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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74화 (74/324)

74화

하지만 남 잘되는 꼴은 두고 보지 못하는 사람은 꼭 있기 마련이다. 하물며 그게 이전에 원한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지금 뭐하는 겁니까? 일에 집중들 하죠?"

저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일리미네이터들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로마이어 엔체스터의 수족인 박찬휘가 불만스런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바쁜 와중에 질서 흐트러뜨리지 말고 저 구석에 좀 있지그래? 트란제비야."

천후는 그가 바로 앞에 서자 일리미네이터 대부분이 물러서며 눈치를 보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단순히 B랭크여서가 아니라, 그가 그들의 수장인 로마이어의 의지를 대변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게다가 그의 곁에는 어느새 두 명이 더 다가와 서 있었다. 눈치로 그들이 1 공격대의 다른 B랭크 일리미네이터라는 것을 짐작한 천후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찬휘와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 옆에 섬으로서 뜻을 같이하고 있다고 어필한 것이다.

'로마이어가 국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일리미네이터라는 것만큼은 허세가 아니었군.'

그날 보였던 모습은 그리 대단치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그를 경계하거나 지원하는 자들이 많다. 심지어 이 자리에 그가 직접 와있는 것이 아님에도. 천후는 마음속으로 그에 대한 평가를 조금 수정하면서, 겉으로는 웃음을 보였다.

"아. 찬휘 씨. 오랜만이네요. 그때 손 다친 건 다 나으셨어요?"

상쾌한 미소를 지은 천후는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찬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를 악물고 손을 잡아왔다. 그때.

"!"

움찔. 손이 마주 잡히기 직전에 손에 힘을 주는 척을 하자 찬휘의 안색이 새하얘지며 그의 손을 쳐냈다. 찬휘는 순간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지나있었다.

"…섭섭하네요. 찬휘 씨."

"지랄 마. 이 개자식아."

이를 갈면서 인상을 찌푸린 찬휘는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서고서 입을 열었다.

"2공격대로 왔으면 예비답게 저리 찌그러져서 우리가 놈을 끝장내는 거나 지켜보고 있어. 이게 너와 우리 사이에 있는 서열이니까."

찬휘의 말은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경급 디제스터 퇴치는 위험하다. 그래서 레이드 참가도 실력순으로 위에서 25위까지 끊는다. 즉,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일리미네이터들은 상위 1위부터 50위까지 불려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서 2 공격대면 2류라는 소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재미있는 소리를 하시네. B랭크는 어디까지나 로테이션으로 돌아가잖아요. 서열 순이면 당신 대신 로마이어 씨가 와있어야지."

"뭐 이 새끼야?"

"그렇잖아요. 이제 일 시작한 지 두 달 되신 분. 아니면…. 지금 이 자리에 없는 로마이어 씨나 다른 B랭크 분들이 당신보다 실력이 밑이라 이겁니까?"

"윽…!"

그 말엔 대답할 말이 궁했는지 그의 입이 조개처럼 다물어졌다. 자기 말에 반박하는 사람을 전혀 만나본 적이 없는 머저리를 보는 기분이다. 저쯤 되면 도리어 귀엽지. 천후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전 오히려 찬휘 씨가 왜 이 자리에 와있는지 모르겠는데요? 분명 저번 텐타클 뱀파이어 때 당신 로테이션은 끝난 거 아닌가요?"

"그건…."

찬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굳이 그걸 보지 않더라도 지금 이 상황을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능히 알 수 있었다. 천후는 그것은 만인 앞에 공개했다.

"아. 리타이어 해서 로테이션을 인정받지 못한 모양이죠?"

"이…."

눈에 핏발을 세운 찬휘가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찬휘의 멱살을 잡았다. 상처 입은 짐승이 내는 듯한 소리가 그의 목에서 나왔다.

"적당히 깝쳐라. 돌이킬 수 없어지기 전에…. 로테이션 문제는 아무래도 좋아. 중요한 건 내가 1 공격대고 네가 2 공격대란 거지. 너는 그 로테이션에 안 들어가 있다고. 주제를 알아라. 응?"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단 게 이런 걸까? 당장에라도 목을 조르기 시작할 것 같은 그 기세에 주변이 웅성거렸다. 하지만 찬휘 옆의 B랭크들은 담담히 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그렇기에 아무도 개입할 수 없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라도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단 한 명.

상처 입은 야수 따윈 겁내지 않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멱살이 잡힌 것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숙여 코가 맞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아가리를 벌렸다.

“깝치지 말건 너지. 무슨 착각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지금 이 예비 공격대는 1 공격대의 전멸을 대비해서 모인 거야. 보통 경급 퇴치에선 이 정도까진 안 해. 열 명 정도 예비로 대기하면 모를까.”

"무슨…소리지?"

찬휘의 눈빛이 흔들렸다. 역시 전혀 자각이 없나 보군. 천후의 입에 비웃음이 실리자, 상황을 파악한 B랭크들이 수인을 맺으며 찬휘를 물러나게 하려 들었다. 하지만….

스르릉.

검집에서 검이 뽑혀 나오는 소리가 맑게 울리며. 그들 앞을 바이크 슈트 입은 여성이 가로막았다. 눈동자에 무료 담은 그녀에게 앞에서 둘은 뱀 앞에선 개구리처럼 압도당해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동안 천후는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꽂아 넣고 그를 이마로 찍어 누르며 말했다.

"즉, 1 공격대가 전멸할 수도 있다고 판단한 거지. 그게 아니면 던전화 가능 디제스터도 아닌데 이 정도까지 바리바리 모을 거 같아? 그리고… 그렇게 판단하게 된 이유가 바로 너다."

"뭐…?"

찬휘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하지만 천후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주제 파악은 네가 해야지. 네 앞에서 다른 사람들이 말 안 하나 봐? 네가 다른 일리미네이터들한테 어떻게 보이는지? 내가 대신 말해줄까?"

덥석. 천후는 순식간에 그의 뒤로 돌아가 뒷덜미를 잡아 들어 올렸다. 키가 작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천후에 비교해서다. 평균적인 성인 남성의 키, 170 초반은 되는 그의 몸무게는 60이 넘었다. 하지만 천후는 그를 새끼고양이나 강아지 들어 올리듯 한 손으로 들어 올리고서, 비웃음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이 답 없는 트롤러야."

"!"

찬휘의 얼굴이 굳었다. 천후에 의해 지켜보고 있던 모든 이들을 한 바퀴 쭉 둘러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들 모두가 찬휘를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눈을 마주 볼 것도 없이 찬휘는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리미네이터들 사이에서 감돌고 있는 불안감은 아무리 그라도 느낄 수 있었으니까….

찬휘의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낀 천후는 여유 있게 그를 내려놓고는 툭 하고 손으로 밀어 다른 B랭크 쪽으로 보내주었다. 그에 맞춰서 강호가 검을 집어넣자, 그제야 기세에 압도당해있던 둘이 혼이 빠진 것 같은 얼굴의 찬휘를 부축하러 달려올 수 있었다.

“여기 있는 누구나 똑같이 생각할걸. 트롤질한 너보다는 그래도 내가 더 낫다고.”

“…….”

둘에게 팔을 붙들려있던 찬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당장 자기 이빨이라도 부러뜨릴 것처럼 이를 악문 그 인상을 천후는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번에야말로 증명해주마. 여기서 화면이나 쳐다보면서 구경이나 하고 있어.”

“제발 그래 줘.”

천후는 약간의 진심을 담아 미소로 대답했다. 그것을 보면서 이를 갈던 찬휘는 1 공격대 출동 명령을 알리는 소리가 들리자 거칠게 등을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여 있던 25인의 1 공격대는 큐브 엘리베이터를 타고서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며 홀에서 사라졌다.

*

한편, 홀에 남아있던 일리미네이터들은 천후와 찬휘의 대치가 끝났음에도 한참 동안 긴장해서 움직이지 못했다. 조금 전 있었던 그것은 젊은, 아니 어리다고 할 수 있는 두 남자의 말싸움에 불과했지만….

싸웠다는 그 사실이 중요하다.

로마이어 엔체스터는 사실상 국내 B랭크 일리미네이터의 수장이다. 그 때문에 국내 디제스터 퇴치업계 전반을 좌우하고 있다. 그의 의지에 따라서 B랭크 일리미네이터들의 통제된다.

시장의 규모가 작더라도, 그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사람은 그 안에서는 슈퍼 갑이기 마련이다. 디제스터 퇴치업은 안보와 직접 엮여있기 때문에 이것이 더더욱 두드러진다.

당장 그가 자신에게 긍정적인 B랭크 일리미네이터들을 꾀어내어 한해에 퇴치하는 파급 디제스터 수를 줄이기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엔 난리가 난다. 이런 면들 때문에 B랭크 일리미네이터, 그중에서 로마이어는 특히 단순한 보수 외에 국가 측에서 제공하는 많은 혜택을 누리면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에게 정면으로 반하는 존재가 나타난 것이다.

박찬휘가 로마이어의 끄나풀이라는 것은 이미 업계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로마이어의 비호 아래서, 로마이어 자신이 쉽게 하지 못하던 양아치 짓을 마구 해대고 있는 게 바로 대리인으로 세운 박찬휘였다.

그런 그에게 싸움을 건다는 것은 로마이어의 권위에 싸움을 거는 것과 동일하다. 일리미네이터들은 바로 그 점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었다.

싸우려 하고 있다. 기존 기득권과.

얼핏 듣기엔 멋있고 좋은 소리처럼 들릴지 몰라도…. 그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짓인지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어쩌다가 그와 협력하는 낌새라도 보인다면?

로마이어가 과연 영천후에게만 화살을 돌릴까?

홀에 남은 2 공격대 멤버들은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다시 천후와 조금씩 거리를 벌려서 섰다. 그들의 눈엔 찬휘를 바라보던 것과는 다른 의미의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천후는 그것에 개의치 않았다.

예상한 반응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떠한 방식을 취했다 하더라도 반드시 한번은 거쳐 가야 할 길. 중요한 것은 현재의 반응이 아니다. 시간이 없는 이상 더더욱. 그렇기에…. 지금 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

‘증명인가.’

멀찍이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레이나드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정공법이다. 다른 사람이 5년, 10년이 걸려서 이뤄내는 것을 한순간에 끝내려 하고 있다. 목숨을 내놓은 것 같은 방식.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리라.

압도적인 자신.

‘내 쪽에서 멍석을 깔아줬어야 하는데.’

레이나드는 이전 친란에게 자신의 방식이 물렀다는 소리를 들은 것을 기억했다. 그것을 확실히 수긍하고 만다. 아아. 당연하지. 연봉 두, 세 배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정말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했군.

당연히 안 먹히지. 있으나 마나 한 조공인데.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천후를 바라보았다. 이미 그의 곁에 많은 사람이 보였다. 저 선상에 같이 설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면 최대한 가까운 곳에서라도 지켜보고 싶다.

마음을 굳힌 레이나드는 그에게 다가갔다.

“워. 로마이어에게 그래도 되겠어?”

선글라스를 고쳐 쓰고 나가니 홀 내에서 웅성웅성 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후 역시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가 먼저 다시 다가올 줄은 몰랐다. 지금 이 타이밍에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은 위험하다. 그것을 모를 그가 아닌데.

“레이나드 씨. 지금은….”

“아아. 됐어. 난 자네 쪽에 붙지.”

“…….”

“난 어차피 이 업계에서 벌 만큼 벌었어. 그러니 조금 더 장래성이 있는 쪽을 보고 싶거든.”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밝힌 레이나드는 손을 흔들어 이브, 에바에게 인사하며 웃었다. 둘은 낯선 그를 보고 흠칫하며 강호 뒤에 샤샥 하고 숨었는데, 그런 와중에서도 살짝 얼굴을 강호의 가슴 옆쪽으로 빼꼼하고 내밀고 있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찬휘를 상대할 때와는 다르게 정말로 밝은 미소를 지어 보인 천후는 다시 한 번 그와 악수를 했다. 바로 그 때. 희주가 조용히 그에게 속삭여왔다.

“주인님. 레이나드 씨라면….”

“아. 그렇네요.”

그녀가 아니었으면 묻는 걸 잊어버릴 뻔했다. 고개를 끄덕인 천후는 슬쩍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모습에 레이나드는 살짝 선글라스를 추어올리며 천후를 데리고 홀 밖으로 나왔다.

“왜 그러나?”

“음…. 사실 조금 여쭤보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요. 레이나드 씨는 디제스터가 출현한 당 해부터 활동했다고 하셨죠?”

“응. 그렇지.”

“그 경험을 근거로 생각했을 때…. 요즘 디제스터들의 발생 패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뭐?”

뜬금없는 질문이다. 하지만 천후가 이유 없이 당장 경급 디제스터와의 교전이 시작되기 직전인 이 상황에서 굳이 이걸 따로 물어볼 리가 없다. 레이나드는 입을 꾹 다물고 추론을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설마? 아니…. 그럴 리가. 그래선 안 돼.”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두려움 담긴 목소리. 부정하고자 하지만 현실을 확실히 자각하고 인정한 목소리가 나왔다.

그의 반응을 보고서 천후는 자신의 짐작을 확신으로 바꿨다. 그리고 그 확신을 입 밖으로 내었다.

“네. 전…이게 멸滅급 디제스터가 출현하기 전에 보이는 전조현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모두 감사드립니다.

내일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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