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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61화 (61/324)

61화

<진리구현자>

그것은 순식간이었다.

디제스터가 교전거리에 들어오자 천후는 여느 때처럼 스텝을 밟았다. 워커와 아스팔트가 마찰하며 고무 타는 냄새가 났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크워어어어어!”

수방사 병력들이 가한 공격을 빠르게 재생해낸 디제스터는 천후를 발견하고는 포효를 내질렀다. 놈은 그리즐리 베어를 연상시키는 외형을 하고 있었는데, 거대한 덩치와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대신 불꽃이 일렁이고 있다는 것이 차이점이었다.

그리고 천후를 발견한 놈은 그 불꽃을 더욱 키우기 시작했다.

“허. 설마?”

그 광경을 보고 흠칫 놀란 천후는 급하게 회피기동을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놈의 눈에서 황백색의 불길이 쏟아져 나왔다.

쿠화아아악! 안 그래도 큰 안구 빈자리에서 시작된 그 불길은 지면에 닿을 때까지 3m반경 이상의 너비에 쏟아지며 천후의 움직임을 쫒았다.

“윽…!”

안 그래도 커다란 거대 괴물이 고개만 까닥이는 것보다 빨리 움직이려니 죽을 맛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근접거리까지 접근해봤지만….

후우우웅! 거의 주변 대기가 짓이겨지는 느낌을 받고 본능적으로 회피를 하자, 그가 있던 자리에 천후의 키보다 큰 곰의 앞발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뒤로도 접근해오며 연속적으로 휘두르는 걸 단순한 백스텝이 아니라, 사이드 스텝을 섞어 밟아 피해낸 천후는 쓴웃음을 흘렸다.

“아. 짜증나는 놈이네. 이거.”

천후의 특성상 접근전을 할 수 밖에 없는데, 접근한 후 자세를 정비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아무리 그라도 완전히 자세가 무너진 상태에서 디제스터와 박투를 진행하는 건 부담이 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뭐 하나 잘못 맞으면 강화주문이고 나발이고 사지 하나가 끊어져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놈이 눈에서 발사한 불꽃은 그 온도가 얼마나 높은지…천후가 피했던 자리의 아스팔트와 그 아래 지면은 완전히 액체화 되었고, 서있던 자동차도 완전히 차체가 녹아내려버렸다.

차라리 일반 일리미네이터처럼 원거리에서 도망 다니는 경우엔 상대가 편했을 것 같은데 천후에겐 꽤 피곤했다.

‘징징댈 순 없지만.’

양 주먹을 꾹 쥔 천후는 슬그머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재미있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지. 명색이 괴물이 아닌가?

아지랑이가 웃는다. 그에 맞춰 괴물의 눈에 다시금 불꽃이 일렁였다. 천후는 다시금 회피기동을 준비했다. 이번엔 끝낼 생각을 하며….

그러나 그때였다.

“음. 조금 늦었다.”

나지막한 음성과 함께, 그의 앞에 푸른 인영이 내려섰다. 건물 위에 뛰어내린 걸텐데, 지면에 떨어지고서도 발소리 하나 나지 않는다.

긴 댕기머리가 그 반동으로 한차례 크게 튀어 올랐다가 가라앉는다. 그래서일까? 자기도 모르게 이 사지에서도 시선이 그 뒷모습에 사로잡히고 만다.

왠지 커 보이는 그 뒷모습에.

“정면은 내가 맡지. 틈틈이 공격을 부탁하마.”

담담히 늘여놓는 소리에 천후의 눈이 커졌다. 무슨 소리지? 포인트 맨을 하겠단 건가? 방금 전 내가 회피기동을 하며 파고드는 걸 봤을 텐데? 역할 배분이 완전 반대잖아?

천후가 이견을 내놓으려고 했지만, 그 순간. 이미 그녀의 허리춤에 있던 두 자루의 칼집 중 하나에서 스산한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일본도보다 훨씬 크게 휘어있는…시미터를 연상시키는 곡도 한 자루가 그녀의 오른손에 들렸다.

“!”

그녀의 손에 칼이 들리는 그 순간…. 천후의 눈이 커졌다.

‘뭐야, 이거?’

수년간 무술을 연마해온 인간으로서의 직감이 그를 엄습해왔다. 딱히 대단한 준비자세도 취하지 않은 자연체. 하지만…!

“가마.”

소리가 났다고 느낀 동시에 그녀의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사람의 몸 대신, 푸른색 선이 도로를 따라 일직선으로 달린다.

그것에 위협을 느낀 것일까? 디제스터의 눈에서 타오르던 화염이 폭사되었다. 사람이 맞는다면 재조차 남기지 않을 정도의 온도. 그러나 그녀는―

“아서라!”

기합성과 같은 소리를 지르며 돌진을 멈추지 않는다. 그런 말소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 싶지만….

안구에서 일렁이던 불꽃이 그 자리에서 실제로 꺼져버렸다.

마치 그런 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꾸워어어어어어!!!!!”

불꽃으로 시각을 대신하고 있었던 걸까? 디제스터는 그녀를 찾아내지 못하고 당황하여 주춤거렸다.

하지만 은색 날 든 무사는 직진을 멈추지 않고, 놈의 공격 범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놈은 인기척을 느꼈는지 반사적으로 천후에게 앞발 공격을 그대로 그녀에게 반복했다.

맞는다면 사람이 아니라 차량이라도 발로 밟은 깡통 꼴로 만들 수 있는 공격!

“뻔하다!”

그러나 그녀는 그 즉시 신형을 위로 튕겨 올리며 손을 피해내곤, 놈의 어깨 쪽으로 날아가 그대로 도를 휘둘렀다.

번쩍. 은색 섬광이 내달린다. 그와 동시에 쿵하고, 그녀에게 공격을 가했던 놈이 오른팔이 지면에 떨어져나갔다. 아무리 재생력을 가진 디제스터라 할지라도, 아예 팔 한쪽이 떨어져나간 것은 커다란 피해인지라, 놈은 고통에 괴성을 토해냈다.

허나 푸른 도복의 검사는 멈추지 않는다. 그대로 허공에 손을 뻗는다 싶더니, 아무것도 없는 곳을 박차 허공에서 다시 도약을 하며 이번엔 왼쪽 어깨를 내려쳤다.

퍼컥! 쿠우웅….

단박에 왼팔까지 끊어지며, 누운 자세로 있던 놈은 졸지에 턱을 땅에 찧으며 드러눕게 되어버렸다.

사박. 작은 소리를 내며 놈의 정수리 위에 내려선 그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고 그대로 칼을 휘둘러 놈의 목을 쳐냈다.

명백하게 칼 길이보다 두꺼운 대가리가 끊어져나가며, 디제스터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꾸물꾸물하고 잘려나간 단면들이 서로를 불러들이며 재생을 해내려든다.

“흠.”

그것을 내려다본 그녀는 몸통으로 발걸음을 옮기더니, 우선 놈의 잘려나간 머리통을 발로 차 거리를 벌렸다. 그리자 아예 목에서 뇌사재생을 시도하는 것이 보인다.

싸늘하게. 작은 웃음을 보인 그녀는 검을 하늘 위로 치켜든다 싶더니, 빠르게 사방으로 휘두르곤 칼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더 이상 볼 것 없다는 듯이 그 거체에서 풀쩍하고 뛰어내려서 등을 돌렸다. 그 직후.

푸확! 그녀가 어느 정도 떨어져 나오고 나서야 갑자기 녀석의 몸에서 피분수가 터져 나오더니, 수십 수백조각으로 나눠진 육편조각으로 변해버렸다.

그 어떤 파급 디제스터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치명적인 피해를 입으면 재생해내지 못한다.

그녀가 건물에서 내려와 달려 나가서 지금까지 걸린 시간은 10초도 되지 않는다. 단 10초 만에 근접거리에서 디제스터를 썰어 죽인 것이다.

“제법 괜찮은 상대였다.”

천후의 앞까지 다가온 그녀는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누가 봐도 압도적인 성과를 올리고도 이런 소리라니?

“…….”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천후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부린 조화가 어떤 것인지…. 이 세상 그 어떤 누구보다도.

왜냐하면….

“선배…. 강화마법이 주특기였군요.”

“응? 아아. 그렇지. 그러고 보니 우린 파티인데도 마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었군.”

겸연쩍게 웃은 강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후의 말을 긍정했다. 천후는 입에 헛웃음이 매달렸다.

그리곤 도저히 안 물어보곤 배길 수 없어 물었다.

“대체…검은 언제부터 연마하신 거죠?”

“음?”

홀린 듯한 목소리에 눈을 깜빡거린 이강호는 천천히 자신의 양 허리춤에 걸쳐있는 두 자루의 칼집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들어 올린 그녀의 눈엔

“평생.”

호승심과 자긍심. 그리고―그 깊이를 감히 잴 수조차 없는 허무가 담겨있었다.

*

디제스터를 퇴치한 뒤처리를 셀레나에게 맡기고 자택으로 돌아온 천후는 강호를 앉혀놓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선배가 B랭크 일리미네이터인지는 전혀 몰랐어요.”

“아….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전혀 나누질 않았었군. 면목이 없다.”

선배 된 입장에서 부끄러운지, 그녀는 얼굴을 붉히곤 고개까지 숙여보였다.

“그런데…선배가 B랭크면 도저히 트란제비야가 이 상태인 게 설명이 안 되는데….”

“으. 응? 아아. 그건…조금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아. 아하하하.”

“사정이요?”

“으음…. 그게. 뭐 직접 보면 더 빠를 거다.”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설명을 피한 강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허리춤에서 긴 환두태도를 뽑아 왼손에 들었다.

“자. 내가 이러고 있을 테니 나에게 방출계 마법을 쏴봐라.”

“네?”

뭔 소리야? 미쳤어? 입에서 꺼내진 않았지만, 눈으로 그렇게 의사표현을 하자 강호는 눈썹을 치켜들었다.

“어허. 말을 들어라. 괜찮으니까.”

“…….”

천후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녀에게 손을 내뻗었다. 천후의 방출계 마법이 아무리 주특기가 아니더라도, 풀 캐스팅으로 쏘면 사람 하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니다. 때문에 그는 만약을 위해서 즉시시전으로 위력을 최소화해 그녀에게 내쏘았다.

하지만….

“응?”

천후의 손끝에 불꽃이 피어오른다 싶더니, 방출하려는 그 순간 사그라졌다. 깜짝 놀란 그는 몇 번이나 더 시도해봤지만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천후는 방금 전 디제스터를 퇴치할 때도 놈이 쏘려던 불꽃이 꺼졌던 걸 기억해냈다.

“이건 대체….”

“주변에서 일어나는 방출계 마법을 무효화 해버린 거다. 내 체질 같은 거지.”

“체질이요?”

“음. 체질 외에 다른 말로 설명할 길이 별로 없군. 하여간 마법사의 마법 뿐 아니라, 디제스터의 발사하는 종류의 공격도 전부 무효화 돼버려.”

살짝 볼을 긁적이며 대답하는 그녀의 모습에 천후는 입을 딱 벌렸다. 뭐야? 그거 완전 대단하잖아? 하지만 그의 생각을 읽은 강호는 웃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모든 능력엔 장단점이 있는 법이다. 이런 마법 무효화를 쓰려면 내가 쓰고 있는 마법도 일시적으로 끊어져버리지.”

“그런 문제가….”

“음. 그리고 난 이것을 켜고 끄는 게 미숙해서…무의식적으로 아군이 쓰는 마법까지 전부 무효화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지. 보통 등 뒤에서 날아오니까 위기감을 느껴버리거든. 그래서…부끄럽다만 한국에서는 아무도 나와 파티를 이루려고 하지 않았었다.”

“…….”

“그리고 셀레나도 메인 퀘스트를 혼자 처리하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해서…나를 서브 퀘스트가 많이 일어나는 중국 쪽으로 돌렸었지. 난 그때쯤 가선 아예 한국에서 활동하는 거 자체가 어려워졌었거든. 하지만 중국에서도 나에게 떨어지는 일은 많지가 않아서 이래저래…. 음. 그렇게 됐다.”

눈물 나는 사정이다. 하긴 일반적인 일리미네이터는 서브 퀘스트를 할 때도 종종 위험한 일이 일어나곤 한다. 그래서 듀오 정도로 뛰는데, 거기서 파티 플레이가 안 되는 인력이 섞여있다고 한다면….

서브퀘스트 디제스터라도 사람 하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니다. 이강호 본인이나 다른 마법사 둘의 마법이 전부 꺼졌을 때 반격이라도 당한다면 대책이 없으리라.

“그래서 난 사실 내심 영원히 후배가 들어올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용케도 너를 잡아왔더군. 게다가 나와 함께 파티를 이뤄도 괜찮은 일리미네이터 일 줄은.”

천후는 감격에 겨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안쓰러움에 한숨을 쉬었다. 이런 사정이 있었다니. 정말 고생 많이 했구나.

그때였다. 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희주는 평소대로의 무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마법을 무효화하는 체질…. 그렇다면 강호 씨는 진리구현자이신거군요.”

“응? 아아. 그렇게도 부르더군.”

“…….”

혼자 고개를 끄덕인 희주는 느릿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허공에서 월하홍취를 꺼내고선 자세를 낮추며 청했다.

“역시…. 부디 검을 한번 맞대게 해주시겠습니까?”

“…약속한 바이니 어쩔 수 없지.”

희주의 청에 다시금 말투가 바뀐 강호는 뽑은 검극을 그대로 희주에게 겨눴다. 희주 역시 월하홍취를 뽑아 검투를 벌일 준비를 했다.

그 모습을 본 천후는 부탁을 받지 않았음에도 주변의 돌 하나를 주워서 툭하고 던졌다.

그리고….

째앵! 단 한 번.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한 자루의 검이 손을 빠져나와 허공을 날았다.

월하홍취.

“으음…!”

백옥 같은 그녀의 손아귀가 처참하게 찢겨져있었다. 희주는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힘겹게 억누르며 손아귀를 감쌌다.

“희주 씨!”

깜짝 놀란 천후가 그녀에게 달려가 치료마법을 시전 했다. 천후의 치료, 재생마법은 주특기만큼은 아니지만 꽤 효율이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손아귀가 잘 치료되지 않는다. 이 정도 상처는 금세 아물어야 하는데도.

“아니 이게 왜…!”

“괜찮습니다. 주인님.”

“괜찮다뇨?! 손 안쪽이 완전히 벗겨져 나갔는데!”

“이 정도면 싼 대가입니다. 과연 진리 구현자군요. 감사합니다, 이강호 씨. 정말로 검을 맞대주셔서….”

“…….”

강호는 대답 없이 그저 고개만 슬쩍 끄덕였다. 둘의 태도를 본 천후는 답답해서 물었다.

“대체 무슨 소리예요? 진리 구현자란 게 그냥 마법을 무효화하는 체질 같은 게 아니고 다른 뜻이 있는 거예요?”

“네…. 단지 그것뿐이라면 저런 거창한 이름을 붙이지 않았테죠. 진리구현자란….”

희주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강호를 올려보았다. 그 눈에 담긴 것은…경외.

“무武의 극한에 접어든 이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세상의 진리를 몸으로 체현한 존재들.”

“무의 극한?”

“네.”

반문에 고개를 끄덕여 보인 희주는 강호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서 단언했다.

“즉…이강호 씨야말로…세계 최강의 검사라는 겁니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감사드립니다.

내일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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