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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60화 (60/324)

60화

희주가 강호에게 가르침을 부탁한 직후. 세 사람은 마당으로 나왔다.

“일단 실력을 좀 파악하고 싶군.”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고개를 끄덕인 희주는 물끄러미 천후를 올려보았다. 그 눈빛을 받은 천후는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지금 하려고요?”

“부탁드립니다.”

“음…. 알겠어요.”

희주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뭔가를 자신이나 주변에 요구해오는 경우는 드물었기에, 천후는 놀라면서도 준비를 했다.

천후는 평소 디제스터와의 대전에 대비하기 위해 희주와 상황을 설정하고 대련형식의 훈련을 하곤 했다. 월하홍취의 특성, 피를 빤 디제스터의 주요능력을 따라하는 기능이 대단히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홍희주 자신도 검술이나 무기술에 어느 정도 조예가 있어 그것들을 능숙하게 사용한다는 점도 주효했다.

서로가 버프주문 없이 치루는 대련이기 때문에 속도나 패턴 한계도 있고, 안전성 문제로 손속에 사정을 두긴 했지만 이것만으로도 어느 도장에서도 실행할 수 없는 훈련이다.

“후우우….”

희주에게서 10m 가량 거리를 벌린 천후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제자리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희주의 손에 완곡하게 휜 환도, 월화홍취가 들렸다.

그녀는 먼저 칼을 뽑아 강호에게 보이며 손잡이 쪽을 그녀에게 향했다. 하지만 강호는 손을 저었다.

“아니. 그건 그만 두지. 그건 마도병장이군. 마도병장에 내가 손을 대서 좋을 건 없다.”

“그렇습니까?”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 희주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천후에게 집중했다. 먼 거리. 아직 서로의 무기가 닿지 않는 거리. 하지만 희주는 조용히 읊조렸다.

“혈인변검, 흑표.”

차르르륵. 환도의 형태가 무너지며 수십 개의 검편으로 변하여 땅으로 늘어진다. 일종의 쇠 채찍이 된 그것을 희주는 어깨와 팔, 그리고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서 휘둘렀다.

“흠!”

휘잉휘잉! 검편이 바람을 찢어 가르는 소리. 5m 길이의 날 달린 쇠밧줄이 날아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 천후는 낮은 기합성과 함께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둘 다 버프의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이다 보니, 월하홍취의 검편은 일반 채찍보다는 훨씬 느리다. 음속에 다다르지 못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크게 너울대며 움직이는 것이 마치 뱀이 물어오는 듯하다.

그래도 덕분에 사람이 피할 수 있는 속도는 나온다. 천후는 빠르게, 하지만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그녀를 향해 파고들었다. 검편을 뻗은 후 회수, 다시 내뻗는 팔을 움직이는 그 짧은 시간에 천후는 회피, 그 이후 접근을 동시에 해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둘 희주도 아니다. 파고들었다고는 해도 아직 5m이상의 거리가 남았다. 백스텝을 밟으며 제 2격. 팔을 내뻗자 물러난 만큼 다가오려 든다. 그러나 그것이 노림수.

“공도.”

천후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지나쳐간 검편의 끄트머리가 갑자기 허공에 빨려 들어갔다. 그것이 다시 나온 곳은 그의 후두부 바로 앞!

“흐으읍!”

시동어를 듣자마자 눈을 크게 뜬 천후는 이를 악물고 몸을 앞으로 내던졌다. 사각에서의 공격에선 사람이 아니라 어떤 동물조차 무력하지만…그래도 그녀의 마지막 손목 컨트롤, 사각으로 전환해서 다가오는 타이밍, 그리고 파공성. 이 세가지를 기반으로 자신의 신체 어느부위를 노릴지 예측한다.

휘이잉!

거기서 치명상을 입을 수 있는 두부. 그리고 심장을 대상으로 설정한 천후는 바닥에 넘어지다시피 한 덕분에 그것을 피해낼 수 있었다. 천후의 눈에 생기가 깃들었다.

‘이제부턴 내 차례다!’

방금 전 이 공격이야말로 희주와의 훈련 시 가장 까다로운 패턴이었다. 이미 사거리부터 한참 이기고 시작하는데, 한두 번 피해내서 손이 닿겠다 싶은 시점에 사각에서 날아오는 공격.

검편 속도가 음속이 아니네 어쩌네 해도 피하기 쉬운 속도는 아니다. 하물며 그게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날아와서야…. 막아낼 수단이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그게 아니니 정말 아슬아슬했다.

하지만 이걸 피해낸 뒤부터는 조금 상황이 다르다. 그대로 양손으로 땅을 짚은 천후는 네발 짐승마냥 땅을 박차며 몸을 튕겨 일어났다.

3미터. 천후가 일어나는 동안 검편을 다시 도로 바꾼 희주는 월하홍취를 양손으로 쥐고서 비스듬히 전신을 노려 베어 들어갔다.

칼로 무슨 사람을 두동 내려는 움직임이 아니다. 아무데나 맞아도 된다는 식의, 넓은 범위를 노리는 공격. 피하려는 시도는 하는 것 자체만으로 신형을 무너뜨리거나 크게 움직일 수 밖에 없는 공격이다.

사람 몸이 강철이 아닌 한, 그 의도에 따를 수밖에 없다. 천후 역시 그것은 마찬가지라, 왼쪽으로 신형을 무너뜨리며 그것을 간신히 피해냈다.

“핫…!”

희주는 그 무너진 신체를 빠르게 발을 옮겨 태세를 정비하고 다시 베어 들어갔다. 하지만….

“으이샤!”

신형이 무너졌다 싶었던 천후는 그 자세에서 상반신을 앞으로 길게 늘어뜨리더니 빠르게 발을 움직여 그녀의 측면을 잡았다. 희주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린다.

뛰어난 균형감각. 보통 사람은 저렇게 하면 몸이 덜컥 멈추거나 앞으로 넘어질 테지만, 그는 짐승마냥 밸런스를 잡아내고서 연속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상반신 전체를 크게 움직이는 천후가 베기 동작을 취하는 희주보다도 빠르게 움직이며 포지셔닝을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하반신의 힘을 받지 못하더라도 허리, 어깨 힘만을 받아 2격을 날려보지만….

중단 부근에 있던 천후의 목을 노린 검격은 허무하게 허공을 가른다. 이미 그녀 주변을 한 바퀴 돌다시피 해서 후면을 잡은 천후는 그녀의 허리를 꽉 하고 끌어안았다.

“후우. 후우. 아. 너무 힘들다.”

“…….”

단기간에 너무 많은 움직임을 한꺼번에 했다. 준비 운동도 없이 갑작스레 전력으로 움직이니 아무리 강골인 그라고 해도 몸이 다 삐그덕 거렸다. 그건 희주도 마찬가지인지, 언제나 흐트러짐 하나 없는 모습은 사라지고 목덜미에 머리카락들이 땀에 젖어 붙어있었다.

“후우우….”

그것이 왠지 아름다워, 거친 숨을 내쉬며 입을 대보자니 그녀의 몸이 작게 떨려왔다. 백옥같이 흰 그녀의 귀가 아주 약간 붉어진 것을 본 천후는 갈증을 느끼며 침을 삼켰다.

동해온다…. 그녀의 냄새를 이렇게 맡으니. 전투로 흥분한 몸이 다른 쪽으로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천후는 그녀의 몸에 딱 붙여 숨겼다.

저편에서 이브, 에바가 구경하고 있는데 이걸 그대로 보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전에 한번 보이긴 했지만 그건 그거고….

등 뒤에서 주인이 숨을 고르는 것을 가만히 느끼고 있던 희주는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그에게서 살짝 떨어져 나오며 강호에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애매하군.”

둘의 훈련을 보고 있던 강호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그렇게 평했다. 지금 이 훈련을 보고 검술의 고하를 따지기는 힘들다. 희주의 움직임이 너무 영천후의 개인 훈련용도로 맞춰져 있었다.

이래서야 사실상 채찍을 다룬 것을 보여준 거니까. 마지막 도로 변화시켜 보인 그 대응으로 판단하기엔 무리가 있다.

거리도 이미 내준데다가, 도를 휘두르던 초격의 자세도 무너져 있었다. 저런 상태에서라면 누구라도 어쩔 수 없으리라.

어째야하나…. 강호는 한참을 고민하는 기색으로 입을 손으로 가리고 있다가, 크게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흠…. 어쩔 수 없지. 이브. 난향은 어디에 있지?”

“어? 강호서방, 칼 쓸 거야?”

“음.”

짧은 대답에 쌍둥이들이 작게 입을 벌리며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러다 희주를 한 번 보더니, 둘 다 안색이 파리해져선 강호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안 돼. 선생님 다쳐!”

“허락 못해!”

둘은 강호 양 옆에 서서는 진지한 기색으로 그녀에게 외쳐댔다. 하지만 그 말에 강호는 눈매를 날카롭게 하며 둘을 내려 보았다.

“나를 의심하는 거냐? 검으로?”

“윽….”

“으으….”

그렇게 말하는 강호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언제나 밝게, 서글서글하게 웃던 여성은 그곳에 없었다. 그저…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자들을 바라보는 싸늘한 맹수의 눈.

“미안해요…. 잘못 했어요….”

“난향, 난화 둘 다 사무실에 있어요. 가져와요?”

그 기세에 압도당한 이브와 에바는 서로의 손을 맞잡고 오들오들 떨면서 대답했다. 강호는 그것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조금 지나서야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는 둘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주며 답했다.

“그래. 난향만 가져오너라.”

“응….”

“알겠어요. 강호, 미안.”

“아니다. 내가 너무 날을 세웠구나.”

둘이 아직까지도 두려워하는 기색이자, 강호는 그것을 풀어주기 위해서 웃음을 내비쳤다. 그것에 안심한 듯 표정이 밝아진 둘은 고개를 끄덕이며 저택을 빠져나갔다.

한편, 그 일련의 모습들을 보고 있던 천후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 애들이 왜 저러지?’

평소엔 강호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볼 때마다 못 잡아먹어 안달이더니 갑자기 태도가 일변했다.

물론 강호가 평소 하는 행실이 좀 하나같이 문제가 있긴 하지만…. 저 갑작스런 변화는 이상하다. 기본적으로 말괄량이 끼가 있는 아이들인데 단박에 순하게 따르게 만들다니?

‘희주 씨도 그렇고…. 검에 관련된 문제인건가?’

천후는 눈치가 없는 편이었지만, 검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그녀의 태도가 조금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직전까지 희주의 태도에 감격까지 내비치던 것이 순식간에 싹 사라지고, 무언가 달관한 듯한 모습이 튀어나왔다.

그런 강호를 희주는 아주 조심스럽게 대하고 있었다. 정말 스승을 대하듯, 검을 미리 보여주고, 실력을 직접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파악하고 싶단 것에도 군말 없이 응했다.

‘그렇게 대단한가?’

어제 복싱 스파링 했을 땐 그다지 대단하단 느낌은 못 받았는데. 물론 동 체급의 여성을 전제조건으로 두면 굉장한 수준이긴 했지만….

뭐 어찌 되었던 아이들이 칼을 가지러 갔으니, 조금 지나면 알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앉아서 쉬고 있던 때였다.

“주인님. 핸드폰이 울리고 있습니다.”

실내에서 울리는 천후의 핸드폰 소리를 들은 희주는 그것을 가져와 천후에게 건넸다.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한 천후는 발신자를 확인했다. 셀레나 였다.

“어. 셀레나. 왜 전화했어?”

<왜 전화하긴! 일이야, 일! 메인 퀘스트! 파급! 지금 바로 사무실로 올 수 있어?>

“…….”

이게 또 이렇게 되나? 천후는 무슨 일 있나 싶어 자신에게 쏠린 희주와 강호의 시선을 받아내며 쓴웃음을 흘렸다.

*

디제스터의 척도는 신神, 천天, 멸滅, 경驚, 파破로 나뉜다. 이중 신급이 가장 강하고, 파급이 가장 약하다. 하지만 가장 약하다는 파급조차도 일반적인 일리미네이터의 평균적인 마력랭크, C랭크 일리미네이터들은 4인이 모여서야 간신히 상대를 한다. 꽤나 힘겹다.

덕분에 그들은 이런 제대로 된 디제스터들이 아니라, 되다만 디제스터. 서브퀘스트 디제스터들을 퇴치하는 것을 주요 돈벌이 수단으로 삼으며 의뢰받는 것을 기피한다.

거의 모든 일리미네이터가 이런 식이기 때문에, 파급 디제스터 퇴치 요청이 들어오면 몇 차례나 돌고 돌기 마련이다. 그 와중에도 최대한 빨리 정해지는 편이지만….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이 말씀.”

파급 디제스터를 단독으로 상대할 수 있는 영천후가 있는 트란제비야는 다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셀레나는 지금까지 만약을 대비해 파급 디제스터를 주력으로 퇴치하는 걸 피해왔다.

덕분에 첫 달에 자의로 받은 파급 퇴치는 딱 한건이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냥 확 받아버렸다.

그것이 의아했던 천후는 현장에 도착해서 슬쩍 물어보았다. 그 물음에 오히려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어왔다.

“응? B랭크가 두 명이나 되는데 몸 사릴 필요는 없잖아?”

“어?”

“강호 씨한테 못 들었어? 강호 씨 B랭크야.”

“…….”

천후는 저 건너편 건물 옥상 꼭대기에 올라서있는 푸른 도복 입은 여성을 바라보았다. 사무실에서 쌍둥이 자매들에게 두 자루의 칼집을 받은 그녀는 그것을 허리춤에 차고서 바람을 맞고 있었다.

시야를 방해할 수도 있을 텐데도 구태의연하게 쓰고 있는 삿갓 아래쪽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저 모습을 보니 그제야 그녀가 일리미네이터라는 실감이 났다.

당장 조금만 지나면 인지를 초월한 괴물과 대면하게 될 텐데도, 미동조차 하지 않고 그것을 담담히 기다리는 그 모습에.

쾅! 콰콰쾅!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는데, 폭음 소리가 들려왔다. 디제스터를 유인하기로 한 수방사 병력들의 화기들이 내는 소리.

그와 동시에 시야 저편에서 집채만 한 크기의 곰처럼 생긴 괴물이 튀어나와서 천후에게 달려들었다.

“후.”

그것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전투욕구가 피어오른다. 시동어와 함께 스펠세이브가 해제되며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머릿속이 녹아들어가는 감각. 그 속에서 오로지 싸우고 싶다는 전투고양에 몸을 맡긴다. 다른 건…뭐 중요하지만 어찌되던 좋아. 어떻게든 되겠지.

“와라.”

싸우자. 단 하나의 의미를 담은 손짓을 하자, 그것을 포착한 괴물이 포효했다. 천후 역시 소리 지르며 양 주먹을 그러쥐었다.

좋아. 좋아! 덤벼! 머리통을 터트려줄게! 머릿속의 이성이 한 꺼풀씩 벗겨지며, 폭력적인 사고가 그 자리를 채우기 시작한다. 마치 지배라도 당해가는 것 마냥.

그러나….

쿵.

전투가 끝났을 때. 그의 머릿속에 들어차 있는 것은 더 이상 고양감이 아니었다.

“굉장해….”

그것은. 경외.

놈의 목이 잘려 땅을 굴렀다. 천후의 눈은 찢어질 듯이 커졌다. 이렇게 놀라본 건…정말 난생 처음이다.

괴물이다.

이 여자는.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쿠폰,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검과 도의 경우 서술에서 용어를 좀 혼용해서 사용하고자 합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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