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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62화 (62/324)

62화

“세계최강이라니. 당치도 않다. 난 아직 멀었다.”

절레절레 댕기머리가 허공에 흔들린다. 하지만 희주는 조용히 찢어진 손아귀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진리구현자에게 당한 상처는…마법으로는 쉬이 낫지 않는다더니 정말이었군요.”

“…….”

희주의 말에 강호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지만…그것도 일순. 손에 검을 그 순간 일변한 그녀의 눈매가 다시금 날카로워졌다.

“왼손은 여력이 있어 보이는군. 이번엔 다르게 상대해주지.”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여 보인 희주는 월하홍취를 주워와 강호와 마주섰다. 오른손은 도저히 칼을 쥘 수 없어 늘어뜨리고 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위태로워 천후는 그녀를 말리려 들었다.

“희주 씨! 이제 그만두세요!”

“…….”

그 목소리에 희주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하지만….

“주인님. 저에게도…향상심이란 것이 있습니다.”

“…….”

“제 검재劍才는 하잘 것 없습니다만…. 그래도 눈앞에 최고의 고수가 있다면…가르침을 받아보고 싶었습니다.”

등을 보이며 말하는 목소리에는 그녀에게서 자주 느낄 수 없는 생기가 전해져왔다. 이런 모습의 그녀를 천후는 딱 한 번 본적이 있었다.

그 날의 밤.

“…….”

말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천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니…극구 말린다면 그녀는 결국 그의 말을 들어주리라. 그런 여자니까.

하지만…그녀는 개인적인 욕구를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정말 처음으로, 천후에게 관련된 것 이외의 것으로 욕구를 보이고 있었다.

꺾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생기가 도는 모습을…더 보고 싶었다.

“이번엔 치고 들어와 봐라.”

“사양 않겠습니다.”

천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희주는 강호의 지시에 응하여 월화홍취를 내찔렀다. 휘어있는 도라고 할지라도, 날이 달린 이상 찔리면 사람 살은 충분히 베인다. 하지만 강호는 대수롭지 않단 듯이 그것을 쉽사리 피해버렸다.

“느리다. 좀 더 동작을 작게 해라.”

뿐만 아니라…. 어느새 왼손에 들고 있던 칼이 희주의 목에 닿아있었다. 그것을 치운 강호는 다시 그녀에게 행동을 주문하며 공격을 기다린다.

벤다. 피한다. 목에 닿는다.

찌른다. 피한다. 목에 닿는다.

부딪히고 연격을 노린다. 그대로 파훼되고 목에 닿는다.

무슨 짓을 해도 강호의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그 모습을 보며 천후의 얼굴이 점점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홍희주의 검술 솜씨는 그렇게 녹녹한 것이 아니다. 동체격의 여성이라면 검도 선수가 와도 쉽게 한판을 따낼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이건 격이 다르다. 이강호는 마치 희주를 어른이 어린아이 손목을 꺾듯 쉽사리 제압하고 있었다.

어떨 땐 힘을 쓰고, 어떨 땐 기술을 써서 제압한다. 같은 발을 써도 이강호가 더 빠르고, 검격을 나눠도 이강호의 검격이 더 빠르다. 패턴을 늘려 상대하지만, 족족 파훼 당한다.

인간이 검을 휘두를 수 있는 관절 한계상의 검로를 모두 파악하고 있기라도 한 듯한 그 모습엔 감탄밖에 할 수가 없다.

그것을 지켜보던 천후의 심장박동이 조금씩 빨라져갔다.

그리고 그 뒤로 20분 후.

“하아…하아….”

완전히 땀에 절어버린 희주는 숨을 몰아쉬면서 강호를 바라보았다. 똑같이 20분을 보낸 그녀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저 냉정한 눈을 하고 있었다.

강호는 그녀의 상태를 확인해보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하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희주는 월하홍취를 손에서 없앴다. 그 직후, 긴장이 풀려서인지 희주가 비틀거리며 넘어지려 하는 것을 천후가 급히 달려가 부축해주었다.

“괜찮으세요?”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서….”

“아니에요. 물 드세요.”

천후는 어느새 자신과 똑같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이브, 에바가 들고 온 물수건과 물을 받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희주는 조심스레 물 몇 모금을 입에 물었다가 삼켰다.

“하아…하아…. 어떻습니까?”

“흠….”

평을 바라는 희주의 물음에 강호는 살짝 표정을 굳혔다. 어떻게 말해야할지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솔직한 감상을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무인이 도리이기에.

“기技는 어느 정도 닿았다. 하지만 지금 그 몸으론 더 이상 늘려봐야 잡스러울 뿐이다. 운동을 더 해. 기초체력을 늘려. 체중을 불리고 근육을 더 붙여라.”

“…….”

“어느 정도 타고난 운동신경을 가지고 있더군. 하지만 그 몸 그대론 어떤 운동을 해도 경지에 이르진 못한다. 거기에서 다음으로 나아가는 방법은 순수하게 육체를 단련해서 쌓아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렇…습니까?”

단호한 강호의 대답에 희주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강호는 오히려 그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다.

격차가 워낙 있었기 때문에 압도적으로 보이긴 했지만…그녀가 어느 정도 몸을 만든다면 그것만으로 격차는 꽤 크게 줄어들 것이다. 1년 정도만 투자해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왜 저런 얼굴을 하지?

하지만 그 순간. 강호의 눈에 영천후가 들어왔다.

희주를 끌어안고서 걱정하고 있는 남자.

희주는 그 품에서 빠져나올 줄 모른다. 이제 다시 움직일 정도는 충분히 될 텐데도…. 그것을 보고 깨닫고 만다.

‘그렇군….’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맺혔다. 그것은…비웃음으로도 보이고, 다른 것으로도 보이는 애매한 것. 하지만 그것은 맺힌 즉시 사라졌다.

빠르게 냉엄한 얼굴로 돌아온 강호는 담담히 말했다.

“…그렇군. 여자이고 싶은 거군.”

“…….”

희주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살짝 어깨가 떨렸다. 그 움직임만으로 충분했다. 강호는 작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그 이상의 발전은 보기 어려울 거다. 뭐어…. 그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나? 어차피 자네의 주인인 영천후는 자네가 보호해야할 대상은 아니다. 호위를 위한 무기술을 익힐 필요는 딱히 없지. 그리고 아마 자네 수준만 해도 서포터들 중에선 손에 꼽을 거다. 아니, 아마 상대를 찾을 수 없겠지.”

“그렇습니까? …그렇군요.”

강호의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새겨듣던 희주는 잠시 고민하는 듯, 검지를 굽혀 그 중간을 입에 댔다. 눈동자의 초점이 일렁였다. 그러나 곧…그 눈동자를 눈꺼풀이 덮었다가 다시 내보인다.

일렁임은 어느새 없어져있었다. 대신 그녀는 몸을 아주 조금, 천후와 더 밀착했다.

그 모습에 강호의 눈에 살짝 이채가 감돌았다.

‘포기했나. 대단하군.’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선을 그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보통 이것을 단숨에 결정하지 못해 인생마저 망가지는 이들이 태반이다. 그 의사결정을 이렇게 빠르게 내리다니.

이 부분에서는 검을 손에 들고 있는 강호조차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희주의 상태를 본 강호는 환두태도를 칼집에 집어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때.

“잠깐만요. 선배. 저도 상대해주세요.”

한참 희주를 안정화시키던 천후는 극구 C랭크 주문까지 써서 그녀를 회복시키고는 강호 쪽으로 걸어왔다.

강호의 눈썹이 튕겼다.

*

“아서라. 맨손으론 상대가 안 된다.”

“…해보기 전엔 모르잖아요?”

그 말을 입에 담는 천후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오랜만이었다. 이렇게…강해보이는 사람은.

유그드라실에서는 17살이 지난 후론 그와 맞상대해서 버텨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격투술의 기본을 가르쳤던 사람들조차 상대가 안됐다.

덕분에 그 뒤로는 어떤 사람과 경기를 하던, 싸움을 하던 시시했는데…. 눈앞에 이런 인간이 있다니?

“하….”

강호는 천후의 눈에서 끓어오르고 있는 전의를 읽고서 헛웃음을 지었다. 같은 무武를 연마하는 인간으로서…저게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강호는 너무나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당연한 것이…자신이야말로 똑같은 것에 굶주려있으니까.

“남자답군.”

검을 잡은 강호의 입매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미소가 걸렸다.

그러고 보니 빚이 있었다.

“하긴…. 천후 너는 나와 스파링도 해줬었지. 앞으로 헬스장도 신세를 져야하고.”

“그래요. 그러니까 부탁드려요.”

목소리에 호승심이 한 가득이다. 그에 응해, 강호의 목소리도 약간 들떴다. 두 사람 다 눈에…광기라 불러 마땅한 것이 서리기 시작했다.

꾸우욱. 양 주먹을 그러쥐는 소리가 조용한 주택가의 마당을 채운다. 이미 싸움이 시작된 것 마냥…소리조차 내지 않고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지기 시작했다. 강호는 천천히 옆으로 서며, 어느새 검만 앞으로 내밀어 좌반신만 보이고 있었다.

바로 그 때.

“그만 해, 강호 서방!”

“오빠 하지 마요!”

허리에 무언가가 달라붙는 느낌에, 두 야수의 눈이 돌았다. 방해하는 것들을 모두 치워버리겠다는 듯, 살기마저 감돌았다. 하지만…허리춤에 몸을 붙이고 덜덜 떠는 아이들의 모습을 본 천후는 흠칫하고 기세를 풀었다.

“이브…. 음 이브 맞지?”

끄덕. 백발의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후를 올려보다가, 다시 히익 하고 소리를 내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래도 지금 내 표정이 좀 굉장한가본데…. 당황한 천후는 자기 얼굴을 꾹꾹 주물러서 올라간 광대뼈라거나 눈매 등을 정리하고는 그녀의 양어깨에 손을 올렸다.

“왜 그래, 이브야. 강호 선배랑 뭐 나쁜 거 하려는 거 아니야.”

“그래두…. 다치는 거 더 이상 보기 싫어. 무섭단 말야…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몸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얼굴을 박은 가슴에는 약간 물기마저 느껴졌다. 그에 놀란 천후는 강호를 바라보았다. 마침 그쪽에서도 에바가 그녀를 끌어안고는 눈물을 보이고 있었다.

“선배. 얘네….”

“아…. 음. 조금 사정이 있어서. 알았다, 알았어. 에바. 안 하마. 그러니 진정해라.”

“그치만…강호서방이 선생님 손 다치게 했잖아….”

“미안하게 됐다. 그러니까 안한대도. 뚝.”

에바의 눈에서 눈물을 훔쳐낸 강호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미안하다, 천후. 아무래도 오늘은 안 되겠군.”

“아아. 네, 뭐. 괜찮아요. 이브. 진짜 안할게. 이제 떨어져도 돼. 응? 울지 말고.”

“…정말? 강호서방이랑 싸움 안할 거예요?”

“그렇다니까.”

울먹이며 올려보는 이브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안심시킨 천후는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사람에게 호승심이 든 건 정말 오랜만이었지만….

이래서야 어쩔 수 없다. 괜히 무시하고 했다가 중간에 아이들이 뛰어들기라면 크게 다칠 수도 있을 테고.

‘조금 아쉽긴 하네.’

살짝 입맛을 다신 천후는 이브가 강호 쪽으로 가서 짹짹거리기 시작하는 걸 보고서 그저 웃었다. 그러다가, 이전부터 한결같이 들었던 소리에 살짝 의문을 느끼며 물었다.

“아. 그런데 선배. 얘들 왜 선배보고 서방서방 거리는 거예요?”

“응?”

진짜 오래전에야 사람 성 뒤에 서방 자 붙이는 건 흔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장인이 사위한테도 잘 붙이지 않는 말이다. 아이들 말버릇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이건 그 중에서도 꽤나 두드러졌다.

“아…. 그건 또 사정이 있는데….”

그 질문에 강호는 살짝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답변을 피하려 들었다. 하지만 그 때 이브와 에바가 강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대신 대답했다.

“우린 크면 강호서방 색시될 거라 그래요!”

“에바 약혼녀야! 이 팔찌는 약혼 선물이예요!”

…….

“경찰서 번호가 몇 번이더라….”

“잠깐! 오해다! 내 말을 들어다오!!!”

방금 전까지 살벌한 분위기로 감싸여있던 마당은 이젠 또 다른 긴장감 넘치는 외침으로 채워졌다.

*

그날 늦은 밤. 사무실에 마련된 욕실 안.

쏴아아. 샤워기에서 떨어져 내린 물줄기가 몸에 닿는다.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강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욕실 밖에서는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브와 에바.

사랑스러운 아이들. 자신에게 의존하는…자신이 지켜야 할 핏덩이들. 그녀에게 있어 이들보다 중요한 것도 없었다.

하지만….

“…….”

꾸욱.

가만히. 주먹을 쥔다. 검을 쥐는 손. 악력만으로 호두 껍데기를 으깰 수 있는…일부러 그렇게 단련한 손이 떨렸다.

오늘만큼은…그녀들이 원망스러웠다.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그와 겨뤘다면….

쿵. 쿵. 심장이 고동친다. 강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후우….”

무슨 생각을…. 그런 것을 가지고 아이들을 원망하다니. 정말 아직 멀었다. 스스로를 책한 강호는 고개를 들었다.

세면대 앞에 있는 거울로 그녀의 몸이 비쳐보였다. 남자라고 외쳐대는 것과는 무관하게…두드러질 정도로 튀어나온 유려한 곡선의 몸.

여자의 몸.

강호는 가만히 자신의 몸에 달려있는 여성으로서의 상징을 쥐었다. 자신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없었으면 했던 것.

쿵. 쿵.

심장이 뛰었다.

그 끝이…오늘따라 뾰족하다.

“……!”

어느새 붉어져 버린 얼굴을 가리려 머리를 거칠게 털어낸 그녀는 빠르게 물기를 정리해내고는 안방에 들어가 누웠다.

자자. 자면 괜찮아 지리라.

이…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각도.

쿵. 쿵.

심장이 뛰었다.

잠은, 오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쿠폰, 코멘트 모두 감사드립니다.

내일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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