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정말 엄청 조심해서 상대해줬던 거군, 나는.”
얼마 후.
강호는 바닥에 드러누운 다섯 명의 남자들을 보고서 침음성을 삼켰다.
천후는 강호가 내려가고 남자들이 올라오자, 그때부터는 손속에 사정을 버리고 진지하게 응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친란의 요구였기 때문이다.
덕분에…처음 연습생이 완전 박살이 나버린 이후로는 프로선수들이 링에 올라왔는데, 그들 모두가 3라운드를 못 버티고 뻗어버렸다.
가장 큰 문제점은 짐에 중량급 선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체급차이가 있다 보니 도무지 한방한방이 교환이 안 된다.
발을 쓰면 버틸 수는 있다. 포인트 위주의 복싱을 한다면 그들에게도 승산은 있었다. 마지막에 올랐던 국내 상위랭커라는 남자가 그럤다면 아마 분명 이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 스파링 영상을 본다는 친란이 걸린다. 지금 여기서 저놈을 눕혀야 눈에 들 수 있다. 그 생각 때문에 그들은 거체에 덤벼들었고, 그때마다 그들은 개미지옥에 스스로 걸어 들어간 개미 꼴이 되었다.
“후우. 대단하군. 대단해. 첫 번째 이후론 전부 프로였는데 그걸 전부 다운시키다니.”
“음…. 이건 순수하게 몸집 빨이라 그다지 대단하다고 할 건….”
“어허. 그런 소리 마라. 속도 차이가 나는 상대를 잘만 맞춰놓고는. 거기다 정타 허용도 거의 없었잖아. 대단한 게 맞다.”
“…….”
강호의 말처럼 천후의 얼굴은 처음 강호에게 한 대 맞은 것 빼고는 깔끔했다. 다섯 명 연속 스파링을 한 걸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체격차가 있다고 한들 링을 넓게 쓰는 발 빠른 이들을 따라잡는 것은 어렵다. 중앙부에서 똑같이 돌면서 따라잡는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서 공방을 이어나가 일방적으로 이득을 얻어나가는 건 체격만 크다고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당장 복싱으로 나서면 일리미네이터 일보다 돈을 더 벌지도 모르겠군. 음…. 혹시 링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지 않나?”
“어떻게 알았어요?”
종종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다. 자신과 수준차가 크게 나는 상대일 경우 특히 그랬다. 하지만 그걸 말한 적은 없는데 보기만 하고 알다니? 천후가 놀라서 묻자 강호는 희미하게 웃었다.
“글쎄. 후후. 재미있는 후배가 들어왔군.”
“…….”
묶었음에도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정리하는 그녀의 모습에 시선이 잠시 빼앗겼던 천후는 정신을 되찾고는 체육관 안을 둘러보았다.
“어? 셀레나랑 희주 씨는 어디 갔지?”
“사장님은 지루하다고 회사로 가버렸어요!”
“선생님은 식사 준비 하신다고 가셨어요!”
그 대답은 이브와 에바가 해주었다. 두 아이들이 히히하고 웃는 얼굴로 올려보는 게 귀엽다. 덕분에 무심코 두 사람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천후는 스스로의 행동에 잠시 놀랐지만, 둘은 그게 별로 싫지는 않은지 오히려 이마를 움직여 손에 문질 대며 꺄르르 웃었다.
“와. 까끌까끌해. 강호서방 손 같아.”
“응. 근데 쪼끔 더 까칠 거려.”
그 모습들을 보니 천후의 얼굴에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저번 지나 때도 그랬지만, 천후는 어린 아이들을 좋아했다.
워낙 어릴 적부터 독방에서 살면서 학습도 개인교습으로 받았다보니, 자기보다 어린 아이들은 거의 접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보니 생소함, 신기함이 겹쳐서 흥미를 보이게 된다.
‘미연이 누나가 나한테 느낀 게 이런 생각이었을까?’
이런 작은 아이들이 옆에서 막 와와 떠들고 있으면 너무 귀여워서 참을 수가 없다. 성적인 의미가 아니라, 막 같이 놀고 싶고 유치하게 행동하고 싶어진 달까? 그 뿐만 아니라 이 아이들은 자신이 보호해줘야 한다는 생각에 책임감이 들기도 했다.
“땀 냄새 나는데 괜찮아?”
“응? 땀 냄새 왜요?”
“강호서방도 나는데? 히히.”
아. 뭐 그런가. 하긴 피트니스 센터나 복싱 짐에서 나는 냄새가 다 그게 그거지. 그래도 보통 싫어하는 냄새다보니까 조금 신경 쓰이긴 한다.
“그럼 오빠 샤워해. 선생님이 갈아입을 옷 주고 갔어요.”
“선생님 완전 대단해!”
마침 그래서 씻으려고 하니, 이브가 속옷과 옷이 든 가방을 가져왔다. 고맙다고 미소 지으며 답해준 천후는 그것을 받아들고 샤워실을 찾아갔다.
*
이야기를 들어보니 복싱 짐의 샤워실은 아래층의 피트니스 센터와 함께 사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처음 들어설 때는 따로 만들려고 했다가, 피트니스 센터 쪽이 워낙 시설이 좋으니 일정 비용을 지불하고 공동 사용하기로 했다고 한다.
신기해서 확인해보니 일반 회원들은 피트니스 센터와 다이어트 복싱을 패키지로도 끊을 수 있도록 되어있는 게, 협조가 꽤나 긴밀한 모양이었다.
하긴 이래놓으면 복싱짐 쪽에도 여성회원이 들어오니까 돈도 들고, 회원도 들어오고 일석이조다. 일부러 처음부터 저렇게 차리는 경우도 있는데, 우연히 협조가 가능한 업종끼리 만났다면 협조 안할 이유가 없으리라.
“다 세상사는 지혜구나.”
이런 건 기억해둬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거린 천후는 남자 탈의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탈의실에서 샤워실이 연결되어있는 구조였다.
오후 5시. 이 피트니스 센터는 도심지의 운동 시설이다 보니 주로 직장인들이 주 고객이었는데, 그 때문인지 탈의실은 텅 비어있었다.
“으. 되게 안 벗어지네.”
땀범벅이 되어서 질척거리는 옷들을 벗어던진 천후는 샤워실로 들어가 물을 틀었다. 아주 잠시 온수를 틀었다가 냉수로 바꾸니 몸이 날아갈 듯하다.
“후우….”
이상고온 덕분에 요즘은 초여름인데도 기온이 30도 근처를 오고갔다. 여기에 운동까지 한 덕에 천후는 시원한 것에 굶주려있었다. 그리고 샤워기에서 나오는 찬물은 그것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주었다.
몸을 다 씻고 깔끔한 기분으로 탈의실로 나온 천후는 희주가 준비해둔 옷가지를 꺼냈다. 생각해보면 이런 것들은 자신이 챙겨야했는데…. 그녀가 용케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땀범벅으로 돌아갈 뻔했다.
“고마워라….”
이런 친절은 받아본 적이 없다. 아무리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 일리미네이터와 서포터 간의 관계라지만 이것은 명백하게 그 이상이다.
천후는 문득 얼마 전 고인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를 위해 준비해왔다는 게 무슨 뜻일까?’
천후의 존재는 유그드라실에 의해서 철저하게 은폐되어왔었다. 그렇기에 그에 대한 것을 외부에서 알 방법이라고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억지로 생각해보면 디제스터를 처리하는 도중 드문드문 만난 사람들 정도?
때문에 천후에 대해 뭔가를 알아내고 준비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질 것만 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애초에 왜 이렇게 헌신적일까? 어째서 자신을…처음 만난 그 날부터 사랑에 빠진 것처럼 대해주는 걸까? 단순히 정신적인 의존증이 있어서? 단지 그 이유로 몸을 섞을 수 있나?
그렇기에 고인규의 말이 신경 쓰인다. 너무나!
쿵!
“…관두자.”
천후는 머릿속으로 희주에 대한 의문들이 떠오르기 시작하자 캐비닛에 머리를 박으며 애써 그 생각들을 지우려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떠나가지 않는다.
알고 싶었다. 그녀에 대해서.
그녀의 모든 것을.
언젠가…기다리고 있다 보면 그녀의 입으로 말해줄 날이 올 것이다. 때가 되면 말해주리라. 그런 여자다. 하지만….
‘내 곁에. 내 앞에 두고 싶어. 희주 씨에 대해선 내가 모르는 게 없었으면 좋겠어.’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욕망에 천후는 어쩔 줄 몰랐다. 이런 욕구를 가져본 적은 처음이었다. 타인에 대한 소유욕. 지배욕이라니…. 더럽고 음습하다. 천후는 자신이 희주에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미안하게 여겼다.
하지만 그는 아직 몰랐다.
이것이 어떤 남자라도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욕구라는 것을…. 오히려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희주는 오히려 더할 나위 없이 기뻐했으리라는 것을.
때문에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속옷에 손을 가져가 다리에 걸쳤다.
그 때였다.
“앗! 에바, 막아! 또 남자 탈의실 들어가려고 해!”
“안 돼, 강호서방! 들어가면 안돼요!”
“어허어. 이거 놔라. 아녀자들이 볼 곳이 못된다!”
탈의실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속옷을 입다 말고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덜컹 하고 탈의실 문이 열리며 이강호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으아앙! 힘만 세 가지고!”
“미워! 나빠요!”
“알겠으니 어서 나가기나 해라. 훠이훠이.”
강호는 이브와 에바가 바닥에 드러누워 다리를 잡고 늘어지고 있는데도 태연하게 아랑곳하지 않았다. 힘을 써서 그 둘이 붙어있던 말던 힘을 써서 억지로 질질 끌고 들어온 것이다.
‘뭐하는 거야, 저게?’
천후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속옷을 입다 말고 입을 딱 벌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끄응…. 너무 달라붙어서 잘 안 벗어지는군.”
하지만 강호는 그런 천후의 존재를 눈치조차 채지 못했는지, 그대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오며 스포츠 브라를 벗었다.
출렁하고 엄청난 낙차로 두덩이의 부드러운 살덩어리가 요동친다.
“후우. 자. 어서들 떨어져라.”
윗도리도 벗었겠다 붙어있던 둘의 팔을 완전히 떼어낸 강호는 꽁꽁 묶은 머리를 풀면서 고개를 양옆으로 털었다. 긴 머리가 폭포수처럼 풀림과 동시에, 자연스레 그녀의 시선이 탈의실 전체를 한번 훑었다. 그리고 그제야,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
“…….”
탈의실이 침묵에 빠졌다. 두 사람 모두 말이 없어져서 눈만 깜빡 거린다. 그러다가, 강호가 자기도 모르게 눈동자만 아래쪽으로 가져가는 것을 본 천후는 자신의 꼴이 어떤지 떠올렸다.
덜렁덜렁. 덩굴줄기에 오이 하나가 덜렁덜렁.
‘…신이시여.’
울고 싶다. 그것을 정면에서 아주 빤히 바라본 강호의 얼굴이 천천히 붉게 물들어 갔다. 차라리 평소처럼 남자가 어쩌네 하면서 진격모드를 계속 켜두지. 저러니까 덩달아 부끄러워진다.
게다가…거기서만 끝났으면 모르겠는데 자기도 모르게 양 가슴이 완전히 드러난 그녀의 상체가 눈에 들어와 버렸다. 당황했는지 가릴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지, 오랜 시간 동안 운동을 해서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는 가슴골과 분홍빛 첨단이 여과 없이 보인다.
덕분에…이 와중에도 눈치 없이 잭의 콩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났다.
“…….”
이윽고 구름에까지 닿을 기세가 된 콩 나무의 상태를 빤히 지켜보던 강호는 아주 느릿느릿 고개를 돌렸다. 손으로 자신의 양 가슴 역시 조심스레 가렸다.
여태까지 그렇게 뚫어져라 봐놓고 이제 와서 고개 돌린들 뭐가 되겠냐만. 그래도 그나마 시선을 피해줬으니 다행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 때.
“…와오.”
“에바는 아무것도 못 봤어요. 아무것도 안보여요.”
바닥에 쓰러져 있어서 잠깐 잊고 있었던 두 아이의 목소리에 천후의 몸이 덜컥 하고 굳었다.
이브와 에바는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가려주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도 호흡이 착착 맞게 손가락 틈새를 벌려놔서 사실상 여과 없이 모두 보고 있었다.
아. 아아아아아!
못해먹겠다아아아!
“아아아아악! 남자 탈의실엔 왜 들어온 거예요, 대체에에엑!”
애들한테 보이고 이게 무슨 꼴이야!!! 나 화났다, 이강호!
*
“저기…. 이제 그만 화를 풀어주면 안될까? 팔이 아프다만….”
“…….”
잠시 후. 결국 강호는 뻔뻔하게 남자 샤워실에서 샤워까지 마치고 나왔지만, 천후와 이브, 에바의 공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벌을 서게 되었다.
이후 피트니스 센터 쪽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시간에는 언제나 그녀가 남자 샤워실을 써서 회원들이 언제나 눈치를 보고 있었다고 한다.
‘5시라 사람이 없는 게 아니었군.’
피트니스 센터 관장은 안 그래도 억울했는지, 사연을 물어보자 어떻게 좀 해달라고 아주 하소연을 해왔다.
엔체스터 콜로니와 제휴가 되어있고, 그녀가 친란에게서 직접 소개받은 VIP취급이라 참고 있었지만 결국 쌓이고 쌓인 게 터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사건을 저지른 장본인인 이강호는 전혀 반성의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억지로 벌을 세워두고 있지만, 이런 상황조차 익숙한지 너스레를 떨어댔다.
“허어. 천후야. 이러는 거 아니다. 내가 이래 뵈도 나이도 많고 직장 선밴데 두 손 들고 벌이나 세우고 말이지. 흠흠. 그래도 나도 반성은 하고 있으니 무릎은 꿇고 있겠다. 그러니 팔은 내리게 해주지 않겠나? 음? 어이쿠. 바닥에 웬 벌레가….”
“앗! 한쪽 팔 내렸어요! 오빠! 혼내줘요!”
“뻔뻔해! 반성을 안 해! 나빠!”
“끄으으응….”
글렀다, 이 사람. 세상에 이런 민폐녀가 있다니. 옆에서 두 아이가 삐약삐약 거리는 소리에 천후는 골치가 아파져 이마를 짚었다.
뭔가 개인사정이 있는 건 알겠지만 이건 도를 넘었다. 몰랐을 땐 그렇다 치고 알아버린 이상 좌시할 수는 없다.
천후는 울상을 하고 있는 피트니스 센터 관장과 남성 이용자 일동의 시선에 한숨을 푹 쉬면서 결론을 내놓았다.
“…선배. 내일부터 저희 집에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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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일 끝나는 시간이 매일 조금씩 달라서...
업로드 시간이 일정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내일 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