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밤에 받는 자문>
친란의 제안을 받아 올라간 방은 호텔 최상층의 VIP룸이었다. 한층 전부를 객실로 사용한 곳이었는데, 일반 손님들은 이 층까진 올라올 수도 없게 되어있었다.
제트 스파에 수영장, 킹사이즈 침대 등등을 보고서 천후는 살짝 탄성을 내면서 내부를 두루 살폈다.
친란은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빙긋이 웃다가, 그 미소를 좀 더 깊게 하며 목 아래쪽 단추 두 개를 풀었다.
그동안 객실 일주를 마친 천후는 숨을 내쉬며 거실의 소파에 몸을 묻었다. 한동안 쉬어서 몸이 많이 회복되긴 했지만, 역시 오래 돌아다니면 머리가 저릿저릿 아팠다.
그런 그의 곁에 친란이 다가왔다.
"술은 할 수 있겠나?"
그녀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건지 양주를 직접 늘여놓고 있었다. 이미 잔에 얼음까지 채워둔 걸 본 천후는 웃었다.
"거절을 못 하겠는데요?"
"후후. 그걸 노린 거지."
천후의 옆자리에 앉은 친란은 그의 잔에 로얄 샬루트를 채워주었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풀려있는 앞섶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이로 깊게 파인 가슴골에 눈이 간 천후는 잔으로 시선을 옮겼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그녀의 복장은 일반적인 치파오보다 훨씬 노출도가 심했다. 당장 천 조각을 살짝만 들어올리기만 해도 그녀의 아랫도리가 전부 훤히 드러나 버릴 것이다. 그런데 위쪽까지 드러나 있다니?
'아. 뭔 생각이야….'
분명 머리가 아팠는데, 그게 싹 사라지고 다른 생각이 가득해지는 것을 느낀 천후는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를 이런 눈으로 보는 건 실례다.
그렇게 마음을 바로 하고 건배를 나눈 천후는 잔을 입에 댔다. 하지만 그때. 친란이 그의 팔을 끌어안아 오며 물어왔다.
"그래. 셀레나는 어떻게 해주는 걸 좋아하지?"
"푸헙!"
피융 하고 자기도 모르게 같이 물었던 얼음 하나가 저쪽으로 날아갔다. 뜬금없는 질문에 천후는 켈록켈록 기침을 했다.
"갑자기 무슨…."
"후후. 일 이야기만 하는 건 지루하지 않나? 조금 가볍게 이야기할 것이 있었으면 싶었네."
"그래도 그런 건…."
"몇 안 되는 친구의 남자인걸. 관계가 원활한지 묻고 싶은 건 당연하지 않나? 그리고…. 남녀 사이에 이런 농은 흔한 게지."
천후는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보며 친란은 더더욱 미소를 짙게 하며 물었다.
"아니면 자네에게 나는 여자로 보이기엔 조금 부족한가?"
스윽하고 몸을 좀 더 깊이 가져오며, 턱 근처에 입술을 가져와 속삭이는 말에 천후는 몸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신체 가득히 느껴지는 모란 향이 다른 방향으로 그를 자극했다.
노출이 평소보다 심한 덕에 위에서 내려다보면 훤히 드러나 보이는 가슴골, 소파에 옆으로 눕듯이 하느라 고스란히 드러난 허벅지와 엉덩이선이 그의 시각에 파고들었다.
…이렇게 딱 붙은 상태에선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닌지라, 천후는 여기선 솔직히 말했다.
"그런 건…. 절대 아니죠. 친란은 아주 아름다워요. 남자라면 누구라도 동할 정도로."
그녀의 올려보는 눈을, 살짝 눈동자만 피하며 답한다. 그 대답에 친란은 입가에 큰 호선을 그렸다.
"흠. 그건 여자로선 기쁜 이야기군. 좀 더 듣고 싶은걸."
"아니. 음. 친란. 우린 지금 사업 이야기를 하러…."
"음? 아아. 그랬지. 흐음. 어떤 내용이었지?"
은근히 묻는 말이 마치 끈적끈적한 점액처럼 그의 귀에 달라붙었다. 천후는 상황이 뭔가 묘하게 돌아간다고 느끼면서도,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입에 담았다.
"일종의 작은 유그드라실을 만들어볼 생각이에요. 기존 일리미네이터 체제는…. 대응 속도가 느려요. 디제스터가 나타나서 사람들이 도보로 아무리 도망친다고 해도, 그건 한계가 있어요. 개인이 마련한 쉘터가 있다면 모를까. 보통 근처의 쉘터까지 닿는데도 시간이 걸리죠."
"흐음. 그럴 테지."
"그러니 가장 이상적인 건 일리미네이터들이 실시간으로 공간이동으로 대응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서브 퀘스트는 몰라도 공격성이 강한 파급부턴 필수라고 봐요."
"아아. 그런 이야기로군."
고개를 끄덕인 친란은 조금 생각하는 듯이 부채를 접었다 폈다 하다가…. 그의 허벅지 위에 머리를 올렸다. 그리고는 볼을 그 위에서 부벼댔다.
"라, 란! 전 진지하게…!"
"응. 나도 진지하게 듣고 있는 거네. 하지만 가만히 듣고만 있자니 심심해서 말이지…. 계속 말해보게."
그러면서 입술로 한 번 허벅지에 입을 가져다 댔다 뗐다. 취한 걸까? 방금 마신 술은 도수가 상당하니, 여성이라면 한 잔에 취해도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듣고 있는 그녀의 눈이 진지한지라, 천후는 으 하고 신음을 흘리며 계속 말할 수밖에 없었다.
"유그드라실의 큐브 엘리베이터로는 부족해요. 이번 사태로 절감했어요. 분명 빠르지만, 올라갔다 내려오는 시간도 걸리고…. 기업에서 지불하기엔 너무 큰돈을 요구하기도 하고요. 그러니 전 기업 선에서 텔레포트 주특기 마법사를 다수 고용해서 대응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싶어요. 그런 식으로 대한민국 전부에 대응하는 거죠."
"흐음흐음."
고개를 주억거린 친란은 손을 들어, 비어버린 술잔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더 줘도 되나 의심스럽지만, 안주면 안주는 대로 큰일일 것 같아 천후는 결국 잔을 채워주었다.
그녀는 그것을 단숨에 비워버리고는, 잔을 내려놓고 그의 허벅지를 양손으로 쓰다듬었다. 안쪽과 바깥쪽을 골고루….
허벅지 사이의 것이 더는 참지 못하고 치솟아 올랐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한참을 그렇게 훑어대다가 말했다.
"실현 가능성은 충분하네. 그냥 그것만이라면 자금 문제는 그리 크지 않아."
"그렇죠?”
"음. 하지만 몇 가지 걸림돌들이 있지.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돈보다 훨씬 갖추기 어려운 조건이기도 하고."
담담히 내뱉은 친란은 조는 고양이처럼 붙이고 있던 얼굴을 허벅지에서 때고는, 찬찬히 상체를 들어 올려 그와 마주 보며 말했다.
"예상되는 문제점은 세 가지. 첫째는 과연 이게 돈이 되는 시도인가? 둘째. 유그드라실이 그것을 좌시할 것인가? 그리고 셋째. 이게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인간들에게 이 이상의 마법 사용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이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군."
단숨에 천후가 고민하던 막연한 문제들을 언어로 바꿔낸 그녀는 이번엔 천천히 소파를 짚고 있는 그의 손을 어린애처럼 조몰락댔다.
"이 세 가지 외에 잡스러운 문제들이 있네만…. 그것들은 자네의 현 자산만으로도 충분히 치우고도 남는 문제지. 그러니 이것을 중점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하지."
"…그러죠."
술은 한잔밖에 마시지 않았을 텐데…. 머릿속이 혼탁하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그런 혼탁한 머릿속으로도 파고들어 왔다. 붉은 입술이 보였다.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목젖이 움직이는 걸 고스란히 눈앞에서 보고 있던 친란은 쿠쿡하고 웃었다.
"일단…. 이것에 과연 사업성이 있느냐의 문제다. 그리고 확언할 수 있는데, 단적으로 말해서. 없지는 않다.”
"없지는…않다?"
말이 이상하다. 없다도 아니고 없지는 않다라니? 하지만 친란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초기비용 문제가 아무래도 크지, 결국.”
“셀레나도 비슷한 소리를 하던데….”
“흠. 셀레나도 조금은 머리가 맑아졌나 보군. 자네가 생각하는 그 시스템은 완성되었을 때는 안정적인 수입을 뽑아낼 수 있을 거야. 아마 대한민국의 디제스터 퇴치비용은 아무리 낮게 잡아도 10배 이상은 오르겠지. 하지만 구축을 어떻게 하는가가 문제네. 자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형태론 아마 힘들 거야.”
“그래요?”
“음. 여기서 두 번째와 세 번째 문제가 겹치는데…. 결국 자네가 말하는 건 일리미네이터 외의 마법사를 추가로 양지로 끌어내겠다는 소리가 되네. 게다가 전국을 전부 커버하려면, 아주 고 랭크가 확보되지 않는 이상 수도 상당히 많을 수밖에 없을 테고.”
“음….”
“그렇게 되면 마법사의 인권을 담당하는 유그드라실은 무조건 튀어나오게 되어있지. 그리고 추가적으로 마법사가 양지에서 활동하게 되면 위협을 느끼는 이들이 있을 테고. 안보를 위한 텔레포트 시스템 구축이란 건 그 자체만 두고 보자면 훌륭하지만…. 그 외의 영역에서 규제가 풀리기 시작해서 그들이 자유롭게 활동하게 될 경우 유통업체가 어떻게 될 거라 생각하나?”
“아니…. 하지만 이건 분명히 용도를 한정해서….”
“그건 자네, 그리고 마법사들의 생각이고. 보통 사람들이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 이렇게 마법에 대한 규제가 하나하나씩 풀리면,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마법사가 인간 위에서 인간을 지배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네.”
“아…….”
“즉, 자네의 구상안은 인식론을 넘어서야하는 시도라는 거지. 자네가 생각했던 것을 다른 이들이 생각하지 않았던 게 아니야. 오히려 초보적인 구상이 아닌가? 하지만 지금껏 아무도 해내지 못했지. 저런 부분을 염려한 유그드라실이 제재와 설득을 해왔거든.”
천후는 얼굴을 굳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막연했던 예상보다 훨씬 어려운 이야기다. 단순히 효율적인 디제스터 퇴치라는 측면에서만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한번 풀어진 규제는 점점 헐거워지는 법이다. 디제스터 퇴치 활동을 위해 텔레포트가 공식화되면, 공식화된 김에 이거에도 써보자, 저거에도 써보자 하는 이야기가 안 나올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빗장이 풀리면 풀릴수록…. 초자연적인 힘인 마법은 인간이 몇 세기동안 쌓아 올려 간신히 이루어낸 노력을 헛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남들이 자동차와 비행기, 그에 들어가는 기름, 물자를 옮기는 데 필요한 인력을 들여서 간신히 이뤄내는 걸, 단 한 명의 마법사가 6초의 캐스팅으로 해내는 걸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그걸 보고 과연 단순히 ‘아. 마법사들은 대단해! 돈 많이 벌어서 부럽다’로 끝날까? 선천적으로 타고난 힘을 보고서? 그럴 리가.
이런 면들 때문에 유그드라실의 활동은 아무리 해도 진전이 없는 것이다. 마법사의 인권, 마법사의 사회진출을 아무리 주장한다 한들 누가 받아들인단 말인가?
시작지점이 다른 인간을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부러움과 질시를 느낀다. 그런데 그것이 아예…. 완전히 다른 영역이라면? 100m달리기를 하는데 조금 앞에서 뛰는 정도가 아니라 바이크를 타고서 출발하는 놈을 눈앞에서 보는 기분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불가능하겠군.’
천후는 아쉬워하면서도 구상을 접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친란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더니,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아마 유그드라실에서 자네에게는 허가를 내줄 것 같군.”
“네?”
놀라 묻는 목소리에 친란은 조용히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
생각했던 대로. 놀란 얼굴이 제법 귀엽다. 이런 표정이 보고 싶었지. 친란은 그의 단련된 몸을 손으로 훑어 내려가며 말했다.
“유그드라실이…. 바라지 않는 것은 아니거든. 마법사들의 사회진출을 실현하게 해줄 사람을. 오히려 늘 바라오고 있었지.”
“…….”
“강력한 통제력으로 마법사들의 힘이 무분별하게 사용되는걸 제한하면서도, 수익성은 창출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일반인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을. 그들은 늘 기다려왔네. 하지만 이게 얼마나 덧없는 이야기인가? 앞의 둘이 충족되면 마지막 하나는 집어 던지기 마련이거든.”
그리 말하던 친란은 손길을 멈췄다. 그녀의 손은 그의 심장 위에 멈춰있었다.
“그런데 여기 그런 사람이 있군. 이번에 막 드래곤을 퇴치해서…. 대한민국에 한정해서라면 민간인의 지지도 크게 얻어낼 수 있는 마법사가.”
“아…!”
천후의 탄성에 친란은 약간 눈을 가늘게 뜨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직 소리를 내기는 일러. 그거론 부족하네. 돈을 벌 방법은 실현 도중에라도 짜내면 돼. 유그드라실의 허락은 아마도 떨어질 거네. 자네에게 필요한 건 지지네. 절대적인 지지. 그리고 난…. 그것을 얻어내고 유지하는 방법을 가르쳐줄 수 있을 것 같군.”
“얼마를 드리면 되죠?”
거침없이 물어오는 말에 친란은 웃었다. 말이 통하는 사내다.
“자네의 뜻에 나도 동참하게 해주게.”
“그런 거로는―”
“아니 충분해. 짐작하고 있을 텐데?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 말에 천후는 잠시 입을 닫았다 열었다.
“어떻게 그렇게 자세하게 알고 있죠? 유그드라실이 바라는 바를?”
그의 물음에 친란은 배시시 웃었다. 그야말로 처음 보는. 아이와 같은 미소.
“내가 그렇게 해보려고 했다가 퇴짜를 맞았으니까.”
“…….”
“세세한 내용은 조금 달랐지만 말이지. 우리 회사에 왜 랭크 측정기가 있겠나?”
과연…. 그녀에게 있어서도 무모하다고 생각했기에 거절했지만, 그 뒤로 협조관계가 되었다는 건가? 친란은 가볍게 말했다.
“뭐 나는 자네의 그런 순수한 선의와는 다르게, 세계 경제의 리스크 관리라는 시각에서 접근한 거긴 하네만.”
“경제 리스크 관리요?”
“음. 디제스터는 상당히 짜증 나는 불확정요소지. 그래서 그것들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생각하다 보니 내린 결론이긴 하네만, 유그드라실의 뜻과 일치는 봤지. 다만…. 기업가가 얻을 수 있는 지지는 한정되어있거든. 아무리 해도 영웅님만은 못하지.”
“…….”
“돌아와서. 그러니까 자네가 걸으려는 길은 내가 한번 해보려다 접어두었던 길이라 이거네. 그리고 자네에게 진 빚도 있어. 그러니 두 팔 걷고 밀어주지.”
“고마워요, 란.”
천후가 감사를 표하려 하자, 친란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으며 그의 양 얼굴을 손으로 가볍게 쥐어 막았다.
“고마워할 것 없네. 어차피 나는 그 과정에서 챙길 건 다 챙길 거니까. 오히려 자네에겐 좀 더 각오가 필요하지.”
“각오?”
물어오는 말에, 친란은 고소하며 답했다.
“돈을 하늘에 뿌려댈 각오는 해뒀나?”
아. 여기까지 와서야 초기비용 이야기로 돌아온 건가? 천후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단순히 인프라 구축이 문제가 아니다. 이건 정말 천문학적인 돈을 때려 박는 과정이 되리라.
하지만 영천후는 웃으며 답했다.
“떨어지면 또 벌죠.”
“좋은 각오군.”
친란은 포부를 밝힌 그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동안 그녀의 손은 그의 심장에 머무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
스륵.
천천히, 그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명치를 지나 배꼽 아래로. 뱀 기어가듯이 내려오는 감각에 천후는 흠칫하고 놀랐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멈추지 않고 골반 아래를 지나, 이미 오래전부터 솟아올라 있던 산봉우리로 다가와 있었다.
옷 아래 뜨겁게 튀어 오른 그것 위에 양 손바닥을 올린 친란은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문에 대한 금전적인 대가는 필요 없지만, 개인적인 칭찬이나 상은 받고 싶은데…. 어떤가?”
불끈하고. 맥박 하며 튀어 오른 것이 그녀의 손에 가볍게 쥐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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