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80화 (80/324)

80화

천후가 눈을 떴을 때, 눈앞에 보이는 것은 흰색 천장이었다.

"음…."

"아! 천후!"

"주인님."

간신히 목에서 목소리를 자아내자, 그가 깨어났다는 것을 안 희주와 셀레나가 양손을 잡아왔다. 그제야 자신이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났다는 것을 자각한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가 있는 곳은 이전 입원했었던 곳과 같은 병원의 특실이었다. 시야에는 강호와 이브, 에바뿐 아니라 레이나드, 그리고 친란까지 보였다. 손님까지 와있는데 계속 누워있을 수도 없다고 생각한 그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오빠!"

"오빠야! 아직 일어나면 안 돼요!"

눈물까지 글썽대며 다가와 외치는 두 아이를 안심시키려 가만히 입가에 미소를 지은 천후는 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냐. 오빠 괜찮아. 그런데…. 대체 어떻게 된 거죠? 분명 키메라 퇴치가 마무리되던 와중이었는데…."

본체가 파묻힌 구덩이를 지켜보고 있었던 시점 이후의 기억이 없다. 게다가 아이들에게 괜찮다곤 했지만, 상체를 일으키니 통증이 몰려왔다. 뭔가에 공격당한 건가?

"음. 그건 내가 설명하도록 하지."

천후가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자, 저쪽 벽에 몸을 기대고 서 있던 레이나드가 그에게 다가오며 그 뒤에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천후에게 스크류 블로우를 맞은 찬휘는 그대로 뒤로 날아가 몇 미터나 데굴데굴 굴렀다. 천후는 거기에서 끝낼 생각이 아예 없는지, 그를 따라가 드러누운 그의 몸 위에 올라타 파운딩을 날렸다.

사람 주먹이 두개골을 두들기는데 무슨 돌과 돌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것을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이강호가 살벌한 기세로 검을 뽑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찬휘를 두들겨 패고 있는 천후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무방비의 상대를 가차 없이 피떡으로 만들고 있는 그 모습에 일리미네이터들은 공포를 느꼈다. 원시시대에서나 행해졌을 맨손의 폭력이 사람을 덮치는 그 모습은 차마 마주 보기 힘든 것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의 안면을 두들기고 있던 천후는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스르륵 옆으로 쓰러졌다. 그것을 강호가 다가가 부축했다. 그때까지 가서야 강호는 검을 집어넣어 주었다.

그제야 공격대원은 키메라를 완전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 2분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놈이 다시 재생하긴 했지만, 이미 쿼크 영역까지 박살 난 놈이 완전부활하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그 뒤 천후, 찬휘를 포함한 부상자들은 유그드라실로 이송, 치료 후 다시 일반병원으로 옮겨졌다. 천후의 상태는 이전과는 다르게 진피와 근육에 화상이 남아있다는 판정을 받아 얼마간 마법에 의한 치료를 더 받아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 외에는 이전처럼 심한 탈진 정도로 그쳤다.

마지막으로 분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트란제비야 둘이 4. 다른 B랭크가 1. 그리고 나머지가 5를 받았네. 뭐. 알아서 긴 거지."

천후가 죽었다면 모를까. 살아나 버린 이상 찬휘의 공격시도는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현장엔 눈을 시퍼렇게 뜬 이강호가 남아있는 시점에서 B랭크들이 함부로 설칠 수 있는 환경이 전혀 아니었다.

합당한 배분이 안 나오면 그 자리에서 피바람이 일어날 분위기에 찬휘를 제외한 B랭크 3인은 몸을 깊숙이 숙였다. 일단은 살고 봐야 할 게 아닌가?

한편, 그 이야기를 들은 천후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강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안 그래도 천후와 팀을 이루기 전에는 한국에서 평이 그리 좋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되다니…. 하지만 그녀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눈 하지 마라. 난 아무렇지도 않아. 오히려 그들이 적반하장이지."

"그렇긴 하지만…. 하아…."

이전부터 생각은 했지만, 이 사람은 자신의 몸을 너무 막 굴리는 성향이 있었다. 그 자신의 강함이 있기에 아슬아슬하게 그 모든 것이 굴러가고 있지만, 옆에서 보고 있자면 위태로워서 가만있을 수가 없다.

언제 한번 제대로 날을 잡고 이야기를 해봐야지. 그렇게 속으로 생각한 천후는 잠시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음…. 마지막에 조금 안 좋게 끝나긴 했지만, 목표했던 것과 비슷한 그림이네요."

"네. 주인님의 힘의 증명. 로마이어 측에게 실력 과시. 그리고 분배 문제까지. 나쁘지 않습니다. 특히 분배의 경우 자발적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으로의 기준이 되겠죠."

"되게 해야 하고?"

"그렇습니다."

무표정한 얼굴이 한차례 끄덕인다. 천후는 어째선지 그녀가 조금 들떠있다고 느꼈다. 표정은 없지만, 고개를 움직이는 정도나 손을 쥐고 있는 힘 같은 것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 더 얼굴에 드러내 줬으면.'

밤에. 그녀를 안을 때 조금씩 보이는 그 모습이 일상에도 조금 더 보였으면 하는 마음이 이 순간에 무심코 들었다. 이전엔 그것이 남 보여주기에 아쉽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제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늘 감추고 있는 것이 못내 아까웠다.

그래서일까? 천후는 무심코 그녀의 볼가에 손을 올렸다. 백옥이 눈을 깜빡인다. 그것은 명백한 놀람. 그의 입에 살짝 미소가 실렸다. 그래. 이렇게 조금 더….

"흠! 엇흠! 아이들도 보고 있는 곳에서 파렴치하게!"

"……."

깜빡했다. 흠칫 놀란 천후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뗐다. 옆에서 말똥말똥 올려보는 두 아이를 보자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하지만 희주는 헛기침을 한 강호에게 눈을 돌렸다.

"읏."

그 눈을 마주 본 강호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평소 그대로 아름다운 눈매였지만, 어째선지 빤히 바라보는 그것이 자신을 힐난하고 있다고 느낀 것이다. 세상 살면서 두려운 게 없는 강호였지만, 지금의 희주에겐 감히 당해낼 수 없었다. 차라리 디제스터를 한 마리 더 상대하는 게 낫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무. 무섭군.'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는데, 강호는 지금 설원 한가운데에 들어온 것 같은 싸늘함을 느꼈다. 그게 비단 병원 특실의 빵빵한 에어컨 탓만은 아니리라. 강호는 어떻게든 제 한 몸 건사하기 위해 다른 화젯거리를 찾았다.

다행히도 그녀를 구해준 것은 친란이었다. 병실 한쪽에 앉아있던 그녀는 이야기가 어느 정도 정리되는 분위기이자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이번 일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네. 부하 직원들을 통제하지 못한 내 잘못이 크네."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연 그녀는 그대로 허리를 90도로 굽혔다.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그것이 누워있는 천후의 가슴 위로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본 레이나드의 눈이 커졌다.

친란. 로자미아 엔체스터는 대 재벌의 말예. 차후 엔체스터 전체를 이어받을 거라 일컬어지는 인재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동아시아 재계의 일익을 담당하는 인물이다.

그런 만큼 그녀의 자존심은 엄청나다. 어지간한 일로는 굽힐 줄을 모른다. 그녀가 자존심을 굽힌다는 것은 위로는 엔체스터 전체가, 아래로는 자신을 따르는 모든 이가 사과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뜻을 꺾었을 때의 분함조차 없이 순수하게 사과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주 어릴 적, 아직 그녀가 엔체스터의 성을 받기도 전부터 그녀를 알아왔던 레이나드도 본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아. 고개를 들어요, 친란. 당신이 이럴 것 없습니다."

레이나드처럼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로마이어가 친오빠인 이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분명 있을 거라고 짐작한 천후는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를 짚어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극구 머리를 크게 저었다.

"아니다. 태어나서 이만큼의 수치를 느껴본 적이 없어. 나는 자네에게 빚을 졌네. 내 이 건은 크게 갚도록 하지."

"……."

억지로 힘을 써서 그녀의 허리를 펴고자 한다면 할 순 있을 것이다. 단순히 완력으로만 따지자면 아예 들어서 역으로 접어버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선 그건 의미가 없다. 흘러내린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서 그것을 확신한 천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친란. 그건 천천히 받도록 하죠.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죠. 다행이네요. 당신이 와있을 줄은 몰랐는데. 사실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

"음?"

천후의 말에 친란은 굽혔던 허리를 폈다. 지금이라면 무엇을 물어보더라도 전부 답해줄 용의가 있었다. 아니 그 무슨 부탁이더라도…. 하지만 그 다음 그가 꺼낸 말에서 친란은 전혀 다른 놀라움을 느꼈다.

"사실…. 전 이번 달에 나타난 디제스터들의 패턴을 보고서 이게 멸급 디제스터 출현의 전조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 부분에 대해서 자문을 좀 얻고 싶은데요."

"……!"

그녀의 손에서 부채가 떨어졌다. 하지만 친란은 그것을 자각조차 하지 못하고 멍한 목소리로 말했다.

"…놀랍군. 이 시점에서 그 생각을 하는 사람은 극소수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일주일 정도 전부터 생각은 했습니다만…. 그때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2체의 디제스터가 합신合身하는 것을 보고 더 이상 감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하. 하하."

일주일 전인가. 자신이 처음 의심했던 때와 거의 동일하다.

천후를 바라보는 친란의 눈빛이 아주 조금 달라졌다. 여전히 흥미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같지만…. 그 성질이 아주 조금 바뀌었다.

친란은 허리를 굽혀 떨어뜨린 부채를 집어 들었다. 그것을 펼쳐 입가를 가렸다. 가릴 수밖에 없다.

방금 그렇게 사죄해놓고….

그 사죄한 남자를 보면서 대놓고 입술을 핥을 순 없지 않은가?

천박한 여자론. 보이고 싶지 않다.

'아. 이런.'

이건 곤란하군. 여자론인가. 자기도 모르게 부채 아래서 쿡쿡하고 웃어버린 친란은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표정을 굳힐 수 있었다.

“아직 조금 경과를 봐야 하지만, 엔체스터 콜로니 자체 시뮬레이션 결과론 65% 이상 확률로 긍정하고 있다."

그 말에 병실에 있던 모든 이들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천후는 그런 와중에도 냉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비를 해야 합니다. 해당 공격대를 조기에 편성해서 훈련해야 해요."

“음. 다음 말은 알겠네. 그걸 발언하고 실현할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거겠지? 나는 자네를 밀지.”

"…괜찮겠습니까?"

그녀의 오빠, 로마이어가 그것을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다. 천후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오라비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에게 손을 대지 못해. 절대로. 나를 방해할 수 있을지언정."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 확신을 내비친 친란은 자기 입에 닿았던 부채 끝을 접어, 천후에게 내밀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멸급 디제스터에 확실하게 대응할 수 있는 건 이 나라에선 자네가 유일하지. 그렇다면 자네를 지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빚은 금방 갚겠네요."

그녀가 죄책감에 휩싸여 있는 모습은 오래 보기 힘들다. 그래도 빠른 기회가 왔으니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한 천후는 밝게 웃었다. 하지만 그 말에 친란은 더더욱 미소를 깊게 바꿨다.

"아니. 이건 어디까지나 처음부터 생각했던 것이지. 빚이란 건 그렇게 쉽게 갚을 수 있는 게 아닌 법이다."

"…네?"

되물음에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병실 안을 둘러보았다. 파워 밸런스가 보인다. 무력으로야 천후와 이강호가 단연 최고겠지. 하지만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강호와 셀레나를 바라보던 시선은 이윽고 희주를 향했다.

"희주. 나중에 잠시 나와 개인적으로 시간을 내주지 않겠나?"

"…그러죠."

가느다란 눈과 눈이 허공에서 마주친다. 친란은 웃었다. 빠르다. 엄청나다.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지만, 보통이 아니다. 이렇게 빠르게 읽히다니. 짜릿짜릿한 감각에 몸이 다 떨린다.

"뭐. 빌라이저도 일단 너를 지원하도록 하지. 내 영향력이라고 해봐야 별것 없긴 하지만."

대화를 곁에서 듣고 있던 레이나드는 이야기가 정리되어가자 손을 들며 밝혔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C랭크 이하 일리미네이터 사이에서 그의 신용은 굉장히 두터웠다. 천후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레이나드 씨. 감사해요."

"뭘. 닭살 돋게 감사해요는. 난 내가 오래 살고 싶어서 그래. 이 나라가 좀 개판이긴 하다지만…. 그래도 내 조카들이 자랄 수 있는 나라론 남겨줘야지.“

멸급 디제스터는 국가의 존망을 위협할만한 존재. 그것에 대항하기 위해선 할 수 있는 최선, 최고효율만 따져서 응집해도 부족하다. 거기에서 최고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저 남자다. 그럼 다른 곳을 볼 필요가 없지.

그리하여. 서울 한 대형병원 특실에서 멸급 디제스터 대비를 위한 1차 동맹이 그렇게 결성되었다.

하지만….

병원 1층 로비.

흰색 정장을 입은 금발의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쓰레기통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어버렸군."

역시. 병문안은 와보고 볼 일이다. 잘난 동생이 신경 쓰는 곳은 더더욱.

기다란 리무진 한 대가 병원을 떠났다.

============================ 작품 후기 ============================

연참, 연참~.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모두 감사드립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