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광현 선배. 아까 그 녀석이 한 말이 사실인가요?"
사건 현장으로 향하는 큐브 안. 찬휘는 다른 B랭크 일리미네이터 주광현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입과 귀에 피어스를 한 차가운 안색의 남자 광현은 그 질문에 오히려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답은 네가 더 잘 알고 있겠지."
"……."
찬휘는 입을 다물었다. 이 대답이야말로 그것이 사실이란 것을 대변하고 있었다. 같은 B랭크 일리미네이터들은 로마이어가 완전히 통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사교성, 그리고 그가 등에 업고 있는 엔체스터의 이름에서 나오는 힘으로 그들의 의견을 어느 정도 조율하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때문에 로마이어 본인조차 다른 B랭크들에게는 곤혹스러워할 경우가 많은데, 찬휘의 경우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 때문에 그의 말에 거침이 없었다.
"종종 볼 때마다 우리에게 욕먹지 않았나? 너는 우리 전체에게 먹칠했어. 나에게 좋은 대답을 기대하지 마."
"윽…."
"경급 디제스터가 나타났을 때 B랭크 일리미네이터의 기본 로테이션은 2명으로 돌아간다. 저번 텐타클 뱀파이어 때도 그랬지. 그런데 이번엔 3명이야. 1, 2공격대 모두 3명씩이지. 이건 저번에 우리가 대국민약속을 한 것도 있지만, 그보단 너를 완전히 수습 취급하겠다는 뜻이다. 넌 여기 없는 놈이라고."
"광현 씨. 그쯤 해둬. 찬휘 울겠다.“
그가 찬휘를 격하게 몰아붙이자, 차마 끝까지 두고 보지 못한 다른 여성 B랭크가 그를 진정시켰다. 그에 광현은 못마땅한지 펫 하고 입에 씹고 있던 껌인지, 송진인지 알 수 없는 것을 뱉어내며 몸을 아예 돌려버렸다. 찬휘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자. 막내. 너무 실망할 필요 없어. 그래도 로마이어가 너를 키워 볼 생각은 있는 것 같으니까. 아니면 이런 기회는 주지도 않았겠지. 안 그래? 이번엔 침착하게 공대장이 하는 말을 들으라고."
"그렇지만…. 우리 공격대의 공대장은 C랭크잖아요?"
찬휘는 C랭크 일리미네이터가 공격대의 지휘를 맡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레이나드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뭐하러 능력 떨어지는 놈들의 명령을 들어야 하는 거지? 그들이 B랭크가 가진 화력에 대한 올바른 판단력을 가졌는지조차 의심스러운데?
아니. 그보다 가장 중요한 건 그래. 내가 왜 나보다 '못난'놈의 말을 들어야 하는 거야?
얼굴 밖으로 여과 없이 비쳐나오는 그의 생각을 읽은 여자는 쓰게 웃었다. 그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초자연적이 힘을 휘두르는 마법사. 그중에서도 먹이사슬 최상층에 있다 보면, 모든 게 자기 발밑으로 보이는 법이지. 몇 년 전 자신도 저랬으니까. 아니, 사실 지금도 어느 정도는 공감하는 바가 있다.
하지만….
"우리들이 투입되는 타이밍이 워낙 중요하기 때문이지. 우리 중 하나가 공대장을 맡으면…. 우리 중 한 명의 화력이 누수 되잖아?"
"아."
찬휘의 입에서 탄성이 나왔다. 이런 식으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긴. 극딜러인 자신들이 직접 공대장을 맡으면 캐스팅이 어지간히 뛰어나지 않는 이상 화력이 센다. 그것만으로 전력이 깎이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 공대장은 이 업계에서 7, 8년은 구른 베테랑이 하는 경우가 많아. 그 오랜 시간 동안 이 바닥에서 살아남았다는 건 보통이 아니란 증거지. 그 정도 되니까 우리도 그들에게 공대장을 맡기는 거고. 그리고…C랭크들의 체면도 살려줄 수 있지 않겠어?"
고혹적으로 웃은 여자는 찬휘의 뺨을 슥슥 쓰다듬었다. 마치 어린아이 대하는 태도였지만, 그녀의 미모 덕에 불쾌감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게 로마이어의 사람 다루는 법이지. 그 녀석 바로 아래에 있으면서 곁눈질로라도 배운 게 너무 없군. 한시라도 빨리 배워두는 게 좋아. 버려지기 전에."
"!"
손의 감촉을 즐기고 있던 찬휘는 그녀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을 보며 광현은 코웃음을 쳤다. 전혀 자각이 없었다니.
"로마이어라고 자선사업가가 아니야. 네가 아무리 B랭크라고 한들…. 지금처럼 멍청한 짓거리를 연발로 하고 다니면 계속 끌고 다닐 것 같아?"
"그러니까 이번 일은 사력을 다하는 게 좋을 거야. 아무리 그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보험을 깔아줬는데 2 공격대까지 넘어가는 일이 생기면 참지 않을걸?"
"……."
보험. 실패하지 않기 위해 던전화 가능 디제스터가 아닌데도 B랭크 일리미네이터를 한 명 더 투입했다. 이것은 찬휘를 시험하기 위한 것.
그리고 또 하나의 보험. 이전 텐타클 뱀파이어의 실패 건으로 불안에 빠져있는 대한민국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완전한 전멸까지 고려해둔 2 공격대를 둔다.
그리고 그 멤버에 영천후가 들어가 있는 것은 분명 자신의 호승심을 끌어올리는 것과 동시에, 그가 없어도 이 업계는 충분히 돌아간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한 수단.
이렇게까지 했는데 1 공격대가 패배하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독자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이 앞의 둘은 몰라도, 로마이어 바로 아래에 있는 자신은 날아가 버리리라. 정말. 어디로든.
찬휘는 자신이 자각도 못 하는 사이에 낭떠러지 근처까지 걸어왔다는 것을 간신히 깨달았다. 물론 이번 일의 실패 확률은 대단히 낮다. 하지만….
"…조심하겠습니다."
"알았으면 됐다. 집중해라. 지상에 다 와 간다."
지상 도착까지 10초를 알리는 AI의 음성을 들으며 광현은 보조와 방어주문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신호 삼아 다른 일리미네이터들 역시 기본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준비를 끝내고 큐브가 열리기 직전 상태에 이를 즈음, 찬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다른 B랭크 분들은 몰라도 C.D랭크까지 절 그렇게 생각하는진 몰랐어요."
"흥. 당연하지. 그들도 사람인데."
오히려 훨씬 더 민감하리라. 하지만 광현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속삭였다.
"그 건은 끝나고 나서 보자고. …주제를 모르는 것들이."
그래. 까일만하지. 인정한다. 하지만 자기 주제를 알면 티를 내선 안 되지. 광현은 강호 뒤쪽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면면을 기억해내며 입술을 핥았다.
까도 우리가 깐다. 어디서 감히.
그 기색을 보고 쿠쿡하고 웃은 여자는 찬휘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귓가에 숨을 불어넣었다.
“그러니까 이번엔 이상한 짓 하지 말아봐. 방금 그건…. 우리 선에서 해결을 보지.”
그 말에 찬휘의 안색이 어린아이처럼 밝아졌다. 바로 그때. 공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키메라를 육안으로 확인. 진형을 갖춰주세요!!"
수신기를 통해서 들려오는 그 목소리는 차라리 비명에 가까웠다. 찬휘는 조용히 각오를 다지며, 이번엔 군소리 없이 사전에 지정받은 자신의 포지션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폭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
목포에서 나타난 경급 디제스터 '키메라 Type-G', 빠른 지칭을 위해 줄여서 '키메라'는 최초 합체 직후 현장에 있던 4명의 일리미네이터들을 급습했다. 다행히 그들은 상대의 심상치 않은 변화를 보고서 빠르게 현장을 이탈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경상을 입어야 했다.
그 이후 '키메라'의 상대는 공격대가 올 때까지 국군이 하게 되었다. 헬기와 전차들이 동원되었다. 그들의 최초공격은 성공적이었다. 현대 군대의 화력은 녹녹지 않다. 화력의 절댓값만 따지고 보며 일리미네이터들의 마법도 현대 무기보단 못한 경우가 태반이다.
덕분에 디제스터는 신체 45% 이상이 소멸하여, 거의 퇴치에 가까운 상황까지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키에에에에에에에!!!!!”
머리통이 반쯤 날아간 놈이 소리를 지른 그 순간. 모든 것이 끝났다.
"으아아아악!!"
갑자기 헬기와 전차들이 진동한다 싶더니, 탑승하고 있던 군인들의 칠공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일순에 그들 모두가 사망해버린 것이다. 전차 내부의 모든 전자장비 역시 쇼트를 일으키며 작동을 멈춰버렸다. 조종사를 잃은 전차들은 그대로 시가지 한가운데에 멈춰 서버렸다.
목포 시가지 한가운데에 나타난 디제스터다. 전장의 신이라 불리는 포병은 나설 수 없었다. 속도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날개가 달린 이상 하늘도 날 수 있는 괴물인 건 분명하다. 비행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그냥 지상 이동속도만 해도 어지간한 차량을 씹어 먹는다.
이 상황에서 포격을 가한다? 할 수야 있겠지. 목포시를 석기시대로 되돌리겠다는 마음만 먹을 수 있다면….
"젠장! 일리미네이터들은!"
"왔습니다!"
다행히 파급->경급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거친 덕분에 시민들의 피난은 끝나있었다. 민간인 피해는 크게 나지 않았다. 정말 그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하지만 이 나라의 안보를 정말 저런 25명에게 맡겨도 되는 것인가?
일리미네이터들의 등장에 안도하면서도, 현장에서 철수하는 군인들은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
"30분도 안 되는 사이에 아주 박살이 났군."
경급 디제스터 경보 이후 1, 2 공격대 소집과 편성, 그리고 출동까지 걸린 소요시간은 20여 분. 이 정도면 목포가 아니라 서울 시내에 경급 디제스터가 나타났다고 해도 이것보다 빠르기 힘든 시간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 목포 시내는 지옥으로 변해있었다. 한국군의 교전에 인한 피해가 너무 크다. 그 하나하나가 놈에게 기동을 강요하면서, 거체가 나돌아다니며 수많은 건물을 콘크리트 더미로 바꿔놓았다.
목포 시가지, 정확히는 목포 역 근처에서 나타난 놈은 한국군의 공격이 어느 정도 잠잠해지자 신체를 회복하면서 인간을 찾아 천천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유그드라실의 백업을 받은 공대장은 그것을 확인하면서 침착하게 지시를 내렸다.
"이 이상 시가지에서 교전은 위험합니다. 놈을 유인해서 장소를 바꿔야 해요. 근처에 학교가 너무 많습니다."
민간인들의 대피장소는 여러 곳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학교로 정해져 있었다. 디제스터 창궐 이후 대한민국 모든 학교의 지하에는 주민 수용을 위한 쉘터가 설치되어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쉘터라고 해도 그게 전부 디제스터의 공격을 막을 정도인 것은 아니다. 교전 중 잘못해서 디제스터나 일리미네이터의 공격으로 쉘터에 피해가 가기라도 한다면….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다.
"그럼 어느 쪽으로 유인할 생각이지?"
"이 근처라면 유달산이나 삼학도가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럼 삼학도로 하지. 유달산 쪽은 빠지는 중간에 학교가 대여섯 개는 더 있기도 하고…. 삼학도 쪽은 좀 벗어나더라도 주변이 골프장이나 공원이니까. 건물 피해도 크게 줄일 수 있을 거야."
삼학도로 향하는 중에도 목포 남초등학교가 있긴 하지만, 그건 비행으로 어떻게든 커버할 수 있다. 의견을 취합한 공대장은 위성 데이터를 취합해보고는 판단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디제스터를 삼학도 쪽으로 유인하도록 하겠습니다. C랭크 일리미네이터 전원 비행. 하프 캐스팅 공격 이후 전력으로 빠집니다. 카운트 직후 교전 시작합니다. 3, 2, 1. 스타트!"
공대장의 명령과 동시에 C랭크 일리미네이터 전원이 하늘로 날아올라 캐스팅을 시작했다. 22명의 주문 캐스팅이 시작되면서, 하늘 위에 형형색색의 오오라가 피어오른다.
"크르르르!"
초자연적인 감각으로 그것을 느낀 디제스터는 눈에 흉성을 띄우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몸만큼이나 거대한 박쥐 날개를 펼친 놈은 일진광풍을 일으키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바로 그 순간, 3초간의 캐스팅을 마친 22발의 방출계 마법이 놈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쿠르르르르르릉!
필설로 형용하는 것이 무의미한 광음이 터져 나온다. 강력한 열 폭풍에 마법을 발사한 일리미네이터 본인들조차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몇몇은 화상을 입었다. 그 모습에 찬휘는 입을 떡 벌리고 놈의 치명상을 확신했다.
그러나 공대장은 냉정한 얼굴로 자기 먼저 몸을 돌려 최대한 빠르게 날아가며 외쳤다.
“손상 경미. 쿨다운 동안 최대한 거리를 벌립니다. 모두 산개하면서 삼학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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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이라고 하면 솩 광현이가 생각난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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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내일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