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노인을 따라 들어온 안채. 문은 창호지가 발라져 있고 고리가 달린 한식 문. 노인이 앉아있는 안쪽 자리 뒤편에는 고구려 벽화를 본뜬 그림이 그려진 병풍이 쳐져 있었다.
그 병풍 위로는 붓글씨로 심기일전이라는 사자성어가 당당하게 걸려있었다. 그 외에는 장롱 하나와 방 좌편에 수석 하나가 보였다. 현대 문물과는 인연이 전혀 없는 그런 방이었다.
하지만 방 안에서 가장 눈을 사로잡는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노인의 앞에 놓여있는 검거치대였다. 그곳에는 칼 세 자루가 칼집에 든 채로 걸려있었는데, 곧게 뻗은 칼이 두 자루. 그리고 크게 휘어있는 칼이 한 자루가 놓여있었다.
당장에라도 칼을 뽑아 휘두를 수 있다는 무력시위 같아,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을 숨기지 못했다.
"어쩐 일로 부르셨습니까?“
안채에 들어온 지도 이미 20분이 넘게 지났다. 그동안 노인은 그저 앉은 채 눈을 꾹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강호가 먼저 입을 열자, 노인의 눈은 천천히 눈을 떴다.
"며늘아기들은 어디 있느냐?"
"……."
천후는 순간 저게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강호는 담담히 답했다.
"이브와 에바는 며느리가 아닙니다. 그 아이들은 서울에 두고 왔습니다. 어린아이들을 여기까지 데려오는 것도 고생입니다."
"그동안 신부수업은 많이 시켰겠지?"
"그 전에 제대로 된 학교부터 다시 찾아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서 증손주가 보고 싶구나. 그 아이들이 탐탁지 않다면 다른 여자를 찾아주마."
이야기가 한도 끝도 없이 평행선을 긋는다. 이게 뭐야? 저 영감탱이는 대체 누구랑 대화하고 있는 거지? 천후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딱 벌렸다.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은 여러 번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거의 벽보고 이야기하는 꼴 아닌가?
그때. 강호가 작게 숨을 들이마시곤 눈에 힘을 주며 각오를 다지곤 말했다.
"증손주라면 금방 안겨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지금까지 강호가 하는 말에 전부 한마디씩 받아오던 노인의 말이 그 순간 뚝 끊겼다. 천후는 방금까지 게슴츠레하던 노인의 눈에 이채가 도는 것을 보았다. 어쩐지 소름이 다 돋았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에 하는 말은 더더욱 소름이 돋았다.
"드디어 여자를 안았느냐?"
'와. 이게 무슨 미친 소리야?'
도저히 대화를 따라갈 수가 없다.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된 것에 감사해보긴 진짜 난생처음이다. 도무지 저 사이에 끼어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강호는 더 그를 방치할 생각이 없는지, 다시금 한쪽 팔을 그의 팔에 엮어왔다.
그리고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부. 이 사람은 제 정인입니다. 당신이 바라는 증손주는…. 며느리가 아니라 제가 안겨드릴 겁니다."
“……."
순간 천후는 그녀의 팔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말을 하면서도 노인과 눈을 맞추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툭 하고. 그녀의 어깨가 팔뚝에 닿았다. …혼자 이렇게 떨게 놔둘 순 없다. 천후는 강호 대신 노인과 마주 보았다.
"!"
형형히. 그 눈 안쪽에서 타오르고 있는 노기가 읽혔다. 마주 보려 했지만, 노인의 눈은 결코 천후에게 향하지 않았다. 오로지 이강호의 숙이고 있는 정수리만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그것이 과연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손녀에 대한 노여움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인지는 천후로선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천후는 그 대상이 자신이 아님에도 뼈를 파고드는 듯한 살기를 느꼈다.
그리고. 또 느껴지는 것이 하나.
'…강하다.'
이미 70은 넘어 보이는 노구이지만, 그 풍채는 당당하기 이를 데 없다. 허리는 꼿꼿하고 피부엔 노쇠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백발 성성한 머리카락이 없었다면 40대로 보아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천후의 단련된 감각. 무술은 연마한 사람을 파악하는 눈이 신호를 보내왔다. 노인에게서 느껴지는 살기는 아무나 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차가운…. 사람의 기관을 낱낱이 해체해 흩어놓고 보는 듯한 이것은, 인간의 몸을 파괴해본 자들만이 내보낼 수 있는 것.
노인 앞에 놓인 검에 눈이 갔다. 저게 그의 손에 잡힌다면….
자기도 모르게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위험하다. 위험하다. 위험하다…!
꾸욱!
그렇기에 천후는 더더욱 그녀의 팔을 가까이 가져오며 노인을 노려보았다. 쏘아보며, 자신의 존재를 내비친다. 더운 여름. 사람 셋이 있는 방 안은 그냥도 땀이 흘러내리지만 지금 방안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러다.
"시간이 늦었다. 쉬어라. 그리고 며칠 머물 거라."
툭.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노인에게서 흘러나오던 살기가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천후도 천천히 긴장을 풀었다. 강호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나왔다.
한차롄 넘겼다. 그런 의미가 느껴졌다.
"…나가보겠습니다.“
고개를 깊이 숙인 강호는 등을 보이지 않고 방을 나섰다. 그 뒤를 천후가 따랐다. 문밖에선 걱정됐던지 식솔들이 모여있었다.
"도련님. 괜찮으셨습니까?"
"…이제부턴 아가씨라 불러주세요."
웅성웅성. 강호의 그 말에 식솔들의 낯빛이 하얘졌다. 식솔들을 이끄는 정 씨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당분간은 도련님이라 부르게 해주시겠습니까? 주인어른께서 어찌 노하실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낮게 속삭이는 말에 강호는 표정을 굳혔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녀는 이곳에서 길어봐야 사나흘 머물다 갈 사람이지만, 이들은 이곳에서 죽 살 사람들이다. 노인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으리라.
"감사합니다. 시장하실 텐데 식사하시지요."
"고맙습니다."
어렵게 웃어 보인 강호의 모습에 식솔들도 조심스레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천후는 약간 안도했다. 역시 저런 소릴 하는 건 노인뿐이었군. 그나마 다행이다 생각하며 천후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
천후와 강호는 별채에 머무르게 되었다. 원래 강호가 쓰던 건물이기도 했다. 강호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브와 에바를 들인 후 새로 지었다고 했다. 아직 완전히 분가하기엔 이르니, 건물만 따로 두어 부부의 정을 눈치 보지 않고 나눌 수 있도록 노인 나름대로 배려한 거란다.
그 이야기에 대한 천후의 감상은 이랬다.
"…진짜 제대로 돌았군요."
"으음. 부정할 수가 없군."
미쳐도 좀 곱게 미쳐야지. 스케일이 상당하잖아. 아예 건물을 따로 지어줄 정도의 망상가라니. 질려서 혀를 내두른 천후는 시선을 상으로 돌렸다.
먼 길에서 손님이 오셨다고 상다리가 부러져라 진수성찬을 차려왔다. 특히 강호가 정인을 데려왔다고 하니 더했다. 뭐 거기까진 좋은데….
"이게 다 뭐랍니까? 응? 선배."
"아. 그, 그게."
그냥 진수성찬이 아니라 딱 봐도 수상한 것들 천지다. 녹용 썰어둔 거에, 자라탕에, 장어에. 저쪽에 도라지로 위장한 삼도 보이는 게, 이것들의 용도가 쉬이 추측됐다.
"그, 정인을 데려왔다고 하니 부엌 쪽에서 아주머니들이 난리가 나서…. 정 씨 아저씨도 아껴뒀던 걸 꺼내왔다고 하니 차마 말릴 수도 없고."
"……."
차마 말리지 못하긴. 말려야지. 어쩌려고 이래. 천후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이거 이전에 한번 봤던 패턴이잖아. 아니 그거 업그레이드네? 게다가 지금은 상황이 크게 다른 게.
꼬르륵.
"…배고픈데 안 먹을 수도 없고."
배고파. 배가 고파 죽겠다. 점심도 못 먹고 나와서 저녁이 될 때까지 길을 걸어왔더니 식욕이 넘치는데 눈앞에 있는 게 이런 거라니? 굶어야 하나? 안 그래도 기초대사량이 높은 천후에게 굶는 건 꽤나 괴로운 일이기에 꺼려진다.
"…부엌 가서 뭔가 다른 거 훔쳐먹고 올까요?"
"응? 떽! 남자가 부엌에 막 들어가는 거 아니다!"
…언제적 사람이십니까? 입에서 말은 안 꺼내도 무슨 뜻인지 훤히 읽히는 눈빛을 보내자, 강호는 부끄러워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잘못 말했다. 그게 아니라. 이 집안에선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된다. 아주머니들에게 혼난다."
"…와. 진짜."
가불패턴 쩌네. 가파니 점프 a도 아니고. 혀를 찬 천후는 결국 개 중에서 좀 먹어도 덜 할 거 같은 것들만 골라서 집어먹기로 했다. 처음엔 조금만 먹고 때울 생각이었지만, 먹다 보니 그것들이 쓸데없이 맛있게 조리되어있어서 배부르게 먹고 말았다.
그동안 그 모습을 강호가 싱글벙글 웃으며 바라보았다.
"선배도 드세요. 얼른 먹고 치우게."
"응? 아아. 이 집에선 여자는 겸상하지 못한다. 다 먹고 나면 나가서 먹으마."
"……."
세상에. 자기도 모르게 이마를 감싸 쥔 천후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보았다. 그래도 등은 형광등이네.
*
딱히 천장뿐 아니라, 별채는 현대 문물들을 상당히 찾아볼 수 있었다. 화장실도 현대식 욕조와 비데가 놓여있었고, 에어컨에 TV, 컴퓨터도 있는 데다가 심지어 와이파이까지 들어왔다.
“아이들이 최대한 불만을 품게 하지 않게끔 한 거지. 나도, 식솔들도 그렇고.”
"…굉장하네요, 그건."
이 두메산골에 인터넷에 와이파이가 터지게 하려면 한국통신이 KT로 바뀐 지금은 수백, 어쩌면 천만 단위로 들었을 텐데 그걸 그런 이유로 하다니.
“나에 관련된 부분을 떼고 보면…. 목적이 일그러졌더라도 이런 게 다 식솔들에겐 편의가 되지. 그건 그것대로 존경으로 이어지고……. 그러니 내가 더욱 곤란한 거다.”
"…….“
“나도 어릴 적엔 조부를 존경했던 때가 있었는데….”
천후는 새삼 강호를 다시 보았다. 길게 뻗어 나온 속눈썹 속으로 짙은 수심이 엿보였다. 아무래도 자신이 이런 식으로 그에게 반항하게 된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고민이 깊은 모양이었다. 안타깝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지금 천후는 남 걱정할 상황이 아니었다.
“저기 선배.”
“음?”
“그래서. 이건 또 뭔데요?”
“으, 응? 아. 아하하하.”
건조하게 웃는 그 소리를 들으며 천후는 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식사를 마치고 자기 전에 씻고 왔더니만 그 사이에 어머나. 별채에 우렁각시가 들어왔다 나갔는지 이부자리가 깔려있었다.
뻔뻔하게 하나만. 베개는 두 개,
“그게…. 조부의 지시로 이렇게 해두었다고 하더군. 정인이라면 한방에서 자야지라면서….”
“…….”
그 영감…. 천후의 표정이 굳었다. 이건 위험하다. 속없이 웃고 있는 저 여자가 과연 지금 자신이 정조의 위기에 처했음을 알고나 있을까?
“…어떻게 따로 못 자요?”
“사랑채가 있긴 한데…. 아마 못쓰게 할 거다. 다른 방에 가면 그 즉시 조부가 나설 것 같구나.”
미치겠네…. 인상을 찌푸린 천후는 어쩔 수 없이 방에 들어왔다. 다행히도 이 방은 강호가 이브, 에바와 함께 쓰던 방이라 상당히 넓었다. 베개만 들고 가면 한참 멀리 떨어져서 잘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을 때였다.
“저기…. 천후야.”
야심한 밤. 나지막한 여성의 목소리가 간질간질하고 귓속에 파고든다. 천후는 흠칫하고 몸을 떨었다. 강호가 흔히 내는 목소리가 아니다.
“네?”
“그…. 고맙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아…. 신경 쓰지 마세요. 뭐. 나중에 밥이나 한 끼 거하게 사세요.”
애써 태연한 목소리를 지어내 보았다. 하지만 그 직후.
“그 정도론 갚을 수 없다. 하지만…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구나. 그러니….”
툭. 투툭. 무언가가 방바닥에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천후의 눈이 커졌다. 등 뒤에서 나는 비누냄새가 화악하고 가까이 다가왔다. 그것은 이윽고 귓가에 다가와 속삭였다.
“그러니…오, 오늘은 네 뜻대로 해도 좋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 순간 달아오르던 게 조금 식었다. 그것을 빌어서 몸을 돌리니, 속옷 차림으로 다가와 앉아있는 강호가 보였다. 드러난 몸을 보니 자기도 모르게 침이 고여 온다. 하지만 천후는 간신히 참아내곤 시선을 한곳에 고정했다.
눈을 꼭 감은 얼굴 앞에, 익숙한 물건이 보인다. 0.03mm.
“……이건 누가 준 거예요?”
눈을 가늘게 뜨고 가로채니, 강호는 귀까지 빨개져서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마, 마음이 잡히면 쓰라고…. 제, 제공자에 대해선 비밀엄수를 요구받았다.”
호오. 그것참. 누가 줬긴 줬단 거네. 그렇다면 용의자가 단 한 명뿐이군요. 통제라. 지끈지끈 아파져 오는 머리를 짚은 천후는 엄한 눈으로 강호를 내려 보았다.
“선배. 제가 정말 이거 받아서 쓰려고 하면 어쩌려고요?”
“으, 응?”
폴짝. 앉은 자세인데도 놀라서 살짝 뛰어오른 강호는 주전자처럼 김을 뿌우 뿜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으…. 저, 정인이라고 말해두었으니까…. 연기에도 도움이 되고. 이런 일을 도와주는 거니까. 그, 남자는 이런 거 다들 좋아하지 않느냐? 나, 나도 어느 정도는 그 마음은 이해하고 있다. 그러니….”
우물쭈물 대며 말하는 게 가관이다. 나이도 위인데 쓸데없이 귀엽다.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나쁜 마음이 슬금슬금 올라온다.
아 정말 깔아뭉개 버릴까…. 아래쪽에서 앙앙대게 해버리고 싶다. 맛 들리게 하면 나중에 어떻게 바뀔지 궁금한데…. 하지만 그것을 꾹 누른 천후는 눈을 날카롭게 뜨고서 손날을 새워 그녀의 정수리를 툭툭 내리쳤다.
“뭘 이해해요. 뭘. 뭘. 뭘.”
“아으. 아으. 아윽!”
“그리고 솔직히 좋아하지만 안 해. 안 해. 안 해. 안 할 거야.”
“아우…. 아프다! 너무하구나. 나도 나름대로 각오를 하고 한 이야기인데!”
아픔에 눈물까지 글썽이는 강호를 보며 천후는 한숨을 쉬다가, 0.03mm를 저쪽에 던져두고는 그녀의 양어깨를 움켜쥐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 기분 상하지 말고 들어요.”
“으, 응….”
“제가 이런 말 할 처지도 아니고요. 연상한테 이런 소리 하는 것도 뭣하지만…. 이런 건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때 하세요.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마시고.”
“…….”
“전부터 말하려고 했는데 선밴 너무 자기 자신을 막 다루는 면이 있어요. 옆에서 보기엔 엄청 위태위태해요. 솔직히. 그래요. 뭐. 이런 거 싫어하는 남자 없어요. 없는데. 그건 그거고 선배는 선배잖아요. …이렇게 쉽게쉽게 허락하면 안 되는 거예요.”
이 사람을 보고 있다 보면 걱정이 된다. 외나무다리 위에서 한 발로 서있는 걸 보는 느낌이다. 자기 따윈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는 거 같다. 솔직히 남이 어떻게 살든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러지 않았으면 싶다. 좀 더 자신을 소중히 여겼으면 한다.
강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천후의 이야기에 어떻게 무슨 말이든 해보려고 입을 어물어물하던 그녀는 결국 말을 꺼내지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숙였다. 그저, 아주 작게 고개가 끄덕였다.
작은 어깨가 보인다. 브래지어의 끈 한쪽이 흘러내릴 듯이 팔에 걸쳐있는 것을 조심스레 올려준 천후는 그녀에게서 물러나 저쪽 벽으로 가 돌아누웠다.
“그래도 방이 넓어서 다행이네. 오늘은 이렇게 떨어져서 자요. 아침부터 다시 붙어 다니면 되지. 그쵸?”
“응….”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 강호는 천천히 이부자리에 누웠다. 여전히 얼굴은 붉다. 그만큼이나, 몸도 뜨거워졌다. 하지만…. 부끄럽다. 부끄럽고 부끄러워 그녀는 한여름이지만 이불을 꼭 덮어썼다.
말끄러미 고개를 내밀어 보니 등이 보였다. 저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한 등. 하지만….
앞모습이 보고 싶다. 어떤 연유로 그런지는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강호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은 있다.”
입에 담아버리고 말았다.
시선은 그 등을 향해.
다음 말이 입안을 굴렀다. 낼까 말까를 고민한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말해도 될 것 같아. 그것을 가만히―
폭.
“!”
“!”
흠칫. 문 쪽에서 들린 소리에 두 사람의 어깨가 움찔댔다. 동시에 밖에서, 아주 미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극도로 예민한 감각을 가진 둘이기에 포착할 수 있었다. 기겁해서 문을 바라보니…. 창호지 아래쪽 구석에 구멍이 뚫려있었다.
의도가 보였다.
‘훔쳐보러 왔다!’
깜짝 놀라 몸을 돌려보니, 강호가 창백한 안색으로 이부자리를 들어서 안쪽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아. 젠장. 간신히 한 위기 넘겼더니만!’
뭐 이래?! 하지만 지금 같이 누워있지 않으면 의심받는다. 한방에서 떨어져 잘 수도 있겠지만, 소박맞는다고 생각하면 그것대로 골치 아프다.
‘에라, 모르겠다.’
이것저것 따져보던 천후는 결국 울상을 지으며 이불 안으로 뛰어들었다.
비누냄새가. 달다.
============================ 작품 후기 ============================
법 관련으론 제가 좀 지식이 미비해서 얼버무린 감이 있습니다. 너그러이 봐주세요.
아. 요 며칠 너무 덥네요. 내일 태풍온다니 좀 시원해지려나...
선작, 추천, 쿠폰, 코멘트 모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