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강원도. 도시 사람들, 특히 서울 사람들의 일부는 지방이라고 하면 아직도 무슨 깡 시골 마을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강원도는 더 그런데, 무슨 산만 있고 주민이라고는 군복 입은 군인이 인구의 98%를 차지하는 소똥 냄새나는 동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상당하다.
…뭐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니다. 분명 그런 동네가 없는 건 아닌 것이 강원도의 현실이다. 이전 평창 올림픽 하겠다고 건설한 알펜시아 리조트 유지비로 들어가는 돈이 강원도 예산을 블랙홀처럼 빨아먹는 것도 사실이긴 하고.
하지만 그래도 도로가 깔릴 곳은 다 깔렸고, 읍내 역시 현대화가 다 되어있다. 아. 물론. 군인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게임방 비랑 여관비 현지 주민이랑 군인이랑 다르게 받는 게 사실이긴 하지만 말이다. 빌어먹을 철원. 와수리 아오.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리네. 아니 이게 아니라.
무슨 말을 하고 싶으냐면 시골이라고 무슨 다 깡촌이 아니다 이거다.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 마냥 끝장나는 두메산골은 의외로 드물다!
그리고.
"선배. 대체 얼마나 더 들어가야 있는 거예요?"
"응? 아아. 이제 조금이다."
"그 소리 20분 전에도 들었어요. 아우."
그 의외로 드문 진짜 두메산골의 비포장도로를 두 명의 남녀가 걷고 있었다. 천후와 강호였다.
버스에서 내리고도 한참을 길 따라서 들어온 둘은 어느덧 슬슬 차는커녕 사람 셋도 나란히 서지 못할 것 같은 길로 들어섰다. 그것도 이미 20분째.
강호는 무더위 덕에 짜증이 난 천후의 눈치를 힐끗힐끗 보면서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작아 보일 수가 없는 모습이다. 좀 불쌍해 보일 정도라 천후는 그저 혀만 차면서 생각했다.
대체 어쩌다가 이런 데까지 왔더라?
*
"선배 여자란 건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그, 그렇긴 하다만."
애인이 되달라고 요청을 한 그 날.
강호는 천후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고는 얼굴을 확 붉혔다. 생각해보니 그날 말고도…. 이전 함께 술 마셨던 날도 일어나보니 나체였다. 과연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진 감히 상상조차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강호로선 절실했다. 도저히 따로 부탁할 사람이 없었다. 다른 방법도 생각나질 않았다.
"하. 하여간 부탁이다. 사흘간만 날 따라서 우리 본가에 가서 내 애인인 척을 해주지 않겠나? 이렇게 부탁하마!"
애절하게 양손까지 합쳐서 비는 자세를 취해봤지만, 천후의 눈은 싸늘했다. 왜 저런 눈빛을?! 강호는 지금까지 자기가 저지른 일들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억울한 감정만을 느꼈다. 나름 첫 후배라고 이것저것 챙겨줬던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가 말았다가 하고 있건만!
물론 그건 그녀 혼자 생각이고, 그녀에게 정상적으로 뭔가 받아본 역사가 없는 천후는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무슨 일인데요. 암만 선배라도 제대로 사정 이야기 안 하면 안 도와줘요."
"윽…. 남자가 쪼잔하다."
소심하게 항의해보지만, 그 순간 천후가 일없다는 듯이 등을 돌리자 강호는 화들짝 놀라서 그의 바지 끄덩이를 잡았다.
"잘못했다. 다 말하마. 다 말할 테니까 제발 그냥 가지 말아다오."
"잘 생각해서 말하세요, 선배. 지금 아쉬운 건 선배지 제가 아닙니다."
"응! 알았다. 알고말고!"
매정한 것 같으니! 속으로 눈물까지 찔끔 흘린 강호는 결국 자기 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실은…. 방금 본가에서 조부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본가에 돌아오라고 말이다."
"음? 뭐…. 잠깐 다녀오면 되는 거 아니에요?"
집에 좀 다녀오는 거잖아? 뭐가 문제야? 천후가 눈으로 그렇게 묻자, 강호는 말을 정리하지 못해 우물쭈물 거렸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다행히도 그때, 이브와 에바가 다가왔다.
"아녜요. 강호 서방 이번에 가면 다시 못 나올껄?"
"할아버지 짱나. 이상한 소리만 해."
"응? 다시 못 나온다고?"
집안 사정으로 그녀가 출근을 못 하게 되면 향후 계획이 사정없이 꼬인다. 지금까지 천후가 뻥뻥 지르고 다닐 수 있었던 것도 그녀가 트란제비야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심각한 사안에 천후는 얼굴을 굳혔다.
"좀 자세하게 말해줄래?"
천후의 물음에 이브와 에바는 신이 나서 손짓 발짓을 다 동원해 설명을 시작했다.
내용은 이랬다. 이강호의 가문은 엄청나게 오래전부터-아무래도 조선 시대부터-이어져 온 무가였는데, 지금도 마치 종갓집처럼 한옥에 장작불 붙이며 살고 있다. 그 집의 주인은 강호의 할아버지인데, 그는 이강호를 남자처럼 생각하고 있고, 금방이라도 여자 하나를 붙여서 결혼시킬 생각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우리보고 강호 오빠 색시하라고 했었다~."
"19살 되면 색시 시켜준댔어. 히히."
해맑게 웃으면서 하는 말인데 듣는 천후는 온몸에 소름이 다 돋았다. 뭐야 그 미친 영감은? 제정신인가?
"저거 진짜예요?"
"으응."
작게 대답한 강호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저 아이들을 처음 데려오려고 했을 때, 나는 입양자격이 안 됐다. 당해 노르웨이 입양 기준이 낮아지긴 했어도 결혼한 사람에게만 허가를 내줬거든. 다른 수가 없어서 가문에 이야기하니 조부가 저 아이들의 법적인 입양인이 되어주셨다. 다만…. 그걸 빌미로 그 해부터 거의 달마다 하나씩 여자를 데려와 만나보게 하더군. 저 아이들에게도 이상한 바람을 집어넣고. 그래서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뛰쳐 나와버렸다."
"세상에."
진짜 미쳤잖아? 어처구니가 없어진 천후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럼 그냥 완전히 나와버리지 그러세요?"
“그게…. 매해 한 번씩은 들어오지 않으면 저 아이들을 도로 데려가 버리겠다고…. 어디까지나 친권은 조부가 가지고 있으니까 법적 싸움이 되면 상대가 안 된다.”
“…….”
천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강호는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저 아이들을 조부에게 계속 맡겨놓을 순 없다. 조부는 아이들이 들어가야 할 학교에 돈을 넣어서 정원 외 관리에 포함시키고 학교도 안 보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따로 사교육을 시키지도 않았고. 내 문제도 있지만, 아이들도 거기 있어서 좋을 건 없었다.”
“하. 무슨 그런 사람이….”
이브와 에바는 지금도 트란제비야의 지원으로 매일 과외 선생을 불러서 일정 시간 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나마도 강호가 해외를 떠돌 땐 그것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그 외에도 다른 사정도 있어 둘의 정상적인 취학은 점점 늦춰지고 있었다. 이건 천후도 사장 자리를 인계받은 후 가장 크게 신경 쓰고 있었던 부분 중 하나였다.
그러나 친권을 저쪽에서 가지고 있는 이상, 이브와 에바는 그녀의 조부가 마음만 먹으면 경찰이라도 불러서 데려올 수 있으리라. 즉, 이브와 에바를 인질로 잡혀서 아주 안 들어가 볼 순 없단 이야기다. 천후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그럼 왜 저보고 가짜 애인이 되어달라고 하는 건데요?"
"그건…. 내, 내가 너, 너와 애인 사이라고 하고 데려가면 포기해주지 않을까 싶어서. 조부가 바라는 내 남성성도 포기하는 거니까 좌절할 게 아니냐?"
"……."
강호가 생각해낸 것치곤 그럴싸한 이야기이지만, 천후는 과연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그녀가 23살이나 먹고도 남자 코스프레를 해왔던 원흉도 그 영감이었다는 건데 과연 그 정도로 이해해줄까?
'어쩌면 선배가 위험할지도 모르겠는데.'
이강호의 본신 무위야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어릴 적부터 함께하던 식솔들을 다치게 할 수 있을까?
'있겠지.'
검을 들면 사람이 바뀌는 여자다. 가차 없으리라. 하지만 다 헤쳐나온 후 그녀의 정신은 망가져 있으리라. 이쯤에서 천후의 마음은 상당히 기울었다.
"나, 나는 주변에 아는 남자라곤 너밖에 없다. 딱히 부탁할 만큼 친한 사람도 없고…. 여차할 때 믿을 수 있기도 하고. 그러니…. 도와주면 안 될까?"
"……."
얼굴을 붉히며 하는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됐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게 평소랑 하는 행동과 갭이 엄청나서 쓸데없이 귀엽다.
'와. 나이 먹고 치사하게.'
천후만 그 생각을 한 게 아니라서, 셀레나 역시 잠깐 헤실 거리면서 웃다가 표정을 굳혔다.
‘아. 내가 이럴 처지가 아닌데.’
그동안 곰곰이 생각하던 천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선배랑 저랑 둘이면 거기에 들어가도 빠져나오는 것 정도야 쉽겠죠."
"으, 응! 바로 그거다!"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걸 보고 천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남 말 할 처진 아니지만, 이 양반도 좀 사람을 사귀어야 하지 않나? 좀 나이 있는 사람이라도 사귀어놨으면 입양문제도 어떻게든 됐을 거 같은데.
"그래요, 갑시다. 가요. 선배 없으면 저도 죽고 못 사니까 지금."
"뭣!?"
"왜요? 그렇잖아요. 지금 우리 둘은 완전 세트라고요. 선배 없인 트란제비야도 없어요. 그리고 아이들 문제도 걸린 이상 이건 제 문제이기도 합니다."
"아. 아아. 그런 뜻이군."
후우 하고 가슴을 쓸어내린 강호는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한편, 저쪽에서 그 헤프닝을 지켜보고 있던 희주는 가만히. 아주 살짝 웃었다. 그걸 옆에서 본 셀레나는 자기도 모르게 덜덜 떨었다.
'홍희주. 역시 무서운 아이!'
셀레나는 과연 자신이 그녀의 방침에 따라갈 수 있을지 진심으로 고민했다.
*
그런 이유로 다음날 출발한 천후와 강호는 아직 면허가 안 나온 관계로 버스를 타고 본가로 향했다. 그녀의 본가는 정말 두메산골 깊숙이 있었는데, 이 한여름에 이런 길을 걷자니 짜증이 솟구쳤다.
그렇게 정거장에서 근 40분이 넘게 들어가서야 그녀의 본가라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세상에 진짜 있었구나. TV에서나 보던 기와집이란 게."
그냥 기와집이 아니라 정말 전통가옥을 사진 찍어 옮겨놓은 듯한, 있을 게 다 있는 기와집이었다. 그 안에는 마치 조선 시대를 재현이라도 시켜놓은 것처럼 한복차림의 식솔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다 그중 하나가 대문으로 들어오는 천후와 강호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어이쿠. 어인 일로 손님이 다….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말투도 강원도 사투리가 아니라, 어디 사극 하인 삘이다. 천후는 무슨 촬영장에 온 기분에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아. 정씨 아저씨. 접니다. 강호입니다."
한편, 남자를 알아본 강호는 쑥스럽게 웃으며 자신을 밝혔다. 지금 강호는 평소의 그 푸른 도복이 아니라 평범한 여성용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묶고 있던 머리도 풀고 있어서 그냥 보면 그녀인지 못 알아볼 수준이었다.
그녀의 말에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정 씨라고 불린 남자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어이쿠. 도련님 오셨습니까?"
"…도련님?"
"하. 하하하하."
천후의 되물음에 어색하게 웃은 강호는 볼을 붉혔다.
"조부께 부름을 받고 찾아왔습니다. 조부는 어디 계시죠?"
"아…. 주인어른께선 지금 마실 나가셨습니다. 저…. 그런데…."
정 씨는 강호의 차림새를 한차례 훑어보고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리고는 마치 오줌마려운 사람처럼 어쩔할 줄 모르고 다리를 굴러댔다.
"어, 어서 옷을 갈아입으시지요. 주인어른께서 보시면 경을 칠 겁니다."
정 씨뿐 아니라, 강호를 발견한 모든 사람이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천후는 그 기저에 보이는 감정을 읽었다.
두려움.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이야기만 들어보아도 제정신이 아닌 건 알겠지만, 그와 직접 부대끼는 사람들이 보내는 신호들을 본 천후는 표정이 심각해졌다.
여기까지 들어오는 길에 보였던 어떤 집보다 이 집이 가장 크다.시골에서 부를 독점하고 있는 지주의 권력은 왕에 비견할만하다는 것은 지식으로나마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반응은 상상 이상이다. 단지 옷을 현대적으로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까지 두려워하다니?
"괜찮습니다. 아저씨. 식솔들에겐 피해가 가지 않게끔 하겠습니다."
"도련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믿겠습니다만…. 아. 그런데 같이 오신 분은?"
워낙 충격적인 장면을 본 탓에 잠시 손님을 신경 쓰지 못했던 정 씨는 급히 천후에게 인사하며 물었다. 천후는 그것을 받아서 스스로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꾸욱. 물컹. 거대한 마시멜로 덩어리에 몸을 던진듯한 감각과 함께 이강호가 몸을 붙여왔다. 그 느낌에 천후가 놀라 입을 벌린 동안, 강호는 애써 웃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 제 정인입니다. 혼인을 전제로 사귀고 있습니다."
달그락. 털썩. 와장창. 그녀의 발언이 있자마자 시선을 모으고 있던 식솔들이 행동을 딱 멈추고 손에 있던 것들을 죄다 떨어뜨렸다. 눈들이 하나같이 화등잔같이 커진 게, 얼마나 놀랐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정인이라고?"
뿐만 아니라, 뒤편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흔히들 커다란 목소리를 사자후라 표현하는데, 그것에 딱 들어맞는 목소리였다. 천후는 그 즉시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이번에 만나러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대문 앞에 선 둘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천후의 눈에 그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산발한 백발이 허리춤까지 내려온 노인이었다.
백색의 한복에 짚신을 신은 그는 그저 뒷모습만으로도 단련되어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감각이 쭈뼛 서는 것을 느낀 천후의 눈이 커졌다.
그런 천후의 감상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인은 굳어있는 식솔들을 피해서 걸어가 신을 벗고는 마루에 올랐다. 그리고는 안채로 들면서 외쳤다.
"들어오너라!"
다시 한 번 집안을 들었다 놓는 목소리를 들으며 천후는 이번 일이 쉽게는 넘어가지 않을 것 같다고 느꼈다.
"…가자."
"네."
불안과 각오가 느껴지는 강호의 표정을 본 천후는 비어있는 오른 주먹을 꾸욱 쥐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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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와수리. 3사단 신교대는 좀 시설 나아졌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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