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사무실을 나온 그들이 향한 곳은 엔체스터 콜로니 본사였다.
“마력랭크 정밀 측정은 아무래도 유그드라실 쪽 장비가 필요하거든. 우리들이 가지고는 있지만 대형이라 이쪽으로 가져올 수가 없었다.”
“가지고 있다고? 그걸 유그드라실에서 줬어?”
“돈을 조금 썼지. 그러고도 사용할 때마다 인가를 받아야 해서 내 입장에서는 귀찮지만.”
친란의 말을 들은 셀레나의 얼굴이 약간 핼쑥해졌다. 희주 역시 조금 다시 봤단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력랭크 측정 장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것은 즉 ‘마법사를 판별할 수 있는 장치’라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그드라실 측에서는 이것을 국가에도 내놓지 않는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있다니?
“대단하군요. 재력만으로 구할 수 있는 장비가 아닌데….”
“후후후. 과찬이군. 자네들도 내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 부탁한 게 아니었나?”
“으으음….”
사실 셀레나로선 동일한 수준의 마법사와 비교분석이나 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입에 담으면 부끄러우니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이야기하는 동안 목적지에 도착한 그들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내리자마자 보이는 것은 텅 빈 공간이었다. 빌딩의 한 층을 완전히 비워놓은 것 같았다. 흰 바닥에 기둥들. 그리고 중앙의 원형의 문(門)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었다.
문이라고 해도 무슨 닫혀있는 것이 아니라, 기둥처럼 박혀있는 그런 문이다. 홍살문이나, 일주문 같이 그냥 통과할 수 있는 문.
“꽤 오래된 타입이네요?”
“최신 것은 아무리 졸라도 주질 않더군.”
그것이 마력랭크 측정 장치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본 천후는 그것의 옆면을 만져보다가 슥 지나쳐봤다.
<당신의 마력랭크는 랭크 F. 랭크 F입니다.>
그러자 여지없는 랭크 F 보고가 흘러나왔다. 무슨 기계적인 반응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특별한 광채 같은 것도 나오지 않았는데 순식간에 판별을 마친 것이다.
“성능엔 문제가 없으니 괜찮을 거야. 이 방은 일리미네이터들의 위력시험용으로도 사용되는 곳이니까. 자네의 힘을 얼마든지 발휘해도 괜찮네.”
“음….”
그녀의 말에 곰곰이 생각한 천후는 셀레나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런데…정말 괜찮겠어?”
“응?”
“아니. 음….”
거기까지 말한 천후가 슬쩍슬쩍 친란 쪽으로 눈짓을 보냈다. 그녀에게도 모습을 보여도 되는지, 설명을 해도 되는지에 대해 묻는 사인을 보낸 것이다. 그것을 파악한 셀레나는 아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친란이라면…. 같이 들어도 상관없어.”
“그래?”
“응. 입도 무겁고…. 신세진 것도 있고.”
흐음. 그런가? 고개를 끄덕인 천후는 완전히 친란과 눈을 맞췄다. 그러자 그녀는 부채를 들어서 얼굴을 가리며 장난기 묻어있는 목소리를 냈다.
“아이야~. 그렇게 뚫어져라 바라보니 부끄럽군.”
“…….”
정말 믿어도 되는 건가? 천후가 의심스런 눈으로 바라보자, 그녀는 부채를 착하고 접고는 검지 대신 부채를 자신의 입가에 가져왔다.
“후후후. 걱정 말게. 나는 오늘 여기서 아무것도 못 본 거네. 측정은 했지만 누굴 측정했는지도 몰라. 아. 대신 ‘보고’가 올라올 수도 있으니 내 ‘개인적인’ 방침은 좀 영향을 받을 수 있겠지.”
저렇게까지 말하니 더 할 말이 없었다. 하긴 부탁하러 온 입장에서 이것저것 요구를 불려가는 것도 웃기는 이야기라 천후는 이쯤하고 납득하기로 했다.
“뭐…. 셀레나가 괜찮다니 상관없겠죠. 일단…그럼 제 능력에 대해서 좀 자세하게 말해볼게요.”
거기까지 말한 천후는 천천히 입고 있던 셔츠를 벗었다. 그것을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희주가 회수해가자 천후는 감사를 표하고는 셀레나를 바라보며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첫째. 내 기본 마력은 내가 스스로 말한 대로 D랭크야. 이건 D랭크 수준의 최대위력 주문을 사용하는데 6초가 걸리기 때문이야. 마력 완전 개방.”
그렇게 말한 천후는 마력 개방 시동어를 외우고서 측정 장치를 통과했다. 그러자 측정 장치에선 랭크 D를 외쳤다.
“이 상태의 나는 다른 마법사와 큰 차이가 없어. 강화마법이 주특기 계열. 역상성 계통은 탐지계열. 탐지계는 내가 A랭크 주문을 사용해도 셀레나보다 못할 거야. 그 외엔 다 고만고만해.”
“응. 여기까진 알겠어.”
“그래. 중요한 건 여기서 부턴데….”
그렇게 운을 땐 천후는 영창과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풀 캐스팅의 6초가 아니라, 거의 1분 가까운 시간을 들여 중얼거리고 나서야 캐스팅을 마친 그의 몸에서는 은은한 아우라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랭크 C를 보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1분 동안 캐스팅을 하면 C랭크 주문을 사용할 수 있어. B랭크는 1시간. A랭크는 하루. S랭크는 시도해본 적 없어. 워낙 오래 걸리니까. 유그드라실에서는 이걸 롱 캐스팅에 의한 스펠 어센션이라고 불렀어.”
“흐음….”
설명을 듣고 있던 친란은 자신의 입술을 톡톡하고 부채로 두드리다가 입을 열었다.
“미묘하군. 그냥 그것뿐이라면 없는 것보다 나은 정도의 능력인 것 같은데.”
“하하. 맞아요.”
그녀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천후는 조용히 입을 달싹였다.
“스테이터스 강화 주문 봉인 해제.”
그 순간 그의 몸에서 무색투명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평소 파급 디제스터와 싸울 때 보였던 윤곽선이 잘 잡히지 않을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이것만해도 그의 신형이 흔들려보였다.
“그래서 나는 지연주문을 사용하지. 사전에 주문을 외워놓고 상황에 따라서 시동어로 해제시키는 식으로.”
“호오….”
고개를 끄덕인 친란은 조심스레 그의 몸에 손을 가져갔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는 그의 몸은 그만큼이나 뜨거웠다.
“하지만 지연 주문은 유지비가 들 텐데.”
“그게 세 번째. 노 코스트 스펠 세이브. 난 지연주문을 유지하고 있는데에 유지비가 들지 않아.”
“과연…. 하지만 그럼 방출계 마법을 100개쯤 세이브 했다가 쏘면 그만 아닌가?”
“유지비는 안 들지만 유지할 수 있는 지연주문의 최대 수는 한계가 있지. 강화마법이 아니면 그 세이브 슬롯 수를 많이 먹어. 그래서 방출마법을 한꺼번에 저장해놨다가 푸는 식으로 쓰기는 조금 힘들지. 주특기 마법도 아니니 위력도 생각만큼 크지 않고. 빗나갈 수도 있고. 그나저나….”
거기까지 말한 천후는 갑작스레 자신의 몸을 무의식적으로 더듬고 있는 친란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잡았다. 덕분에 지금까지 여유 있는 태도 일색이던 친란의 안색이 순식간에 굳었다.
천후는 그 모습을 웃으며 내려 보면서 천천히 고개를 숙여 얼굴 앞에서 멈춰 섰다.
“겁도 없군. 남자 몸에 이렇게 쉽게 손을 대다니.”
“읏…!”
세상 무서울 게 없어보였던 그녀의 눈에 공포가 서렸다. 천후는 그 눈가 아래에 엄지를 가져가 문지르며 속삭였다.
“미안한데…. 이렇게 조금씩 형상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고부턴 조금 내가…기분이 업 되거든. 고양감이라고 해야 하나…. 제정신이 아니라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이렇게 쉽게 다가오면 곤란해.”
“아…알겠네. 그러니 놔주겠나?”
“어쩔까….”
작게 말한 천후는 어깨에 올려둔 다른 한손을 천천히 그녀의 허리 아래로 내렸다. 그 행동에 친란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동공이 점점 커지면서도 아무런 저항조차 할 수 없다. 그동안 손은 점점 내려와 꼬리뼈아래를 지나 갈라져있는 계곡 사이로 파고들어가려 들었다. 바로 그 때.
“천후!”
“…….”
셀레나가 놀라 외치는 목소리를 들은 천후는 눈을 크게 뜨면서 물러났다. 그리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 죄송해요. 디제스터가 앞에 있으면 전투고양 상태가 되는데…. 그게 아닐 땐 다른 쪽으로 생각이 쏠려서. 음.”
간신히 존댓말을 끄집어낸 그는 여성들의 눈이 자신의 몸 한 점에 쏠리자 얼굴을 붉히며 몸을 돌렸다. 오직 희주 만이 나지막한 감탄사를 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좋은 정보로군요.”
“…….”
어떤 의미로 좋은 정보란 걸까? 셀레나와 친란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였지만, 희주는 더 이상 말을 삼갔다.
그 동안 강화주문을 해제한 천후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이었다.
“하여간…. 이렇다보니까 난 지연주문 활용법이나, 캐스팅 관련 부분에 특화됐어.”
“그게 무슨 뜻이야?”
“뭐 간단하게 말해서…B랭크 주문 외우는데만 한 시간이잖아? 하지만 한 시간 내내 나불거리면서 손가락질만 하는 건 사실 생각보다 엄청 지치거든. 그동안 다른 일도 못하고. A랭크는 뭐 말할 필요가 없고.”
“그렇지.”
“그래서 나는 아예 영창, 수인을 생략하고 캐스팅을 하고 있어. 풀 캐스팅과 같은 효과를 거두려면 4배 정도 시간이 걸리지만 마력만 소모하면 되지.”
“으으으음. 근데 그렇게 하려고 해도 보통 제자리에 서있어야 하지 않아?”
“그건 마법사들이 캐스팅에 익숙하질 않아서 그래. 레이나드 씨도 비슷한 걸 하던데…. 난 조금 더 발전해서 사실상 캐스팅을 거의 의식하지 않고 계속 유지할 수 있어. 오토캐스팅이라고 부르는 게 맞겠지.”
“그래도 잠 잘 때는 끊길 거 아냐? 그 방식으로는 A랭크 마법은 4일이 걸린다며?”
“잠 잘 때도 유지할 수 있어. 익숙한 주문이라면 특히나. 생소한 주문이라면 잠시 ‘멈춰’뒀다가 일어나서 다시 이어서 하는 식이야. 내 캐스팅이 캔슬되는 경우는 다른 주문을 급하게 외워야할 때말곤 없다고 생각하면 돼.”
“…무슨 마법이 레고도 아니고 그게 돼?”
“10년 동안 이 짓만 연마했으니까. 이건 내가 아니라도 마법사면 다들 연습하면 할 수 있는 거야. 이거 자첼 아저씨…그러니까 내 양아버지가 가르쳐준 거 거든. 내 특성을 썩히는 게 아깝다면서. 덕분에 지금와선 내가 아저씨보다 능숙해. 아저씬 잠잘 때는 유지가 안 된다더라.”
“그렇군.”
이것이 이 남자의 강함의 진면목. 친란은 그것을 단박에 파악해냈다. 스펠 어센션? 좋기야 하지만 제약이 심한 능력이다. 스펠 세이브? 그의 방출마법이 주특기가 아닌 이상 이것에도 활용에 한계가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스스로 연마함으로써 극복, 장점으로 승화시켜 놨다.
아주 극히 일부의 일리미네이터들만이 이동 간 주문 시전, 컴뱃 캐스팅을 익힌다. 없어도 주 돈벌이인 서브 퀘스트는 가능하고, 메인 퀘스트는 파티플레이로 극복이 되니까.
자기계발에 힘쓰질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전혀 다르다.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노력으로 연마가 가능한 부분을 극한까지 파고들어둔 것이다.
그것은 그의 발달된 육체를 봐도 일목요연했다. 정말로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서 자신을 갈고닦아온 자의 궁극형태라고나 할까?
“진정한 일리미네이터….”
“응?”
“처음 저희 앞에서 싸우셨을 때 하셨던 말이 떠오르는군요.”
“…납득 가는 명칭이군.”
천후야말로 저 명칭을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을 친란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그 어떤 일리미네이터도 저런 수고로움을 스스로 자처하지 않는다.
당연하지. 저쯤 되면 거의 구도자 수준이다. 10년 동안 캐스팅 연마와 무술 연마만 하면서 살아온 사람이라니. 듣도 보도 못했다. 오래된 무협소설에서 벽곡단만 씹어 먹으며 폐관수련을 하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기인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현실에 이런 사람이 존재하다니.
‘탐이 나는군.’
친란은 살짝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
“후우…. 뭐 이정도면 대충 다 설명한 거 같은데.”
“응? A랭크 마법은 안 쓰는 거야? 써도 건물 안 부서진대.”
“아니 음…. 저번에 마지막에 쓴 빨강 빔 있잖아. 신위라고 하는데…. 그게 A랭크 마법 쌓아놓은 걸 상당히 소모하면서 쓰는 거거든? 그래서 지금 저장해둔 게 몇 개 없어.”
“그래도 한 개 정돈 써도 되잖아?”
“쓸 순 있는데…B랭크 마법 걸었을 때 봤으면 알겠지만, A랭크 땐 상태가 훨씬 심하거든? 제정신이 아닌 게? 그래서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천후는 세 여자를 가만히 눈으로 훑었다. 그 말을 곰곰이 뜯어본 셀레나는 곧 그게 무슨 뜻인지를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 그에게서 몇 걸음이나 떨어졌다.
친란 역시 부채로 자기 얼굴을 가리면서 꺼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오직 희주 만이 평소 그대로의 무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문제가 됩니까?”
“…내가졌네.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하는 사람은 오랜만에 보는군.”
역시 희주야. 거침이 없지. 친란이 꼬리를 내리고 항복 선언을 하는 걸 본 셀레나는 혀를 내둘렀다.
한편, 한차례 희주를 경외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친란은 잠시 얼굴 앞에서 부채를 살살 움직여댔다. 한참을 그렇게 고민하는 모양새를 하고 있던 그녀는 스윽 하고 몸을 돌려서 셀레나를 마주보았다.
그 순간, 셀레나는 머리털이 쭈뼛 서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어떤 감정이 읽혔다.
욕심쟁이의 눈.
그리고 보통 저런 눈을 하고 있을 때, 그녀는 항상 똑같은 말을 하곤 했다.
“미안하군. 셀레나.”
“응?”
“이 남자. 내가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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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