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천후가 완전히 회복하고, 유그드라실까지 한차례 들렀다 온 이튿날.
비로소 그가 완전히 업무복귀를 하게 되자, 셀레나는 그가 출근한 즉시 한 가지 작업에 착수했다.
그것은 바로 천후의 능력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
“응? 아니 또 뭘 그런 걸….”
직장에 자기 능력을 전부 고지하고서 산다는 것은 마음은 편하지만 사실 꽤나 골치 아픈 일이다. 남들보다 컴퓨터에 대해 조금 더 잘 안다고 AS 담당 직원 취급당하는 경우도 있는 판에 마법이야 뭐 두말할 여지도 없다.
천후 역시 처음엔 그녀가 워낙 닦달하듯 몰아붙이며 물어오자 말하기 꺼려했었다. 하지만 희주의 다음 말에 마음이 단박에 기울었다.
“말씀해주시지 않으면 저희는 또…주인님께 여력이 있는지도 알지 못하고 가슴 졸이며 지켜봐야합니다. 그건…도저히 견딜 수 없습니다.”
잔잔히 흔들리는 그 목소리를 듣자니, 자신이 정말 죽을 죄 지은 느낌에 자살의욕까지 무럭무럭 솟구쳐 올라올 지경이다.
도저히 버틸 수가 없다. 결국 그는 희주와 셀레나가 자신의 능력을 정밀하게 분석, 측정해보고 싶다는 요구에 응하고 말았다.
“그런데 우리 회사에 그런 거 측정할 방법이 있나?”
“그 부분은…. 아마 괜찮을 거야.”
“음?”
아마라니? 천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셀레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며 중얼 거렸다.
“욕심쟁이가 오기로 했거든.”
“욕심쟁이?”
“응. 디제스터 퇴치 기업을 취미삼아서 포켓머니로 운영하고 있는 애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을 들은 셀레나는 인상을 굳히면서 천후를 바라보았다.
“천후. 지금 문 열고 들어올 애가 무슨 소리해도 넘어가지 않기야?”
“응?”
갑자기 무슨 소리지? 그가 못 알아듣고 눈을 깜박 거리자 그녀는 입가를 우물우물 거리다가, 살짝 까치발을 들어서 그의 볼가에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꼬, 꼭이야!”
“…….”
멍. 얘가 왜 이럴까? 강호 팀이 사무실에 없었기에 망정이지. 있었으면 민망한 꼴을 보여줄 뻔했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로 불안해하는 기색이자, 천후는 볼가를 매만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알았어.”
그의 확답을 얻어낸 셀레나는 그제야 인상을 펴고는, 하아아 하고 심호흡을 몰아쉬며 걸어가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흑발을 올려 묶어서 비녀로 마무리한 미녀가 있었다. 조금 가늘게 뜬 눈에 재기와 함께 장난기가 묻어있는 여자였다.
그 아래로는 모란이 그려진 검은색 부채로 코와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부챗살 너머로 희끗희끗 비쳐 보이는 것만으로도 미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고개를 내리자 검은 색 치파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옷에는 황금색용이 봉긋이 솟아오른 가슴을 물어뜯을 것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것을 시작으로, 그녀의 몸에 꽈리를 틀듯이 감아 발목에 있는 꼬리까지 수놓아져 있었는데 당장이라도 옷에서 벗어나 튀어나올 것처럼 역동적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옆트임.
보통 치파오라고 해도 옆트임은 무릎이나 허벅지 중간 부분에서 끝나기 마련인데, 그녀가 입은 옷은 마치 컨셉 모델용이나 성인업소용처럼 거의 골반 높이까지 트여있었다.
덕분에 그냥 가만히 서있는데도 허벅지 선 전체가 노출되고, 그 뒤로 둥근 곡선을 그리는 둔덕을 얇은 천 하나가 간신히 매달려서 가리고 있는 형국.
게다가 아름다운 각선미가 어울리자 더 없이 색정적이라 사람들의 시선을 빨아들인다.
차를 타고 온 게 아니라 길거리를 걸어 다녔다면 경찰들에게 치녀 혐의로 잡혀가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천후 역시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몇 초나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막상 부끄러운 복장을 입은 그녀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지, 즐거운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 루셀. 오랜만이군. 1년만인가?”
“…셀레나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로자미아.”
“후후후후. 거래가 박하군. 네가 나를 란이라고 부른다면 생각해보마.”
살랑살랑. 눈앞에서 부채를 흔들며 대답한 그녀는 살짝 몸을 옆으로 기울여 사무실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정겨운 곳에서 일하고 있군.”
“윽…!”
이 기집애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눈은 가늘게 뜨고 웃고 있는 게 전혀 정겨워 보여서 한 말 같지가 않다.
하지만 그녀. 로자미아는 셀레나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있든 어떻든 신경조차 쓰지 않고 그녀를 지나쳐 사무실 안쪽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그래서. 네가 말한 그 사람은 어디 있지?”
“야! 잠깐만!”
당황한 셀레나가 그녀를 잡으려고 했지만 로자미아는 가볍게 그녀의 손길을 피해내고는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천후를 발견하자 얼굴에 화색을 띄더니, 착하고 부채를 접으며 다가와 손을 잡아왔다.
“오. 자네가 영천후로군. 반갑네. 정말 보고 싶었어.”
“네?”
뭐지, 갑자기? 하지만 놀라기엔 일렀다. 그녀는 천후의 손을 양손으로 쥐더니, 자신의 가슴께로 끌고 와 꾹하고 품으며 몸을 밀착해온 것이다.
화악. 은은한 향수냄새. 샴푸냄새가 코를 통해 들어오자, 단숨에 남성으로서의 반응이 찾아온다. 밀착한 몸으로 그것을 느낀 것일까? 그녀는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반갑네. 앞으로 나를 부를 땐 친란…란이라고 불러주지 않겠나?”
“야! 친란!”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셀레나가 뛰어와서 뜯어내려들자, 친란이라 스스로를 밝힌 여성은 저항하지 않고 천후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우후후후후.”
하지만 얼굴만은 여전히 요염한 미소를 머금으며 여전히 천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
얼마 후.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서야 진정한 셀레나를 앉히고 물어본 결과 여러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친란은 엔체스터 콜로니의 CEO. 그리고 거대기업 엔체스터의 수장 아마니 엔체스터의 증손녀라고 했다. 셀레나는 어쩌다보니 개인적인 사정으로 어릴 적부터 그녀와 알고 지내왔다고 한다.
그녀는 서양인인 아버지와 중국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었는데, 모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외모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가문의 이름을 등에 업어야할 때는 ‘로자미아 엔체스터’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개인적인 연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친란’이라 불리는 것을 더 좋아했다.
어느 정도 나이가 차기 전에는 부친 쪽에서 연락이 두절되었었기 때문이라고도 지나가듯이 밝혔다. 사춘기에 접어들어서야 다시 접촉해왔다고.
“내 소개는 이쯤이면 됐겠지. 그나저나 표정이 꽤 좋아졌군, 셀레나.”
“으, 응? 그래?”
“그럼. 정태 오라버니가 돌아가신 이후론 늘 어두웠잖나? 아아. 정태 오라버니는 좋은 사람이었지….”
친란은 그녀의 오빠를 떠올리며 가만히 자신의 몸을 스스로 끌어안았다.
“그 분만큼 나를 평범한 여자아이로 생각해준 사람은 없었는데…. 그렇게 될 줄 알았으면 타계하기 전에 한 번이라도 안겨볼 것을. 늘 아쉽군.”
“…너 그때 열다섯 살이었거든?”
만날 때마다 듣는 소리긴 하지만, 늘 엄한 말을 하는 여자다. 하지만 친란은 오히려 정색하며 대답했다.
“무슨 상관이지? 서로가 알 것을 알고 있고, 마음이 통해 합의하에 임한다면 아무 문제없지 않나? 야박한 한국 법으로도 합법으로 알고 있는데.”
“아니. 음…. 그렇긴 한데….”
생각해보면 유독 어릴 적 친란은 오빠에게 달라붙곤 했었다. 정태는 그냥 그것을 어린애의 마음이라 생각했는지 가볍게 받아주곤 했었지만….
친란은 어린 마음에 정말 사모했었는지 오빠가 죽은 지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종종 떠올리며 지금처럼 아쉬워하곤 했다.
한편,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희주는 친란을 바라보며 느릿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음이 맞는 분을 만나게 되는군요.”
“음?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물론입니다. 마음이 통한다면…나이 차이 같은 것은 의미 없는 것.”
“그렇지? 오라버니라면 분명 나를 상냥하게 다뤄줬을 것이야. 결코 변절자처럼 굴지 않았을 테지.”
“아∼. 제발.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 이야긴 좀 그만하자.”
죽은 사람 두고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참 대응하기 힘든 일이다. 게다가 희주가 거들고 나서니 친란이 더욱 자극을 받아 마구 폭주하자 셀레나는 그것을 한차례 끊으려 들었다.
하지만 친란은 더욱 깊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후후. 야박하군, 셀레나. 자기만 좋은 남자를 구했다고 너무 박하게 구는 거 아니냐?”
“무, 뭐?”
친란은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자, 가만히 고개를 돌려 천후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그녀는 접은 부채 끝으로 아랫입술을 살짝 누르며 입술을 달싹였다.
“후후. 못난 우리 오라비의 청혼을 몇 번이나 거절하더니 좋은 남자를 잡았군.”
“호오.”
“응? 청혼?”
“!!!!”
셀레나는 다른 두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화들짝 놀라며 친란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 반응을 지켜보는 것이 즐거운 건지 깊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으…. 하필이면 천후 앞에서 그 얘길!’
속이 다 탄다. 보아하니 천후도 상당히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낸 셀레나는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더듬더듬 목소리를 냈다.
“벼, 별거 아니야. 란 네 오빠가 있는데…. 내가 아주 어렸을 적부터 계속 결혼해달라고 했었거든. 전부 거절했지만….”
“그래?”
“그, 그렇다니까. 그 사람이랑 나랑 나이차이가 몇인데 그걸 오케이 해. 나이 아니더라도 별로 내 취향도 아니고….”
“뭐. 우리 오라비가 지금 서른셋이니 13살 차이면 좀 많긴 하지.”
“좀이 아닌데?”
뭐야. 그거. 세간에서 말하는 로리콘? 페도필리아? 그런 건가? 셀레나가 10살 때 스물 셋이었다는 거 아냐? 제정신인가?
“후후. 동생인 내가 보기에도 꼴불견이었는데 잘 되었지.”
“그렇군요. 정말 보기 흉합니다. 어린 여자에게 집착하는 남자라니.”
“…아까 둘이서 나이차는 상관없다느니 하지 않았어요?”
갑자기 전혀 달라졌는데? 하지만 희주와 친란은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 경우 어린 쪽의 마음이 어떤가가 중요합니다.”
“그렇지. 나이 먹은 작자가 어린아이에게 먼저 발정하는 것은 보기 흉한 흉물일 뿐. 하지만 어린 마음에 연심을 가지는 것은 받아줄 수 있어야하는 게지.”
그런 건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천후는 전혀 모르겠단 눈으로 셀레나를 바라보았다. 셀레나 역시 어깨를 으쓱 하는 게 별로 동의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친란과 희주는 서로 손을 꾹 맞잡더니, 말 한마디 없이 핸드폰 번호를 교환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어지간히 마음이 맞은 모양이었다.
“뭐…. 하여간 그 건은 됐어. 오늘은 그 이야기 하자고 온 거 아니잖아.”
“아아. 그랬지. 그래. 우리 셀레나가 오랜만에 연락해 와서 무슨 소리를 하나 좀 들어볼까?”
친란은 새로운 친구가 생겨 기쁜 마음에 즐거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셀레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잠시 천후의 눈치를 다시 한 번 봤다.
그 시선을 인식한 천후는 왜 이러나 싶어서 눈을 깜빡이다가, 처음 셀레나가 꺼냈던 말을 기억해냈다.
‘걱정하고 있는 건가?’
별로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천후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녀를 안심시켜주는 의미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식탁 아래쪽으로 손을 잡아주었다.
그러자 셀레나는 표정을 밝아져서는, 조금 들 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친란. 다른 게 아니라…천후도 강호 씨처럼 당분간 너희 회사 시설 좀 사용하게 해주면 안 될까?”
“음? 뭐야? 겨우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눈치를 봤던 건가? 이거 참…. 나도 박하게 보였나보군.”
셀레나의 물음에 친란은 오히려 약간 불쾌해졌는지 고운 아미를 찡그렸다.
“얼마든지 써라. 아니. 그런 건 앞으로 물어보지도 마라. 너희 회사 직원이 이후에 몇이 되던 그냥 써도 상관없으니. 대체 나를 뭐로 보는 거냐?”
어조가 격해진 게 정말로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셀레나는 당황하며 손을 흔들었다.
“잠깐 잠깐. 진정해! 본론은 따로 있어.”
“뭐냐? 또 시시한 이야기를 하면 그냥 돌아가겠다. 대신 너에게 조금 실망을 할지도 모르겠군.”
“으윽….”
순식간에 싸늘하게 돌변한 태도에 셀레나는 몸을 움츠렸다. 친란은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서 사적으로도 가까운 편이었지만, 이렇게 공적인 이야기가 오갈 때에는 자신에게 걸맞은 이야기가 아니면 진심으로 화를 내곤 했다.
하지만 아마도…. 이번 이야기에는 만족을 하겠지. 셀레나는 내심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실은…천후의 능력측정을 좀 정밀하게 해보고 싶은데….”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을 들은 친란의 눈이 여느 때와 다르게 커졌다가 다시 가느다래졌다. 그리곤 부채를 촤악하고 활짝 펼쳐 얼굴을 가리며 속삭였다.
“그건…. 꽤 흥미가 동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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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그럼 내일 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