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역시 C랭크 따위를 믿는 게 아니었다. 찬휘의 눈에 분노가 서렸다.
뭐? 경험? 선행 예지에 가까운 지령? 다 꺼지라 그래. 그딴 건 압도적인 힘 앞에선 아무런 의미가 없어. 아니 힘이 갖춰지지 않은 한 그런 건 다 잡스러울 뿐이야. 다 잔재주라고!
어디든, 어떤 자리든 내 위에는 위에 있는 게 걸맞은 인간이 들어앉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나보다 더 약한 새끼가 내 위에서 이래라저래라 해봐야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결국엔 이 꼴이잖아. 예측이 단 한 번 빗나간 꼴이 이거잖아!
내 위에서 꺼져! 날 통제하려고 들지 마, 잡놈들 주제에! 잘난 인간이나 오란 말이야!
그래. 로마이어 형 같은. 돈도 많고 여자도 많고 나에게 미래를 보장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내 주변에서 사라져!
사망자가 나오고, 공격대장이 부상으로 지령을 내릴 수 없어진 그 시점에서 찬휘는 이성을 잃었다. 다른 B랭크가 말한 대로 억지로 성질을 참아봤지만, 결국 결과는 내지 못했다.
‘그래. 결국, 결과를 내는 것은 힘이다. 압도적인 힘! 그게 있는 내가 이 상황을 정리해주마!’
부서질 듯 이를 갈면서 주변 일리미네이터들이 습격을 당하고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풀 캐스팅을 성공한 찬휘는 아직 제대로 달라붙지 않은 놈의 본체에 방출마법을 내갈겼다. 하늘에서 백열이 내리꽂히며 놈의 육신이 비산했다. 완전히 고깃덩어리로 화해버렸다.
찬휘의 눈에 환희가 맺혔다.
잡았다. 이걸로 저번의 실수를 만회하고, 공격대를 구한 인물로 앞으로도 줄곧 이야기를 들을 거다. 손을 내뻗은 그의 입가엔 웃음이 번져갔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의 행동이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일반적인 경급 디제스터였다면 지금 이 공격으로 완전히 퇴치되었으리라. 자신이 공격당할 수 있는 리스크를 지고서 한 공격이니, 과감하다고 평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박찬휘!”
지금 이 디제스터에게 있어서만큼은, 완전히 틀린 판단이었다. 그것을 찬휘는 뒤편에서 자신의 이름을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치는 것을 듣고 나서야 자각했다.
퍼버버버버버벅!
“으…억…!”
강렬한 파육음과 함께 찬휘의 몸이 꺾이며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광현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어갔다. 지금 그의 행동 하나로 일어날 파급효과가 얼마나 클지 도무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아니 그 이전에….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살아 나갈 확률이 대폭 감소했다.
공격대장이 쓰러진 지금 지휘권은 자신에게 있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남은 공격대원들을 수습하고 광역 공격으로 벽을 친 후, 나머지는 전력으로 디제스터 본체에 딜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광역마법의 핵심이 되는 B랭크 하나가 리타이어 했다.
그것만으로 끝나면 그나마 낫지만, 풀 캐스팅을 해준 덕에 디제스터가 공격을 가하는 ‘방향’이 결정되었다. 당연히 찬휘와 가까운 거리에 있던 그도 범위 안에 들어갔다. 그리고 바로 지금….
푸푸푹!
“씨발…. 이 개병신 새끼.”
광현은 로마이어의 부탁으로 찬휘와 같은 공격대에 들어온 것을 후회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더니, 딱 그 꼴짝이다. 광현은 자신에게 덮쳐오는 수많은 디제스터의 육체 쪼가리들을 바라보며 입술에 피어싱한 링을 핥았다. 입에서 걸쭉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바로 그때였다.
쿠르르르르르르릉! 삼학도 저지대에서 고지대까지…. 일리미네이터 주변 몇 미터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 폭발이 일어났다. 광현과 쓰러진 찬휘 주변의 모든 것들도 폭발에 잿더미가 되어 사라져갔다.
“…예비가 왔나?”
내 명줄이 아직 끝나지 않았나 보군. 쓰게 웃은 광현은 신형을 튕겨 찬휘를 수습했다. 온몸에 관통상을 입고 있긴 하지만…. 유그드라실의 치료를 받는다면 어쩌면 살지도 모르지. 죽게 내버려 두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뒷일은 생각해야 한다.
“광현 선배….”
“입 열지 말고 싸 닥치고 있어.”
자신도 몸에 관통상을 입었다. 마지막 힘으로 발버둥 치기라도 하면 자신이 쓰러지고 말리라. 간신히 그를 들쳐 멘 그는 아직 남아있는 강화마법의 힘을 빌려 해당 위치를 이탈했다. 그러는 와중 그의 눈에 한 무리의 사람이 보였다.
큰 키와 덩치를 가진 남자와 허리춤에 검을 찬 여자. 보일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광현은 묵례로 목숨을 건져준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러나…. 그의 등에 몸을 맡기고 있던 찬휘의 눈은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아…안 돼….”
저 자식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아니,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다고. 여기서 사라져! 다시 저 위로 올라가 버리란 말이야!
“광현 선배…. 저 새끼 올려보내야 돼요…! 지멋대로 내려와서…!”
“…….”
광현은 찬휘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순간적으로 살의가 들끓어 올랐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어차피…살든 죽든 이 뒤는 없는 놈이다. 한 번 정도는 봐줘도 되겠지.
“자라. 닥치고.”
“으…!”
광현에게 이마를 집히자 순식간에 눈앞이 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저편에 보이던 그 키 큰 녀석의 등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렸다.
아아. 나는 또 빼앗기는 건가…? 놈에게?
또…이런 식으로?
입가에 맴도는 말을 다 내뱉지 못한 찬휘는 사라져가는 그 등 뒤를 향해 손을 내뻗다가 이윽고 의식을 잃고 말았다.
*
1 공격대와 마찬가지로 지연주문을 활용해 광역공격을 펼쳐 일리미네이터들이 빠질 시간을 준 2 공격대는 지상에 내려오자마자 진형을 갖췄다.
공중에서 대략적인 전장상황을 파악한 레이나드는 혀를 찼다. 중간에 B랭크 하나의 잘못이 있긴 했지만, 자신이 1 공격대장을 맡았다 하더라도 비슷한 상황이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키메라’는 희귀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일정 시간 동안은 영체 정보가 있는 한 체세포 하나 남겨두지 않아도 무한 재생하는 특성이라니.’
일리미네이터는 유령이나 비실체의 적과도 많이 상대하게 되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한눈에 보기에도 그런 특성을 가지고 나타난다. 그런데 이 녀석은 철저하게 위장되어있다. 보통 상태에서도 충분히 일반 경급 디제스터와 비슷한 힘을 가진 놈이 간신히 죽였다 생각하면 갑자기 특수 패턴에 들어가다니.
사방으로 쏘아낸 육체들이 따로 변형을 일으켜 피해를 주는 동안 놈의 본체는 거의 재생을 끝내고 있었다. 저편에서 20m가량의 거체를 수복하고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분명 2 공격대도 일반적인 공격대였다면 이 녀석을 처리하는데 고생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일반적이지가 않지! 레이나드는 선글라스를 치켜 쓰며 천후와 강호를 바라보았다. 결국, 이런 자리가 와버리고 말다니.
‘보고 있겠지. 로자미아.’
보여주마. 네가 눈 여겨 본남자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음을. 내가 보여주지.
“디제스터 재생 완료를 육안으로 확인. 이제부터 ‘키메라’ 트라이를 시작합니다. 먼저 초전은 영천후, 이강호 듀오가 열어주세요.”
“네.”
“따르겠습니다.”
짧게 답한 둘은 그대로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강화마법이 주특기인 만큼, 다른 일리미네이터들을 아득히 초월하는 육체성능에 인해 그들의 움직임을 놓친 것이다.
2 공격대원 대부분이 유그드라실에서 영천후에 대해서 풀어두었던 영상 데이터를 이미 본 상태였지만, 실제 눈앞에서 그것을 경험하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중 몇몇은 이렇게 말해왔다.
“너무 위험합니다. 경급 디제스터에게 단 두 명만으로 선행공격을 하다니!”
기존 일리미네이터 말했다면 당장 공격대에서 이탈해도 할 말이 없는 지령이다. 하지만 레이나드는 오히려 웃으며 답했다.
“공격대장인 제 판단을 믿어주세요. 그들이라면 할 수 있습니다.”
“…….”
레이나드가 이 바닥을 구른 게 10년이다. 2 공격대뿐 아니라, 유그드라실에게 소집 당한 모든 일리미네이터들이 한 번씩은 그와 면식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가 경급 디제스터 레이드에서 이렇게까지 걱정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남은 23인 모두 풀 캐스팅 시작하세요. 지연주문 세팅 후 지령이 떨어지면 바로 발사합니다.”
빠지지지직!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몸에서 스파크가 일어났다. 레이나드의 풀 캐스팅이 시작된 것이다. 23인 전원 풀 캐스팅이라니?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꺼렸지만, 이미 그가 먼저 행동을 개시한 이상 어쩔 수 없다.
두 사람을 돌격시킨 나머지 사람들의 몸에서 형형색색의 오오라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극도로 빨라진 두 사람의 신형이 불길이 치솟아 오르는 대지를 찢어발기며 ‘키메라’에게 향했다. 둘을 포착한 놈은 꼬리를 치켜들어서 그 끄트머리에 달린 가시들을 쏘아냈다.
쿵. 쿠쿠쿠쿵! 하나하나가 사람 키는 우습게 넘어선다. 이쯤 되면 가시가 아니라 무슨 기둥이다. 하지만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발사 궤도가 단순하다. 그래서는…. 이 둘을 막을 수 없다.
허공에서 두 선의 시선이 얽힌다. 말하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다. 무색과 적색이 양 갈래로 나뉘며, 디제스터 주변을 돌았다.
“키에에에에에!”
펑. 퍼퍼퍼퍼퍼펑! 오른쪽에선 어지간한 빌라 한 단지만 한 크기인 놈의 몸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왼쪽으론 은선이 지나치며 신체를 베어낸다. 둘 다 재생력에 의해서 금방 치료되지만…그래도 성가시다! 데미지가 쌓여간다.
키메라는 손을 들어 주변을 도는 그것들을 쳐내려고 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천후와 강호는 하늘이 뒤덮이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많은 일리미네이터들은 바로 이런 공격들을 회피해내지 못하고 육편이 되어 바스러져 버린다. 그러나…!
스캉. 쿠콰콰쾅!
순간적으로 두 선이 교차하며 놈이 뻗었던 오른손이 잘려나가고 폭발하여 사라져버렸다. 갑작스러운 대 타격에 디제스터는 적응하지 못하고 비명을 내지르면서 빈틈을 보였다. 그것을 놓칠 순 없다.
“선배!”
“음!”
단지 부르는 것만으로도 그가 하려는 말을 안다. 알 수 있다. 당연하지. 겨룸. 싸움에 있어서만큼은 그와 그녀가 모르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놈은 큰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둘의 힘으론 이 이상 큰 타격을 입히는 것은 무리다. B랭크 강화마법이 가지는 화력 상의 한계.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 화력을 끌고 와야 한다.
어디에서? 굳이 말할 필요가 있는가? 바로 저쪽에서 빛나고 있는 광점에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방해물은 있어선 안 된다. 마법을 지워버릴 수 있는 이레귤러는 최대한 배제해야 한다.
진리구현자로서의 특성. 마법, 초자연적 능력의 무효화. 그것은 분명 강력한 것이지만, 이강호는 아직 그것을 의식적으로 완전히 컨트롤 하지 못하고 있었다. 후방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너무 감이 좋아서’ 자기도 모르게 무효화 해버리니까.
그러나. 반대로 그것을 직시한다면? 공격이 오는 걸 이미 안다면? 그리고 그것이 그 범위 내에서 완벽하게 안전하다고 믿을 수 있다면 어떨까?
그것을 위한 선택. 영천후와 이강호는 중간에 디제스터를 두고서 완전히 광점의 반대방향에 섰다.
게임으로 말하자면 그래.
몹의 머리를 돌렸다.
“발사!”
번쩍. 순간. 섬광이 일었다. 빛의 파도. 파도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것이 키메라의 몸통 중앙을 완전히 관통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빛에 닿았던 곳에서는 빛이 번져나가 남은 몸조차도 훼손해나가기 시작했다.
“키에에에에에에!”
23인의 풀 캐스팅. 지면에 꽂혔다면 대폭발을 일어났을 그것은 삼학도 너머에 있는 부두를 반쯤 소멸시키며 바다를 양옆으로 밀어내며 수평선 저 끝까지 날아갔다.
자신들이 발휘한 마법에 되려 놀란 2 공격대원들은 이미 반은 빈사 상태가 된 키메라의 몰골을 보면서 크게 입을 벌렸다.
“어때? 괜찮다고 했죠? 자! 다음 풀 캐스팅 준비!”
신나서 미치려고 하는 레이나드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들의 판단력은 간신히 보통 수준으로 돌아왔다.
영상을 보면서 어느 정도 생각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었다.
로마이어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신예. 트란제비야의 영천후는 과연 그럴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로마이어가 줄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레이드의 안정성.
경급 디제스터에게서 단 두 명을 제외한 23명이 풀 캐스팅을 할 수 있게끔 하는…절대적인 안정성!
그들은 지령에 따라 풀 캐스팅을 시작하면서 확실하게 느꼈다.
지금 이 자리야말로―패러다임이 변화하는 그 시발점이 되는 장소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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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많이 오네요. 다들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