 왠지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올려본 그녀는 씨익 하고 웃으며 말해왔다.

“그럼 같이 가볼까? 사실 나도 귀국선물을 사러갈 생각이었거든.”

“어? 괜찮으시겠어요? 사무실 들어가 보시려고 한 거 같은데.”

놀란 천후의 반문에 그녀는 찬찬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원래는 셀레나에게 얼굴이나 비추고 다녀오려고 했는데 사무실에 없다니 됐다. 이럴 때 후배의 도움이 되는 것도 직장 선배의 보람이지.”

그렇게 말하며 혼자 응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움직임에 맞춰서 댕기머리가 춤을 춘다. 그걸 보고 잡아 당겨보고 싶단 마음이 드는 걸 꾹 참은 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형.”

“∼∼.”

천후가 마지막에 입에 담은 그 단어가 그렇게 좋은 걸까? 온 몸을 바르르 떨며 홍조를 띄운 그녀는 발랄한 발걸음으로 앞서 걸어가, 도로까지 나가 택시를 잡았다.

그리고선 뒷자리 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탁탁 치며 외쳤다.

“자. 타라, 타.”

“…….”

저렇게 좋아하니 도저히 누나라고 부를 수가 없구만. 이래도 되나? 천후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그녀가 권하는 자리로 향했다.

*

“자고로 선물은 먹는 게 남는 거다.”

그녀를 따라 인근 백화점에서 내린 천후는 순식간에 카트 요원으로 전직 당했다. 그를 지하 식품코너로 끌고 온 강호는 좀 신기한 과일이나 먹을 것이 있다 싶으면 그때마다 카트에 집어넣었다.

“자, 잠깐만요, 선배님. 암만 그래도 첫 월급 선물로 먹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응?”

“받는 두 사람 다 여자잖아요. 좀 생각해줘야….”

“하하. 걱정마라. 여자라고 먹는 걸 싫어하진 않아.”

손을 살살 저으며 대답하는데, 그것만으로도 푸짐한 옷감 너머 흔들리는 뭔가가 느껴져 신빙성을 더한다. 덕분에 천후도 잠깐 그럴싸한데 싶어 현혹될 지경이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뭐야. 마성 쩌네? 시선을 돌려서 간신히 제정신으로 돌아온 천후는 머리를 차갑게 식혔다.

물론 여자들이라고 먹을 거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다. 오히려 생각보다 환장을 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평소 때고. 이건 아니잖아?

애초에 먹을 거만 사갈 거면 뭐 하러 택시타고 백화점까지 온 거야? 근처에 대형마트만 두 갠데.

하지만 지금 강호의 기세는 심상치가 않다. 어느새 카트 중간 정도까지 먹을 것들이 쌓여있는 것을 본 천후는 놀라서 외쳤다.

“잠깐만요! 얼마나 사려고요?!”

“응? 이런 걸 끌고 왔으면 전부 채워 넣어야지. 모름지기 끝까지 못 채워 넣는 남자는 미움 받는 법이다.”

뭔 소리야! 그거랑 이건 전혀 다른 이야기잖아! 뭘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고 앉아있어?

천후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을 벌리고 있는 동안, 그녀는 이젠 완전히 흥미 본위로 눈에 보이는 것들 중 아무거나 주워 와서 집어넣기 시작했다. 더 이상 봐줄 수가 없었던 천후는 두리안을 봉투 3개에 가득 채우고 있던 그녀를 멈춰 세웠다.

“아니아니. 이건 아닌 거 같아요. 애초에 그 사무실에 이걸 어떻게 다 채워 넣게요. 냉장고 그리 크지도 않더만.”

“응? 흐으으음.”

천후의 말에 행동을 딱 멈춘 강호는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다가, 뭔가를 떠올렸는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냉장고를 사가면 되겠군!”

“…….”

참 통도 크셔라. 희주나 셀레나가 나를 보는 기분이 이랬을까…. 천후는 순간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끼며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일단…. 몇 개만 남기고 다시 되돌려놓고 오죠.”

“앗! 무슨 짓이냐! 중간에 하다 마는 남자는 미움 받는다!”

“아어!”

딱!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를 쥐어박은 천후는 거칠게 발걸음을 옮기며 물건들을 제자리에 돌려두고 왔다. 그 기세가 워낙 대단하다보니, 그의 의도를 알아 챈 백화점 직원이 다가와 카트를 아예 받아가 버렸다.

“아윽! 뭐하는 거냐! 내 귀국 선물이…!”

“시끄러워! 대체 저걸 누가 다 먹는다고? 몇 개만 골라서 가져와요!”

“윽….”

천후가 엄하게 외치자, 그녀는 쥐어 박힌 자리를 문지르면서 소심하게 항변해왔다.

“너, 너무한 거 아니냐? 그래도 내가 나이도 셋이나 위고, 선밴데….”

“그래서요?”

답지 않게 가느다란 눈으로 째려보자, 그녀는 어깨를 푹 수그리고는 고개를 떨궜다.

“아, 알겠다.”

조금 훌쩍이는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한 이강호가 저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지켜본 천후는 흥 하고 콧김을 내쉬었다.

왠지 큰 일한 느낌이 들어서 뿌듯했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모두 감사드립니다.

내일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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