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악몽을 이겨내고 힘겹게 눈을 뜬 천후는 어째선지 몸이 좀 허하다고 느꼈다. 잠에서 일어나면 늘 기분이 찝찝하지만, 오늘은 그것 이상으로 힘이 빠져나간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더 충격적인 것은 바로…잠에서 일어났는데도 안 서 있다. 죽어있다구.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렸다.
"이놈의 꿈이 이제 내 체력까지 뽑아가나?"
그럼 좀 심각한 사안이긴 한데. 하지만 이런 건 그냥 나이 먹어가는 영향일 수도 있고, 일시적인 현상일 가능성도 크다 보니 쉽게 검사를 받아봐야겠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가 검사를 받는다고 해봐야 유그드라실의 미연에게인데, 가서 대체 뭐라고 할 건데. 진지한 얼굴로 누나! 아침에 안 서요! 하면 되나? 만에 하나 그렇게 했다 한들 돌아오는 답이 빤히 보였다
"…관두자."
오늘만 그런 거겠지. 그래야 해. 침을 꿀꺽 삼키며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제 그 많은 무시무시한 음식들을 섭취했는데 아침에 죽어있다니 이해가 안 갔지만 남한테 쉬이 이야기하기엔 좀 꺼려지는 이야기였다.
"근데 선배는 어디 가셨지?"
자고 일어나니 강호가 없었다. 어제 그렇게 옆에 딱 붙어 잤는데 어디 간 걸까?
'곤란한데.'
이곳에서 그녀 혼자 돌아다니게 하는 것은 그리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천후도 별로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경우 누군가 진지하게 물어보면 설렁설렁 자초지종을 죄다 풀어놓을 가능성이 워낙 높았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천후 자신 역시 이 집에서 혼자 있고 싶단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별채엔 현대문물들이 좀 있다지만, 어제 식솔들의 행동들을 보면 갑갑하기 그지없다. 그런 것들을 보면 예전 생각이 들어버리곤 한다. 그, 흰색 방.
"일단 선배를 좀 찾아볼까?"
스멀스멀 찾아오는 트라우마에 가까운 기억을 몰아낸 천후는 별채에서 나왔다. 다행히도 강호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시잉. 날카로운 단공음. 마당 한가운데에서 검무가 펼쳐지고 있었다. 오른손에 크게 휜 칼을 든 그녀는 빠르게 움직이며 검을 휘두른다. 검을 휘두르는 경로도 짧게. 하지만 확실히 베어낼 수 있게.
발이 지면을 밟으며 그녀의 몸을 천천히 뒤로 물린다. 다리와 몸통이 따로 움직이는 것 같을 정도다. 그러다가 상체를 크게 흔드는 동작. 저것은 회피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검이 휘둘러지며 가상으로 추격해오는 상대를 벤다. 그와 동시에 다시 한 번 회피.
몇 번이나 반복한다. 이미 홀로 마당 전체를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를 정도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싶은 순간. 그녀가 순식간에 검을 집어넣고는 숨을 골랐다.
그 모든 동작을 지켜보고 있던 천후의 눈에 천천히…. 웃음기가 서렸다.
호승심과 함께.
'나군.'
그녀의 행동만 보고서도 그녀가 가상으로 설정한 대상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저것은 같은 검과 검을 마주치는 동작이 아니다. 일방적인 사정거리 내에 상대를 묶어두고서 베어내는 동작이다.
그리고 그녀가 보인 동작들을 역으로 계산하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녀가 설정한 전과가 어떤지도 읽는다. 눈에 이어. 입에도 미소가 실렸다.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손뼉를 쳤다.
짝짝짝짝…. 아침의 적막을 깨며 울려 퍼진 그 소리를 들은 강호는 가만히 눈을 떴다가, 그 소리를 낸 주인공을 보고서 눈동자가 커졌다.
"일어났나?"
"제가 이침이 좀 빨라서요."
"아. 음. 봐, 봤나?"
"조금?"
천후의 답에 강호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담담히 돌아와서 그를 마주 보았다. 눈에는…. 여전히 실려있다. 무료가. 하지만 그 가운데. 아주 약간의 마음이 드러난다.
그것을 건드려본다.
"선배. 일리미네이터 일은 왜 시작한 거예요?"
답은 예상이 갔다. 한여름. 아침이라도 여전히 덥다. 하지만 그 순간. 한 번의 차가운 바람이 지나쳐 그녀의 머리칼을 흩날렸다. 그것이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답이 돌아온다.
"사람 중에선 상대가 없었으니까."
바람이. 스산하다. 차다고까지 느껴버린다. 다시 드러난 그녀의 눈엔 감정이 없었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이 보였다.
"하."
어이없어 웃는다. 과연. 그녀답단 생각이 든다. 아니 애초부터 그렇지 않을까 생각은 했었지만…. 정말이었군. 꾹. 주먹이 쥐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아름다운 미소 지은 여성의 입이 벌어졌다.
"그런데 최근에 장담할 수 없는 사람이 생겼다."
사박. 모래 밟는 소리가 났다. 그녀의 머리칼이 한 올 한 올 바람에 흩날리며, 그 아래로 광기 흐르는 눈을 내보였다. 당장에라도 절정에 오를 듯한 미소.
벨 것을 찾은 미소.
그것에 이끌려 천후도 한껏 미소 지었다. 그녀의 칼끝이 어느새 자신에게 향해있었다. 그건…기쁘다. 기쁘지만.
"다음에 하죠. 다쳐서 돌아가면 혼나요."
"……."
여자의 눈에 원망이 감돈다. 이미 극한까지 달아오른 감각을 이 정도 말론 가라앉힐 순 없나? 쓰게 웃은 천후는 다음 말로 위로했다.
좀 더 알아듣기 쉬운.
확실한 말로.
"그리고. 생각해봤어. 근데 역시 선배 말대로…. 역시 완전 맨손으론 무리야. 그러니까 나도 준비가 되면 그때. 어때?"
찌릿찌릿. 둘 사이에는 3m가 넘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천후의 머리카락이 타들어 갔다. 착각이다. 어디까지나 착각에 불과하다. 그래. 그건 어디까지나…. 살기가 맞부딪히는 감각에 불과했으니까.
"약속한 거다."
"그래."
푸웃…. 거짓말처럼 아침 바람이 잦아들었다. 흩날리는 그녀의 머리칼이 얌전해졌다 싶었던 순간, 어느새 그녀의 검은 검집에 들어가 있었다.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광기 가득하던 그녀의 얼굴엔 홍조가 대신 들어차 있었다.
"아. 그. 음. 미안하다."
"뭐가요?"
"그냥…. 아침부터 이래서."
"하루 이틀인가. 선배 허당인 거."
쓰게 웃은 천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칼만 잡으며 인간이 변한다. 뭐 하지만…. 역시 한 번은 확실히 해두고 싶었다. 바로 옆에 이런 사람을 두고서…. 그냥 넘어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그녀는 좀 더 얼굴이 시뻘게지며 다른 말을 해왔다.
"그리고 어젯밤에도…."
"음? 아 그건 넘어가기로 했잖아요. 뭘 다시 꺼내."
"아니. 음. 그게 아니라…! 아, 아으! 하여간 미안하다!"
파닥파닥하고 어린애처럼 팔을 흔들어대는 모습에 천후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하지만 그녀는 그 이상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허벅지를 오므리고 꼼지락대고만 있을 뿐이었다.
*
그 뒤. 둘은 이틀이나 더 그곳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첫날 이후로 노인이 강호를 다시 만나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천후는 몸에 좋다는 음식이란 음식은 죄다 먹느라 괴로웠다. 음식 자체야 맛있지만, 이걸 어디에 분출할 데가 없으니 그게 문제다. 첫날처럼 아침에 일어나니 허한 일도 더는 일어나지 않아서 더더욱 그랬다.
게다가 밤마다 식솔 아주머니들이 훔쳐보러 오는 바람에 둘은 계속 붙어 자야만 했다. 사흘째 되는 날엔 상당히 익숙해져서 슬슬 아무렇지도 않을….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정돈 아니었고 꽤 버틸만하게 되었다. 그때마다 강호는 미안함에 몸 둘 바를 몰라했다 그렇게 사흘째 되던 아침.
"도련님. 주인어른께서 찾으십니다."
워낙 아무 소리 없자 그냥 돌아가 버리자는 결론을 내고선 짐을 꾸리던 찰나에 정 씨로부터 전언이 들어왔다.
노인은 마당에 나와 있었다. 정 씨의 안내를 따라 별채에서 나온 둘은 그 앞에 섰다. 노인은 강호가 다가오자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랫것들은 전부 물러가 있거라!"
그 한마디에 주변에서 상황을 살피던 모든 식솔이 공손히 허리를 굽히고 뒷걸음질을 하며 사라졌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천후의 표정에 긴장이 서렸다.
천후의 눈에 노인의 양 허리춤과 손에 들린 세 자루의 검집이 보였다. 첫날 그의 방에서 보았던 것들이었다. 저걸 굳이 방에 안 두고 가지고 나왔단 것이 심상치가 않다.
강호의 집안은 무가라고 했다. 그러니 몸에 무기를 늘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마실 나갔다고 했던 그때는 비무장이었다. 지금 저건 쓸 일이 있어서 가지고 나온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생각은 강호도 같은지 얼굴을 굳힌 채 노인을 마주 보고 있었다.
노인의 입이 열렸다.
"오늘에야말로 결심하지 않으면 못 돌아간다."
"조부…."
"시간을 더 달라고는 못하겠지."
"첫날 제 말은 전혀 듣지 않으셨군요."
"잡소리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강호의 말을 단호하게 자른 노인은 성성한 백발 사이로 드러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다가, 허리춤 외에 손에 들고 있던 다른 검을 검집째 그녀의 앞에 던졌다. 그녀의 눈의 광채가 크게 흔들렸다.
노인이 외쳤다.
"잘라라."
"……."
"자르고 수술을 하면 가르쳐주마."
단 한 문장으로 구성된 그 말을 천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그때. 옆에서 간과할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르릉.
칼이 뽑혀 나오는 소리.
"선배!"
"……."
흔들리는 광점은 이윽고 사라져있었다. 검을 들었을 때의 그녀. 진리구현자로서의 그녀가 되어 노인에게 묻는다.
"정녕 이래야만 합니까?"
"그렇다. 달리는 알려주지 않겠다."
"……."
그녀의 입이 다물어졌다. 시선이. 잠시 천후에게 머물렀다. 순간 천후는 보았다. 그녀의 눈에 서린 감정이 읽혔다.
체념. 그리고.
각오.
"!“
이건 위험하다. 단숨에 머릿속에 비상신호가 울렸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그 검을 배꼽높이에서 수평으로 들었다. 그리고는…그것을 빠르게 추켜올렸다.
"선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한 천후는 재빨리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 부르르. 체격에 비해 괴력을 가진 그녀의 힘을 순식간에 제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천후는 간신히 해냈다.
"…왜 막는 거냐?"
"왜냐니! 뭘 자르려는 겁니까?"
"가슴이다."
"……."
"여자를 포기하면. 검을 정진할 수 있다. 그럼. 포기해야지."
빠드득.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으깨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게 어쨌다고.
"집어쳐!"
화악! 천후는 그녀의 오른손에 쥐어진 검을 억지로 빼앗아서 던졌다. 손에서 검이 빠져나가자, 그녀의 눈에 다시 광점이 돌아왔다. 그 광점에서, 투명한 물줄기가 흘러내린다.
아아.
이제 알았다.
알았어. 알았다고, 선배.
내가 지금 여기에서 뭘 해야 하는지 확실히 알겠다.
당신은 바라지 않았겠지만…. 더는 못 참아. 이….
빌어먹을 노친네가!
"영감님. 손녀한테 뭘 시키는 거지?"
"……."
노인은 대답이 없었다. 아니.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천후는 피식 웃었다.
날…. 봐!
툭. 천후는 땅에 떨어진 칼을 발로 차올려, 그것을 다시 차서 노인에게 쏘았다. 채앵! 맑은소리와 함께 날려보낸 검이 저쪽으로 튕겨 나갔다. 발검음도 나지 않았는데 영감의 왼손엔 이미 직도, 환두태도 한 자루가 뽑혀있었다.
노인의 눈이 그제야 천후에게 향했다. 타오르는 눈빛. 천후는 그가 자신을 처음으로 제대로 직시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으슬으슬 몸이 떨려온다. 하지만 천후는 웃었다. 노인이 입을 열었다.
"넌 뭐냐?"
"나이 드시니까 귓구멍이 틀어막히셨나. 당신 손녀 애인이라고."
"나에겐 손녀가 없다."
단언하는 목소리. 자기 홀로의 믿음이 쌓이고 쌓여, 망상을 현실로 굳혀낸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환상은 환상일 뿐이야. 지금 그걸 부숴주지. 천후는 확하고 손을 뻗어 옆에 있는 강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럼 내 옆에 이 여자는 뭔데?"
"손자다."
"손자?"
코웃음을 친다. 거짓 자신을 끌고 와 연기한다 아니. 연기? 아니지. 연기가 아니야. 이 여자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하고 싶었던 말. 행동일 뿐.
천후는 그대로 손을 끌어올려…그녀의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앗…!"
"요즘 남자는 가슴이 이렇게 크던가? 응?"
"검의 길엔 쓸데없는 것이다."
말이 바뀌었군. 천후는 눈매를 날카롭게 바꾸고 더욱 거칠게 그것을 주물러댔다.
"그걸 판단하는 건 나지 댁이 아니야. 이 여잔 이미 내 꺼니까. 누구 마음대로 이 가슴을 자르려 들어?"
"…네 거라고?"
"사흘 동안 합방시켜놓고 아무것도 안 했을 거라고 생각했어? 죄다 연기였다고 생각하나 본데…. 명기더군. 당신 손녀. 좋은 여자였다."
"처, 천후야?"
강호가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천후는 그 기색을 바꾸지 않고 그녀의 가슴을 탐하며 목에 입을 맞췄다.
"아! 그, 그만…!"
그러자 그녀의 입에서 정말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노인은….
남아있던 곡도 하나를 마저 뽑았다.
"죽고 싶은 모양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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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밖에 안 뺐는데 왜 몸이 허한가.
강호가 좀 누구씨랑 비슷한 과다보니까... 네 뭐 그렇단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