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왜요? 괜찮지 않으면?"
"으, 응?"
"괜찮지 않으면 선배가 위로해줄래요?"
조용히 얼굴을 가져와 귓가에 속삭이는 말에 그녀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걸 보고 피식 웃은 천후는 그녀의 귓불을 약하게 꼬집었다.
"농담이야, 선배. 너무 이런 말에 하나하나 진지해지지 마요."
"윽!"
발끈한 강호가 주먹으로 그의 가슴팍을 퍽퍽 때렸다. 진심으로 때리는 건 아니라지만 그래도 조금 아파서 천후는 켁켁 하고 기침을 하며 웃었다.
"이제 좀 돌아오셨네."
"여, 연장자를 놀리지 마라! 나는!"
"알아요. 미안해. 잘못했어."
꼬집었던 귓불을 엄지와 검지로 문질러대던 천후는 그대로 손을 벌려 그녀의 귀를 덮었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얼굴 반을 가렸다.
텐트에서 속삭임이 울렸다.
"솔직히 그리 괜찮지는 않아. 힘드네요. 생각했던 거보다 훨씬."
"……."
"사람들이 나를 많이 기억하고 있더라. 우리나라 사람들도 많이 잊어버렸던데. 이것저것 말할 땐 솔직히 좀 힘들었어요."
"……."
"언젠가 한번 와보고자 했었어. 그런데…. 내가 좀 많이 늦었네."
"천후야."
"많이 늦어버렸어…. 어른이 돼버렸잖아. 울 수가 없어."
그러니 울음을 웃음으로 대신했다.
"슬퍼. 슬프지 않은 게 아니야. 하지만 스물이 넘어버렸어. 과거 일로 훌쩍대기엔 내가 너무 커버렸어."
기억한다.
그 날의 일을.
오늘 밤 잠들면 또다시 마주하고 말리라.
그것을 마주하는 것은 괴롭다. 하지만…. 어느 정도 극복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반복되는 파노라마. 반복되는 가상현실. 반복되는 지옥의 참상은 이제 일상이 되어 그의 가슴에 머문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감정이란 것이 날아가 버렸던 어린 시절을 지나, 인간성이 점점 갖춰지면 갖춰질수록.
거기에서 받은 감상과 감정은 쌓여 그의 마음에 응어리져 뭉쳐져 갔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그렇기에 더더욱.
"쉽게 울 순 없잖아. 부모님 앞인걸."
꿈속의 기억에서밖에 본 적이 없는 부모님이지만 그들 앞인걸.
이제는 장성했다. 누구 앞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자식이 되었다고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다.
입 밖으론 내지 못했지만.
"아픈 건 맞아. 그렇지만 울어버리면 난 그날 떠난 사람들 볼 면목이 없어. 난 여기에선 울면 안 돼.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응…."
"그러니까…."
조명을 위해 가져온 랜턴조차 켜지지 않아, 텐트 안은 어둡다. 하지만 천후는 정확히 그녀의 눈가 아래를 훑었다. 문명의 빛은 없었지만, 악시스 문디가 발하는 빛을 반사하는 것이 보였다. 손가락에는 물기가 묻어있었다.
천후는 자상히 웃었다.
"울지 마요, 선배. 왜 선배가 우는 거야."
"아…. 으…!"
흠칫.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만져본 강호는 당황해서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울고 있었단 것조차 몰랐던 모양이었다.
착한 여자.
눈물 흘리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매료되어버릴 만큼.
"흐, 흠! 오해하지 마라! 난 그렇게 눈물이 헤픈 사람이 아니다!"
"아닌 거 같은데. 봐요. 저번에도."
"그땐…! 그럴만했잖느냐!"
부끄러운지 역으로 성을 낸 강호는 휘릭하고 몸을 반대로 돌려버렸다. 너무 놀렸다. 웃고 있던 천후는 그러다 눈매를 천천히 누그러뜨렸다. 그리곤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 감각에 강호의 어깨가 떨렸다. 자신에게만 들리는 심장 소리가 무한대로 커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너무 빨라져서 심장이 터지는 듯했다.
그의 손길은 따갑다. 전체가 단련되어 굳은살투성이인 그 손은 농담으로라도 부드럽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왤까. 그 단단함과 따듯함에 마음이 편해졌다.
천천히 눈이 감겼다.
'…….'
이게 몹쓸 짓인 것은 안다. 천후의 친밀감을 이용해, 이렇게 접촉이 늘어가는 것은…. 이미 여자가 있는 그를 타락시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가슴 아픔과 가슴 두근거림을 함께 가진 채. 그녀는 손길의 따듯함에 눈을 감았다.
*
대참사로부터 10년이 지난날의 밤.
악시스 문디는 여느 때와 같이 은은히 빛을 내고 있었다. 그때마다 그 거대한 몸체에선 호롱불이나 도깨비불 같은 흐릿한 불길들이 물방울처럼 튀어나와 그 주변을 돌다 다시 빛으로 화해 악시스 문디로 돌아가곤 했다.
줄기 부분뿐 아니라 뿌리 부분에도 튀어나오곤 하는 이 불길들은 마치 허상처럼 사람이 닿아도 아무런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그나마 바람이 조금 부는 것 정도일까? 바로 그렇기에 몇몇 사람들은 이것이 정말로 혼불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 날 죽어간 이들이 악시스 문디에 속박되어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그 추측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했다.
<별의 적자가 왔군.>
그날. 악시스 문디 주변을 도는 불길들은 이례적으로 한 자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방황하며 맴도는 전체의 양에 비하면 한 줌도 안 되는 적은 수에 지나지 않아, 아무도 그것을 느끼지 못했지만.
<흐흐흐. 겁도 없군. 최완이 허락을 했단 말인가? 우리들의 존재를 알고 있을 텐데?>
모여있는 불길들의 크기가 커졌다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자신들끼리 입이 아닌, 염으로 대화를 나누며.
이 불길들은 살아있었다.
영적으로.
다른 불길들까지 그런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여기 한 자리를 맴돌고 있는 다섯 개의 도깨비불들만은 분명히 그랬다.
그것 중 하나가 말했다.
<그놈 옆에 진리구현자가 붙어있더군.>
<아. 그걸 믿고 보낸 거로군.>
키이이이이…. 혼불이 일렁이며 야밤의 황무지에 귀곡성을 흘렸다. 최소한의 소음조차 나지 않는 황무지에선 그 작은 소리조차 지평선 끝까지 널리 퍼져나갔다.
<멍청한. 잠들면 아무런 의미가 없거늘. 무슨 생각으로 이 땅에 그를 보냈지?>
<흐흐. 아무래도 좋아. 우리에게는 천금 같은 기회일 뿐이지.>
귀곡성을 낸 불길이 그 크기를 키우더니 너울거리기 시작했다. 그 기세에 다른 것들이 그 아래로 모였다.
<정말로 할 셈인가?>
<여부가 있는가? 자넨 괴물이 사람 거죽을 쓰고서 돌아다니는 것이 증오스럽지도 않은가?>
<허나…. 놈에겐 보험이 많네. 진리구현자가 깨어날 수도 있겠고, 뭣보다 그 남자가 무슨 조치를 해놨을지.>
불길 중 하나가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처럼 촛불보다도 작아졌다.
<크크크. 그 남자의 힘은 무한하지만, 그 배려가 모든 것에 닿고 있는 것은 아니야. 그렇게까지 상냥한 자가 아니지. 여지는 충분히 있네. 아니면…. 오늘 이 기회를 놓칠 텐가? 10년 만이네. 다음엔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몰라.>
<…….>
일렁. 작아졌던 혼불이 흔들리며 커졌다.
<그래. 그래야지. 어차피 우리는 이 빌어먹을 감옥에 속박당한 몸. 육신조차 잃었거늘 무엇을 고민한단 말인가?>
<그렇지. 우리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던 것들을 다음 녀석들에게 전부 넘겼으니….>
<마지막으로는 의미 있게 사라지고 싶군.>
<이걸로 그들이 어쩔 수 없이 나설 수밖에 없게만 한다면.>
스스스스…. 혼불들이 하나하나 기이한 소리를 내며 한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그 주변으로 지금까지 자유롭게 노닐던 다른 불길들조차 하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들의 주변은 대낮처럼 밝아져 있었다.
이상 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낀 캠프의 유족들이 무슨 일인가 확인하기 위해 하나씩 밖으로 나와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그들이 표적으로 삼은 이도 있었다.
가장 큰 혼불이 염을 외쳤다.
<모든 것은 마법사를 위해서.>
태양처럼 빛나던 것이 흩어져 한곳으로 달려들었다.
*
시작은 한 덩어리의 혼불이었다. 그것이 모이고 꼬여, 이윽고 거대해지며 그 움직임에 따라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갔다.
그것이 지나가는 길에 반투명의 강이 만들어지며 분수대의 물이 떨어지듯 온도 없는 불길들이 커튼처럼 흐드러졌다.
마치 오로라와 같이 녹아드는 그 광경에 캠프 밖에 나와 있던 유족들은 입을 벌리고 말을 잃었다.
별이 창조해낸 거대한 존재, 악시스 문디는 그들에게 있어 경외의 대상이자, 증오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 거대함에 위압 당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양분 삼아 거대해졌는가를 생각해보면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광경은…. 보고 있던 모두가 무심코 아름답다고 생각해버렸다. 마치 악시스 문디에 묶인 영혼들이 유가족들의 이미 오래전에 찢어져 아물 줄 모르는 가슴의, 마음속 상처를 어루만져주기 위한 공연을 벌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아. 우리를 사랑하여 이곳에 모인 이들이여.
부디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서 한순간이라도 편하게 잠들어주오.
그것이 우리들의 비원. 우리들의 염일지니.
보고 있던 모든 이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어떤 사람은 엉엉 울며 비석을 끌어안기도 했다.
하지만 소란에 밖에 나와 본 천후의 감상은 달랐다.
"저게 뭐야?"
악시스 문디. 피를 먹는 세계수는 물리적으로 존재하기 힘든 생명체다. 성층권까지 솟은 거대나무란 판타지로 받아들이자면 멋진 것이었지만, 현실적인 측면에선 이 얼마나 허튼소리인가?
수많은 SF가 궤도 엘리베이터를 소재를 다루지만, 그 기초가 되는 토대조차 제대로 쌓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정지궤도는커녕 유그드라실이나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4만 피트 높이까지 건축물을 올린다는 것 자체가 아직 상상의 영역인 것이다.
만약 현시점에서 시도한다면 인류의 총아를 모아서 도전해야 하는 문명 전체의 과제가 될 것이다. 그것도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과제.
그런데 이 악시스 문디는 생명체라는 탈을 쓰고서 문명의 정점조차 탐하지 못한 높이까지 뻔뻔하게 자라있다. 게다가 앞으로 더 크게 자랄 거라고 예상되고 있었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악시스 문디는 그런 의미에서 초자연적 생명체의 정점에 있는 무언가에 가까웠다. 마치…. 디제스터처럼.
바로 그 세계수에서 이상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눈으로 보기엔 아름다운, 사람들을 현혹할만한 패턴을 그리고 있었지만 천후는 그것에서 괴기와 공포를 느꼈다.
"한정 봉인 해제."
그의 몸이 흑색 불길로 뒤덮였다. 악시스 문디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천후는 그저 몇 번의 한정봉인 해제, A랭크 강화주문을 걸었던 때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을 써먹어 보고자 한 것이다.
그는 A랭크 주문을 둘렀을 경우, 평소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자면 투명화한 채 되살아난 드래곤이라거나, 그 어떤 수단으로도 탐지되지 않는다는 저 성층권 너머의 유그드라실이라거나.
혹은 이렇게. 수백 수천의
<너의 몸을 내놔라!>
혼령이라거나.
"!"
직시한 그 순간, 그것만으로도 의식이 날아갈 뻔했다. 악시스 문디 주변을 아름답게 날아다니는 수많은 불길들. 그것 모두가 혼령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 빛의 강을. 분수를. 오로라를 만들고 있는 주체는 말 그대로 혼령의 집단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아름다운 오로라는 천후에겐 허공에서 떠오르는 수천 개의 데드 마스크로 보였다.
하나하나가 피눈물을 흘리며, 그때마다 입이 찢어지고 째졌다가 흩어지고, 다시 형태를 갖추는 그 반복에 천후는 입을 다물었다. 바로 그때. 한참 허공을 떠돌던 그 무리가 방향을 바꿔 자신에게 쇄도해오는 것이 보였다.
천후는 주먹을 굳게 틀어쥐었다. 단순히 영혼을 보는 영안을 뜨는 것뿐이라면 좀 더 낮은 랭크의 주문을 사용해도 되지만, 굳이 변신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대항해야 한다. 압도적으로!
하지만 그때.
"아니?"
천후는 주먹을 내뻗으려는 순간, 그의 몸을 변형시키던 강화주문이 꺼져가는 것을 느꼈다. 이강호의 힘인가 싶었지만, 천후는 곧 이것이 악시스 문디의 또 다른 특성, 데드 매직 존의 영향임을 깨달았다.
뭄바이 반도 내에선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써봐야 금세 이렇게 흩어지는 것이다. 그런 주제에 사령이 맴도는 건 허가하고 있다니!
"으,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혼령의 군세가 그의 몸을 덮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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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가지 말라는덴 다 이유가 있지.
선작, 추천, 쿠폰,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공중요새 유그드라실은 하나예요.
기관으로서의 유그드라실은 성층권에 있는 요새가 본부고, 작은 지부들이 활동하기 용이한 국가들에 조금씩 있습니다. 그런 지부들은 저렇게 날아다니는 게 아니라 그냥 일반 건물들에 있고요. 자세한 건 좀 더 이후에 본문에서 나올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