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허당이...아니야?>
다음 날 이른 아침.
이브, 에바와 함께 천후의 집으로 온 강호는 지하 헬스장을 보고는 탄성을 내질렀다.
“세상에…! 굉장하군!”
개인 헬스장 치고 너무나 잘 갖춰져 있는 시설에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돌아다녔다. 프리 웨이트를 중심으로 두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발달시키기 힘든 부위들을 위한 필수적인 머신들도 놓여있어서, 정말 돈 받고 운영해도 될 것 같았다.
“정말 여길 써도 되는 거냐? 왠지 미안한걸!”
“말로만 미안하다고하지 마시고 좀 행실로 보여 봐요.”
“하하하.”
맑게 웃은 강호는 덤벨들을 양손으로 들어보면서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같이 구경 온 에바와 이브도 집 지하에 이런 게 있는 것이 신기한지 요리조리 돌아보고 있었다.
“후우. 선배가 거기 계속 다니면 관장님 위장염 걸릴 거 같아서 쓰게 해드리는 거예요.”
“너무 그러지 말아라. 남자가 남자 샤워실 좀 썼다고 그리 소란이라니. 오히려 내 쪽이 더 곤란했다.”
아이고…. 그러십니까? 끝까지 저걸 밀고 나갈 셈인가보군.
“뭐…. 그리고 거기서 운동을 하고 있으면 이상하게 시선이 너무 쏠려서 부담스럽기도 했다. 남이 운동하는 데 뭘 그리 쳐다보는지.”
“…….”
그렇게 말하며 곤란하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데, 그 움직임에 따라서 땋은 머리가 같이 흔들리는 것이 눈을 어지럽힌다. 사람이 자각이 없단 게 이렇게 무섭구나. 천후는 새삼 이사람 언젠가 정말 큰일 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전에 잡아오길 다행이지….’
속으로 혀를 찬 천후는 기구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뭐 여긴 어차피 저 밖에 안 썼으니까 놀려두는 것보단 낫겠죠. 아. 희주 씨도 가끔씩 썼던가? 하여간에.”
“으음! 정말 고맙다! 이 은혜는 잊지 않으마!”
무슨 옛날 중국영화 배우마냥 포권하는 것을 보며 쓴웃음을 지은 천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직 감사하긴 일러요.”
“응? 무슨 말이냐?”
“오늘은 손님으로 모셔왔지만…. 앞으로는 오전시간에 매일 같이 집에 오고간다는 거잖아요. 그럼 희주 씨한테도 제대로 허락을 받아두는 게 좋을 거예요.”
그 말에 강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희주 씨라면 네 서포터 아닌가? 네가 정한 일을 굳이 또 따로 허락을 맡아야 하나?”
“아니 그게 또…. 이 집이 제 집만은 아니니까요. 손님이 매일 오면 관리하는 희주 씨도 힘들 테고.”
“아아. 그런 뜻이군. 알겠다.”
진중한 목소리로 대답한 강호는 양손을 꾹 움켜쥐면서 결연히 대답했다. 그녀로서는 이 시설을 본 이상 이곳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허락을 따낼 수 있게끔 굳게 마음을 다졌다.
*
“…안됩니다.”
마음을 다진 건 다진 거고. 그거랑 상관없이 희주는 그녀가 매일같이 들락날락 거려도 되냐는 이야기에 즉답해왔다.
허락을 구하라고 했다지만 직접 데려온 사람의 청을 거절할 줄은 몰랐다. 덕분에 천후는 약간 놀라서 눈을 똥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희주는 바로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다.
“관리에 대한 부분은 별로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홍희주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가 가늘게 뜨며 그녀의 위아래를 훑었다. 실내라서 삿갓을 벗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긴장으로 역력하다. 하지만 희주가 지금 살펴보려 하는 것은 얼굴색 같은 것이 아니었다.
마치 진열되어있는 상품을 보듯, 희고 잡티하나 없는 이마부터 분칠조차 하지 않았는데도 고운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분명 화장품을 쓸 리가 없는데 곱게 올라간 눈썹. 짙은 입술이 시야에 잡힌다.
입으로 바락바락 남자라고 우기는 것과는 상반되는 외모. 그것은 몸도 다를 바 없다. 이전, 사무실에서 보았던 그녀의 나신을 떠올린다.
그걸 찍어 성인 잡지 표지로 사용하면 전부 매진이 될 거라 확신할 수 있을 정도의 몸매.
‘좋은 소재.’
나쁘지 않다. 하지만 조금 까다롭다. 그렇다면….
“다만…. 집 안에 다른 외간남자 분을 들이는 것은 조금…. 무섭기에.”
“푸헙…!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희주가 내놨던 밀크 티로 환상의 분수 쇼를 시전한 천후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하지만 희주는 표정하나 바꾸지 않았다.
“말 그대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강호 씨.”
“으, 응?”
질문을 받은 강호 역시 놀라서 양손을 꼭 모으면서 어깨를 움찔 거렸다. 스스로를 남자로 생각하고 행동한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덕분에 그녀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입만 어물거렸다.
그 사이에 희주는 말을 이었다.
“이전 처음 뵈었을 땐 나신으로 사무실을 자유롭게 쓰고 계셨는데…. 아무리 저라도 친하지 않은 남성분이 이 집에서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부끄러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겁니다.”
“아, 아니 그건….”
“강호 서방이 잘못했네.”
“응. 강호가 나빴네.”
이건 그녀를 완전히 남성 취급하는 건 잠시 내려놓고 보더라도 부끄러운 일이다. 같이 소파에 앉아있던 이브와 에바조차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여댔다. 할 말이 없어진 강호는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희주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 뿐 아니라…. 주인님이 계시지 않는 사이에 저를…. 아니. 아닙니다. 손님께 너무 무례했군요.”
거기까지 말한 희주는 고개를 살짝 돌려서 강호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한편, 희주의 말을 듣고 입을 빠끔빠끔 거리던 강호의 눈에는 살짝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온 몸을 바들바들 떨다가 소파 앞 티 테이블에 양손을 쿵 하고 짚더니 고개를 콱하고 숙였다.
“윽? 선배?”
“희주 씨! 감사하네!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이야! 아아…!”
강호는 그녀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가를 깊이 생각하고 나서야, 그녀가 자신이 주장하는 정체성을 완전히 받아들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대신 자신이 주장하는 행실을 취해달라는 요구를 해온 것이다.
당신이 스스로를 남자라고 여기고 있다는 것은 알겠다. 그렇다면 남자다운 반응과 행실을 보여라. 스스로가 여자라는 사고를 완전히 버리고 나를 대해라 라고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자신의 사정을 밝힌 적조차 없는데 이렇게 대해온 사람은 인생을 통틀어 단 한명도 없었다. 그것에 감격한 이강호는 눈물 한줄기를 주르륵 흘리며 닦지도 않고 격한 목소리로 외쳤다.
“걱정 말아라! 나는 명실상부한 남자! 하지만 변절자는 아니다! 저번 같은 추태는 보이지 않도록 주의하마!”
그녀의 답에 희주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그 모습에 강호는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정말로 조심하겠다! 그리고 그대에게 욕정하지도 않아! 나는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다! 그러니 걱정할 것 없다! 믿어다오!”
“…….”
큰 목소리와 몸짓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희주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눈가에서 흘러나온 물길을 닦아주었다.
“…그건 큰일이군요. 여성에게도 조금은 관심을 가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
그 손길을 받아들인 강호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다가, 왼손을 들어 자기 얼굴에 올라와있는 백옥에 겹쳤다.
“그대에게라면…내가 정말, 정말로 남자였다면―”
그렇게 말하는 강호의 눈은 홀린 듯이 풀려있었다. 그 얼굴을 마주보며 희주는 다른 손의 검지로 그녀의 도드라진 입술을 막았다. 그러면서 볼가를 쓰다듬던 손을 느릿하게 치우며 속삭였다.
“…손버릇이 좋지 않으시군요.”
“미, 미안하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화들짝 놀란 강호는 황급히 자기 손을 내렸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은 홍시처럼 달아올라있었다.
그에 맞춰 완전히 그녀에게서 손을 치운 희주는 자신이 타온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작은 목 넘김 소리가 침묵에 빠져든 거실에 크게 울렸다.
집 안에 모인 다른 넷의 시선이 그녀에게 한꺼번에 집중됐다.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내며 희주는 담담히 말을 꺼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 부분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그 부분? 다른 문제도 있나요?”
천후의 질문에 희주는 이번엔 그를 마주봐왔다. 방금 전 강호에게 보였던 건이 있다 보니,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이 너무나 작아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생각도 안하고 있던 부분을 짚어왔다.
“주인님께선…강호 씨가 시설을 쓰게 해주시는 대가로 무얼 받으셨는지요?”
“네? 아무것도….”
“…….”
표정에 변화는 없다. 하지만 천후는 왠지 주변 공기가 스산해진 느낌을 받았다. 아주 살짝 눈동자의 광점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요 한달 동안 그녀와 지내면서 알게 된 건…이건 그녀가 기분이 상했단 신호란 거였다.
왜 화가 났지? 천후는 안절부절 못하다가 그녀가 방금 한 말을 곱씹었다.
‘뭐, 뭔가 받아야하는 건가?’
하긴…. 생각해보면 피트니스 센터에서 민폐 쩔어서 어쩔 수 없이 집에 데려온 건데 그걸 아무것도 없이 해주는 것도 좀 이상하다.
그제야 천후는 희주가 자신에게 자기 이득을 제대로 챙겨달라고 무언으로 호소하고 있단 걸 깨달았다. 부끄럽기가 한량없다.
하지만 천후는 일반적인 피트니스 센터 이용비용을 잘 모른다. 어제 본 할인가 정도는 기억하지만…. 결국 눈치를 보던 그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바, 받으려고 했어요. 하하.”
“…….”
“그런데 그, 얼마나 어떻게 받아야할지 잘 모르겠어서요. 음…. 희주 씨는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저에게 조언을 구하신다면….”
스르륵. 차갑게 느껴지던 눈이 눈꺼풀로 한번 덮어졌다 나오자 다시 평소의 것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천후는 살짝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에게서 시선을 다시 돌려 강호를 바라본 희주는 자신의 요구조건을 내놓았다.
“일단 몇 가지 조건을 걸겠습니다. 저와 주인님은 매일 사무실에 출근을 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오후에는 집에 사람이 없습니다. 같은 직장 동료사이라지만…빈집에 손님을 들일 수는 없습니다.”
“으음. 그렇다면?”
“그러니 가능하면 주인님과 운동하는 시간을 맞춰주세요. 그게 힘드시다면 퇴근 후에 이용해주셔도 괜찮습니다.”
지당한 말이라 강호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확인한 희주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주인님과 같은 시간이나 퇴근 후에 운동을 하시면…어찌되었던 식사시간이 가깝게 됩니다. 주인님의 서포터로서…손님을 집에 들이고 식사시간에 그냥 돌아가시게 할 순 없습니다. 다만 저 혼자서는 손이 부족하니…저 아이들을 그동안 저에게 맡겨주실 수 있을는지요?”
그 질문에 강호는 스윽 하고 이브와 에바를 내려다보았다. 둘의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네! 네! 할게요! 시켜만 주세요! 선생님!”
“저희 완전 말 잘 들어요! 집안일 완전 잘해요! 스승님!”
희주가 말을 꺼냈을 때부터 흥분해있던 그들은 손을 반짝 들어서 자기어필을 해왔다. 이건 뭐 더 이상의 답이 필요 없다. 고개를 한번 끄덕인 희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천후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천후는 움찔했지만 이번엔 조금 더 알기 쉬운, 송구스러워 하는 눈빛을 잡아낸 천후는 자기 쪽에서 물었다.
“왜 그러세요?”
“죄송합니다, 주인님. 혹시 괜찮으시다면…대가로는 제 개인적인 요구를 손님께 부탁드려도 괜찮은지요?”
“음?”
개인적인 요구라니. 희주로선 정말 극히 드문 이야기다. 자기도 모르게 솔깃해진 천후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응해주었다.
“아. 물론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꾸벅하고 고개를 숙여 보인 희주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강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리곤….
“강호 씨. 검을 맞대게 해주시겠습니까?”
몸 둘 바 몰라 하던 강호의 몸짓이 멈췄다. 당황이 서려있던 눈매가 더 이상 크지 않았다. 벌려져있던 입은 꾹 다물렸다.
그저. 한 마디.
“가르쳐 줄 순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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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