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트란제비야는 지난 2주 사이에 4건의 파급 디제스터를 퇴치했다. 다른 업체에서 보자면 미친 페이스라고 학을 뗄 수준이었지만, 그들은 그걸 대수롭지 않게 해냈다.
바로 그 4건 째의 디제스터, 또 다른 ‘그렘린 페이스’를 쓰러뜨린 직후였다.
“요즘 그렘린 페이스가 자주 나타나네요.”
“음…. 동일한 종류의 디제스터가 자주 출몰하는 경우는 드문데.”
그들이 처리한 4건 중 2건이 그렘린 페이스. 그 외에 다른 곳에서도 두 건이 있었다고 유그드라실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되어있었다.
디제스터의 난점은 발생 장소, 발생 시간뿐 아니라, 발생 종류조차도 랜덤성이 높다는 것이었는데, 근래 들어서 갑자기 그렘린 페이스가 자주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꽤 까다로운 타입인데…이렇게 계속 나타나면 일리미네이터들 피해가 크겠어요.”
“음. 아니 그렇지도 않다. 연속 발생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나름대로 대응 전략들이 나오기 시작한 모양이더군. 사실 일로선 고정된 적이 낫지.”
“아아.”
그건 확실히 그렇다. 아무리 까다로운 놈이라 한들, 패턴이 똑같은 놈이라면 숙련될 경우 상대하기가 쉽겠지. 애초부터 4인 이상 일리미네이터를 보유한 큰 기업들의 경우 사전 훈련 등을 통해 미리 대응할 수도 있다.
“그럼 저희도 처리가 끝났으니 돌아갈까요?”
“음. 그러지. 수고했다, 사장.”
“선배는 좀 관둬주세요, 그거.”
사장 소리에 천후는 목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맞는 호칭이긴 하지만 아직 적응이 안돼서 부끄럽다. 하지만 강호는 후후하고 웃음만 짓고는 대답은 해주지 않았다. 아무래도 바꿔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그렇게 퇴치 후의 뒤처리는 셀레나에게 맡기고 돌아가려고 했던 그때였다. 둘 외에는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도로 저편에서 무슨 결혼식장에서나 볼만한 기다란 리무진 한 대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응? 아직 주민 대피령이 해제되지도 않았을 텐데?”
서울은 디제스터 발생 빈도도 높고, 얼마 전 ‘텐타클 뱀파이어’에 의한 인명 피해 등으로 인해 디제스터에 대한 공포감이 높아져 있었다. 때문에 대피령이 떨어지면 민간인들은 해제될 때까지 절대 거리를 돌아다니지 않곤 했는데 차가 돌아다니다니?
그렇게 놀라고 있을 동안 리무진은 그들의 앞까지 다가와 멈췄다.
“음. 벌써 끝났나 보군. 역시 빠른데.”
“에이. 형이나 제가 나선 거 보다야.”
리무진의 보조석, 그리고 맨 뒷좌석의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
한 명은 황금을 녹인 듯한 금발 머리에 전형적인 유럽계 백인 외모를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한 30대의 남자였다.
다른 하나는 검은 머리를 샤기컷으로 자른 앳된 얼굴의 한국 남성이었는데, 정장을 입고 있는데도 어린 티가 남아있는 게 숨겨지지 않았다. 걷는 걸음걸이라거나, 미묘하게 껄렁거리는 상체 움직임까지 겹치니 억지로 양복을 입혀놓은 고등학생 양아치 같았다.
그중 금발의 남자는 영천후를 바라보면서 씩 하고 웃더니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다행히 아직 돌아가진 않았었군. 사무실까지 찾아가는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되겠어.”
“누구시죠?”
천후는 그의 미소를 보고서 약간 인상을 굳혔다. 분명히 호인상인데…이상하게 눈에 밟혔다. 저 웃음 아래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인상이라고 해야 하나? 게다가 입에서는 아주 유창한 한국어가 나오고 있는데, 외모가 있다 보니 이질감이 굉장하다. 셀레나에게서도 종종 느꼈던 감상이긴 했지만, 그것의 수십 배 이상이다.
한편, 그가 경계하는 기색을 보이자, 금발의 남자와 함께 있던 한국인 남성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 이 새끼가. 이 나라에서 일리미네이터 일을 하면서 형을 모른단 말이야?”
“…….”
이건 또 뭐지? 천후는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의 그를 가만히 뜯어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본 적은 있는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연예인이십니까? 제가 TV를 잘 안 봐서 모르겠네요.”
“뭐? 미친 새끼.”
헛웃음을 흘린 남자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천후에게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금발의 남자가 팔을 뻗어 그를 막았다.
“워워. 진정해라, 찬휘야. 우린 서로 처음 만나는 사이니까 모를 수도 있지.”
“아니죠, 형. 그럴 순 없죠. 사실상 형이 이 나라 일리미네이터 대빵인데.”
“아서라, 아서. 그리고 좀 쪽팔리게 그런 소리 좀 하고 다니지 말고.”
“쳇. 형은 사람이 너무 순해.”
찬휘라 불린 남자는 그 뒤로도 뭐라고 궁시렁 댔지만, 쪽팔린단 소리가 먹혔는지 더 이상 소리를 지르거나 하진 않았다. 아무래도 겉으로 보이는 모양새를 굉장히 신경 쓰는 성격인 듯싶었다.
그동안 천후와 그 외 트란제비야 일행을 한번 쓱 훑어본 남자는 다시 한 번 얼굴에 미소를 띠며 손을 내밀었다.
“소개가 늦었군. 나는 로마이어 엔체스터라고 하네. 엔체스터 콜로니에서 일하고 있고, 부끄럽지만 B랭크 일리미네이터들의 대변인 역할도 맡고 있지.”
“당신이…!”
그 소문이 자자한 로리콘인가! 천후는 새삼 그를 다시 뜯어보았다. 서양인답게 훤칠한 키에, 준수한 외모가 눈에 들어왔다. 친란의 오빠이니 분명 재력도 남다르겠지. 조건으로만 보자면 흠잡을 곳이 없는 남자다. 그런데 어쩌다가….
‘뭐지?’
로마이어는 자신을 바라보는 천후의 눈빛에 뭔가 이상한 감정…굳이 말하자면 안쓰럽거나 불쌍하단 느낌이 섞여있자 아주 살짝 웃음 띤 얼굴을 찡그렸다. 초면에 왜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편 천후는 그가 내민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먼저 내밀기는 했지만, 그의 손에는 얇은 흰색의 실크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평소에 끼고 다니는 걸까? 아니면….
“트란제비야의 영천후라고 합니다.”
의심을 가지면서도 천후는 그것을 숨기며 그와 손을 마주 쥐었다. 손에 아주 약간의 힘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느낀 천후는 인상을 굳혔다. 하지만 곧 악수를 빠르게 끝낸 로마이어는 찬휘에게 고개를 돌렸다.
“찬휘야. 너도 와서 인사해라. 앞으로 자주 봐야 할 친구야.”
“자주 봐야 하나요? 뭐 좋죠.”
로마이어의 말에 입 끝을 양쪽으로 쭉 찢은 그는 천후의 앞에 다가와 섰다. 로마이어도 조금 껄끄럽지만, 지금 이 남자는 껄렁대는 것이 영 초면부터 보기 안 좋다. 하지만 첫인사는 저쪽에서 건네 온 이상 피할 순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천후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이쪽에서도 잘 부탁드립니다. 예에.”
남자는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하며 천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곤…. 로마이어 때와는 다르게 정말 진심으로 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
천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하지만 찬휘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구둣발을 들어 천후의 워커를 꾹 하고 짓밟았다.
“정말 자알 부탁드려요. 예?”
지직. 지직. 워커 앞쪽을 발로 비비는 소리가 들려왔다. 워낙 단단한 신발이라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체중이 실려 있는 것은 확실히 느껴졌다.
그 순간. 천후는 조용히 확신했다.
싸움을 걸러왔군.
그럼……. 받아줘야지.
“아이. 그럼요. 물론이죠.”
생긋. 상쾌한 웃음으로 되받아쳐준 천후는 그대로 찬휘와 마주 잡은 오른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시작과 동시에 찬휘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던 힘이 완전히 풀렸다. 그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꾸…우우우욱.
“윽!”
영천후의 굵은 손에 검붉은 혈관이 드러났다. 그러자 굳어있던 찬휘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안색이 시뻘게지며, 차마 소리는 지르지 못하고, 지금까진 지그시 밟는 수준이었던 구두로 천후의 발등을 부서져라 몇 번이나 내려찍었다.
“하하. 왜 그러세요. 응? 어디 아프신가보네.”
그러나 천후는 그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에 힘을 더 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찬휘는 더 이상 발버둥 치는 것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윽고….
뿌…끄그그극…. 빠가각!
“끄아아아아아아악!”
찢어지는 비명와 함께 찬휘가 자지러지며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손과 손가락뼈가 동시에 복합 분쇄골절 당하는 고통이란 사람이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도 최대한 버티고 버틴 것이지만, 결국 입가에서 흰색 거품을 내뿜으며 주저앉고 말았다.
천후는 그런 찬휘의 정수리를 귀엽다는 듯이 왼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리면서 로마이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오셨죠?”
눈을 아주 약간 가늘게 뜬…비웃음이 머금어져있는 천후의 얼굴을 보면서도 로마이어의 입가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은 이제 웃고 있지 않았다.
*
주민 대피령이 해제된 거리의 인근 카페. 로마이어 엔체스터는 그곳을 잠시 동안 전세를 내고 영천후와 함께 들어왔다.
한 테이블에 마주 앉은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분위기를 짐작해서인지, 함께 온 트란제비야 일동도 입을 다물었다. 오직 옆 테이블에 앉은 박찬휘가 고통으로 신음하는 소리만이 유일하게 간헐적으로 들렸다.
‘씨발….’
박찬휘는 손의 상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 치료를 받으러 가고 싶었지만, 로마이어가 따로 보내줄 기색을 보이지 않자 안색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그로선 로마이어의 의사를 거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덕분에 그는 정말 죽을 것 같은 통증에도 큰 소리 하나 제대로 못 내고 가만히 있어야 했다.
그러는 동안 서로가 주문한 음료가 테이블에 도착하자, 천후와 로마이어는 동시에 잔을 들어서 그것을 마셨다. 그러면서도 눈은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로마이어의 입에서 첫마디가 떨어진 것은 한 여름임에도 굳이 시켰던 뜨거운 음료가 식을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메인 퀘스트만 전문으로 하겠다고 했더군.”
“네. 저와 강호 선배 듀오면 그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천후의 말에 로마이어는 시선을 강호에게 옮겼다. 같은 B랭크로서 조금은 안면이 있었던 강호는 그에게 살짝 목례를 하는 것으로 인사를 마쳤다.
“그렇군. 뭐 내가 하려는 말은 별것 아니야. 사업 방향을 조금 수정할 생각 없나?”
“…무슨 의미 신지?”
본론이 나왔군. 천후는 눈매를 가늘게 떴다.
한편, 뒤에선 로마이어가 용건을 밝히자마자 셀레나가 얼굴색을 바꾸며 나서려했다. 사업의 방향은 그가 정하지만, 그 구체적인 운영 방향, 비용 문제들이 거론되기 시작하면 힘들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순간, 희주가 팔을 뻗어서 그녀의 행동을 막았다. 셀레나가 눈빛으로 왜 그러는가를 묻자, 희주는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이미 오너가 직접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겁니다. 부르기 전에 나서지 마세요.”
“…….”
그 말에 셀레나는 어깨를 움찔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맞다. 그가 걱정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미 그녀가 나설 타이밍은 지났다. 아니…그보단 그 타이밍을 일부러 천후가 주지 않았다.
“…….”
희주는 가만히 천후의 등을 바라보았다. 아직 미숙하지만… 그가 쳐놓은, 트란제비야 일동 모두를 감싼 무형의 울타리가 느껴졌다. 그녀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로마이어가 말했다.
“다른 뜻은 아니야. C,D랭크들에게 일을 좀 더 배분해주라는 거지. 그들에겐 간간이 하는 메인 퀘스트는 큰 수입이 되네.”
“글쎄요. 별로 그런 기색은 아니던데요. 오히려 환영하는 분위기던데. 커뮤니티에서도 일관된 반응이었습니다만.”
“그건 그들이 근시안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야. 전체 매출은 분명 떨어질걸?”
그의 말에 천후는 코웃음을 쳤다. 회사를 인수받고 파급 디제스터를 잡던 2주 동안 천후는 그 와중에도 정신없이 한국 일리미네이터 업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귀가 닳도록 들었다.
구체적인 수치까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덕분에 천후는 적어도 지금 로마이어가 하는 말이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소리인지는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덕분에…. 지금처럼 오히려 양손으로 깍지를 끼며, 얼굴을 가리면서 되물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리스크 적인 면에서 그들은 서브 퀘스트 만을 하길 원합니다. 제가 보기엔 당신이 진짜 하는 생각은 그게 아닌 것 같은데요.”
“무슨 뜻이지?”
“솔직해죠. 우리. 당신은 지금 메인 퀘스트에 C,D랭크들이 끌려가지 않아서, 그들의 부상 치료나 재충전을 위해 썼던 시간이 줄어들어서 당신들이 쓸어먹던 서브 퀘스트를 나눠주게 생겼으니까 저에게 온 것 아닙니까?”
로마이어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그는 곧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솔직히 굉장히 불쾌한데. 웃기지 좀 말게. B랭크들은 듀오 팀으로 메인 퀘스트를 잡을 수 있어. 고작 그런 이유로 이런 이야기를 할까? 우린 어디까지나 일리미네이터 업계의 전체 이득을 위해서….”
열변을 토하는 로마이어의 얼굴을 보며, 천후는 피식 웃으며 내뱉었다.
“그럼 당신들도 저희처럼 하세요.”
“뭐?”
로마이어의 말허리를 끊은 천후는 그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그 안면을 뚫어버릴 것 같은 시선에 로마이어는 혀가 멈춰버렸다.
“B랭크 일리미네이터 듀오는 보통 한 달에 두건 정도의 메인 퀘스트 밖에 처리를 안 하죠. 정말 전체 이득, 그리고 당신들의 이득을 함께 높이려면 당신들이 메인 퀘스트를 처리하는 회전율을 높이면 되는 문제 아닙니까? 그런데 왜 여태 안 하고 있었죠?”
당신들이 정말로 업계의 전체 이득…안전을 포함한 진정한 전체 이득을 생각한다면 그래야 마땅하다. 수익도 양쪽 모두 그쪽이 더 크게 나겠지. 천후는 그렇게 말해온 것이다.
로마이어의 말문이 막혔다. 아주 조금, 눈동자가 그의 시선을 피해 갔다.
“그건….”
서른이 넘은 그의 이마에서 흐르기 시작한 땀을 본 천후는 말을 골랐다. 어떻게 말하면 확실한 반응이 올까?
천후는 짧은 시간 뇌리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말들 중 가장 직접적인 것을 집어 들었다. 어차피 여러 수사를 붙인 말은 취향이 아니다.
결정을 마친 천후는 테이블에 손을 짚고, 몸을 앞으로 쭉 빼 얼굴을 그의 코앞에 멈추고선 그 말을 내던졌다.
“……겁나서?”
테이블이 부서질 듯한 소리가 났다.
============================ 작품 후기 ============================
추천, 선작, 쿠폰, 코멘트 모두 감사드립니다.
내일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