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하연과 성아의 키메라 레이드 팀. 2팀은 키메라를 상대로 상당히 고전했다. 둘 다 한 달의 블랭크가 있었던 것도 컸지만, 뭣보다 B랭크 2인 화력으론 키메라가 너무 터프했다. 공격대장인 레이나드는 트라이 시간을 45분으로 잡고 있을 정도였다.
"걱정 마세요. 곧 1팀에서 지원이 올 겁니다."
"으!"
"반갑기도 하고, 안 반갑기도 하고."
그녀들의 입에서 묘한 소리가 나왔다. 그들도 B랭큰데 남의 도움을 굳이 받자니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한가한 소리를 할 때가 아니었다.
"키이이이이!"
트라이 와중 다른 그렘린 페이스 한 마리가 난입해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공격대들은 예상했던 사태였다는 것처럼 그림처럼 흩어지며 놈의 초음파 공격을 피했다. 비행속도, 그리고 재생속도는 빠르지만, 초음파 발사의 쿨다운이 있는 녀석의 공격은 이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대한민국의 모든 일리미네이터가 지긋지긋할 정도로 익숙해져 있었다.
그렇게 한번 회피하자, 어디선가 날아온 4명의 일리미네이터가 그렘린 페이스를 유인해 데려갔다.
"이것도 여러 번 하다 보니 익숙해지네."
드래곤 등장 후, 키메라가 상륙한 인천 부두 근처는 그렘린 페이스가 두세 마리씩 함께 날아오곤 했다. 놈들은 인근의 유일한 인간인 일리미네이터들에게 달려들었는데, 그때마다 3팀의 인원들이 4명씩 붙어서 놈들을 떼어냈다.
이것 역시 키메라 레이드가 늦어지고 있는 요소 중 하나였다.
그때였다.
"지원 왔습니다!"
인근 가장 높은 건물 옥상에서 내려선 영천후는 통신기에 대고 크게 외치며 뛰어내렸다. 그 옆에는 도복 차림의 이강호도 함께였다. 김포의 키메라를 영체 복구 상태로 만들고 바로 이쪽으로 지원을 온 것이다.
"가게! 공격대원 전원 풀 캐스팅!"
평소라면 잡소리 한마디는 섞을 레이나드였지만 지금은 1분 1초가 아까운지라 바로 전력모드로 들어갔다. 그의 명령에 따라 25인의 의복이 부풀어 오르며 마력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그것을 감지한 키메라가 아가리를 벌리지만, 그 순간 이미 접근한 천후가 콧잔등을 발로 차며 입을 닥치게 만들고, 앞다리 두 개가 잘리며 앞으로 넘어졌다. 놈은 가시 달린 꼬리를 휘둘러대 봤지만, 꼬리가 아무리 길어도 머리까지 닿진 않는다.
그동안 6초가 지났다.
"발사!"
쿠오오오오! 마력의 기둥이 직선으로 뻗어 나가 키메라를 감쌌다. 너무나 큰 화력이다 보니 키메라의 전신이 전부 휩쓸려, 이윽고 한 줌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키메라의 회복패턴인 육체 던지기 구간이 완전히 생략되어버렸다.
이렇게 되면 영체 복구 모드도 별것 없어서, 몇 명만 투입해서 지속해서 딜해주기만 하면 됐다.
"후.... 여전하네요."
"치잇. 내 어필 타임이...!"
그가 오자마자 상황이 해결되자 하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성아는 자기 힘으로 해결하지 못한 것을 분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정을 모르는 천후는 그 뒤, 급하게 레이나드에게 다가왔다.
"레이나드 씨. 1 공격대 상황은 알고 계세요?"
"음? 아니. 이쪽은 레이드가 꽤 힘들게 진행 됐어서."
1 공격대고 나발이고 이쪽은 키메라하고도 생사결을 벌이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런 거 따로 확인할 여유는 없었다. 그 말에 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럼 말씀을 드릴게요. 저 혼자 판단을 내릴 문제가 아닌 거 같아서요."
그렇게 말한 천후는 1 공격대의 상황을 설명했다. 사실상 트라이가 실패했고, 13명이 사망했다는 것. 브레스 이후의 상황 파악이 안 되고 있지만, 드래곤도 50% 이상의 육체 손실을 봤다는 점 등을.
"상황이 굉장히 급박하게 돌아가는군. 일단 내 생각엔 지금 바로 그쪽으로 가서 연속 트라이를 해야 한다고 봐."
드래곤이 상처를 입었을 때 끝장을 봐야 한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게 27명. 1팀 인원까지 합치면 40명이 된다. 이 인원을 전부 데려간다면 승산이 있다. 아니,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1 공격대 전원이 전멸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달려왔습니다. 우리가 교전을 먼저 시작하고, 1팀이 합류해서 연속 레이드를 하죠. 저와 선배.... 아니 제가 단일 포인트맨, 탱킹을 하겠습니다."
"천후!"
강호의 안색의 새파래졌다. 그녀는 이곳으로 오기 전, 큐브 엘레베이터를 타고 유그드라실로 오를 때 파주에서 치솟아 오르는 불기둥을 보았다. 불기둥이 치솟기 전 날아오는 광파도 보았다.
그것을 정면에서 오직 홀로 상대하겠다는 건가? 미친 짓이 따로 없다. 게다가.... 어째서 자신을 빼고 혼자 탱킹을 하겠다는 것인가?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위험해요. B랭크 강화마법으로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닙니다."
"!"
"아무리 저나 선배라도 안돼요. 이건 절대 물러설 수 없습니다."
"하지만!"
틀린 말이 아니다. 진리구현자로서의 그녀의 특성은 드래곤 레이드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 거기까지다. 특성이 디제스터의 육체적인 능력까지 지워주지 않는 이상, B랭크 강화마법으로 키메라처럼 동시 탱킹을 하겠다는 것은 무모하다.
그것은 분명한 진실. 그러나 강호의 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하지만 따로 자아낼 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녀는 입만을 읊조릴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희미하게 웃은 천후는 다시 표정을 굳혔다.
"그럼 그렇게 알고. 가죠. 공격대장님. 큐브 엘레베이터 요청을."
"알았네."
고개를 끄덕인 레이나드가 유그드라실에 연락을 취하는 동안, 2 공격대원의 표정엔 긴장이 서렸다. 이곳에 남은 이들은 B랭크 둘과 레이나드를 제외하고선 2군이다. 1군보다 기량이 떨어진다. 이미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진 키메라 레이드에도 고전할 만큼.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본인들도 자각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대로 드래곤 트라이를 해야 한단 생각을 하니 식은땀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모두 조용히 각오를 굳혔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은 전혀 없다는 것을 모두 알았다. 그렇기에 몇몇은 따로따로 모여 소리 지르며 전의를 불태우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니? 태원아! 살아있는 거냐?"
유그드라실에 연락을 취하던 레이나드가 갑자기 밝게 외친 소리에 공격대원들이 웅성거렸다. 태원이라면 1 공격대장 정태원이었기 때문이다. 곧 둘의 대화가 모든 이들이 함께 들을 수 있도록 중계되었다.
"네, 선배님. 좀 다쳤습니다만, 살아는 있습니다. 1 공격대 남아있던 33명 모두 생존."
목소리에 그르륵 거리는 소리가 섞여들렸다. 레이나드는 순간 그것이 목까지 피가 차올라와 있어서 나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상황은? 상황은 어떤 거야?"
"상황은... 최악입니다. 저희 모두 큰 부상입니다. 사실상 전원 리타이어. 하지만 드래곤도 브레스 이후 한차례 발광하고 나선 침묵 중입니다. 아마 공격만 하지 않는다면, 전부 재생될 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것 같습니다."
"......."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하지만 대한민국 최정예 13명이 죽었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지금이 최대의 기회라는 것도. 레이나드가 물었다.
"태원아. 우린 지금부터 드래곤 연속 트라이를 하려고 한다. 50% 이상의 손실이라며. 영천후와 함께라면 가능할 거 같냐?"
"......."
통신기 너머로 대답이 없었다. 잠깐 죽었는가 생각했지만, 레이나드는 곧 이것이 태원 특유의 생각하는 시간 동안 말이 없어지는 버릇임을 알았다. 예상대로 곧 답이 돌아왔다.
"네.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응?"
뒷말이 희미해지는 것을 들은 레이나드가 되묻자, 통신기 너머에선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의 방침은... 재정비 후 트라이요, 2 공격대장. 마음대로 결정을 내리면 곤란하지."
"...."
로마이어의 목소리에 레이나드는 선글라스 너머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보니 브레스 발사 이후에도 전원생존이라면 이놈도 살아있었겠지.
"로마이어. 무슨 생각인진 대충 알겠지만, 지금은 자존심이나 명예를 따질 때가 아니-"
"아아.... 미안한데 지금 내가 이야기를 나눌 건 당신이 아닌 것 같군. 그쪽에, 영천후도 이 통신을 듣고 있겠지?"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에 천후는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흐.... 크크큭. 좋아좋아. 뭐 내 방침은 이거다. 방해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미쳤군.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공격대로 실패하고서 재도전을 논하는 거냐? 다시 실패하면? 또 13명을 죽이고 다시 시도할 셈이냐?"
영천후의 목소리가 격해졌다.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란 건 머저리라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놈은 지금 자신의 좌를 유지하기 위해서 가장 높은 가능성을 계속 배제하려 들고 있었다. 이미 강화도와 파주가 초토화되었음에도. 그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로마이어는 오히려 더더욱 웃으며 말했다.
"와. 똑똑한데? 그래. 그렇게 하면 4번은 더 트라이 할 수 있겠군. 그 방법은 나도 생각도 못했는걸. 아이디어 고마워."
"로마이어!"
이 미친 자식! 노성을 외친 천후는 통신기에 입을 대고 소리를 질렀다.
"이제 됐다. 어차피 1 공격대가 전원 리타이어 상태면 네 의견 따위 들을 필요도 없겠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을 데리고 연속 트라이를 하겠어."
권위란 것도 그것을 가진 이가 좀 멀쩡할 때나 유지되는 것이다. 로마이어 본인이 리타이어 상태에 트라이는 실패. 그 상태에서 드래곤이 반죽음상태라면, 아무리 현재 R.D.C소속에 있는 이들이라도 천후의 손을 들어주리라.
하지만 그 소리에 로마이어는 폭소했다.
"하하하하하! 아.... 결단력이 좋군. 역시 젊은 게 좋다니까. 하지만 영천후. 나도 트라이를 실패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니었거든? 너에겐 이쪽으로 오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거야."
"뭐?"
되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유그드라실에서 인천 쪽으로 향해오는 키메라 3체가 있다는 보고가 날아들었다. 이것을 봤던 건가? 천후는 안색을 굳히고 말했다.
"그래. 키메라가 오고 있군. 하지만 저거론 날 20분이나 막을까 말까할 뿐이야."
"흐.... 그렇겠지. 하지만 그거면 충분해. 어디... 그걸 잡고도 올 수 있으면 와보라고."
그 말을 끝으로 로마이어와의 연락이 끊겼다. 무슨 의미지? 황망히 통신기를 바라보고 있을 때, 머릿속이 울리는 염파가 찾아들었다.
<천후야!>
<셀레나?>
급박함이 느껴지는 염파다. 언제나 촐랑거리긴 하지만, 그건 이런 다급함과는 다르다.
<무슨 일이야?>
<우리, 공격당하고 있어! 군인! 군인인 거 같애! 막 총 쏘고! 꺅! 염파 오래 지속 못 해! 도와줘!>
"셀레나!"
놀라서 외쳤을땐 이미 염파가 끊겨버렸다. 그 즈음에 2 공격대 1팀 인원이 큐브를 타고 인근에 내려섰다. 40명의 인원. 이거라면 키메라가 3체라 해도 별것 아니다. 하지만 총격을 받고 있는 쪽은...!
"큭...!"
키메라 1체당 10분에서 12분이면 충분하지만, 그 시간도 없어! 천후는 잠시 자신의 손과 주변에 진형을 갖춘 일리미네이터들을 바라보았다. 식은땀이 났다하지만 결정했다.
번민할 시간도... 없다!
"A랭크 스테이터스 강화 주문. 한정 봉인 해제."
쿠홧! 순간 그의 몸이 흑색 불꽃을 물들었다. 그것은 실제로 온도를 가진 불꽃. 주변에 있던 이들이 열을 느끼고 깜짝 놀라 천후를 바라보았다. 같은 마법사임에도 두려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천후야?"
"말할 시간 없어...!"
A랭크 주문을 자력을 푼 그 순간, 머릿속을 흔드는 사이한 속삭임들이 들려왔다. 불꽃이 된 만큼 뇌가 녹아 흐트러지는 것 같다. 간신히 그 속에서 한 가닥 이성의 끈을 잡은 천후는 그대로 몸을 움직였다.
하늘 위에 떠 있는 미물들이 보인다. 잡것들. 너희 따위에게 시간을 허비하게 하지 말란 말이다...!
"으아아아아아아아!"
번쩍! 흑색 전격이 번뜩인다. 자리에서 사라져버린 불꽃은 어느새 공중으로 치솟아 놈에게 돌격했다. 쿠콰앙! 키메라 1체의 몸통에서 폭발이 일어나더니, 흩어진 육신에서 불길이 일어나 재생을 막았다. 일순에 1체가 영체 복구 모드로 들어간 것이다.
두 눈을 치켜뜬 레이나드는, 그러나 금세 상황을 파악하고 외쳤다.
"키메라 트라이 시작!"
A랭크 주문을 해방한 천후는 과연 엄청났다. 최초 1체가 일순에 당하는 것을 보고 디제스터 답지 않게 몸을 사리며 협공을 해온 두 놈들 역시 3분도 지나지 않아 영체 복구 모드로 들어갔다.
이래서야 다른 사람이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의 강력함에 공격대원들은 질렸다. 하지만 천후는 숨을 몰아쉬었다. 전투의 대상이 없으니 이성이 녹아내릴 것 같다.
방금까지 함께 싸우던 녀석들이 얼마나 강할지 궁금하다.
특히....
저쪽에서 검을 휘두르던 저 여자가....
<...님.>
그때. 그렇게 강호에게 한 걸음씩 다가가던 천후의 흐리멍덩해진 머릿속에 염파가 들려왔다.
어째서인지, 수많은 노이즈 속에서 그것만은 또렷하게 들렸다.
<주인님...!>
그 목소리는 다급하다. 움찔하고. 물에 녹여놓은 듯했던 이성이 이 목소리의 주인공만은 확실히 알아챘다.
<희주 씨...?>
멍하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가 입에 담은 단 하나의 말에. 그의 이성이 똑바로 돌아왔다.
<....가....>
"!"
번쩍. 그의 신형이 검은 번개가 되어 강호에게 들이닥쳤다. 단숨에 그녀의 손목을 가로챈 천후는 눈에 비치지도 않는 속도로 현장을 떠났다.
"큭! 천후! 천후야!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이냔 말이다!"
천후가 A랭크 주문을 평소에 안 쓰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남들에게 반쯤 괴물이 된 이 모습을 보이기 싫다는 것.
둘째는 이성을 잃을 수 있어 위험하기 때문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A랭크 주문의 캐스팅 타임이 너무 길어서 복구하기가 힘드니, 정말 필요할 때가 아니면 사용하기를 꺼렸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이 타이밍에, 드래곤 연속 트라이를 앞두고 A랭크 주문을 사용하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천후야! 멈춰라! 멈춰서 설명을 해라!"
그의 움직임은 이미 강화주문을 두르고 있는 강호조차 잡힌 채 끌려가고 있을 뿐인데도 버텨내기 어려울 정도로 빨랐다. 순간 천후가 이전에 A랭크 주문을 쓰면 이성을 잃을 수 있단 말을 떠올린 강호는 그의 이름을 필사적으로 외쳤다.
다행히 그는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서는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의 표정이.
지금껏 보았던 어떤 때보다 흐트러져있었다.
순간 강호는 불길함을 느꼈다. 저런 얼굴을 하는 남자가 아니다. 자신이나, 다른 여자들 앞에선 더더욱.
"선배...."
"그래! 대체 무슨 일이냐! 왜 이러는 거냐?"
"아이들이.... 에바가...!"
머릿속에서 번개가 쳤다.
저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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