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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84화 (84/324)

84화

희주의 말대로 요즘은 운전면허 시험이 간략화된 덕분에 빠르게 취득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 셀레나가 면허를 땄다는 운전면허학원에 등록한 천후는 살짝 긴장했다.

"이곳이 셀여사에게 운전면허를 따게 해줬다는 전설의 학원!"

"미안하네! 셀여사라서!"

빽하고 소리 지르는 아가씨가 있었던 기분이 들었다가 말았다가 하지만, 뭐 그건 넘어간다 치고.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정말 건실한, 정상적인 학원이었다.

학원은 특히 최단 시간 이내에 면허획득을 할 수 있도록 맞춰주었는데, 덕분에 천후는 신체검사, 필기시험, 장내기능을 한큐에 끝내버릴 수 있었다.

"와. 이래도 되나?"

아무리 간소해졌다지만 이쯤 되니 무섭다. 특히 장내기능은 딱 하루 연습해보고 통과하니 본인도 얼떨떨했다.

"그래도 장내기능이랑 도로주행에서 많이들 떨어져요. 젊은 분이라 쉽게쉽게 배우시네."

그런 건가? 천후는 칭찬을 듣고도 저게 립서비스인지, 정말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뭐 귀찮은 걸 빨리 끝냈으니 기분이야 좋지만, 이래서 셀여사 MK-2 같은 게 마구마구 늘어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을 지울 수가 없다.

"너 또 이상한 생각 하지?"

"아닙니다. 에헤이. 설마."

정당한 생각이지. 이상한 생각이라니. 하하. 이 사람. 셀레나가 뾰로통해져서 노려보자 천후는 웃으면서 뒷말을 숨겼다. 우리나라 교통안전. 파이팅.

"오늘 도로주행 시험일이라며? 잘 칠 수 있을 거 같아?"

"연습으로 돌 땐 괜찮았어. 희주 씨랑 같이 코스도 따로 한 번 돌아봤었고."

"그래? 그래도 긴장하고 해. 도로는 합격률 30%밖에 안 된대."

"그거밖에 안 돼?"

시험이 간략해진 이후엔 도로주행 시험 합격률이 이전보다 더 낮아졌다. 뭐 떨어지면 다시 치면 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싫다. 조심해야지 생각한 천후는 고개를 끄덕이곤 집을 나섰다.

"그럼 다녀올게."

"오빠 잘 다녀와!"

"차 사면 우리도 타보게 해줘!"

"오냐."

대문까지 쪼르르 따라 나와 손 흔드는 걸 보니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위험하군, 이거. 포돌이 아저씨 올라. 하지만 정말 어린 동생, 아니 딸 생긴 기분이다.

'뭔 생각이람.'

피식 웃은 천후는 학원으로 향했다. 회사 차에 어울릴 6인승 차량을 떠올리면서.

*

<200m 앞에서 우회전입니다.>

시험차량의 네비가 내는 소리를 들으며 천후는 바짝 긴장했다. 코스는 이제 거의 다 돌았다. 네비에 뜨는 점수를 보니 아직 감점은 없었다. 이제 마무리만 잘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던 때였다.

부아아아아앙!

차량 창문을 모두 닫고 있는데도 뒤쪽에서 오토바이 배기음이 들려왔다. 이 정도면 불법개조를 했거나, 아니면 상당한 슈퍼바이크라는 건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천후의 눈이 무심코 백미러로 향했다.

"엇."

특징적인 붉은색 동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천후는 보자마자 그게 파니갈레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더더욱 특징적인 것은 그 탑승자였다.

오토바이 헬멧을 쓰고 있었지만, 여성임을 단박에 알아볼 수 있는 유선형의 몸매가 보인다. 약간 누운 자세로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지라, 어깨에서 시작된 곡선이 허리에서 들어갔다가, 둔부에서 도톰하게 치솟아 올라 바이크의 뒤꼬리로 빠진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팔 사이에는 슈트를 입고 있음에도 한눈에 보이는 볼륨이 아래쪽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기색이 얼마나 살인적인지, 주변의 차들은 도로 사정이 원활한데도 죄다 서행하고 있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막상 바이크 주인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차선을 변경하여 천후의 차량 옆으로 다가와 나란히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한차례 손을 흔들더니, 엄지를 치켜들어 보인다.

'여기 있었네. 힘내라.'

어떤 뜻인지 바로 읽어낸 천후는 쓴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미러로 뒷좌석을 보니 시험관들도 그녀를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지만, 어쨌든 감점요인이 나오면 다시 칼같이 물어뜯으리라.

여기까지 응원하러 와줬는데 불합격할 순 없지. 천후는 다시 집중력을 끌어올리며 시험에 집중했다.

*

"에…. 영천후 씨. 합격."

"후우."

코스가 끝나는 지점. 시험관은 시험자들을 모아놓고서 도로주행 합격, 불합격 여부를 그 자리에서 말해주었다.

셀레나 말마따나 정말로 많은 사람이 불합격하는 걸 보고서 살짝 불안해하고 있던 천후는 합격소리를 듣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 합격했나? 축하한다."

"하하. 와 진짜 떨어질까 봐 조마조마했어요."

천후는 누군가가 등 뒤를 두드리며 하는 말에 기뻐하면서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자기가 합격한 것처럼 만면으로 웃음 짓고 있는 강호가 있었다.

"이제 같이 도로를 달릴 수 있겠군."

이제까지는 괜찮은 바이크를 사고도 같이 취미를 공유할 사람이 없었다. 딱히 인터넷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니 더더욱. 하지만 바로 근처에 바이크나 차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르지. 그게 그렇게 기쁠 수가 없어 강호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저는 바이크는 안 살 건데요?"

"그래도 상관없다. 너는 차로 달리고, 나는 바이크로 달리면 되지. 속도경쟁 하잔 게 아니니까."

"하긴 그러네요."

드라이브는 그냥 그것만으로도 즐거운 법이다. 천후는 빙긋 웃다가, 그제야 그녀를 제대로 보고는 숨을 삼켰다.

평소에는 묶어놓는 머리를 지금은 완전히 풀어두어서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바이크 슈트는 더워서인지 앞섶을 열어두고 있었는데, 깊이 파인 가슴골이 보일 정도로 열어둔 그 모습에 주변의 모든 남성이 침을 흘릴 기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속도경쟁은 안 하겠다고 하면서도, 입고 있는 슈트는 공기저항을 최소화시킨 본격적인 슈트인지라, 몸에 쫙 달라붙어 맵시를 뽐낸다. 특히 높은 골반 아래에 붙어있는 엉덩이 라인이 예술적이다. 천후 역시 자기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다가 헉하고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아. 이 사람 정말 자각이 없는 게 무섭다.'

세상엔 정말 일부러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녀는 정말 바이크를 좋아해서 이러고 있을 뿐이다. 현재 가용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안을 짜내서 입은 복장인 것이다. 영감님들이 동네 뒷산 올라가면서 온갖 고가장비를 구하는 것과 같은 선상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 파괴력은 살인적이다. 당장 주변의 아저씨들이 차마 서 있지 못하고 주변 벤치나 도로 턱에 걸터앉아있는 것을 보고서 천후는 그 서글픈 감정을 공유했다. 악마 같은 여자 같으니.

그러나 강호는 그런 신호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천후에게 한쪽 눈으로 윙크하며 돌아섰다.

"그럼 난 먼저 가마. 밤에 보자."

"아. 네. 들어가세요."

마지막에 조금 두근거린 자신이 싫다. 천후는 떠나가는 그녀를 보면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때,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다가와 물었다.

"형씨. 저 여자랑 아는 사이예요?"

"아…. 네. 선배예요."

"대학선배?"

음? 대학? 천후는 잠깐 멍해졌다가, 보통 자기 나이 때엔 대학을 다니고 있단 걸 떠올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 네. 같은 학과 선배요."

"캬…. 개꿀이네. 저기. 나 번호 좀 따줄 수 있어?"

"네? 아니 그건…."

천후가 곤란해하자, 옆에 있던 다른 남성이 말했다.

"접으쇼. 밤에 보재잖아. 이미 둘이서 할 거 다 했구만."

"아. 그랬어? 캬…. 부럽네. 부러워."

"아주 허리가 빠지겠구만."

"오늘 밤에 미라 되는 거 아냐?"

"……."

그게 그 뜻이 아닌데…. 아니 근데 이 아재들 초면인데 왜 이렇게 구수지게 굴지? 그렇지만 어쩐지 이해 못 할 감상도 아니라서 천후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자기도 강호가 다른 남자와 밤에 보자느니 하는 소리를 나누는 걸 보면 속으로 부러워할 것 같았으니까.

'애초에 내 여자도 아니지만.'

뭐 미녀의 행동엔 뭐든지 간에 품평이 따르는 법이다. 그녀의 경우 스스로 알아서 오해를 불러일으키면서 살고 있으니까 더더욱.

천후는 문득 방금 그녀의 모습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역시 그 한복을 치우고 다른 옷을 입은 것만으로도 굉장한 미녀로 돌변해버린다. 당장 모델 섭외가 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다.

'항상 저러고 다니면 좋을 텐데.'

역시 남자라고 하고 다니게 하기엔 너무 아깝다. 좀 더 선을 넘기 전에 자기 자신을 인정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던 천후는 곧 고개를 저었다.

오만한 생각이다. 그녀에게도 사정이 있겠지. 그것을 전혀 모르는 상태로 자기 멋대로 그녀를 재단해서는 안 된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같이 일할 사이다. 이런 마음으로 대하면 언젠가 삐그덕 거리리라.

"후우."

마음을 정리한 천후는 다시 시험용 차량을 몰아 학원으로 향했다.

'근데 정말 무슨 사정이 있는 걸까?'

그것만이라도 알고 싶다. 그녀가 먼저 알려주는 날이 오긴 하겠지만…. 역시 저번 카페에 갔을 때 털어놓게 해야 했는데. 그런 기회가 쉽게 다시 올 것 같지는 않다. 그렇게 생각한 천후는 쩝하고 입맛을 다셨다.

뜻밖에도.

그 기회는 바로 찾아왔다.

*

"천후 사장님. 미안한데, 사흘 정도 휴가를 줄 수 없을까?"

시험을 끝마치고 자택으로 돌아온 천후는 강호가 꺼낸 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어차피 휴가나 마찬가진데 뭐 굳이 따로 휴가를 드릴 필요가 있나요? 그냥 전화하고서 안 나오셔도 돼요. 사흘 정도야 뭐."

"아니! 이건 완전히 내 개인 사정인지라…. 지금처럼 출근을 인정받으면서 쉬기엔 내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다!"

음. 세상 피곤하게 사시는 분이군. 굳이 준다는 것도 안 챙겨 먹겠다니. 뒷머리를 긁적인 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럼 그러세요. 그럼 선배는 사흘간 유급휴가인 걸로."

"아니! 그러니까 유급은!"

"유급휴가는 노동법으로 인정된 정당한 휴가입니다아."

"그, 그런 거냐?"

"그래요. 자. 땅땅."

뭐 어차피 일없어서 탱자탱자 놀고 있었는데 굳이 휴가까지 쓰나 싶지만, 본인 의사가 그렇다니 별수 없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강호가 살짝 눈치를 보면서 물어왔다.

"휴, 휴가 사유는 안 물어보는 거냐?"

"뭘 그걸 또 물어봐요. 놀고 싶어서 놀겠다는데."

천후는 놀 수 있을 때 적법하게 보장된 휴가 쓰는 거에 이유를 묻는 거 자체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그런 걸 따질 생각이 없었다.

먹튀엘이 나타나서 잡으러 가고 싶다면 보내줘야지. 휴가가 죄짓는 것도 아니고. 굳이 그걸 하나하나 물어, 묻기는.

휘휘 하고 손을 내젓는 그 모습을 본 강호의 안색이 일순 환해졌다. 하지만 곧 다시 천후의 눈치를 보는 티를 팍팍 내다가, 뜬금없게도 희주 쪽으로 향했다.

"…?"

뭐지?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동안, 강호는 희주 옆에 앉아 귓가에 뭔가를 속삭여댔다. 꽤 길게 이야기하는데, 희주는 그동안 표정 하나 변하지 않다가 이야기가 끝날 즈음에 한마디 했다.

"알겠습니다. 그러시죠. 단, 주인님이 허락하셔야 합니다."

"응! 고맙다!"

"아닙니다. 같은 직장 동료가 아닙니까. 어려울 땐 도와야죠."

빙긋. 순간 희주의 입가에 주변 사람이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한 미소가 지어졌다. 어지간하면 보기 힘든 모습에 모두가 놀랐지만, 특히 천후가 놀랐다.

아니. 불안했다.

'뭔가 꾸미고 있는 거 같은데.'

그녀의 의도가 전부 천후에게 좋게 작용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방향성이란 게 문제인지라, 천후는 가끔 당황할 때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종종걸음으로 다시 다가온 강호는 긴장한 기색으로 천후를 올려보다가 양손을 꽉 잡으며 외쳤다.

"천후야. 또 하나 부탁이 있다! 앞으로 사흘간만…. 내 애인이 되어다오!"

"네에?!"

이건 또 뭔 소리여? 너무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펄쩍 뛰었다가 내려온 천후는 기겁해서 강호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죽어라고 나는 남자요 남자 송을 부르던 분이 무슨 소리야?

바로 그때.

강호의 뺨이 복숭아처럼 붉어졌다. 그 사이에 있는 붉은 앵두 두 점이 달싹였다.

"이건 비밀이다만…. 사실…. 나는 여자다."

…엄.

굉장히 빠른 커밍아웃이군요?

천후는 황망한 눈으로 희주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시선을 피해버렸다.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 작품 후기 ============================

7월 한달동안 봐주신 독자분들 모두 감사드려요.

수도사를 하길 잘했다고 늘 생각합니다.(음?)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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