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미스 엔체스터>
- 막간 -
천후가 세 명에게 첫 월급 선물을 하고 간 그날 밤.
미연은 자기 방 침대에 걸터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그것은 잠이 들기 전에 잠시 졸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결국 원로들이 뭔가 일을 저지를 것 같군요. 피곤하게 됐네요. 끈질긴 작자들이니.>
<예상했지만 정말 짜증나는군.>
머릿속에서 오늘 오후에 만났었던 두 남자들의 염화가 울려 퍼졌다. 염화念話, 텔레파시를 통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염화는 확실히 안전한 거 맞나요?>
<내 마법실력이 썩은 게 아니라면.>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 믿어보죠.>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미연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전 세계에 70명도 되지 않는 S랭크 마법사 주도의 텔레파시다. 동 수준의 마법사가 이 인근에서 작정하고 대기하고 있다면 모를까…. 유그드라실에 설치되어있는 마법도구 정도로 뚫을 수는 없으리라.
유그드라실 자체야 SA랭크 마법사들이 만들어낸 기적이지만, 그 내부에 들어차있는 기자재까지 전부 그들이 만든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유그드라실 내의 정보 수집은 그렇게 심하지 않아. 천후한테만 과도하게 집중되어있었을 뿐이지.>
<그랬죠…. 아까 일로 제가 너무 예민해져 있었나 봐요.>
미연이 그렇게 안심한 투로 말하자, 그것을 고인규가 받았다.
<뭐 그리고 솔직히 저희 셋이 한통속이란 걸 유그드라실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굳이 이 오밤중에 염화로 이야기해야하나 싶긴 하지만. 넘어갈까요?>
<…굳이 말해줘서 고맙네요.>
이 남자. 정말 하는 행동이나 말이 가끔씩 짜증난다. 하지만 그는 미연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라 예측하고 더욱 즐기고 있으리라. 그런 성격이니까.
예상대로 한차례 낮은 웃음을 염화로 보내온 고인규는 곧 진지한 태도로 일변했다.
<그나저나…. 천후도 참 어지간하군요. 자신의 반평생…아니 기억이 10살부터니까 평생이네요. 평생 동안 가둬놓고 학대한 곳에 뭐가 좋다고 인사씩이나 오는지. 저라면 바로 인연을 끊었을 텐데.>
<그건….>
<그렇잖습니까? 말이 연구지. 바늘길이가 손가락 세 마디만한 주사를 거의 매일 맞고, 취미생활이라곤 대 디제스터 격투술을 익히는 것뿐이었잖아요? 이것도 마땅한 상대가 없어서 반은 자기류고. 그 외엔. 뭐. 명상? 석가모닙니까? 명상이 취미게?>
<…….>
<거기에 디제스터 퇴치 시에는 서포터, 오퍼레이터만 붙여줬지 파티는 구성해주지 않았었죠. 죽으라고 내려 보낸 거에서 다 살아온 거지, 그건 사실. 정신과 주치의로서의 소견은 말하기도 싫습니다.>
이 말엔 다른 둘도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원로원이 발의권만 남았다고 한들…아직도 그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이들의 수는 많다. 그들의 의견을 모두 묵살할 수는 없었다.
덕분에 늘 천후에 대한 환경 개선은 더디기만 했다. 그들은 정말 최소한씩만 양보해줬고, 천후는 그에 만족해야했다. 그 중의 일부는 그를 죽음의 길로 유도하는 것도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전부 극복해왔다.
<솔직히 전 이번 투표결과가 잘 나온 것도 좀 불안합니다. 이렇게 순순히 내려 보내준 것 자체가 이상하다고요.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습니다.>
때문에 어찌어찌하여 이번에 사회에 나가게 된 것조차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거대하지만 그래도 폐쇄사회인 유그드라실 내에서 일을 저지르는 것이 힘들어지자 좀 더 넓은 장소로 옮긴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다른 둘도 그의 말에 동의하는지 말이 없어졌다.
한참이 지나서야, 미연의 염이 전해져왔다.
<지켜줄 수 있을까요?>
평소에 그녀가 가지고 있던 드셈이 느껴지지 않았다.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최완은 굳은…그러나 단호한 기세로 대답했다.
<해봐야지.>
그래. 해 봐야지. 그가…자신과. 이 두 사람과. 유그드라실에서 자신을 인간으로 대해준 이들에게 고마움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한.
그것이 우리들의 속죄이리라. 그의 마음에 답해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리라.
무겁게 떨어진 그 말을 끝으로 염화는 끝났다.
“후우….”
한숨을 내쉰 미연은 손을 뻗어 그가 가져왔던 선물상자를 집어 들었다. 고인규의 말이 내내 가슴을 헤집었다.
그의 말처럼 천후나 내가…단숨에 인간으로서의 연을 끊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지가 않다.
그딴 엉망진창인 10년인데도. 추억은 남고. 기억은 소중해서 서로를 찾게 되고 만다. 천후가 10년간 꾸준히 성장한 점이 있다면 바로 그 부분이라고 미연은 생각했다.
인간으로서의 정을 가지게 된 것.
지금에 와서 보면 그것이 너무나 허술하고, 조금은 답답한 면도 없는 것도 아니지만….
10년 전.
악몽을 꾸며 아무렇지도 않다 말한 아이의 모습을 떠올린다.
지금.
악몽을 꾸면서도 괜찮다 말하는 남자를 떠올린다.
“…….”
살짝 웃고 만다. 남자라니. 장난으로 크네 어쩌네 했어도 그는 나에게 언제까지고 아이인데…. 몸만 큰 아이. 하지만 이번에 만났을 때, 살짝 향수냄새가 났었다.
여자향수 냄새.
“이젠 어른이려나….”
그렇다면 조금은…또 다른 변화를 맞이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미연은 그에게 받은 선물 상자를 열어서는 내용물을 꺼냈다.
“근데…이건 대체 무슨 의미이려나?”
빨간 속옷. 이미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내용물이 달라지는 마술은 일어나지 않는다. 미연은 곤혹스럽게 웃으면서 그것을 바라보았다.
<미스 엔체스터>
서울 중심가. 국내 내로라하는 정상 기업들의 비즈니스 빌딩들이 서로가 하늘을 가려보겠다며 줄지어 들어서있는 거리.
중앙선 대신 돌로 막은 틈에 흙을 쌓아올려 가로수를 심어놓아 조경을 살려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지만, 그 양옆을 지나다니는 운전자나 인도를 걷는 사람들의 표정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여력이라곤 티끌만큼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대한민국 워커홀릭들의 최대 전쟁터인 이곳의 한 빌딩.
가장 크지는 않지만,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외국계기업의 신축빌딩이었다. 그 안.
“오오….”
조명이 전부 꺼져 어두운 방 안. 하지만 불빛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쪽 벽면과 같은 너비의 스크린이 프로젝터가 내비치는 화면을 재생하고 있었으니까.
영화라도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화면은 중앙을 기점으로 대각선 네 방향으로 각기 다른 장면들을 비추고 있었다. 언뜻 보면 그것은 일종의 감시카메라로 촬영한 영상 같았다.
그 화면은 그리 선명하지도, 촬영대상에게 제대로 접근하지도 못한…영상물로서는 불합격 점수를 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대단하군….”
하지만 그것을 시청하고 있는 이는 무엇이 즐거운지, 그 불명확한 화면을 보면서 흥분된 목소리를 냈다. 그것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중앙화면을 제외한 네 방향의 다른 화면들에 노이즈가 생기며 검게 변했다.
그와 동시에, 화면이 선명해지며 중앙에 이상한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건물이나 언덕 높이를 넘어서는 크기의 디제스터. 텐타클 뱀파이어.
방금 전, B랭크 일리미네이터의 공격에 의해 산산조각 났던 그것은 보험으로 숨겨두었던 ‘나머지 절반’을 움직여 자신을 공격해오던 일리미네이터 셋을 전멸시켰다.
가지고 놀기라도 하려는 듯, 목숨은 붙여놓은 채 여자는 옷을 벗겨서 꿰뚫을 준비를 하고 남자는 쥐어짠다. 승부의 향방은 이미 결정됐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했을 때 이변이 발생했다.
먹구름 가득한 하늘. 거친 장대비 속에…. 어둠이 모인다. 모이고 모여서, 한줄기의 검은 불길로 화한다.
그것을 마주한 순간 디제스터는 다른 둘을 내던져버리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총력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통하지 않는다. 24명을 거의 리타이어 시켰던 그 강력함은 온데간데없이…흑암 앞에선 저항조차 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에게 조종당해 약점인 핵을 잡히고, 그대로 부술 수 있음에도 일부러 농락하듯 몸체를 전부 갈려버린 후 하늘로 내던져진다.
그리고…. 홍염이 치솟아 오른다.
“아아…. 몇 번을 봐도…굉장하군.”
발끝에서 무릎으로, 허리로, 어깨로, 그리고 팔을 뒤틀며 회전시켜, 주먹으로 힘을 전달시킨다. 그와 함께 뿜어져나가는 홍색 광선.
지구의 중력권을 벗어나 태양계 저편으로 날아간 그것은 서울 하늘에 일시적으로 오로라를 만들어내고서 사라져갔다.
그것을 발출한 이는 그 직후, 힘이 다했는지 뒤로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을 끝으로, 화면이 꺼지며 방 안에 불이 들어왔다.
“란님. 너무 여러 번보고 계십니다. 시력에 좋지 않습니다.”
“후후후….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자네는 모르겠나?”
개인 집무실로 보이는 방 안. 황금색용이 수놓인 검은색 차이나 드레스, 치파오를 입은 여성이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펼쳤다.
차가운 눈매. 하지만…눈동자 안쪽에선 희미하게 뜨거운 무언가를 피어올리고 있는 눈으로 자신의 위안을 걱정한 정장의 남성을 바라보자, 그는 그 시선을 황급히 고개 숙여 피했다.
“저는 그저 당주님의 건강을….”
“후후…. 시시한 남자로다. 하긴. 그게 그대의 일이지.”
부채로 입을 가리며 웃은 그녀는 이번엔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자신의 개인 집무실에서 허락도 없이 프로젝터 리모컨을 만져서 멋대로 화면을 다시재생하고 있는 남자가 있는 쪽으로.
“그럼 칠삼 오라버니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레이나드라고 불러달라고 했지 않습니까? 로자미아.”
본명을 불린 선글라스의 남자. 빌라이저의 베테랑 송칠삼. 가명 레이나드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선글라스를 고쳐 쓰며 대답했다.
“딱딱하군요. 몇 년이나 알고 지낸 사이인데. 란이라 불러주시죠.”
“오늘은 어디까지나 일관계로 온 겁니다. 그럴 순 없죠.”
레이나드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시선을 스크린으로 돌렸다. 방 안에 불이 켜져서 화면이 명확하진 않았지만, 이미 수십 번은 돌려본 영상이다. 이젠 직접 보지 않아도 얼마든지 머릿속으로 재생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보면 볼수록.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그가 그녀에게 들려줄 수 있는 답은 하나뿐이었다.
“그는. 영천후는 이 업계의 패러다임. 파워 밸런스를 완전히 뒤집어버릴 겁니다.”
그의 오랜 경험과 감으로…그가 뭔가 특별하다는 것은 만났던 첫날부터 눈치 채고 있었다. 쿼드라 콩가 전 이후. 그의 강화마법에 대해 미심쩍은 인상을 받은 그는 발품을 팔아서 강화마법이 주특기인 마법사들을 수소문해 찾았다.
그들이 내놓은 답은 한결 같았다.
C랭크 수준의 강화마법으로 디제스터와 정면 대결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라고.
물론 그 정도의 무술의 고수라면 C랭크 강화마법으로도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까지 압도적인 강함을 보여줄 순 없다고.
분명 여력을 숨기고 있다. 최소한 B랭크다. 그것이 레이나드가 내렸던 결론이었다.
그는 이것만으로도 패러다임을 언급했었다. B랭크가 슈퍼 극딜러네 어쩌네 해도…딜러는 딜러다. 경급 이상과 교전 시 풀 캐스팅은 똑같이 사용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는 다르다. 지연주문을 기반으로 버프를 걸고서 정면에서 싸울 수 있는 민첩성과 공격력. MMORPG에서 말하는 근딜탱, 혹은 회피탱이 가능한 존재. 불완전하지만 작금의 현실에선 그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그 가치를 따지기 힘든 존재가 된다.
국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경급 이상 레이드에 무조건 참가시켜야 할 정도로 귀중한 인재다. 아니, 이미 국내를 떠난 문제다. 그는 세계 전체에서 원하리라.
그런데 그 이상의 역량이 있었다. 아무리 낮게 잡아도 A랭크 이상. 그렇다면….
“국내에 A랭크이상의 일리미네이터가 전무한 이상…. 그는 이미 하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후후후…. 역시 사람 보는 눈, 가치를 판단하는 눈 하나는 정확하군요.”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말한 그녀는 이젠 부채로 오뚝한 코까지 슬금슬금 가렸다.
“그런데 지금 일리미네이터들 사이에선 무슨 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하셨는지?”
“…배척하잔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무시하자고.”
“미쳤군요.”
“미쳤습니다.”
단언에 단언으로 답한 레이나드는 천천히 몸을 돌려서 여자와 마주보았다.
“애초에 저는 그가 왜 그런 작은 곳에서 자신을 가둬두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로자미아….”
“란.”
“란…은 알겠니?”
자신의 이름을 나지막이 밀어붙여오는 기색에 결국 져주고 만 레이나드는 말을 놓으면서 쉬는 동안 줄곧 품고 있었던 의문을 털어놓았다.
란이라 자신의 이름을 밝힌 그녀는 찬찬히 부챗살을 엄지로 훑으며 말했다.
“첫째로는 자신의 힘을 제대로 휘두를 줄 모르기 때문일 테죠. 지금껏 그가 보였던 태도를 보면 그는 정말 세상에 갓 나온 병아리 같으니. 아직 자신이 어떤 입장인지 파악도 못하고 있을 터.”
“그렇더군.”
“그리고 둘째로는…. 정말로 착한게지요. 터무니없을 정도로.”
“…….”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여력이 있다 한들, 자기 심장이 꿰일 때까지 싸워야 하는 저런 사지에 들어왔을까.”
그 말에 레이나드는 과연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다시금 미소를 지은 그녀는 펼쳤던 부채를 탁 하고 접었다.
입가에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미소가 맺혀있었다.
“그러니 반드시 우리 사람으로 만들어야겠습니다.”
“쉽지 않을걸. 내가 한 제안도 그냥 튕겨 나왔어.”
“그거야 오라버니의 방식이 물렀을 뿐.”
딱 잘라 말한 그녀는 접은 부채 끝으로 자신의 입술을 꾹 눌렀다.
“저에게는 좀 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으니.”
“미인계는 통하지 않아. 트란제비야의 사장이 상당한 미인이더군. 이미 애인관계라는 소리가 있던데….”
“후후. 꼭 미인계를 말한 것은 아닌데…. 잠깐. ……트란제비야?”
그 이름을 들은 그녀는 살짝 아미를 찌푸렸다.
“트란제비야…. 트란제비야….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아.”
몇 번이나 되뇌던 그녀는 어느 순간, 번뜩 하고 눈을 뜨더니 지금까지 보였던 그 어떤 것보다 큰 미소를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치파오의 아랫단이 펄럭이며 허벅지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에 개의치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창밖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루셀이 있는 곳이군.”
엔체스터 콜로니의 CEO. 로자미아 엔체스터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쿠폰, 코멘트 모두 감사드립니다.
챕터 2 인물 등장은 대충 이 정도겠네요. 쨘쨘.
오늘 오후 즈음에 하나 더 올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