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이 더블 데이트는 철컹철컹?>
어느 정도 상처치료가 된 이후. 즉 강호의 본가에서 뛰쳐나온 지 며칠이 지나서야 천후는 그날 했던 행동을 기억해내고는 사과했다.
"아. 선배. 저기…. 죄송해요. 막 만지고 그래서."
당시엔 그래야 했다고 생각해서 저지른 거긴 하지만, 시간 지나서 생각해보니 굉장한 무례였다. 아직 남자의 손을 타본 적 없었던 그녀의 몸을 마구 만져댄 거니까. 처음 그런 건 아니지만, 맨정신일 때 그랬으니 그녀의 충격이 컸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천후는 그녀와 둘만 있을 때 조심히 말을 꺼냈다. 하지만 강호는 오히려 살짝 웃으며 답했다.
"아니다. 조부와는 한번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대신하게 해서 미안할 따름이지."
"음…."
아니 그걸 사과한 게 아닌데. 그 영감을 발로 밟아댄 건 전혀 미안하지 않다고. 그러나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지 다른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저 살짝. 그녀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올리며 웃는다. 그것을 본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확 돌렸다.
'아. 위험하다.'
방금 그건 정말 위험했다. 그녀와 있었던 어떤 헤프닝보다 훨씬 크리티컬 했다. 그녀는 오늘도 한복을 입지 않고 머리를 풀어두고 있었는데, 방금 운동하고 막 씻은 후라 이렇게 앞에 서 있으면 좋은 향기가 났다.
그 향기와 저 웃음이 합쳐지니 최강이다. 심장 박동을 갑자기 폭증시키며 뿜어져 나온 혈류가 코 쪽으로 향하는 걸 간신히 틀어막았다.
'안 좋아.'
이대론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끌어안던가. 입을 맞추던가 해버릴 것 같다. 당황한 천후는 필사적으로 말을 돌렸다.
"으…. 아! 근데 아직 영감이 친권 행사는 안 하고 있나 보네요."
"음. 본인도 다쳤고. 네 재산 규모도 들었으니 쉽게 시도할 엄두가 안 나겠지."
서로서로 작정하고 법정 싸움으로 가져가면 마지막엔 누가 승리하더라도 시간은 엄청나게 끌 수 있으리라. 어쩌면 그게 정리될 즈음엔 이브와 에바가 거의 성인이 되어있을 수도 있다.
"하여간…. 이브랑 에바 건은 저에게 맡겨주세요. 그걸로 선배나 아이들을 구속하지 못하게끔 온 힘을 다할 테니까."
"응."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게 아름답다. 멍하니 그것을 넋 놓고 보고 있던 천후는 으 하고 얼굴을 손으로 덮었다. 반칙이다. 저 얼굴로 저러는 건 너무 치사하다.
그렇게 천후가 이성과의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주방에서 희주와 셀레나, 아이들이 거실로 나왔다.
"오빠! 화채 먹어! 사이다 수박 화채!"
"자. 숫깔!"
쪼르르 달려와 작은 손에 들린 수저를 쥐여주니 자기도 모르게 헤실헤실거리게 된다. 다행히 이건 강호 때와는 다르게 대놓고 해도 아무도 뭐라 안 하지. 그동안 수저를 굳이 사람마다 쥐여준 에바는 탁자 앞에 쪼그려 앉아 얌하고 화채를 떠서 입에 물었다.
"맛있어! 선생님 맛있어요!"
"다행이군요."
표정없이 대답한 희주는 가만히 그 옆에 앉아서 입에 묻은 수박씨를 떼주었다. 천후는 그걸 보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TV를 틀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확인하기 위해 뉴스라도 볼 생각이었다.
<속보입니다. 경급 디제스터 키메라가 서울에서 또다시 나타났습니다. 키메라는 R.D.C의 일리미네이터들에게 발생 직후 25분 만에 퇴치되었습니다.>
뉴스를 틀자마자 R.D.C에 대한 뉴스가 나왔다.
"흠…. 경급 디제스터 출현율이 늘었네."
"는 정도가 아니지. 이번 달만 벌써 다섯 마리 째야. 보통 한 해에 서너 마리인 걸 생각해보면 엄청난 빈도지."
"이걸로 전조라는 건 확실해졌군."
이전 로마이어의 대국민 토론회에선 상당수의 일리미네이터가 멸급 디제스터를 예측하고 있었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로마이어의 블러프였다. 그 시점에서 멸급 디제스터의 출현을 예상하고 있었던 건 극소수. 괜히 친란이 천후의 예상을 듣고서 놀란 게 아니다.
이 때문에 R.D.C의 처음 결성 때는 진짜로 멸급이 나타나긴 하는지에 대한 의혹제기와 그외 잡음도 많았다. 하지만 2주가량이 더 지난 지금은 정말로 다들 그렇게 예상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출현빈도가 너무 단시간에 높아졌어. 이건 안 좋은데."
"무슨…. 아."
천후의 생각을 묻던 셀레나는 바로 예측해내고는 탄성을 질렀다.
"어. 석 달이나 걸릴 거 같지가 않네, 이건."
"……."
천후가 확실히 답하자 이브와 에바를 제외한 모든 이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국가의 존망을 좌우할만한 괴물이 나타날 시기가 당겨졌다는 소리를 들으니 화채나 먹고 있을 생각이 싹 사라졌다.
"로마이어 측에선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멸급 디제스터 등장 직전 즈음엔 아마도 연락이 오겠죠. 그때부턴 정말 아수라장이 되니까."
멸급 디제스터의 등장 전조는 같은 디제스터의 빈번한 등장-> 경급 디제스터 발생 빈도 증가 -> 디제스터 동시다발 등장 -> 멸급 디제스터 출현의 단계를 거친다.
이 중 지금은 2단계. 하지만 3단계에 이르면 아무리 로마이어가 국내의 모든 일리미네이터를 끌어모았다 하더라도 손을 뻗어오지 않을 수 없으리라.
"이쪽에서도 준비하고 있는 건 있으니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말도록 하죠. 아직 여유는 있으니까."
"네."
희주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뿐 아니라 셀레나나 강호도 마찬가지였다.
'음. 괜히 틀었네.'
분위기가 심히 무거워지자 천후는 은근한 죄책감을 느꼈다. 이러려고 했던 게 아니었는데. 다행히 그때. 뉴스 속보가 끝나고 다른 내용이 나오기 시작했다.
<멸급 디제스터 출현예고에도 불구하고 올해 여름에도 바닷가나 수영장에는 많은 인파가 모였습니다.>
때는 피서철. 화면에는 수많은 사람이 해변이나 수영장, 계곡에서 놀고 있는 모습들이 보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괴물들이 쑥쑥 튀어나오는 마당에 잘도 저렇게 논다 싶지만, 이미 디제스터가 삶의 일부가 되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올핸 진짜 덥네."
"아…. 요즘은 밖에 못 돌아다니겠어."
역마살이 낀 듯이 돌아다니던 셀레나도 요즘엔 천후의 자택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스팔트에 달걀을 까면 후라이가 될 정도로 더웠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우리도 피서나 갈까?"
"으. 피서가면서 더울 거 생각하면 좀."
"그치. 그게 싫지."
준비까진 어떻게 한다 치고 저런 해변까지 차 타고 가랴 어쩌랴 하다 보면 그건 그것대로 짜증나는 일이다. 하지만 그때. 화면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이브가 화채를 한입 냠 하고 물면서 말했다.
"그래도 난 쩌기는 한번 가보고 싶은데."
"응?"
"음!"
되물어보니 이브는 입술을 쭉 내밀어 입에 문 수저 손잡이를 화면 쪽으로 향하게 했다. 화면엔 워터슬라이드에 인공파도까지 있는 커다란 워터파크 비추고 있었다. 그 외에 놀이기구도 풍성해서 확실히 재미있어 보인다.
살짝 고개를 돌려 에바를 보니, 에바 역시 헤~하고 입을 벌리고 화면을 보고 있었다.
"……."
요거요거. 어쩔 수 없구만.
"저기 어디지?"
두 아이의 눈이 똥그랗게 떠져서 천후에게 모였다.
*
TV에 나왔던 곳은 바르발디 오션랜드였다. 위치를 확인한 천후는 바로 내일 떠날 채비를 차렸다. 천후가 같이 가준다는 말을 하자, 둘은 방방 뛰면서 좋아했다.
"와. 진짜루?"
"아싸아!"
"그럼 수영복 사러 가요!"
"비키니! 비키니 입을래요!"
놀러 가는 게 확정되자 아이들은 신이 나서 외쳐댔다. 천후도 그에 편승해 단숨에 아이들을 데리고 마트로 뛰어갔다. 이브는 미리 준비했다는 듯이 카트에 동전을 넣고 끌고 왔고, 에바는 그 옆에 붙어 그걸 슉슉 밀어댄다.
"오빠! 여기여기!"
스포츠용품 매장까지 단숨에 달려가 저편에서 손짓하는 걸 보니 자동으로 웃음이 터져 나온다. 키가 가슴까지나 올까 말까 한 애들이 저렇게 빠르게 움직이니 신기하다.
느긋하게 걸어와서 보니 매장에는 여름을 맞이해 수영복들을 많이 진열하여 판매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중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빠르게 서치해내더니 샤샥 하고 근처에 있던 탈의실에 들어갔다. 행동이 이렇게 빠를 수가 없다.
"아. 좀 진작 데리고 다닐걸.“
요즘은 또래 아이들도 전부 방학일 때다. 하지만 천후는 지금까지 아이들이 밀려있던 교육을 생각해서 매일 강사를 붙이고 있었는데, 저렇게 좋아하니 슬쩍 미안해졌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 아이들이 탈의실에서 튀어나왔다.
"쨔쟌! 어때요? 예뻐?"
"비키니! 비키니!"
보니 이브는 허리에 프릴이 달린 분홍색 원피스 수영복을, 에바는 노란색의 비키니를 입고 있었다. 둘 다 얍얍 하고 섹시 포즈 비스무리한 걸 취하는 게 귀여워서 천후는 슬금슬금 웃다가, 에바의 배꼽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걸 보고 살짝 얼굴을 굳혔다.
"잠깐만. 역시 비키니는 안 되겠다."
"에~. 왜애!"
"어른 되면 입자, 어른 되면."
어린애가 입긴 너무 야하잖아. 눈이 칼같이 변한 천후가 그녀를 다시 들여보내려고 하자, 에바는 방방 뛰면서 소리 질렀다.
"싫~어어. 비키니가 좋단 말예요!"
"히. 에반 맨날 야한 것만 좋아하니까 안 된다고 하는 거다~."
"으씨! 이브 너 눈치 본 거잖아. 집에 가져갈 땐 몰래 딴 거 넣으려고 한 거 다 알 거든?"
"야! 그걸 왜 말해!"
이브가 팔짝 뛰는 걸 본 천후는 슬그머니 탈의실 안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한쪽에 고이 접어놓은 비키니 수영복이 보였다.
'아이고야.'
애들 참 영악하구만. 살짝 이마를 짚은 천후는 옥신각신하는 둘을 말리고 탈의실로 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였다.
"손님. 따님들이세요?"
"네? 아뇨. 동생이에요. 나이 터울 좀 있는."
천후가 덩치가 있고 하다 보니 좀 나이가 있어 보이는 편이긴 하지만, 아빠냐는 소리를 듣자 살짝 마음에 스크래치가 생겼다. 그 대답에 점원은 곧장 사과했다.
"어머. 죄송합니다. 오빠 되시는군요. 그런데 왜 동생들에게 비키니를 못 입게 하세요?"
"네? 아니 너무 야하잖아요. 그리고 애들 배가 너무 차가워도 안 되고…."
10살부터 비키니라니! 천후가 꼬장꼬장한 아저씨 같은 태도로 돌변했지만, 점원은 빙긋 웃으면서 그를 설득해나갔다.
"요즘은 아이들 수영복도 비키니가 더 많이 나온답니다. 어른들이 그렇게 입으니까 아이들도 따라 하고 싶은 거예요. 더 예뻐 보이는 거고. 존중해주셔야죠.“
“아니. 그래도….”
“그리고 요즘은 원피스 입는 애들 별로 없어요. 수영장 갔는데 혼자 원피스 입고 있으면 촌스럽다고 생각할걸요?”
"어. 어어…."
조곤조곤 말해오니 반박하기 어렵다. 게다가 말하는 내용도 지극히 신경 쓰인다.
‘그래? 내 결정 때문에 애들이 촌스러워 보일 수 있다고? 다른 애들은 다 하는데 내가 막고 있다 이건가? 으음…. 하지만 어린 애들인데…. 아니 그래도….’
솔깃솔깃. 팔불출 팔랑귀가 움찔움찔대는걸 보고 지금이 기회라고 여긴 아이들이 양옆에서 폴짝폴짝 뛰며 외쳐왔다.
"맞아요! 비키니가 더 예쁘단 말야!"
“원피스 답답해요! 더워! 시원해지러 가는 건데!”
“촌스러! 쪽팔려!”
“구려! 아줌마 같아!”
"으으음!"
오빠 된 입장에선 도저히 양보해주기 싫은 이야기지만, 더 밀어붙였다간 미움받게 생겼다. 이게 가장 죽어도 싫지. 쩝 하고 입맛을 다신 천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대신에 추워지면 바로바로 말하기다?"
"해냈다!"
"언니 고마워요!"
처음 본 점원과 하이파이브를 한 둘은 꺄르르 웃어댔다. 그 뒤로도 둘은 수영모와 튜브 등을 골랐다.
"이건 물 들어갈 때만 쓰구 다른 모자 써야겠다."
"응. 너무 빡빡해! 안 예뻐!"
수영모를 써본 둘은 그것들은 금세 내려놓고는 뒷머리 쪽이 그물망으로 된 매쉬캡을 쓰고서 히히 웃어댔다. 뭐 확실히 수영모는 계속 쓰고 있긴 그렇지.
"그럼 다 골랐니?"
"네~!"
둘이서 동시에 소리를 높이자 천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계산을 마쳤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점원이 나선 이유가 있었는데, 원피스보다 비키니가 좀 더 가격대가 높았다. 대체 왜 천이 더 적은데 비싼 건진 모르겠지만.
다음날.
"날씨. 화창합니다."
"도시락 준비 완료!"
차착 하고 이미 현관문 앞에 나란히 서서 대기하고 있는 걸 본 천후는 웃음을 흘리며 희주에게 물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근데 정말 같이 안 가실래요?"
"네. 제가 함께 가면 아이들이 눈치를 볼 테니…."
"눈치요?"
"아무래도 약간 불편해하니까요. 다른 어른들은."
"음?"
천후가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여대자, 아래쪽에서 아이들이 양팔을 휘감으며 재촉했다.
"오빠, 빨리 가자아~. 응?"
"워터 슬라이드 늦게 가면 엄청 기다렸다 타야 한단 말야."
"아. 그랬지."
고개를 끄덕이고 희주를 보니 그녀는 가만히 천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가가 살짝 올라온 게 즐거워하고 있는 것 같다.
"아이들에게 주인님은 어리광부릴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
무슨 차이가 있는 건가? 하지만 희주는 더는 말하지 않고 천후의 손을 질질 끄는 아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러자 아이들이 흠칫하며 고개를 꾸벅 숙인다.
'대하는 태도가 너무 다르잖아!'
이걸 좋아해야 해, 말아야 해? 천후는 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내 웃으며 외쳤다.
"그래. 그럼 가자!"
"예~!"
"렛츠 고!”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쿠폰, 코멘트 모두 감사드립니다.
법률관련은 역시 좀 얼버무린 감이 있습니다. 꾸벅꾸벅.
장소 이름은 언제나처럼 적당히 바꿨어요.
이브&에바가 생각하는 어른들을 보는 이미지는 희주 : 존경하는 선생님!
셀레나 : 잘 놀아주지만 바빠보여!
강호 : 우리가 신경을 '써줘야' 해!
천후 : 애교부리면 잘 받아줘! 막 커서 든든해!
대충 이런 느낌입니다.
그나저나 저 점원은 오빠라고 대답했을 때 얼마나 막장 가계도를 생각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