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선배와의 술자리>
로마이어와의 설전 아닌 설전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천후는 옷을 갈아입고 사장 의자에 앉았다. 사무실 안에 괜히 이거 하나만 고가품이라서인지, 아니면 자리가 주는 압박감 때문인지 쉽게 적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그의 생각이고….
“오빠, 멋있어!”
“풍채 좋아!”
“그, 그래?”
아이들의 생각은 다른지 옆에 서서 그렇게 꺄꺄 거렸다. 아무래도 셀레나보단 그가 앉아있는 게 훨씬 모양새가 낫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워낙 큰 의자이기도 했고.
그 덕분에 지금까지 조금 각 잡고 진지한 태도를 보이고 있던 천후의 입이 헤벌레 벌려졌다. 뭐 사람 하루 이틀에 바뀌는 게 아니다.
“오늘은 정말 잘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저쪽에서 보고 있던 희주는 천천히 다가와 그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해왔다.
“갑자기 나타나서 당황하셨을 텐데…. 잘 대응하시더군요.”
“그런가요? 너무 공격적으로 군 것 같기도 한데, 전.”
강한 척을 하려고 애쓰다 보니 그런 태도가 나와 버렸다. 오늘은 그렇다 치고, 앞으로는 좀 고쳐나가야 하지 않을까 내심 생각했던 천후였다. 하지만 희주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조금 거칠긴 했습니다만…. 앞으로도 그 정도의 태도를 고수하시는 것도 일종의 전략이 될 수 있습니다.”
“흠…. 하지만 저들이 저희 목줄을 쥘 수 있는 위치에 있잖아요? 이전에도 트란제비야에 일이 아예 끊긴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네. 물론 아직 칼자루는 저들이 쥐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길지 않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주인님에게 의존하는 때가, 혹은 이용하기 위해 접근하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님께선 그 모든 시도를 힘으로 뒤집어엎으실 수 있으신 분이시니 태도를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
힘의 논리인가. 천후는 살짝 표정을 굳혔지만 그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람들을 전부 떠안고 가면서도 내가 나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으면 뭐라도 다 이용해야 한다. 하물며 힘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
담담히 뜬 그 눈에 결의가 실린다. 의자에 앉은 몸을 꼿꼿이 세운다. 그 모습에 희주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가 사라졌다. 그녀는 그의 목의 긴장을 풀어주며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앞으로는 방침을 조금 달리할 생각입니다. 오늘같이 길에서 갑자기 만난 경우는 어쩔 수 없습니다만…. 이후엔 주인님과 만나기 이전에 저나 셀레나를 먼저 통하도록 할까 합니다. 괜찮으신지요?”
“그건 어떤 의미가 있는 거죠?”
“저희를 통한다면…일단 상대는 주인님과 직접 대면한다는 부담감이 덜해집니다. 그들이 하는 말을 저희가 순화시켜서 주인님께 전해드릴 수 있겠죠. 혹은 저희 차원에서 좀 더 상대의 의향을 분석하고서 말씀드릴 수 있을 겁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주인님의 경우엔 굳이 만나볼 필요가 없거나, 각오가 되지 않은 이들까지 전부 만나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게 됩니다. 즉, 저희는 회사 실정에 개입하는 영역이 꽤 넓은 비서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뭔가…이상한 커튼 치고 그 뒤에 있는 대마왕 같은 게 되는 건가요, 저?”
“비슷합니다. 당장은 그저 기본 방침일 뿐입니다만…. 최종적으로는 그렇게 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지금은 희주, 셀레나, 강호가 대마왕 휘하의 여 간부 1, 2, 3번인가.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어버린 천후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직 실감이 와 닿는 이야기는 아니다.
“물론 이런 체제라도 모든 판단은 주인님의 것을 우선합니다. 이미 주인님이 나선 상태라면 저희를 따로 찾지 않으시는 한 절대 개입하지 않을 겁니다.”
“네. 그럼 그렇게 하죠. 저도 확실한 정황 파악이 안 된 상태에서 말실수로 분위기를 꼬고 싶진 않으니까.”
어차피 당분간은 찾아오는 손님 등을 그녀들이 그저 상대하는 정도인 이야기다. 그걸 굳이 그리 길게 심사숙고할 필요도 없어서 천후는 결정을 내렸다. 그 말을 끝으로 희주는 말을 멈추고 안마만 계속했다.
그것을 공적인 대화가 끝났다는 것으로 받아들인 이브와 에바는 다시 쪼르르 달려왔다.
“오빠오빠. 그래도 앞으론 막 사람 다치게 하고 그러진 마요. 그러면 나쁜 사람이야.”
“응?”
아…. 그 껄렁거리는 녀석 이야기인가? 그러고 보니 뒤에 애들이 보고 있었는데, 못 볼꼴을 보였다. 천후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 미안하다, 얘들아. 무서웠니?”
“응…. 무서웠어요…. 에바는 사람들끼리 싸우는 거 싫어요….”
그렇게 말하며 에바는 꾹 하고 그의 팔을 끌어안으며 얼굴을 묻었다. 팔을 통해서 떨림이 전해져왔다. 놀라서 옆을 보니, 이브도 고개를 폭 숙이고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다.
곤란하다. 오늘 일로 영천후는 확실하게 느꼈다. 앞으로는…정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분명 사람을 향해 무력을 행사해야 하는 일도 일어나리라. 이 아이들 앞에서도…. 안 그러면 우리가 위험해질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당장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모습에 천후는 속으로 둘에게 사과를 하며 거짓말을 입에 올렸다.
“아∼. 괜찮아, 얘들아. 알았어. 앞으론 안 할게. 응?”
“정말요?”
“진짜로요?”
“그래. 진짜진짜. 에이. 내가 깡패니. 사람하고 맨날 싸우게.”
빙긋하고 웃어 아이들을 안심시킨 천후는 큰 손으로 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둘은 그제야 히히 하고 웃음을 되찾았다. 천후는 마주 웃어주면서도, 마음속으론 수심이 깊어져 갔다.
이 아이들에 대한 방침도 조만간 세워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어찌 되었던 자신의 아래에 들어온 핏덩이들이 아닌가.
그렇게 마음먹고 있을 때였다.
“자자. 시간도 늦었으니 일 이야기는 이쯤 하지.”
지금까지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강호는 손뼉을 쳐서 분위기를 환기하며 일어섰다.
“어찌 되었던 일이 무사하게 끝난 거다. 오늘은 맛있는 거나 먹고 푹 자자. 어떠냐?”
“맞아요! 고기 먹어요, 고기!”
“응! 회식해요! 고기!”
강호의 말에 자극받은 아이들이 눈을 빛내며 올려보자 천후는 쓴웃음을 지었다. 얘네 진짜 너무 솔직하구만. 어쩌나 싶어 돈 관리하는 셀레나에게 고개를 돌리니 그냥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대충 이런 의미였다.
‘이런 걸로 하나하나 물어보지 마. 당연히 되지.’
아. 그건 그렇지. 얼마나 한다고. 천후는 두 아이를 양팔에 하나씩 안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그럼 오빠랑 같이 키 크러 가자!”
“와! 아싸아!”
“야호! 고기다!”
사무실이 떠나갈 듯한 환호성을 들으며 천후는 사무실 계단을 내려갔다.
*
조금 멀리 나가 한우 집에서 더는 못 먹는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때까지 고기 맛을 보여준 천후는 둘의 배가 빵빵해져서 숨을 후하후하 하고 힘들게 쉴 즈음이 되어서야 나왔다.
이미 시간도 꽤 늦었고, 아이들도 있고 하니 자연스럽게 파장 분위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후후. 다들 2차를 안 간다면 내가 천후를 좀 빌려 가도 될까?”
“네?”
이미 고깃집에서 소주를 몇 잔 한 덕에 안색이 약간 붉어진 강호가 그에게 다가와 목에 팔을 걸어왔다. 그래도 발걸음이나 말투도 말짱한 걸 보니 취한 건 아닌 거 같은데? 그녀와 오래 함께 지낸 이브와 에바는 뭔가 짐작 가는 게 있었는지 빵빵해진 배를 쓰다듬으면서 쨍알댔다.
“앗! 강호 서방 또 술 마시고 들어오려고!”
“오빠도 술고래로 만들려고! 안…! 우웁….”
갑자기 소리를 지르니 올라오는지 에바가 자기 입을 틀어막는 것을 보고 강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니 왜 거기서 회심의 미소를 지으십니까, 선배님?
“후후후…. 너무 많이 먹어서 잔소리할 기력도 없나 보군. 마시려면 이럴 때 마셔야지.”
“우우! 치사해!”
“약았어!”
그녀의 말마따나 이제는 삐약거리는 것도 힘들어진 그녀들을 서로서로 우웁 거리면서 물러났다. 셋의 말씨름을 지켜보던 천후는 골치가 아파져서 이마를 짚었다.
“…어디 가시게요, 선배.”
“응? 아아. 그냥 남자들끼리 갈 곳이 있을 뿐이다. 뭘. 일이 잘 풀릴 땐 술 한 잔 걸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건 그런데….”
“그럼 저희도 같이 가요.”
곤란해하는 천후를 보고 셀레나가 구원을 왔지만, 강호는 척하고 손을 내밀며 단호한 거부 의사를 밝혔다.
“어허. 남자들끼리 갈 곳이 있대도. 아녀자들이 낄 곳이 아니다.”
“…….”
대체 어디 가시게? 이쯤 되니 가자는 장소부터 의심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강호는 의심하는 눈길을 빙글빙글 웃으며 튕겨내고 있었다. 철판이 따로 없다. 아니 오히려 희주를 바라보며 더 무서운 소리를 내뱉었다.
“아. 희주 씨. 미안한데 어쩌면 외박을 하게 될 수도 있네. 괜찮겠지?”
“뭐가 괜찮겠지 예요!”
깜짝이야! 진짜 어디 가시려고! 펄쩍 뛴 천후는 그녀를 떼어내려 들었다. 하지만 강호는 팔에 힘을 줘서 떨어져 나가지 않게 버텼다. 또 쓸데없이 힘이 애매하게 세서, 이걸 억지로 뜯어내려면 작정하고 그녀의 어깨든 어디든 몸을 잡고 뿌리쳐야 할 판이라 천후는 갈등했다.
그때 희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 분들끼리 교분을 쌓는 건 좋은 일이지요. 하루 정도야….”
“아니, 잠깐 희주 씨?!”
거기서 다시 그 소립니까? 당황해서 돌아보니, 어느새 희주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앞으로 술을 드실 일이 많을 겁니다. 그러니…미리 경험해 보시고 익숙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
“오오…. 그래. 그거다! 나도 그 뜻으로 하는 이야기인 게다!”
말을 이렇게 바꾸니 이상하게 그럴싸해진다? 그 뒤로 이어진 강호의 신소리는 무시하더라도 일리는 있었다. 천후가 고민하는 기색으로 돌아서자, 희주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그런 일 하나하나를 저에게 다 말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모름지기 남자분이시라면…. 말씀 없이 술 한 잔 정돈 걸치고 오셔도.”
강호와는 달리 이렇게 은근히 권해오니 거절하기 어렵다. 이 시점에서 이미 마음이 8할쯤 넘어갔다. 가만히 그의 얼굴을 올려보던 희주는 그 기색을 살피다가, 귓가에 입을 가져가며 결정타를 넣었다.
“그리고…강호 씨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들어두셔서 나쁠 건 없습니다.”
그 말에 천후의 눈이 번쩍 떠졌다. 하긴 강호가 이렇게 끈질긴…사람이긴 하지만 술 같은 걸로 끈질긴 사람은 아니다. 지금 옆에서 실실 웃는 걸 보면 그것도 아닌가 싶은 생각이 안 드는 것도 아니지만.
“후…. 알았어요. 갑시다. 가요. 어디 뭐 얼마나 대단한데 가는지 가보자고.”
“하하. 잘 생각했다.”
얼굴을 환하게 펴고 웃는 걸 보니 참…. 이 사람 걱정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희주가 백에서 무언가를 꺼내 천후의 손에 쥐여 주었다.
하나는 현금이었다. 신사임당 한 다발. 이미 이 시점에서 천후의 얼굴이 굳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 뒤, 지폐 위에 올려주는 것을 보고서는 아예 얼굴색이 창백해졌다.
“이, 이걸 왜….”
얼마 전…. 셀레나와 일을 치를 때 사왔었던 초박형 3개들이 갑 3개. 희주가 약으로 관리하는 것을 알고선 자기 쪽에서도 신경을 써야겠다고 마음먹고 사왔던 물건인데 이걸 왜 지금?
“…병은 조심하셔야 합니다.”
“업소에서 안 해요! 절대 안 할 거예요! 하늘땅에 맹세코!”
파르르르. 은근한 목소리에 전율마저 느낀 천후는 고개를 마구 흔들면서 그것들을 희주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곤 굳은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것을 마주 본 희주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주제넘었습니다. 그럼….”
희주는 세 갑 중 한 갑만을 그의 바지 주머니에 넣어주면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향했다.
강호.
“…만약의 만약을 위해서입니다.”
“…….”
그 말에 천후는 갈등했다. 솔직히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리가 없었다고 생각하지만…. 술 취해서는 어떨까? 지금 이 순간에도 천후의 목에 매달리느라 팔에 닿고 있는 이 거대한 물컹거림을 만취해서 느끼면 과연?
“그럼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아, 잠깐. 희주 씨!”
갈등을 마칠 새도 없이 희주는 빠르게 물러서더니, 아이들을 데리고 저쪽으로 가버렸다.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고 가렴.”
“와, 진짜요?”
“그럼, 그럼 선생님이랑 같이 자도 돼요?”
와와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천후는 모든 것이 늦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때…. 목에 걸친 팔에 힘을 더욱 꾸욱 주며 얼굴을 귓가까지 밀착해온 강호가 속삭였다.
“자아. 그럼 둘만의 시간을 가져볼까? 응? 영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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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턴 강호 턴.
내일 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