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사흘간 석모도 연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던 드래곤은 이윽고 다시 깨어났다. 깨어난 놈은 이전처럼 연안을 유유히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날개를 펼쳐 비상했다. 순간적으로 구름 위까지 치솟아 오른 놈이 다시 나타난 곳은 영종도였다.
동아시아 교통 허브 중 하나인 영종도 국제공항이 있는 섬. 영종 IC와 인천대교 기념관 사이의 인천대교 고속도로 위에 떨어져 내린 놈은 느릿하게 인천대교의 시작점 앞까지 걸어와서는 아가리를 벌렸다.
현현된 것은 폭력. 인천대교의 60%가 그 자리에서 소멸했다. 다리를 받치는 철골이고, 다리 교량이고를 가리지 않고 완전히 증발시킨 그것은 죽 날아가 송도 종합스포츠센터를 폐허로 만들어버리고, 시화호를 넘어 화성시를 급습. 화성시청을 날려버렸다.
그 인근은 개발계획 지역이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공원과 산, 그리고 아파트들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드래곤 브레스는 그 모든 것을 쓸어버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드래곤은 그 한 번의 브레스 이후로 다시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외관상으로는 사흘 전 입었던 상처를 모두 회복된 것으로 보였는데 이러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유그드라실에선 해당 개체의 특성이라고 판단과 함께, 하루 적어도 1회의 브레스를 뿜을 것이라 예상해왔다.
국민들은 조금씩, 사과가 벌레들에게 파먹히듯 드래곤 브레스에 의해 전 국토가 파괴되어가는 모습을 보며 조금씩 희망을 잃고 국가에 대한 회의감을 짙게 드러냈다.
그리고 그때.
정부에 있어 치명적인 영상이 TV에 나오기 시작했다.
영천후의 대국민 발표가.
*
간결한 방송이었다. 조그마한 스튜디오를 빌려서 찍은, 어깨 위만 간신히 나오는 영상. 생방송조차 아닌 녹화 영상.
성의 없다고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 영상이었지만, 누구도 그것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일전 키메라를 단독으로 쓰러뜨리고, 3체의 키메라 동시 트라이를 40인으로 성공하게 한 인물의 영상이었으니까. 이미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정장을 차려입고, 단정하게 정리한 머리로 화면에 나타난 그는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국민 여러분. 저는 마법사. 일리미네이터 영천후라고 합니다. 드래곤이 나타난 지금,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저도 슬픈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국민 한 사람으로서, 당연히 드래곤 트라이에 나서고자 했습니다."
웅성웅성. 사람들이 숨어 들어가 있는 쉘터, 남부지역 전체가 그 말에 술렁였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나 국민 여러분들의 로마이어에 대한 열렬한 지지와 믿음이 있어, 저는 1 공격대에서 물러나 2 공격대로 활동했습니다. 아쉽게도 로마이어의 공격대는 트라이에 실패했고, 대한민국은 최정예 일리미네이터 13명을 잃었습니다. 그 뒤 로마이어가 몸을 숨기고 있는 지금, 저는 나라의 위기에 맞서 싸울 생각이었습니다."
환호성이 터졌다. 월드컵 대표팀이 골을 넣었을 때의 100배 이상의 환호성이었다.
"그러나!"
하지만 그것에 찬물을 끼얹듯, 천후는 말을 끊었다. 그리곤 고개를 한번 숙였다가, 노기 띤 음성을 냈다.
"대한민국 정부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드래곤 트라이가 있던 날, 연속 트라이를 결심하고 있던 그때. 제 가족들. 제 아이들에게 한국군의 기습이 가해졌습니다. 차량이 반파되고 식구들이 모두 다쳤으며, 저희 사무실이 있던 상가는 박격포가 떨어졌습니다. 이런 데 제가 어떻게 이 나라와 정부를 믿고서 행동할 수 있단 말입니까?
물론! 당연히 이것이 나라의 주인이신 5천만 국민 여러분들의 뜻이 아니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뽑은, 여러분들이 선택한 대표자들이 저를 경계하여 핍박하니 저로선 견뎌낼 수 없는 위협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가족들을 따로 두고 활동할 수 있겠습니까?"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낸 그는 잠시 입술을 꽉 깨물고 있다가, 숨을 고르며 말을 계속 했다.
"하지만…. 그래도 저는 서해안에 잠들어있는, 지금은 깨어나서 영종도에 내려선 괴물과 맞서기 위해서 저를 위협했던 정부와 다시 한 번 협상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정부 측에선 저희의 협상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저를 위협하고, 합당한 보수조차 제공하지 않겠다는 국가에서 제가 적을 계속 남기고 있을 이유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미국, 러시아, 중국 대사들이 찾아와 안전을 보장하겠다며 귀화를 종용하고 있습니다."
씁쓸하게 웃은 천후는 그러다, 눈을 정면으로 향하며 자신의 심장 위에 오른손을 가져갔다. 그 순간 카메라 앵글이 아주 조금 떨어지며, 그 모습을 비췄다.
"하지만. 저는 제 몸속에 흐르는 이 한국인의 피와 국민 여러분들을 지키고 싶다는 가슴속 열정이 아직도 식지 않았습니다. 정부가 제 조건을 받아들이고, 제 가족을 습격한 장본인들을 찾아내기만 한다면, 저는 언제든지 이 목숨을 걸고서 드래곤과 맞설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저 혼자서는 정부를 설득할 힘이 없는 듯합니다. 제 손을 떠나버린 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국민 여러분들께서 결정해주셨으면 합니다. 여러분들의 뜻에 따라 저는 드래곤과 싸우거나, 아니면 사흘 후. 이 나라를 떠나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영상은 끝났다.
국내 TV, 라디오, 인터넷 방송을 포함한 모든 매체에서 실시간으로 방송된 이것은….
세종시를 폭동의 도시로 바꿔놓았다.
<무능한 해명진 행정부는 당장 영천후 가족을 위협한 범인들을 공권력을 총동원해서라도 찾아라!>
<모든 요구조건을 수용해서라도 잡아라! 무슨 짓을 한 거냐!>
<민간인에게 군을 동원하다니! 지금은 21세기다!>
천만에 가까운 인파가 몰려들었다.
촛불시위가 등장한 후, 대한민국에서 과격시위는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가장 시위가 심했던 대학들에서조차 화염병 제조 방법의 전승이 끊겼다는 뒷소문이 돌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정부세종청사 앞에서는 분노로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국민들이 성난 야수 되어 폭력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전, 의경 병력이 우스워 보일 정도의 수. 그 원성에 행정부는 질렸다.
드래곤이 화성을 공격한 이후, 대한민국에 안전지대는 없다는 인식이 전 국민에게 확산해있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해결책을 가진 인간을 도발했다는 본인 발표는 기름에 불을 붙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일이 있을까 봐 언론통제를 하고 있었지만, 해당 녹화내용을 미리 보았던 방송사들은 단 한 곳도 빠지지 않고 요구했던 시간에 동시 방영을 해버렸다. 언론 통제고 나발이고 이건 언론사로서 절대 그냥 넘길 수 없는 정보였으니까.
방송 이후 내용을 가공, 왜곡, 곡해하는 방송은 있었을지언정, 그 원본을 틀지 않은 곳은 없었다.
이 인파를 타협 없이 어떻게든 하려면 군을 동원해야겠지만…. 민간인이 군에게 습격당했다는 소릴 듣고 분노해서 모인 군중에게 군을 투입한다? 그 수가 천만이 넘는데?
그 순간 내전 발발이다. 대한민국은 정말로. 완전한 의미로 끝장이 나리라.
결국 7시간 만에 항복 선언을 한 정부는 간신히. 정말 간신히 군중들을 해산시켰다. 그리고 다시 영천후의 자택 앞.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고자세를 보이던 정부 관료들은 현실 앞에서 전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 맨 앞에는 해명진 대통령이 있었다.
*
"제발! 제발 나서주게! 주겠네! 원하는 조건을 받아들일 테니 부디!"
천후는 마당에서 머리를 박고서 애원하는 이들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정치인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에는 아무런 감정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화가 났다.
자기 자신에게.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는데.'
국민 총의가 로마이어에게 모이고 있었으니까. 그가 모든 지지를 빨아들이고 있었으니까 그에게 결국은 기회를 주고 말았다.
그것이 번져서 에바가 다쳤다.
이 빌어먹을 정부란 놈들은 결국 로마이어에게 모든 것을 내줘서, 처음 토론회 때 페인트로 던졌던 사병조차 제공해, 연대 하나를 통째로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이다.
그것을 박찬휘가 정신지배로 통제, 자신들의 식솔을 공격한 것이고.
'좀 더 철저해야했어.'
천후는 희주의 말을 기억했다. 힘의 논리. 그것을 좀 더 철저하게 휘둘러야 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니. 최소한. 정말 최소한 유그드라실에서 마지막 로마이어와 대면했을 때.
'그때 그놈을 패 죽여서라도 내가 나섰어야 했는데.'
그 어설픔이. 그 애매하게 지키려 들었던 선이 불똥이 되어 가장 상처 입어서는 안 될 사람에게 튀었다.
페르소나를 쓰려면.
가면을 쓰려면 좀 더 철저하게. 정말로 괴물이 되어야 했는데….
화를 입고 나서야 그럴 생각이 들다니.
나는 정말 병신이다.
부서져라 이를 간 천후는 엎드린 채 벌벌 떨고 있는 이들을 내려보았다.
그렇게 진짜 가면을 덮은 그는…. 그 위에 분노를 덧댔다.
이놈들은 왜 자기들만 몰려와서 입으로만 나불대고 있지? 화가 났다.
어제 했던 말을 기억 못 하는 모양이니까.
"해명진 대통령님. 고개를 드시죠."
차게 흘러나온 목소리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천후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말했다.
"이상하네요.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하진 않잖아요. 거래를 했을 텐데요?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제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기억이 안 나시나요?"
"…!"
조용히 웃은 천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엎드려있는 국무총리의 뒤통수를 발로 밟았다. 쿠직 하고 코가 땅에 박히며 피 냄새가 났다.
"내 사람. 내 가족. 내 여자에게 손대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는 놈들이 있잖아…! 응?"
꾹. 꾸욱. 잘 관리해놓은 정원의 잔디 사이로 사람 얼굴이 비벼지며 파고들어 갔다. 국무총리가 몸을 뒤틀며 비명을 질러댔지만, 그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그것을 막지 못했다.
한참을 그렇게 밟아대던 천후는 발을 떼고는, 손으로 그의 얼굴을 치켜들어서 대통령 앞에 가져왔다.
흙과 피와 눈물이 범벅이 되어서, 이 이상 흉측해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짓이겨진 면상이 된 그의 옆에 얼굴을 마주 대며.
왕이 말했다.
"로마이어와 박찬휘를 잡아서 내 앞에 끌고 와. 거래는 거기서부터 시작이야. 사흘, 아니 이틀 주지. 그 이상 지나면 난 이 나라를 뜨겠어."
로마이어와 박찬휘의 목에 3천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렸다.
*
용이 내려앉은 섬 영종도. 그 인근의 도시는 사람들이 전부 빠져나간 폐허가 되었다. 전쟁이 일어나 사람들이 피난을 가면 도둑이 드는 법이지만, 드래곤 사태에는 그런 것도 없었다.
하지만 단 한 곳.
인천 부두 근처 호텔 룸 한 곳만은 달랐다.
"으응! 하아…!"
쯔걱. 쯔걱. 여자의 신음, 교합하는 소리, 침대가 삐걱대는 소리가 울렸다. 자체 발전기가 있는 것인지, 방 안에는 멀쩡하게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 조명 아래서 여자를 탐해간 금발의 남자는 올라타서 허리를 떨어대다가 떨어져나왔다.
"후우…."
방사 후의 흡연은 온몸의 기를 다 빨아먹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담배에 불을 붙인 그는 연기를 내뿜었다.
"생각보다 행동이 빠르군. 이렇게 움직일 수도 있었나?"
아니면 벤치마킹을 한 걸지도 모르지. 뭐가 됐던 기분 나쁘다. 로마이어 엔체스터는 그렇게 생각하며 침대 끝에 앉았다.
트라이 실패 이후, 그는 반신불수에 가까운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그는 유그드라실과 영천후의 관계를 생각해, 유그드라실이 아니라 민간 힐러에게 치료를 받았다.
속도도 느리고 가격도 더 비싸지만, 지금 상황에서 영천후의 시야 안에 자신이 노출되는 것은 죽여달라고 발가벗고 춤추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인천 쪽에 몸을 숨긴 건, 만에 하나 자신이 치료되는 사이에 천후가 상황을 지배하게 되더라도 드래곤에 인접한 곳일수록 찾아내기 힘들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그 생각은 맞아서, 영천후의 대국민 발표 후 미친 듯이 돌아다니기 시작한 군, 경찰도 인천 서부와 영종도 인근까지 뒤질 생각은 못 하고 있었다. 차량 등이 드래곤을 자극해서 내륙으로 날아오면 끝장이니까.
그렇게 인천 부두 인근 한 호텔을 점거한 그는 여자와 경호인력까지 끼고서 호의호식하고 있었다. 뒤에서 다시 한 번 바란다는 듯이 팔을 목에 걸쳐오는 기색에 로마이어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그때. 달칵하고 문이 열리며 방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차성준이었다.
"워. 노크는 해달라니까."
"…넌 참 태평도 하군."
나신의 여자를 보고 눈을 피한 차성준은 혀를 내둘렀다. 나라 전체가 그를 찾겠다고 혈안이 되어있는 와중에도 즐길 건 다 즐기고 살다니. 굉장하다면 굉장하다.
레이나드에겐 그의 거처를 모른다고 해두었지만, 성준은 아직도 그에게 붙어있었다. 아니 이제 정말 로마이어의 최중요인물이 되었달까?
한숨을 내쉬고 로마이어에게 다가간 성준은 그의 앞에 서서 말했다.
"어떻게든, 40명. 모았다."
그의 말에 로마이어가 쿠쿡하고 웃었다. 역시 수완이 괜찮다. 직접 나서기 힘든 상황에서 여기까지 해주다니.
담배 한 대를 끝까지 빨아 재낀 그는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상황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아직 멀었다. 나에게도 기회 한번이 더 있지."
로마이어 역시 고압적이었지만, 천후의 방식은 고압적인 정도가 아니다. 반발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아직 일리미네이터에 대한 지배력을 본격적으로 행사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더더욱….
"시일은?"
"빠를수록 좋겠지? 내일 밤으로 하지."
성준에게 대답한 로마이어는 껄껄 웃다가, 여성에게 입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좋아. 그럼…. 우리들의 마지막 게임을 시작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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