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82화 (82/324)

82화

다음날 이른 아침. 대한민국에서는 한 가지 커다란 특종이 터졌다.

<로마이어 엔체스터, 3개월 이내에 대한민국에 멸급 디제스터 발생 예측하다!>

이 발언에 인해 대한민국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하지만 로마이어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아예 디제스터 연구 전문가와 몇몇 B랭크 일리미네이터와 함께 공영 방송국 3사 공동주최로 설명 및 토론회를 열었다.

국가의 안보를 논하는 자리인지라, 그 자리에는 국방부 차관 역시 함께하고 있었다.

"로마이어 씨. 일단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네. 안녕하십니까? 저는 B랭크 일리미네이터의 대표, 로마이어 엔체스터라고 합니다."

"워낙 심각한 사항이라 빠르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로마이어 씨는 대한민국에서 곧 멸급 디제스터가 나타난다고 하셨는데요. 멸급 디제스터란 대체 어떤 존재입니까?“

"일단. 그것을 설명해 드리기에 앞서 디제스터 척도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디제스터의 강함에 따라서 우리는 디제스터를 신, 천, 멸, 경, 파급으로 나눕니다. 이 중 신급이 가장 강하고, 파급이 가장 약합니다."

"그럼 멸급은 겨우 중간단계밖에 안 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만, 현실은 조금 다릅니다. 디제스터 척도는 저렇게 나눠두었습니다만, 실제론 10년간 신급, 천급 디제스터는 나타난 적이 없습니다. 즉, 멸급 디제스터가 지금까지 인류가 대적해봤던 최고 등급의 디제스터라는 것입니다. 그 위 등급은 차후 출현할 가능성이 있어 미리 이름을 지어놓은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군요. 그럼 그 멸급 디제스터는 얼마나 강한 건가요?"

"멸급에 그런 이름이 붙은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기자분들, 그리고 국민 여러분들께서는 7년 전 멸망한 아즈라엘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아즈라엘의 이름이 거론되자, 회장의 분위기가 사뭇 무거워졌다. 인도에서 대참사가 있은 지 3년 후. 갑자기 나타난 대형 디제스터에 의해 멸망한 국가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곳에서 나타났던 디제스터가 바로 멸급 디제스터였습니다. 당시엔 아직 일리미네이터의 수도 적었기 때문에, 놈은 군의 힘으로 쓰러뜨려야 했고, 결국엔 재래식 병력으로 해결을 보지 못해서 핵폭탄을 사용해야 했죠."

로마이어의 말에 국방부 차관이 첨언했다.

"당시에 사용됐던 핵폭탄의 수는 42발. 하나하나가 모두 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에 투하되었던 것들보다 훨씬 강력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럴 수가…."

"그 때문에 아즈라엘은 모든 기반시설과 사람들이 살아갈 터전을 잃고서 국가가 붕괴했습니다."

"그렇다면 큰일이 아닙니까? 우리나라는 핵을 보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경악하는 기자의 모습에 토론회에 참석해있던 방청객들의 표정에도 불안감이 서렸다. 로마이어는 슬쩍 웃었다. 이미 보도자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저렇게 연기를 하다니. 사람을 잘 구했다.

"바로 그래서 제가 나선 것입니다. 당시의 멸급 디제스터는 반 영체, 그러니까 유령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기존 현대 병기가 잘 통하지 않았지만, 저희 마법사. 일리미네이터들의 힘이라면 그들에게도 충분한 타격을 가할 수 있습니다."

오오 하는 감탄사가 방청객에서 터져 나왔다. 일부러 유도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탄성이었다.

"그렇군요. 그런데 로마이어씨는 어째서 대한민국에 멸급이 등장한다고 생각하신 건가요?"

"그것은 최근 디제스터들의 발생 패턴을 보고서였습니다. 10년간 등장한 멸급 디제스터는 총 8체. 그들이 나타날 때마다 전조현상으로서 일정 지역 내에 동일한 종류의 하급 디제스터들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네에. 하지만 국방부와 유그드라실의 분석으론 아직 성급한 판단을 내릴 정도의 빈도는 아니라는 자료가 있습니다만."

"네. 옳은 말씀입니다. 아직 완전히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디제스터를 전문적으로 퇴치하는 저희 일리미네이터 사이에선 이전 합체하는 타입의 디제스터가 발생하는 것을 보고 확신하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저는 현장에서 5년간 일했습니다만, 그런 디제스터는 본적이 없습니다."

로마이어의 말을 타이밍 좋게 다른 B랭크가 도왔다. 좌중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하지만 그때, 로마이어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자자. 바로 그래서 이렇게 미리 토론회를 연 겁니다. 역대 사례를 보아도 저희만큼 빠르게 멸급 디제스터를 감지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지금부터라면 얼마든지 대비를 할 수 있습니다."

"대비라고 하신다면?"

“일단 정부 측에서 유그드라실을 통한 민간인들의 공중수송에 대해 협의를 하는 겁니다. 멸급 디제스터의 광범위 공격은 그 범위가 엄청납니다. 갑자기 나타나면 경급 때까지와는 달리 사람이 달려서 쉘터로 피하는 정도론 대처가 되질 않습니다. 위험지역 내의 시민 전체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 것입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협의가 진행되고 있나요? 차관님?"

갑작스레 돌아온 화살에 차관은 흠칫 거리면서 준비한 문서를 읽어나갔다.

"아직 완전한 협의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만, 곧 해결될 것입니다."

"국민들의, 민간인들의 생명이 가장 우선 돼야 할 것입니다. 그 점을 주의해주세요, 차관님."

"물론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들의 안전을 위해 모든 힘을 다할 것입니다."

최대한 각 잡고 하는 말임에도 불안해 보이기 짝이 없다. 하지만 로마이어는 그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또한, 사안이 사안인 만큼, 내륙, 그리고 도심지까지 사단, 혹은 군단 규모의 포격을 언제든지 실행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네. 그 부분에 대해선 제가 조사해봤는데요. 탄약에 대한 문제가 걸리는데…."

"괜찮습니다. 반드시 미국의 협조를 얻어내겠습니다. 그리고 발생이 예상되는 날까지 최대한 많은 사단, 군단급 훈련을 치를 생각입니다."

"대한민국의 국군 장병 여러분들의 힘을 믿습니다."

금발 머리의 백인이 유창한 한국어로 이렇게 말하니 이 이상 어색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 때문에 더더욱 자극을 받은 이가 많았다고 후에 많은 전역자가 회고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희 일리미네이터, 그리고 저에 대한 지원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지원이 필요할까요?"

"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 던전화가 가능한 디제스터일 경우 그 안에선 40명의 일리미네이터 밖에는 싸울 수가 없습니다."

"……."

"그러므로 이번 멸급 디제스터 레이드를 준비하는 모든 일리미네이터는 최대한 정예화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확실한 리더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부족합니다만, 현 상황에서는 제가 그 역할을 맡아 완수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로마이어 씨는 지난 5년간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면서 수많은 성과를 냈고, 많은 일리미네이터들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이미 대표나 다름없습니다만, 지금처럼 공식적인 장소에서 다시 한 번 부탁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옆자리에 앉은 남자는 가려운 곳을 대신 살살 긁어주며 그의 발언에 힘을 실어 주었다. 살짝 감사를 표한 로마이어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이 방송을 보고 계신 이 나라의 일리미네이터분들께 부탁드립니다. 나라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부족한 몸입니디만, 부디 이번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저의 지휘를 따라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꾸벅. 앉은 자리에서 절을 하듯이 머리를 숙이는 그 모습에 많은 사람이 감동했다. 방청객석에선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그들에게까지 감사인사를 해 보인 로마이어는 국방부 차관에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차관님께서는 이번 일에만 임의로 제 휘하에서 움직일 수 있는 사병을 준비해주실 수 있을지요?"

"네? 아니 그건…."

대한민국에서 사병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로마이어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아직 한국어가 미숙했군요. 실례. 저희의 화력이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에 즉각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포병이나 전차부대 하나를 붙여주실 수 있을까요? 군단급 화력지원은 강력합니다만, 명령이 들어가고 떨어지는 데에 오래 걸립니다."

"……."

차관의 이마에 한 줄기 땀이 흘러내렸다. 말은 온건하고 그럴싸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역시 사병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그것을 대놓고 밝혔다간, 국민 감정상 어떤 역공을 받을지 모른다.

"자체 회의 후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답변을 기다리죠."

태연한 얼굴로 빙그레 웃은 로마이어는 그 후에도 계속해서 토론회를 계속해 나갔다. 국가의 사활을 논했던 이 방송은 실시간 최고 시청률 82%를 찍었다.

*

"결국 저질러버렸군."

모든 일정을 미뤄두고 해당 방송을 지켜본 친란의 표정은 싸늘했다.

로마이어는 해당 방송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은 지 12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자신의 조력자와 해당 영역의 전문가. 그리고 방송 3사의 진행자들까지 귀신처럼 포섭해, 자신이 연출하고자 하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자기 편한 대로 전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포섭하지 못한 국방부 차관 역시 현장의 분위기, 그리고 송출되고 있는 화면에 신경이 쏠려 절대 내주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서도 쉽게 이야기를 꺼내지 못할 정도다.

'이것이 로마이어의 재능이지.‘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이 빠른 행동력. 사람을 포섭하는 능력. 주변의 분위기를 편하게 만드는 화술. 아직 젊은 외국인 사업가를 연상시키는 자신의 외모까지 고려한 행동.

저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타고났다. 로자미아 엔체스터는 오라비의 그런 재능을 충분히 인정하고 있었다.

허나….

"거기까지일 뿐이지."

가장 근본적인 부분을 외면하려 하고 있다. 방송에서도 언급조차 나오지 않고 있다. 유일하게 포섭당하지 않은 차관이 말을 꺼내야 할 테지만, 그는 이미 다른 화두에 속박되어있었다.

확실히. 사람 다루는 재주. 남이 믿게 하는 재주. 남을 속이는 재주는 뛰어나다. 걸출하다고까지 할 수 있겠다.

그것을 살렸으면 됐을 텐데….

"너는 여전히 네 손에 닿지 않는 것을 이루려 하는군."

그것은 단순히 꿈에 취했다는 것이 아니다. 불가능한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제3 세계의 어린아이가 과학자가 되고자 하는 것은, 지원할 수 있는 꿈이다. 본인의 노력과 강력한 재정적 지원자가 있다면 실현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최소한의 IF는 남아있는. 여지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사람이 아무런 장비 없이 곰을 맨손으로 상대해 이기고 싶다는 건? 로켓에 타는 게 아니라 그냥 지면을 점프해서 우주로 나가고 싶어한다면 어떨까?

그건 꿈도 뭣도 아니다.

허황된 개소리일 뿐.

"어리석은 오라비….“

화면 속에서 열변을 토하는, 또 어느 때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는 로마이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여러 가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 재능을 살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해나갔다면 좋았을 것을….

친란은 자신의 마음에 이런 잔념이 남아있는 것을 느끼고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는 그가 지금까지 자신과 엔체스터의 이름을 등에 업고 저질렀던 악행 대부분을 알고 있었다.

그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한 대죄인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그는 로자미아 엔체스터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래 말 그대로.

"혈족만 아니었던들….“

그를 떠올릴 때마다 입버릇처럼 하는 말을 다시금 담아본다. 친란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그리고….

로자미아 엔체스터의 눈이 떠졌다.

냉철한 눈. 사람을 베어낼 듯한 눈이 화면을 바라보다. 곧 시선을 치우고 완전히 등을 돌렸다.

"어리석은 오라비. 너는 실패할 거다."

뚝. 리모컨 눌러 화면을 껐다. 그녀의 눈이 아주 잠시. 자신의 태블릿을 훑어보았다. 눈동자가 흔들린 건 일순. 철혈로 돌아온 그녀는 단호한 발걸음으로 집무실을 나서며 읊조렸다.

"그리고 엔체스터는 두 번 실패는 용납하지 않는다."

쾅! 커다란 소리와 함께 집무실의 문이 닫혔다. 펄럭. 펄럭. 완전히 닫히지 않은 창문 때문에 들어온 바람이 실크 커튼을 흔들었다.

그 아래로 아직 빛을 잃지 않은 태블릿의 화면이 보였다.

<멸급 디제스터 레이드 시뮬레이션 보고>

상황설정

총 참여인원 : 40인

상세 : C랭크 30인, B랭크 10인, A랭크 없음

시뮬레이션 횟수 : 572회

시뮬레이션 결과 : 572회 전멸

결론 : 추가 변수 설정 필요

커튼이 화면을 가렸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쿠폰, 코멘트 모두 감사드립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개봉이 얼마 안 남았네요.

국가명은 현실국가에서 약간 변경해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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