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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73화 (73/324)

73화

<증명>

로마이어가 경고를 하고 간 날 이후에도 트란제비야는 방침을 바꾸지 않았다. 그래도 예상했던 외압은 딱히 들어오지 않았다. 로마이어 엔체스터가 아직 행동을 취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천후의 인맥, 유그드라실 한국 지부장 최완이 막아주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천후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표정이 좋지 않으십니다.”

“아…. 희주 씨.”

테이블 위에 차를 내려놓으며 희주가 말을 걸어오자, 천후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감사함을 표시하고는 그녀에게 태블릿 화면을 보였다.

“요즘…. 조금 낌새가 안 좋아서요.”

“무슨 말씀이신지….”

“유그드라실에서 한 달 이내에 퇴치된 파급 디제스터 데이터를 요청해서 받아봤어요. 그런데…. 두 건을 제외하곤 모두 그렘린 페이스, 그리고 ‘페이스리스’더군요.”

페이스리스란 얼굴 없는 사자와 같은 몸통만 있는 디제스터다. 다른 특수능력은 없이 육체 능력만을 가지고 있는 녀석으로, 파급 디제스터 중에서는 하급이었다.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는지요?”

그 물음에 천후는 얼굴색을 굳히며 조용히 입을 땠다.

“…너무 잦아요.”

“…….”

“디제스터란 기본적으로 랜덤성이 무서운 적이에요. 강호 선배 말처럼 이렇게 같은 타입만 나타난다면 일로서는 편하죠. 조금 지나면 아마 군만으로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낮은 탄식을 흘리며 천후는 뒷말을 꺼내지 못했다. 희주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주인이 지금 하고 있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 통찰을 동원하여 파악해본다. 그러다…어떤 결론을 냈다.

“설마….”

“…….”

그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희주는 그의 뒤로 돌아와 함께 자료화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어깨에 올린 손에 아주 약간의 힘이 들어갔다. 그것을 느낀 천후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올리며 조용히 말했다.

“아직 확실하게 판단을 내릴 정도의 빈도는 아니에요. 하지만…대비는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주인님이 감이…틀리길 바라는 저를 용서해주시길.”

“…….”

목소리엔 감정이 들어가 있지 않았지만, 천후는 가만히 그녀의 손을 들어 자신의 볼에 가져다 대었다. 안심시켜주려는 행동. 하지만 희주는 보았다. 그의 눈매가 여전히 날카로워져 있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천후의 성장배경, 삶의 동기가 그에게 부여하는 통찰, 직감이 그것을 예지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문득, 희주는 그가 이런 눈을 꽤 오래전부터 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벌써 근 일주일 전부터….

눈을 감는다. 그렇다면 주인의 짐을 덜어드릴 수 있는 자문을 준비해야 한다. 생각을 선회하자 선택지가 좁혀졌다.

“…주인님과 같은 판단을 내린 분들이 분명 있을 겁니다. 접촉을 시도해보겠습니다.”

“부탁해요.”

“일단…친란 씨부터 연락을 취해보겠습니다. 그녀 휘하의 일리미네이터들은 신용하기 힘듭니다만, 다른 쪽의 콘택트를 도와줄지도 모릅니다.”

“…알겠어요.”

로마이어의 건이 좀 걸리긴 하지만, 사안이 사안이다. 그런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깊이 고개를 끄덕인 천후는 그녀의 의견을 수용했다.

그때였다.

“천후! 큰일 났어!”

쾅! 사무실의 문을 때려 부술 듯이 박차고 들어온 셀레나가 헉헉거리며 테이블 앞에서 숨을 헐떡거렸다. 꽤 먼 거리에서부터 달려온 듯, 이마가 땀범벅이 되어있었다.

“무슨 일이야?”

“하아! 하아! 목포 쪽에 경급 디제스터가 나타났어. 그런데…. 이걸 봐.”

셀레나는 숨이 차는 와중에도 리모컨을 찾아서 TV를 틀었다. 동시에 오퍼레이터들이 촬영한 듯한 영상이 화면에 뜨기 시작했다. 화면엔 페이스리스를 4명의 일리미네이터가 상대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전개는 무난해 보였다. 포인트 맨이 유인하고, 그것을 따라간 녀석은 3명의 풀 캐스팅으로 거의 사망 직전에 몰렸다. 하지만 그때였다.

<키에에에에에!!!>

“아니?”

갑자기 화면에 옆으로 돌면서, 새로 나타난 또 하나의 디제스터 그렘린 페이스를 비췄다. 연전이 되는 건가? 그렇다면 꽤 힘들다. 하지만 이미 페이스리스는 사망 직전. 마무리하고서 응원을 부르고 버티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퇴치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그렘린 페이스는 주변의 모든 인간이나 일리미네이터를 공격하는 것조차 잊었는지 페이스리스 쪽으로 날아왔다. 그러더니…그 목에 자신의 후두부를 가져다 댔다. 그 순간. 섬광이 터져 나왔다.

<으앗?! 무슨 일이야!>

<합체했어?>

스피커에서 당황하는 일리미네이터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직후.

화면에는 완전히 부활한 페이스리스…. 아니, 완전히 다른 놈으로 변해버린 디제스터가 잡혔다.

크기도 5m 정도에서 20m 정도로 훨씬 커지고, 머리가 없던 곳에는 그렘린 페이스의 머리가 붙어 있었다. 귀에 있던 박쥐 날개는 훨씬 커져서 등으로 옮겨가 있었다.

놈은 잠시간 가만히 있는가 싶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일리미네이터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위협을 느낀 그들은 바로 회피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직후….

<쿠워어어어어어어!>

고막을 찢어버릴 듯한 소리와 함께, 화면에 노이즈가 생기더니 이윽고 검게 변해버렸다. 아무래도 촬영하고 있던 장비가 박살 난 모양이었다. 그 뒤론 똑같은 영상이 계속해서 반복됐다.

천후의 표정이 굳었다. 셀레나가 이제부터 할 말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테이블에 올려놓은 스마트폰이 마구 울리고 있었으니까.

“강호 선배 불러.”

그 말이 입에서 나오기 무섭게 사무실 밖에서 끼이이익 하고 바이크 멈춰서는 소리가 났다.

*

일리미네이터들의 대부분은 서울에 상주한다. 이건 대한민국에서 살기엔 서울이 가장 좋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디제스터의 출현빈도는 인구 밀집도에 비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서울은 대한민국에서 디제스터가 가장 많이 나타나는 도시라는 것이다. 이런 디제스터의 특성이 밝혀진 후 서울의 인구집중은 어느 정도 해소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700만 이상이 살아가는 대도시였다.

하지만 이런 현실 때문에 지방에 강력한 디제스터가 나타나면 대응이 늦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광역시들까진 어떻게 되지만, 그 외에는 디제스터가 나타나면 정말 이름 그대로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비단 대한민국만이 아니라 지구 상 모든 나라가 같은 문제로 고통을 겪었다. 이것은 일리미네이터의 절대 수가 부족한 이상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급하게 수도에서 일리미네이터들을 모아서 지방으로 파견했을 즈음에는 이미 대형 인명피해가 일어난 후인 경우가 태반이었다.

국가에선 이 부분을 어떻게든 해보려고 기를 썼지만, 그 어떤 수송기를 써도 실시간으로 날뛰는 괴물이 인명피해를 내는 것보다 빠르게 대응할 순 없었다. 이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유그드라실이 나섰다.

성층권 상을 비행하는 유그드라실은 세계 각지에 대기하고 있는 일리미네이터들에게 큐브 엘리베이터를 내려보내서 수용한 후, 디제스터가 나타난 곳으로 파견해주기로 한 것이다.

SA랭크 마법사들이 만들어낸 걸작. 텔레포트를 통해 지구 상 어디에든 나타날 수 있는 슈퍼 아티펙트, 불가시 공중요새 유그드라실은 그것을 가능케 했다. 그 대신 국가에서 막대한 비용을 뜯어냈다.

전 세계 모든 국가는 급한 불을 끄기 위해서 그 비용을 치렀지만, 그러는 한편으로는 어째서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하느라 인류가 고통받는 동안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밝히지 않았는지에 대한 강력한 의문을 품었다.

단지 수송비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글쎄….

애초에…이 정도의 힘이 있다면 정말 지구권을 정복하고도 남는다. 전 세계 어떤 기술로도 탐지되지 않고, 전 세계 어디에도 한순간에 나타날 수 있는, 8,000명 이상의 마법사가 탑승하고 있는 건축물, 전함이라는 것은….

점령을 생각하지 않고 공격에만 힘을 쏟는다면 그 어떤 국가라도 남아나지 못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정말로 수송비만 받고서 끝내고 있다. 전 세계는 그것에 감사하면서도, 마법사들에 대한 경계를 더더욱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서른…마흔 명 이상이군요.”

“예비 공격대를 둘 생각인가 보네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가 규모의 이야기고. 목포로 향하기 위해 큐브 엘레베이터에 탑승해 유그드라실에 올라온 천후는 당장의 일에 집중했다.

많은 인원이 머무를 수 있도록 마련된 홀에는 40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의 일리미네이터들이었지만, 그중에는 드문드문 유그드라실 직원과 군복을 입은 사람들도 섞여있었다.

손에 명단을 든 그들은 큐브를 타고 올라오는 일리미네이터들의 이름을 부르며 양쪽으로 나누고 있었다. 상황이 급박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들은 그 지시에 빠르게 따랐다. 천후 역시 올라오자마자 제 2 공격대, 즉 1 공격대가 위험해지면 증원으로 투입되는 쪽으로 배속되었다.

“저거….”

“트란제비야의 그…. 제3 인륜가?”

조용히 2 공격대 쪽에 서자 일리미네이터들의 시선이 몰리는 게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사람들이 그에게서 거리를 뒀다. 그에 천후의 표정은 살짝 일그러졌지만 금방 마음을 다스렸다.

‘이런 거에 하나하나 신경 쓰면 미친다….’

가볍게 심호흡을 한 그는 많은 사람을 보고 불안해하는 이브와 에바를 달래며 시간을 보냈다. 그때였다.

“워~. 와있었군. 오랜만에 보니까 반가워, 천후 씨. 사장이 됐다며?”

물러난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선글라스를 쓴 30대 남자가 아는 척을 하며 다가왔다. 레이나드였다. 그를 보고 환하게 인상을 편 천후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하하. 안녕하세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잘됐군! 그래. 이쪽은 식구들?”

“아. 네.”

천후는 레이나드에게 다른 이들을 소개해주었다. 레이나드는 그들 모두에게 정중하게 인사하다가, 아이들과 함께 서있는 이강호를 보고서 입을 크게 벌렸다.

“아니? 강호 씨. 한국에 와있었어?”

“아…! 레이나드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그를 본 이강호도 눈이 커지더니,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인사했다. 강호는 오늘 휴식일이라 오토바이로 드라이브를 즐기다 소환되었는데, 허리에서부터 떨어지는 아름다운 굴곡이 딱 달라붙는 붉은색 바이크 슈트에 덕에 눈에 훤히 들어왔다순식간에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그것을 본 레이나드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답했다.

“선배는 무슨. 해준 것도 없는데. 한국에 돌아왔으면 연락 한번 하지 그랬어.”

“죄송합니다. 근래에 바쁜 나머지 생각을 못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강호의 눈에는 죄송스러움과 존경이 가득했다. 그녀에게선 쉬이 찾아보기 힘든 반응에 천후는 고개를 갸웃했다.

“두 분이 아는 사이세요?”

“응? 아아…. 그게…. 이전에 말했었지? 체질 때문에 위험했던 적이 있었다고. 그때의 파티플레이 때 파티장을 하셨던 게 레이나드 선배님이셨다. 그 뒤로도 많이 챙겨주셨는데….”

“그땐 정말 깜짝 놀랐어. 그래도 강호 씨의 특성을 잘 살리기만 하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여론이 너무 좋지 않아서 내 힘으론 어떻게 할 수가 없더군. 미안해.”

“아닙니다. 세 명이 중상을 입었었는데 당연합니다. 다 제 미숙함이 문제였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강호의 표정이 어둡다. 하지만 레이나드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하하. 됐어. 됐어. 다 지난 이야기니까. 그래도 잘 됐군. 안 그래도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천후 씨랑 파티를 짜고 나선 잘 풀린 모양이니. 그랬군…. 트란제비야에는 당신이 있었지….”

이전, 쿼드라 콩가 때 천후의 전투 스타일을 보면서 레이나드는 그녀를 떠올렸었다. 완전히 똑같지만, 불완전한 나머지 인정받지 못했던 존재. 하지만 그녀가 천후의 아래에 들어갔다면…. 정말로 도약만 남은 셈이다.

‘부럽군!’

이미 서른 중반이 넘어서 은퇴를 생각하고 있는 자신으로선, 앞으로 이들이 걸을 행보를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으리라. 레이나드는 그렇게 짐작하면서 씁쓸히 웃었다.

한편, 레이나드가 천후에게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본 다른 일리미네이터들은 주저주저하다가 한 명씩 다가와 인사해왔다.

“당신이 트란제비야의 일리미네이터군. 이름은 많이 들었네. 덕분에 몸 고생이 좀 줄었어.”

“레이나드 씨가 입이 닳도록 빨아대더라고. 내 참….”

“반가워요. 저번에 구해줬을 때 바로 인사를 해야 했는데. 조금 늦었네요.”

“아….”

영천후는 많은 이들이 경계심을 풀고서 다가오는 것을 보고서 눈을 크게 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두려워하던 기색이 남아있던 이들이 레이나드의 행동을 보고 완전히 경계를 푼 것이다.

그들이 자신을 대놓고 멸시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멀리하려는 것은 명백했기 때문에 천후는 조금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지금껏 해왔던 행동들이 쌓여 그 결과를 맺혔다. 천후는 이전 희주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래. 나는 강자. 이들은 약자. 약자가 강자에게 먼저 다가오기란 힘들다. 하지만 세상을 혼자 살 것이 아니라면, 결국 자신이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들이 소극적이나마 손을 뻗어온 지금이라면 더더욱.

그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반갑습니다. 트란제비야의 영천후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고개는 숙이지 않는다. 하지만 굽어보지도 않는다. 그저 허리를 꼿꼿이 펴고서 그들 전부를 시야에 담는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홀이 조용해졌다. 모여 있던 모든 일리미네이터들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마음속에서 무언가를 인정하고 만다.

‘이 사람이라면….’

두근두근. 몸속에 뛰는 심장 소리만이 들린다. 마법과도 같은 묘한 고양감이 그것을 부추긴다.

“와아….”

“오빠 멋있어….”

“쉿….”

마찬가지의 감상을 어렴풋이나마 느낀 이브와 에바가 놀란 눈으로 하는 말에 희주는 조용히 입가에 검지를 대며 그들을 조용히 시켰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희주의 시선 역시 그에게 향해 있었다.

수많은 사람 가운데 오로지 그만이 보인다. 그 모습을 희주는 가만히 두 눈에 각인시켰다.

============================ 작품 후기 ============================

그것은 프린세스메이커를 하는 심정.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모두 감사드립니다.

어쩌다보니 오늘도 연참하네요. 헤헤.

그럼 정말 내일 뵐게요. 쨘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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