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119화 (119/324)

119화

<죽은 자는 말이 없더라도>

드래곤 슬레이어 영천후가 쾌차했다. 어느 정도 회복하여 병원을 나온 날. 신문기사 1면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그 신문을 돈 주고 사서 본 영천후의 표정은…. 이를 데 없이 찝찝했다.

"이것이 사생활 침해인가…."

언론을 너무 적극적으로 활용한 후폭풍이 이런 식으로 닥쳐버렸다. 어느새 그는 이 나라에서 가장 관심이 쏠리는 인간 중 하나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드래곤 슬레이어란 건 뭐야?"

"응? 용 잡았다고 붙여주던데."

"아…."

싫다. 이러지 마. 부끄러워. 저게 영어니까 그럴싸하게 들리지, 용잡이 영천후잖아. 뭐야 그게. 이제 클 만큼 컸잖아, 우리. 동글동글하게 말려버린 손을 힘겹게 펴낸 천후는 한숨을 쉬었다.

"너무 막 나갔구나, 내가…."

분노를 이겨내지 못하고 휘두른 대가가 여러 가지로 강력해서 버텨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셀레나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익숙해져야 할걸? 앞으론 더 심할 테니까?"

"아아…."

괴로운 한숨을 내쉰 천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걷었다. 그와 동시에 집 담벼락에 사다리를 기대놓고 대기 타고 있던 수많은 기자와 파파라치들이 카메라를 들이대 왔다.

"오, 쉣."

자기도 모르게 기겁하고 다시 커튼을 친 천후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병원에 좀 더 있을 걸 그랬나? 며칠 사이에 이렇게 대접이 달라지니 당황스러웠다.

그런 그의 앞에 희주가 차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라앉을 겁니다.”

“그래요?”

“네. …곧 치울 거니까요.”

사아아악. 뭔가 돋아나는 기분에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덜덜 떨었다. 같이 듣고 있던 셀레나 역시 침을 꼴깍 삼키며 찻잔을 든 손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저, 저기. 희주 씨. 괜찮아요. 조금 놀란 거뿐이니까 그렇게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는데…."

"…언론의 자유보다 삶의 자유가 더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흠! 으흠!"

푹푹! 옆에서 셀레나가 헛기침하면서 옆구리를 찔러오자 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삼갔다.

오늘따라 강경하신 게 타협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아무래도 희주 개인적으로 대단히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그런 거라면 천후도 말릴 생각은 없었다. 사실 사생활 하는데 저런 사람들이 따라다니면 짜증 나는 게 사실이기도 하고.

생각을 정리한 천후는 화제를 다른 것으로 돌렸다.

"그나저나 사무실이 날아가서 큰일이네요. 신규 건물은 아직 공사가 안 끝났잖아요."

트란제비야 사무실이 있던 상가 건물은 박찬휘의 습격 때 박격포를 맞고서 완전히 박살 나버렸다. 다행히 자리를 비웠기에 다행이었지만, 앞으로 일할 곳이 문제였다.

대부분은 자택에서 해결할 수 있었지만, 유그드라실 연동 시스템이 전혀 돌아가지 않는 게 문제였다.

사무실 주소를 자택으로 옮기고, 유그드라실 전용 위성 수신망을 마련하고 어쩌고 하다 보면 시일이 걸렸다.

원래 이전하려고 했던 곳은 아직 완공까진 시간이 많이 남았다. 훈련시설 등의 문제로 상당히 거창하게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셀레나가 말했다.

"그거 말인데. 란이 엔체스터 콜로니 합병할 생각 없냐던데?"

"응?"

천후가 되묻자, 셀레나가 좀 더 자세히 설명했다.

"뭐. 엔체스터 콜로니는 엔체스터 빌딩 안에 있는 자회사나 부서 같은 거잖아. 그러니까 그 시설들이랑 같이 인수해서 쓸 생각 없냐고 하더라고. 엔체스터 콜로니 쪽도 B랭크가 전부 날아가서 사실 좀 애매하거든, 지금."

"그럴…수 있나? 엔체스터인지 엄청 대기업이지 않아?"

세상일에 별 관심을 안 두는 영천후였지만, 엔체스터란 곳이 미국의 중공업과 건설업을 기반으로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대기업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에 지사를 차린 건 어디까지나 중국에선 활동하기 힘든 사망한 로마이어를 위한 것이었고.

어찌 되었든 해당 업계에서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대기업인데, 자신들의 이름을 지우고 빌딩 안에 파고드는 걸 받아들일까? 역으로 먹으려 들면 모를까? 그걸 걱정한 것이다.

하지만 셀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 엔체스터는 뭐랄까…. 가문 이름을 엄청 신경 쓰긴 하는데, 상업 뇌는 따로 두는 그런 기업이거든."

"무슨 뜻이냐?"

"지금 하는 일이 돈 안 돼 보이면 가문 명이 얽혀도 그냥 팔아버린다 이거지. 그리고 아시아시장 책임자가 란인데 어쩔 꺼야. 하라면 해야지."

가차 없다. 무섭다, 엔체스터. 혀를 내두른 천후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일단…. 임시로 사무실만 사용하는 걸로 하자고. 우리 빌딩도 올라가고 있는데 몇 층이나 빼 쓰는 건 좀 아닌 거 같아."

"응, 뭐. 말해둘게."

구체적인 절차를 떠올린 셀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담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띠리리. 띠리리리.

"……."

대문 벨 소리를 들은 희주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천후는 뒷모습만 보고서도 그녀의 기분이 상당히 나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발걸음이 약간 느리고, 인터폰을 누르러 가기까지 두 번이나 머리를 쓸어 넘기는 것을 보고 확신했다.

'아. 저거 때문에 화가 난 거구나.'

천후의 퇴원 이후. 사진 촬영뿐 아니라 인터뷰 한 번 해달라고 수많은 기자들이 쿨다운도 없이 찾아와 벨을 눌러대고 있었다. 한사코 거절하고 있었지만, 그때마다 사람을 바꿔서 계속 찾아왔다.

희주는 인내심이 아주, 엄청나게 강한 여자다.

천후한테는.

하지만 다른 사람에겐 어떨까?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 천후는 직접 일어나 인터폰으로 다가갔다.

"희주 씨 제가-"

"….인터뷰는 사절하겠습니다."

그가 다가오는 것을 느낀 희주는 빠르게 응답 버튼을 누르고 그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직접 본 그녀의 옆모습에선 더더욱 불쾌감을 읽을 수 있었다.

'아. 일어나는 게 아니었어!'

가암히 주인님이 신경 쓰이게 하다니! 어째선지 천후는 가만히 서 있는 그녀에게서 설원 속에 머리칼을 나부끼고 있는 차가운 설녀의 환영을 봤다.

하지만 그때. 인터폰 화면에서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 비쳤다.

희주는 인터뷰 요청이 너무 많아서 아예 밖에서 들려오는 마이크 음성을 꺼놨었는데, 그들은 종이에 글자를 써서 카메라에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내용을 읽은 희주의 몸에서 노기가 흩어졌다. 그리곤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천후를 올려보며 물었다.

"손님들께서 오신 것 같습니다. 들일까요?"

이 정신없는 와중에 그녀가 '손님'이라고 단언하는 인물들이다. 천후는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

찾아온 것은 C랭크 일리미네이터들이었다. 레이나드와 정태원, 그리고 이전 '쿼드라 콩가'때 천후와 안면을 텄었던 C랭크들.

6명 정도 되는 그들이 앉을 자리를 마련해준 희주는 다과를 내놓고는 셀레나와 함께 조용히 천후의 뒤편으로 물러났다.

천후는 말없이 묵례로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쩐 일들로 찾아오셨어요? 이렇게 여럿이서."

천후가 C랭크들에게 그렇게 벽을 치고 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그에게 장벽을 느꼈다. 특히 로마이어 건으로 대립을 시작하고, 드래곤 레이드를 성공한 이후로 그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인간이 되었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천후에게 공격대장 제안을 받은 레이나드는 그에게 쉽게 접근하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그를 상당히 조심스럽게 대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천후는 이들이 한꺼번에 찾아온 것에 반색할 수밖에 없었다. 뭔가 큰일이 났거나, 아니면 부탁을 하기 위해서 온 거라고 생각했기에.

그들의 대답은 후자였다.

"사실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염치불구하고 이렇게 몰려왔네."

최초로 말문을 연 것은 레이나드였다. 하지만 그는 곧 다시 입을 다물고, 태원과 다른 이들에게 턱짓을 했다.

그것을 보고 천후는 대충 눈치고 레이나드가 이들의 청탁을 받고서 왔다는 것을 알았다.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아무래도 C랭크들은 지레짐작으로 천후가 레이나드를 C랭크들과 대화를 나눌 창구로 임명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천후는 잠시 이걸 수정시켜야 하나 고민했지만, 곧 속으로 마음을 접었다.

여기서 자신이 '편하게 한 분씩 오셔도 돼요 하하하~'해봐야 들어먹을 리가 없으니까. 오히려 이게 그들에게 편한 방식이라면, 그걸 받아들이는 게 도리이리라.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눈치를 보던 그들 중 가장 중앙에 있던 정태원이 총대를 메기로 했는지 입을 열었다.

"영천후 씨. 이번 드래곤 레이드로 '저희' 동료들이 많이 세상을 떴습니다."

"네. '우리' 동료들이 열일곱 분이나 세상을 뜨셨죠. 안타까운 일입니다."

천후가 진중하게 대답하자, 태원과 다른 같이 온 이들의 안색이 약간 밝아졌다.

"정확한 숫자를 기억하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온몸을 바쳐서 나라를 지키신 분들입니다. 같은 일리미네이터라면 반드시 기억해야지요."

동업자들이 거대한 위협에 맞서 싸우다가 죽었다. 온 국민이 쉽게 잊는다 해도, 동업자들만은 쉽게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런 그의 뜻이 전해졌는지, 태원은 다른 이들과 잠시 눈을 맞추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사실…. 그들에 대한 이야기로 찾아왔습니다."

아아. 그런 건가. 고개를 끄덕인 천후는 셀레나를 바라보았다.

"셀레나. 그분들 장례식이 어떻게 치러졌지? 보상금은?"

레이드 성공 이후로 병원에서 열흘 넘게 뻗어있던 천후는 그들의 삼일장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 말에 태원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로마이어의 예치금을 분배하고 나서 그 중 일정 금액으로 장례를 크게 치르고, 유족들에게 보상금도 부족하지 않게 주어졌습니다. 저희가 바라는 것은 금전적인 부분이 아닙니다."

드래곤 레이드 이후. 로마이어가 지금까지 모아두었던 예치금은 드래곤 사태 이전 비율을 기준으로 전 일리미네이터들에게 분배되었다.

그 과정을 주도한 것은 차성준이었는데, 처음에는 로마이어 밑에서 잠시 있었던 것 때문에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지만, 정말로 칼같이 나눠 분배함으로써 어느 정도 입지를 다시 회복했다.

그때 그 예치금으로 사망자에 대한 보상을 크게 해주자는 의견이 나왔고, 그것은 만장일치로 받아들여졌다.

여기에는 그들 덕분에 살아남았다는 생각, 다음에 이런 일이 있더라도 이 정도의 보상액이 나오게끔 미리 조치를 해두자는 생각, 예치금 자체가 오랜 기간 묵혔다 나오는 돈인 만큼 보너스처럼 느껴졌다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 기반엔 선의가 작용하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었다.

"그럼 어떤 도움이 필요하신 거죠?"

하지만 이러면 딱히 도와줄 부분이 별로 없지 않나? 천후가 조심스레 묻자, 정태원은 조용히 양손을 겹쳐 꾹 하고 주먹을 쥐었다.

"저희가 원하는 것은…. 명예입니다. 그분들이 국가적인 위협에 맞서다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저희 일리미네이터가, 마법사가. 국민들과 같은 유전자를 가진 인간이 그렇게 몸을 바쳐 죽어갔다는 것을."

잠시 감정이 격해져 두서없이 말을 꺼내던 정태원은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진정하고선 말했다.

"영천후 씨. 부디…. 이번에 죽어간 분들이 국가유공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습니까?"

"……."

천후의 표정이 굳었다. 태원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역시 힘든 일이었나? 하지만 그들에게 기댈 곳은 그뿐이었다. 그렇기에 태원은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번 드래곤 사태를 사고, 그러니까 천재지변의 연장선상으로 처리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우리' 일리미네이터 뿐 아니라, 디제스터의 반격을 받아 죽어간 군인들조차 전사가 아니라 사고사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적국과 싸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래서…."

"아니. 됐습니다. 거기까지만 말씀하셔도. 알아들었어요."

태원의 말을 중간에 끊은 천후는 잠시 이마를 괴고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라보던 일리미네이터들의 표정이 점차로 어두워졌다. 그에게도 무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 직후. 천후의 입에선 전혀 생각 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당연히 했을 거라고 생각해서 좀 놀랐던 거예요. 그래요? 국가유공자 처리가 안 됐단 말이죠?"

눈매를 날카롭게 바꾼 천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주 씨. 나갈 채비를 해주세요."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쿠폰, 코멘트 모두 감사드려요.

8월도 이제 마지막이네요.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9월에도 꾸준히 써나가겠습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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