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결국, 멸급 디제스터 '드래곤'의 퇴치 총 책임자는 로마이어 엔체스터가 되었다. 여러 의혹이 있었지만, 당장이 급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드래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북한 내륙에 공격을 가하며 남하하고 있었다. 브레스 뿐 아니라, 드래곤 주변에서 키메라와 그렘린 페이스가 허공에서 나타나 북한 내륙을 문자 그대로 개박살내고 있었다.
그동안 놈은 유유히 바다를 건너 연평도를 무시하고 내륙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로마이어의 자질이 어쩌네, 성매매가 어쩌네 할 시간은 없었다.
정부에선 결국 A급 일리미네이터 파견 요청을 하지 않았다. 중국과 미국, 러시아 대사들이 대통령과 접견했다는 소식이 있었지만, 그 뒷이야기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유그드라실 안.
드래곤을 격퇴하기 위한 대한민국 일리미네이터 전원이 한자리에 모였다.
*
멸급 디제스터 퇴치를 위한 1차 회의는 철저하게 R.D.C 소속 인원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졌다.
"태원 씨. 어디에서 싸워야 할 것 같나요?"
"……."
최초 키메라 레이드는 실패했지만, 그만한 공격대장도 없단 것을 잘 알고 있는 로마이어는 정태원을 다시 1 공격대장으로 임명했다. 그도 그것을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수용하는 건 거기까지.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
"그 전에. 전력 보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영천후 씨를 데려오죠."
유그드라실 데이터베이스에는 해외에서 있었던 멸급 디제스터의 교전 기록이 존재한다. 영상과 문서를 가리지 않고 최대한 자세하게 기록된 그것을 보면 볼수록 그는 한 가지를 확신했다.
이건 미친 짓이었다.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전부. 그야말로 전부 때려 박아도 극복할 수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 당장 정체를 숨기고 있는 대한민국 내의 모든 마법사들에게 무릎 꿇고 사정을 해서라도 전투참가, 최소한 전투지원을 해달라고 빌어야 할 판이다.
나라가 망하든 말든 하늘에 떠 있기만 하는 이 유그드라실. 이 안의 8000 마법사들에게 몇억 몇십억씩 쥐여주는 한이 있더라도 끌어들여야 한다. 아니 적어도 그런 노력은 하는 게 정상이다.
그중에서 당장 현업 일리미네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영천후는 당연히 이번 1차 레이드에 반드시 참가시켜야 했다. 이미 제3 인류고 나발이고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딴 건 살아남고 다시 생각해도 되는 문제다.
하지만 로마이어 엔체스터. 지금 이 자리의 일리미네이터 130명. 나아가 인구 5천만의 일국의 생명을 한 손에 틀어쥔 이 금발 외국인은 빙긋 웃었다.
"괜찮습니다, 태원 씨. 그를 참가시키지 않겠다는 게 아니에요. 그에겐 드래곤이 불러내는 경급, 파급 디제스터 처리를 맡길 겁니다. 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죠."
"……."
웃음 뒤. 눈동자가 싸늘하다. 태원은 그 순간 타협점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 화제가 나오는 것을 지극히 불쾌해하고 있었다.
'…나도 오래 살았나.'
이제 서른 초반인데 이런 생각이 들다니. 절망이 그의 심장을 짓눌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조차 없다. 그렇기에 그는 현재 로마이어가 활용하고자 하는 전력을 최대치로 두고서 설명을 시작했다.
"…본토로 올라오게 해선 안 됩니다. 연안을 따라 내려오고 있는데 이미 연평도는 지났으니 볼음도, 주문도, 석모도 이 세 섬을 마지노선으로 삼고 막아야 합니다."
셋 다 주민들이 사는 섬이지만, 지금은 이미 본토로 피난해 있는 상태였다.
"그곳에 주거를 두고 있는 주민분들껜 안된 일이지만, 초토화될 것을 전제로 두고 싸워야 할 겁니다."
"그렇겠죠."
"개인적으로는 석모도에서 교전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낮지만 산들이 좀 있죠. 드래곤이 워낙 거대하니 어쩔 수 없이 공중전을 할 수밖에 없게 되겠지만, 보조전력들이 산개해서 지원하기에는 좋을 겁니다. 교대 인원들이 은신해서 기다리기도 좋을 테고요. 그리고 솔직히 강화도부턴 내륙이나 다름없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석모도에서 교전한다 치고. 어떻게 유인하지요?"
"배틀 시그널을 사용하려 합니다. 도발에 응한다면 반드시 접근하겠죠."
단순 풀 캐스팅에 의한 원거리 공격이라면 브레스에 의한 반격을 받겠지만, 도발 마법인 배틀 시그널이라면 놈의 호승심과 경각심을 자극해 끌어들일 수 있으리라. 태원이 말을 이었다.
"재래식 무기의 피해가 경감되긴 합니다만, 그래도 군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겁니다. 포인트 맨 체제로만 대응하기엔 지극히 어려운 적이니 주의를 최대한 여럿으로 분산시켜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번 레이드 투입 인원에 대해서입니다만…. 다행히도 드래곤은 던전화는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60인으로 하려합니다."
그 말에 정태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60인. 이것은 사실상 경급 이상 디제스터를 상대할 수 있는 일리미네이터의 절반이다. 나머지 반으로 드래곤이 내륙에 뿌릴 키메라와 그렘린 페이스를 막겠다는 것이리라.
단 두건 있었던 던전화 가능 멸급 디제스터의 던전에 출입 가능한 일리미네이터의 수가 40인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많은 전력이 투입되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반대로 본토 방어를 하는 쪽의 인원수가 적단 생각이 들지만….
'…그건 트란제비야 쪽에 일임하는 수밖에 없군.'
정태원 역시 10인 레이드를 성사시키는 영상을 봤다. 일부러 유그드라실 데이터베이스를 뒤져서 실전 영상까지 챙겨봤다. 그것을 본 그는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A랭크 주문은 쓰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본토 쪽은 걱정 없겠지.'
생각을 정리한 태원은 주먹을 꾹 쥐고는 전의를 다졌다.
전략회의는 조금 더 지나서야 종료되었다. 오늘이 오기 전에 이미 정리해놨던 드래곤을 상대한 60인의 명단이 발표되었다. 이미 마음을 잡고 있었던 이들은 각자 자신의 위치로 향했다.
그리고 회의실을 나온 로마이어는, 제2 공격대. 본토에 남는 70인 가운데 가장 앞에 서 있는 영천후와 마주 섰다.
금발 남자는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큰 체구의 남자는 표정이 없었다. 그 표정 없는 옆을 스쳐 지나갈 때.
"이기고 와라."
단 한마디가 들려왔다. 로마이어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그것은 곧 싸늘하게 다물어졌다.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걸어나가며 단언했다.
"당연한 소릴."
그 말을 신호로 모여있던 1 공격대원 주변에 비눗방울 같은 것이 생기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제야 몸을 돌린 천후는 로마이어가 서 있던 자리를 노려보았다.
부조리하다. 저 자식은 미쳤다. 결국은 이렇게 끝내고 말다니. 부조리함에 파묻혀 질식해 죽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 자식은 이겨야만 한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
진다면…. 뒤가 없으니까.
1 공격대는 로마이어의 통제 하에 있는 모든 B랭크와 가장 실력이 뛰어난 C랭크들이 전부 모여있는, 대한민국 최강의 공격대였다.
저들이 무너진다면 이 나라는 끝장이다.
그땐 A랭크 강화마법을 두를 수 있는 영천후가 남아있고 나발이고 소용없다. 아무리 그라도 드래곤을 상대로 남아있는 전력만으로 상대할 엄두는 나지 않는다.
결국 이런 미친 상황을 성립시키다니. 목을 뚫고 뛰쳐나오려는 노성을 간신히 가라앉힌 천후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승리를 기원하죠.“
그 말에 담겨있는 뜻을 읽은 남아있는 70인의 표정은 창백해졌다.
*
큐브는 석모도의 상봉산 아래 부두에 내려섰다. 작은 부두였지만 사람 설 자리 하나 없을까. 한 자리에 집결한 그들은 마치 한 사람처럼 심호흡을 내쉬었다.
수많은 화면으로 놈을 봤지만, 실제로 만나게 되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다. 사실은 전혀 만나고 싶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여기서 도망쳐서 외국으로 뜨고 싶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굳이 로마이어가 R.D.C를 만들지 않았다 하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비슷한 집단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빠져나간다는 것은, 앞으로 대한민국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인간 대접을 받으며 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굳이 그것뿐이 아니더라도….
그런 마음을 숨기고 있는 이들의 마음속에도.
자긍심이 있다.
지금 이 자리를 확실히 이겨내고 극복하여, 미래를 열어 보이겠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
영웅이 되고 싶다는 마음. 개선장군이 되고 싶다는 마음. 그렇게 거창한 마음까지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래.
한 사람의 아버지로서. 자식이 자라고 있는 세상을 지키고 싶단 마음은 어떤가.
일리미네이터들은 다들 젊다. 20대에서 30대가 대부분. 그렇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직도 감정이 이성을 누를 때가 종종 존재한다.
허나 그 누가 이 자리에 선 그들의 감정을 욕할 수 있을까?
"시그널을 쏜 이후, 보조 인원들은 즉시 석모도 내에 산개 및 은폐. 전투 인원들도 최대한 산개합니다."
소형 무전기를 통해서 들려오는 공격대장의 목소리에 그들의 고개가 일제히, 약속한 것처럼 단 한 번 끄덕였다.
60명을 데려온 만큼, 그 중 20명은 보조, 방어, 회복마법에 전념하는 인원으로 돌리고 나머지 40인이 공격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공격 담당이고 보조 담당이고를 떠나. 그들 모두 목숨을 걸고 이 자리에 섰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였다.
이기고. 살아서 멋지게 돌아가자!
앞으로의 전황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정태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가만히 가장 앞에 서 있는 금발의 남자를 보았다.
과연 그는 이런 마음들을 알고는 있을까?
'…잡념은 버리자.'
한순간 떠오른 마음을 내려놓은 그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유그드라실의 서포트로 드래곤의 위치가 실시간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두 섬 너머에 있다.
때가 왔다.
이제는 싸워야 할 때. 그렇다면. 되어야 한다.
인간의 정을 버린, 차가운 지휘관.
공격대장이.
"전 인원 배틀 시그널!"
번쩍!
각기 다른. 60개의 문양이 석모도의 하늘을 뒤덮었다.
*
드래곤은 기어이 계속 남하하여 볼음도 인근까지 다가왔다. 이미 여기서 동쪽으로 조금만 가면 강화도와 김포가 나온다.
하지만 놈은 좀 더 남하할 모양이었다. 여기서 좀 더 내려가서 나올 도심지라면 단 하나밖에 없다.
인천.
하지만 그때. 드래곤의 감각에 무언가가 걸렸다. 신경을 거슬리는 무언가. 자신의 감각을 흐트러뜨리는 무언가.
자신에게 도전하고자 하는 무언가.
"크르르르르…."
남하하고자 하는 것은 그저 단순한 변덕이다. 인간을 멸한다는 단 한 가지의 특수성을 제외하면 그것들은 본능의 화신들이었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와중에도 훌쩍 다른 곳으로 날아가 살육을 벌일 수도 있다.
그 본능을 해석하여 만들어낸 주문이 하늘에 새겨진다. 와라. 이쪽으로 와라. 너에게 있어 가장 위험한 존재인 우리가 너를 먼저 상대해주마하고. 빛과 문양과 마력으로 말을 건다.
그 어느 것이던 괴물의 심기를 거르지 않는 것은 없었다. 놈의 몸이 빛이 치솟아 오른 곳을 향해 돌았다. 그리고…
고…오오오오오….
쩍 벌어진 아가리에 빛무리가 모였다. 주변의 공기가, 공간이 압착되어 일렁댄다. 파도가 격해지며 바람이 그것의 입으로 거세게 빨려 들어갔다. 이윽고 그것은 놈의 입에 가득 차 휘몰아치는 구체가 되었다.
"쿠화아아아아아악!"
놈의 입에서 광구가 뛰쳐나갔다. 맹렬한 속도로 회전하는 그것은 순식간에 주문도의 지면에 선을 남기며 날아가, 석모도의 상봉산과 낙가산을 잇는 능선에 꽂혔다.
쿠콰아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빛기둥이 치솟아 오르며, 삼림이 불바다로 화했다.
"꺄아아아아아악!"
"C랭크 1명 사망! 2명 부상!"
"부상 인원은 즉각 이탈 후 회복주문 처치 후 복귀!"
비명과도 같이 찢어지는 보고를 들은 태원은 이를 악물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배틀 시그널로도 자극할 뿐인가?!’
그렇다면 빠르게 전략을 다시 세워야한다.
광구가 꽂히면서 휘몰아친 바람 때문에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았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이 자리에서 누구보다 상황을 확실하게 파악해야 할 공격대장이었으니까.
그때.
마치 그 용감함에 대한 포상을 내려주겠다는 듯이.
하늘이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지며 쿠우우우웅!
눈앞에, 황금색 산이 떨어져 내렸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쿠폰,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배틀 시그널은 통했습니다.
그저 인사가 조금 격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