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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95화 (95/324)

95화

꿈.

그에게 있어서는 지긋지긋한 것이다. 사람의 감정을 강제적으로 엉망으로 만드는걸. 잠들기 전, 사랑하는 여자와 한자리에 눕고선 일어날 땐 식은땀을 흘린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천후는 요즘 들어 문득.

이 꿈이 단순히 자신의 트라우마에 기인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에 대해서 회의감을 품고 있었다. 따지고 들어가자면, 천후에게 그 당시의 일은 트라우마가 맞다.

하지만 뭐랄까….

이게 진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은 안다. 온도. 당시의 촉감까지 재현한 이 광경이 끔찍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알고는.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조금.

영화를 보는 감각을 느껴버리고 만다. 왜냐면.

꿈이 아니면 기억하지 못할 일이니까.

드러누운 나신의 시체들이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져 있는 지옥도地獄道. 그 한가운데 서있는 아이의 눈을 통해 보이는 세계는.

시간이 지나.

다시 매미 울음소리가 나고

다시 흑영들이 몰려드는 그런 마지막.

아이의 눈이 천천히 감기며 꿈은 끝났다.

끝나야 했다.

그러나.

목소리가 들려온다.

"메이거스. 진심인가?"

"물론. 가능성이 있는 게 이것뿐이니까.“

"!"

벌떡. 천후는 눈을 크게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껏 인영들이 뭐라고 말을 해왔지만, 이렇게 선명한 목소리가 들린 것은 처음이었다.

"…뭐였지?"

천후는 마지막에 들린, 메이거스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그 순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으…. 으아아악!"

참을 수가 없다. 얼마 전 강호의 조부와 겨뤄 크게 다쳤을 때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머리를 감싸 쥔 천후는 몸을 뒤틀며 비명을 질러댔다.

그 소리에 잠에서 깬 희주가 황급히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 순간. 놀랍게도 머리에 가득하던 격통이 멈췄다.

"주인님. 무슨 일이신지…."

"헉…. 헉…. 꿈을, 꿈을 꿨어요."

주인이 악몽을 꾸는 것은 항상 있는 일이지만…. 이 정도로 괴로워하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희주는 가만히 그를 올려보았다. 온몸에선 식은땀이, 눈동자는 크게 떨리고 있었다.

겁먹었다. 무언가에.

"무엇을 보셨나요?"

다시 떠올리면 괴로울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럼에도 희주는 조심스레 물었다. 천후는 그 말에 숨을 몰아쉬다가, 꾹 하고 입을 다물었다. 몇 번인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기억이 안 나요."

"……."

"인영이 모여들고…그리고…. 어?"

그의 자각몽은 선명한 수준을 넘어서 저주에 가깝게 그를 옭아매고 있었다. 그는 그 내용을 프레임 단위로도 서술할 수 있을 정도로 그것을 선명하게, 완전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왜 머리가 아팠던 거지?"

멍한 목소리를 낸 천후는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희주의 얼굴에 무표정이 완전히 날아가고, 걱정이 한가득이다.

"주인님…."

그녀의 흰 손이 뺨에 닿았다. 천후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그녀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이 여자를 불안하게 만들다니.

"괜찮아요, 희주 씨. 꿈이란 게 원래 기억이 안 나는 게 정상이에요. 오히려 좋아진 걸 수도 있어요."

"……."

자기가 생각해도 말도 안되는 소릴 주워섬겨보지만, 희주는 대답하지 않고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자신의 불안은 끝났지만, 그녀의 불안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풀어줘야 하지?

'그러고 보니…. 어제 그녀를 안아줬던가?'

아니다. 그녀와는 매일 합방하고 있지만, 몸을 섞은 횟수는 첫날을 보낸 그 후로 한 손에 꼽을 정도다.

솔직히 미봉책이지만….

"정말 괜찮아요. 응…?"

스륵. 그녀의 얼굴을 가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긴 천후는 볼과 입가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목덜미를 탐해갔다. 그녀의 입에서 뜨거운 숨이 새어 나왔다.

"아…. 주인님…. 죄송합니다."

"뭐가요?"

"주인님이 원하시는 때가 아니라…. 제가 불안해하니까…."

희주는 관계에 있어서 철저하게 그의 페이스에 따르고 있었다. 그가 요구하는 날이 아니면 먼저 유혹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그가 자신을 위해주고 있단 것에 몸 둘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비천한 것이 감히.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지만 그 말에 잠깐 움직임을 멈춘 천후는 본격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번쩍 들어서 바로 눕혔다. 그리고선 조금 장난기와, 색욕이 섞인 목소리를 냈다.

"희주 씨 그건 아니에요."

"……?"

"전 언제나 하고 싶어 미칠 거 같으니까."

그녀의 생각이 완전 틀린 건 아닌데…. 그건 어디까지나 아직 분위기나, 어떻게 자연스럽게 할까를 신경쓰거나 그러느라 그랬던 거였지 하기 싫었던 날은 하루도 없었다.

지금도 이렇게 눕히니 기억이 어쩌네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졌다. 콧김을 내쉰 그가 늑대처럼 그녀를 덮쳐갔다. 그 즉시 그녀의 입에서 비음이 새어 나왔다.

희주의 눈이 잠시 창가 쪽으로 향했다.

해가 조금씩 떠오르고 있는 시각. 문득 떠올린다.

'아…. 그러고 보니 아침에 안아주신 것은 처음….'

생각은 길게 가지 않았다. 온몸을 주물러대던 짐승이 그대로 찔러들어왔기 때문이다. 격렬함에 침대가 여인과 함께 비명을 질렀다.

*

대한민국의 서해 영해는 중국 어선들에 의한 피해를 매년 크게 보고 있었다. 막 심해졌던 초창기엔 해경으로 대응이 어느 정도 됐지만, 지금에 이르러선 어선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죽창 정도가 아니라 소총에 이르는 개인화기로 무장하는 경우도 왕왕 있어 날이 갈수록 건드리기 힘든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이른 새벽.

평소처럼 대한민국 영해까지 나와 조업을 하던 중국 어선들은 이상한 현상을 목격하게 되었다. 오늘은 구름 한 점 없어 파도도 높지 않은 원활한 조업이 예상되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대한민국 영해를 넘어서서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야가 희뿌옇게 변하고, 갑자기 파도가 높아졌다.

놀란 선장이 반쯤 맛이 간 무전기로 연락을 취하니, 그들의 배가 있는 주변 수 km의 해역만 이렇게 보인다는 소리가 돌아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평생을 어업에 매진했던 선장은 처음 보는 현상에 아연실색해서 배를 돌리려 했다. 오늘 이 해역에서 조업을 하려고 했던 건 자기 배를 포함해 30척이 넘는다. 이렇게 많은 배가 움직이고 조업을 포기하면 손해가 엄청났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바다에서 한순간 잘못된 선택은 죽음을 의미한다. 인해전술이네 어쩌네 하며 중국인들의 인구 수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체를 위에서 내려다봤을 때 이야기고, 당장 이곳에서 배를 몰고 있는 자기 목숨은 하나뿐 아닌가?

그는 조업원들에게 철수하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들 중 몇몇은 이미 그물을 푼 상태에서 빠지면 큰일이라는 소리를 해왔다. 그 말엔 선장도 조금 갈등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콰아아아앗.

무언가가 물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배가 내는 소리가 아니다. 직감적으로 그것을 깨달은 선원들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순간 안 그래도 희뿌연 해역이 조금 어두워진 것 같다고 느꼈다.

"저. 저거 뭐야!"

"히익! 선장님! 배 돌려요!"

무언가를 발견한 이들이 지르는 소리에 선장은 망설이지 않고 배를 돌렸다. 대체 뭘 봤는진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런 건 나중에 놈들이 허풍을 섞어서 알아서 나불댈 테니까.

콰지지지직!

판단이 느렸던 다른 배들이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한민국 해군의 공격일까? 아니 대한민국은 일단 민주국가다. 이런 불법조업도 한두해가 아닌데 갑자기 이렇게 경고도 없이 발포할 리가 없다. 뭣보다 발포음이 들리지 않았다.

'젠장! 대체 무슨 일이야!'

궁금해하지 않겠다고 생각한지 몇 초 지나지도 않았는데, 결국 알고 싶단 마음을 버릴 순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궁금증은 곧 풀렸다.

쿠지지직.

"히, 히이이이이익!"

"미친! 배가!"

뭔가 부서지는 소리 직후 선원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선장은 최대한 의식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배가 멈춰있었으니까.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다.

"…니미."

계기판만 보면 분명 나가가고 있어야 정상임에도 배가 그냥 서있다. 파도가 이렇게 격한데 배가 그 자리에 서있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이야기다. 조류에 의해서라도 움직여야 하는데, 지금은 마치 무언가에 고정된 것처럼 흔들리지도 않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선 그가 아니라 넬슨이 와도 답이 없다. 이를 간 선장은 결국 갑판으로 달려나왔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희뿌연 안개 속. 한 치 앞도 구분하기 힘든 그 속에서…. 검은 실루엣이 보였다. 대책 없이 거대한 실루엣.

그것은 하염없이 긴 목을 가지고 있었고, 그 사이로 노란, 아니 황금빛이 감도는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대가리는 도마뱀을 연상시켰는데, 이마 위쪽으로 두 개의 뿔이 보였다.

목 아래로는 유선형의 몸체를 가지고 있었는데, 대부분 물 아래로 잠겨있었음에도 그것이 한번 움직일 때마다 거대한 파도가 일어났다.

전체적으론 네시 호의 괴물 등과 같은, 과거 공룡시대의 공룡을 떠올리게 하는 실루엣. 하지만 선장은 저것이 그것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왜냐하면 배를 멈춰 세운 수단…. 놈의 몸 중 유일하게 실루엣이 아니라 제대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 보였기 때문이다.

손.

거대한 몸체에 비하면 얇고 작은 손이었지만, 이 작은 어업용 배는 그것이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조금 들려서 허공에 붙박혀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실루엣의 이미지를 전적으로 달라지게 만드는 부위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날개.

"…용."

그중에서도 서양에서 악마로 믿었다는 드래곤. 그것을 떠올린 선장은 헛웃음을 흘리며 놈을 올려보았다. 너무 거대하다. 황해의 깊이가 얕다지만 평균 수심은 48m, 지금 이 해역의 경우엔 70m가 넘는다.

그런데도 놈의 몸체는 반쯤 밖으로 나와, 그 긴 목이 하늘 높은지 모르고 치솟아 있었다. 선장은 문득, 대한민국에 멸급 디제스터가 나타날 거라는 뉴스를 기억해냈다. 그 뉴스에서는 몇달 후를 예측하고 있다고 했고, 뭣보다 중국에서 나타나는 게 아니니 내 알 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게 중국에서 날뛴다면….'

이곳은 대한민국의 영해긴 하지만, 중국에서도 그리 멀지 않다. 몸을 어디로 돌리느냐 차이에 가깝다. 이런 놈이 도심에 상륙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아니 그전에….

지금 당장 어떤 일이 일어날지조차.

"크르르르르르…."

그것을 알려주겠다는 것일까? 놈의 입에서 괴성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바다가 요동치며, 놈의 얼굴에서 눈 말고 다른 곳에서 빛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입속에서.

선장은 몸을 돌려 주변 선박들에게 무전을 시도했다. 저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는 명백했다. 용의 입에서 뛰쳐나올 것이 하나밖에 더 있겠는가?

하지만 그 모든 시도가 무색하게….

쿠화아아아아악!

선장은 빛이 터졌다고 생각했다. 단지 그것밖엔 느낄 수 없었다. 놈의 아가리가 벌어진 그 순간, 그의 몸은 1초도 되지 않아 기화되어 사라져버렸으니까.

30척의 다른 선박들과 함께….

"쿠워어어어어어어!"

안개에 몸을 감춘 괴물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듣는 이는 모두 죽었다.

그날.

한중韓中 해군, 공군 연합은 황해에서 가용할 수 있는 핵을 제외한 모든 전력을 동원해 공격을 펼쳤다.

놈이 등장한 위치는 바다. 그렇기에 내릴 수 있는 결정이었다. 구축함과 호위함, 전폭기가 투입되고, 대공, 대함, 대잠을 가리지 않고 미사일이 퍼부어졌다.

A급 일리미네이터가 아니라 그 할아버지가 와도 흉내 낼 수 없는 화력의 폭풍. 인류의 힘이 현현했다.

그러나.

그 직후. 하늘에 태양처럼 치솟은 에너지 구체에서 섬광이 뛰쳐나온 순간, 모든 것이 끝났다.

인간은. 졌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쿠폰, 코멘트 모두 감사드립니다.

D와 싸워봅시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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