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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71화 (71/324)

71화

강호가 천후를 끌고서 들어온 곳은 사무실 인근의 바였다. 조금은 정신없을 정도로 시끄러운 음악이 흐르는 화려한 조명의 웨스턴 바.

‘음. 기대한 내가 나빠.’

내심 기대를 안 했던 건 아니었던 천후는 살짝 실망하면서도 안심했다. 여태까지 강호가 모인 모습들이 그 모양들이었으니, 조금 걱정이 됐던 게 사실이다.

한편, 강호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바텐더와 다른 직원들 모두 화색을 띠면서 그녀를 맞이했다.

“어머. 강호 씨 왔어? 오랜만이다.”

“아아. 요즘 좀 바빴으니까. 항상 마시던 걸로.”

“…….”

이야. 저 말을 진짜로 하는 사람이 있긴 있구나. 여러 가지 의미로 놀라서 보고 있자니, 바텐더가 노을빛 띤 칵테일을 그녀 앞에 내놓았다. 아무래도 정말 단골인 모양이었다. 바텐더는 그렇게 놀라고 있는 천후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그쪽은? 강호 씨 친구?”

“아니. 우리 회사 사장이다.”

“응? 여사장이라고 하지 않았어?”

“음. 그 여사장을 사로잡았지.”

어머머 하고 감탄하는 소리와 함께 시선이 달라진 게 느껴진다. 그런 눈길로 바라본들 부끄러울 뿐이라 천후는 살짝 목덜미를 붉혔다. 다른 사람에게 듣자니 역시 좀 느낌이 다르다.

“그럼 사장님은 뭐로 드릴까요?”

“음. 아무거나 주실래요? 사실 이런 데 와본 적이 없어서.”

“이야. 까다로운 분이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여유로운 인상으로 쿡쿡 웃은 바텐더는 검은색 술이 담긴 잔을 내놓았다. 고개를 까닥여 감사를 표한 천후는 강호에게 물었다.

“그런데 정말 왜 갑자기 저만 부른 거예요?”

“음? 하하. 그렇게 대단한 뜻은 없었는데…. 그냥 우리끼리 이야기해본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아서 말이다. 그래서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좀 하고 싶었지. 몇 년 만에 들인 후배야. 개인적으론 일관계로만 끝내고 싶진 않아.”

“…그것도 그렇네요.”

너무 경계하고 있었나? 하긴 생각해보면 슬슬 그녀의 여러 사정을 들어볼 때도 되긴 한 것 같다. 피식 웃은 천후는 먼저 잔을 가져갔다. 잔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칵테일을 단숨에 원샷했다.

“후우. 오랜만에 마시니 살 것 같군. 이브랑 에바가 날이 갈수록 도끼눈을 떠서 말이다. 이제 사무실에선 손도 못 대겠어.”

“사무실에선 마시지 마세요….”

“하하. 이럴 때 마셔둬야지. 조금 있으면 사무실을 이전할 게 아니냐? 그때 가면 직장에서 술을 마신다는 것도 못해보는 일이니까.”

강호의 말 그대로 트란제비야는 좀 더 훈련시설을 갖출 수 있는 건물로 이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제 저 허름한 곳에서 지낼 수 있는 시간도 얼마 안 남았다.

“그 두 아이는 참 어린데도 똑 부러진 구석이 있네요. 선배랑 잘 어울리는 거 같아요.”

“으음. 부끄럽게도 언제나 신세를 지고 있지. 뭐어…. 잘된 일이야. 예전에는 말도 별로 없는 편이었으니까. 많이 나아졌지….”

강호의 눈이 멍하니 흐려졌다. 이전 일을 생각하는 듯했다. 천후는 그녀의 말을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그 아이들을 데려온 게 벌써 4년 전인가…. 난 성인이 되자마자 일리미네이터를 시작했었지. 뭐 그때는 유그드라실 직속이었지만 말이다.”

“유그드라실 직속이었다고요?”

“음? 왜 놀라지?”

“아뇨. 그게….”

천후는 자신의 사정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해주었다. 그 이야기에 강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러고 보니 그런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건너건너 들은 적이 있긴 하지. 뭐 유그드라실은 워낙 크고, 너는 단독행동을 했으니 서로 모를 수밖에. 그리고 난 유그드라실에서 살았던 것도 아니고, 협조요청이 오면 이동할 때만 탑승하고 내리는 식이었거든.”

“아아….”

그랬군. 고개를 끄덕인 천후는 눈으로 그녀를 독촉했다. 살짝 웃은 그녀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두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그 해 노르웨이의 겨울은 추웠지. 폭설도 심했고. 덕분에 산간지방에서 발생한 디제스터 퇴치가 늦어져 버렸어.”

“…….”

“뭐 그래도 다행히 시민들은 쉘터로 피신할 수 있었지. 군이나 일리미네이터 파견은 좀 늦어졌어도 버틸 수 있었어. 하지만…. 그때 수도에서 경급 디제스터가 나타나 버렸지. 덕분에 그쪽에 인력이 집중되어버렸어.”

“그럼….”

“응. 그래서 유그드라실이 나섰고 거기에 나도 섞여 있었지만…. 그땐 이미 며칠이나 지난 상태였지. 디제스터 퇴치 자체는 쉬웠어. 별것 아니었지. 하지만 퇴치 이후에 센터를 개방했을 땐…. 식량을 가지고 한차례 크게 싸움이 일어난 직후였더군.”

한차례 말을 끊은 강호는 조용히 빈 잔을 바텐더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술잔을 비우는 페이스를 맞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다시 칵테일이 채워졌다. 그녀는 노을빛 감도는 잔을 바라보다가 그것을 한 번에 들이켰다.

“어느 정도 진정된 상태였지만…. 이미 큰 희생이 치러진 뒤였어. 싸움을 말리던 두 사람이 죽어버렸지. 그게 그 아이들의 부모였어. 그렇게 보내놓고는 아무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더군.”

“…….”

“그 해엔 스칸디나비아 반도 전체가 디제스터로 몸살을 앓았었어. 이브나 에바같이 졸지에 고아가 된 아이들은 넘쳐났지. 수소문해서 친족들을 찾아가도 전부 거절하더군. 사실 나도 그때 거절했어야 했지만….”

쉘터의 가장 구석에서…. 완전히 말라버려 더는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는 백발의 두 아이를 보고서 외면한다는 선택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정신 차려보니까 내가 그 아이들을 서포터, 오퍼레이터로 받아들였더군. 이런 케이스가 꽤 많다는 것 같아. 제대로 코 꿰였지. 하하.”

맑게 웃는 얼굴에서 천후는 다른 감정을 느꼈다. 그것이 점점 자신에게 전염되어오는 것을 천후는 가만히 받아들였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눈을 감아 간신히 막았다.

“그랬군요. 그래서….”

“응. 이젠 많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눈앞에서 사람들이 싸우는 걸 보면 많이 무서워해. 그때 겨루지 못한 건 아쉽지만….”

“아뇨…. 그건 정말 괜찮아요. 그보다…. 하아….”

천후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러지 않으면 목을 죄는 듯한 이 느낌이 분명 눈가까지 타고 올라가 버리리라. 무심코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나는 멍청하다. 난 너무 주변에 무관심해. 좀 더 많이, 좀 더 제대로 신경 써 줄 수 있었는데. 좀 더 빨리 이 이야기를 그녀에게서 들었어야 했는데….

“…고기 좀 자주 사줘야겠네요.”

“하하. 그거면 됐다.”

간신히 입에서 끄집어낸 그 말이 마음 전부가 아니란 것은 누가 봐도 명백하다. 아무리 눈치 없는 강호라도 알 수 있었다. 그 때문에 강호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웃는 얼굴이 조금 붉다.

“아. 그런데 전에 그 약혼자 소리는 뭐예요? 진짜 철컹철컹?”

“아아…. 아니, 그건 내 조부祖父가….”

답하던 강호의 목소리가 급격히 어두워졌다. 괜한 걸 물었나? 그 기색에 천후도 놀랐지만, 그녀는 곧 고개를 들더니 은근한 목소리를 냈다.

“…장소를 좀 옮길까?”

이번엔 거절할 수 없었다.

*

“오빠. 왜 와서 한잔도 입에 안 대. 마셔요, 마셔.”

“입에 안 맞아? 다른 술 시킬까?”

“…….”

꿈인가 생신가. 천후는 자기 양옆에서 알아서 다가와 몸을 부비 대는 여성들을 보고서 식은땀을 흘렸다. 4인용 소파에 몸을 묻은 그의 눈에는 사방에 여자, 여자, 여자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은희가 예쁘게 하고 나왔구나. 자. 받아라.”

“아앙~. 강호 오빠, 어딜 만져요!”

“음후후후. 싫으냐? 주지 말까?”

“아이 그런 건 아니지∼”

심지어 바로 앞에 앉아있는 파란색 한복 입은 여자가 다른 여자 가슴골에 돈을 꽂아 넣고 있다. 미친 것 같은 광경에 인지 부조화가 일어날 지경이다. 테이블 옆에는 가슴과 허벅지를 훤히 드러낸 여자 둘이 술을 몸에 들이부으며 흘러나오는 음악에 몸을 흔들고 있었는데, 보고 있자니 본의 아니게 남자로서의 반응이 마구 찾아왔다.

그래도 그게 맥시멈에 이르는 것은 간신히 억누른 천후는 기겁하며 외쳤다.

“선배, 여기 뭐예요!”

“응? 뭐냐니? 카페 아니냐?”

이게 무슨 카페야! 천후는 목까지 치고 올라온 목소리를 옆자리의 여자가 입에 물려주는 과일 때문에 입 밖으로 내보낼 수 없었다.

바에서 나온 강호는 그 뒤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선, 사무실 상가 건물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겉모양부터 의심스러워서 천후는 한번 놀러 오라고 권유까지 받았는데도 피했던 곳이다.

뭐 그래서 결과는 이 모양. 강호가 들어오자마자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른 여자들이 그녀를 둘러싸더니 알아서 가게에 closed 팻말을 걸어놓곤 함께 한가운데 앉혀놓곤 술과 에로의 잔치를 벌이기 시작했다.

‘아. 세상에.’

결국 이 흐름이냐?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감싼 천후는 원망스러운 눈길로 강호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 옆자리에 앉은 여성들에게 한 번씩 입을 맞추면서 말했다.

“응? 왜 그런 눈이냐? 후후후. 남자끼리 이런 데 좀 오는 게 어때서.”

“그래, 오빠~. 우리 그래도 룸보단 훨씬 건전하게 노는 거다?”

훨씬 건전해서 지금 속옷 차림이구나. 다른 세계다. 여기에 익숙해지면 여러 가지로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강호는 여기에 오는 게 매우 익숙한지, 은근한 목소리로 옆의 여인에게 속삭였다.

“오늘은 나하고 2차 갈까?”

“안 돼는데~. 음~. 그래도 강호 오빠랑 가는 거면 갈게. 콜.”

강호는 그 말에 후후 웃으며 나오는 그녀가 주는 술을 주는 대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테이블에 기본으로 깔린 것만 해도 양주가 몇 병인지 모르겠다. 가산을 탕진하겠다고 작정한 수준이다.

그렇게 여자들 사이에서 주지육림을 즐기던 그녀는 한참을 술고래 모드가 되어 있다가, 30분 정도 지나자 천천히 휘청대더니 이윽고 테이블에 얼굴을 박았다. 그 위에 있던 직업여성들이 잔으로 쌓아올린 탑이 그녀의 얼굴에 밀려서 깨져나갔지만, 그녀는 느끼지도 못했는지 그대로 테이블에 얼굴을 부비며 혀 꼬부라진 목소리를 냈다.

“젠장∼! 빌어먹을 영감탱이! 안 달린 걸 어쩌란 말이냐! 나도 남자로 태어나고 싶었다고오!”

끄르르르…. 강호는 그 말 직후 목에서 침 끓는 소리를 내다가, 결국엔 침묵해버렸다. 설마 해서 건드려보니, 완전히 의식을 잃었는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천후의 표정이 새파래졌다.

“아이고야….”

돌아버리겠네. 진짜 가지가지 한다. 가지가지 해. 바닥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쉰 천후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냥 손으로 양 눈을 가렸다. 그때, 조금 전까지 그의 옆자리에 있던 여성이 다가와 조심스레 물어왔다.

“저기, 오빠. 우리 계산해줘야 하는데.”

“선배 지갑에서 카드 긁으세요….”

도저히 이거까지 내줄 생각은 전혀, 티끌만큼도 안 든다. 아니, 맘 같아선 여기에 그냥 놔두고 돌아 가버리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조금 전 했던 말이 마음에 못내 걸린다. 한참 고민 하던 천후는 결국 그녀를 등에 어떻게든 어거지로 업었다.

그렇게 사무실로 올라가려던 천후는 문득 뭔가 떠올라서 여자들에게 물었다.

“선배 매일 올 때마다 이래요?”

“응? 그러엄. 얼마나 VIP인데. 보통 우리 중 몇 명이랑 오빠가 데리고 사는 애들이 챙겨가.”

“아…………………….”

과연. 아이들이 질겁한 이유가 있었구만. 진짜 노답이네, 이 양반. 듣기만 해도 화가 부글부글 난다.

“아…. 그런데 선배랑 2차 가면 대체 뭐해요?”

“응? 말상대나 해주다 오는데? 뭐 만지작대긴 하는데 아저씨들 하는 짓에 비하면 꿀이지.”

“…….”

진짜 개꿀이네? 이것이 진정한 하늘이 내린 절대호구신인가? 근데 정말 이해를 할 수가 없구만….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천후는 다음에 또 와달라는 말을 한 귀로 흘리면서 업소에서 나왔다.

“후우….”

어째 이렇게 될 것 같더라니. 나쁜 예감은 틀리지가 않는다. 한숨을 푹 쉰 천후는 계단을 올랐다. 키가 큰 만큼 여자치고 체중이 나가는 그녀였지만, 그에게는 그리 무겁진 않았다. 그저 걱정되는 게 있다면, 지금 이러고 있다가 어깨에 토라도 할까 봐 그게 두렵다.

생각해보니 소름이 돋아서 천후는 걸음을 서둘렀다. 사무실 문을 따고서 들어간 천후는 그녀를 안방 매트리스에 천천히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여기까지 했으면 됐지, 뭘 더해.

하지만 그때….

“가지 마라….”

스르륵…. 뱀이 기어오르듯 흰 팔 두 개가 그의 목을 감싸왔다. 그와 동시에, 직업여성들의 몸에서 짙게 풍기던 향수 냄새가 뱄는지 그녀에게서도 났다. 꾸욱…. 등 뒤로 단연코 인생을 통틀어 넘버원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볼륨이 감촉이란 이름의 폭력이 되어 와 닿았다.

“서…선배?”

위험하다. 이건 위험해. 머릿속에서 급하게 경보음이 울린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천후는 어떻게든 힘으로라도 팔을 풀려고 했다. 그러나….

“나를…혼자 두지 말아다오….”

찌르르르.

귓가에 속삭인 목소리에 온몸에 전류가 흘렀다.

============================ 작품 후기 ============================

노답의 균형은 유지되어야 한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모두 감사드립니다.

오랜만에 연참해보네요. 에고고.

정말 내일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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