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무상고독의 검귀검신>
“저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최강의 검사가 되고 싶습니다.”
7살. 어린 마음에 떨어지는 별똥별에 빌었던 소원. 그 소원을 들은 것은 별똥별만이 아니었다.
“네가 평생을 남자로 살겠다고 맹세한다면, 너를 최강으로 만들어주마.”
일평생을 무에 바치고, 어느샌가 그 눈에서 광기가 흐르게 된 노인. 조부가 뻗어온 고목 같은 손길.
조부는 가문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를 따르면 최강이 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소녀는 별 님께서 소원을 이뤄준 것이라고 믿고, 그 손을 잡았다.
그 손을 잡음으로써 많은 것을 잃었음을, 그녀는 16년이 지난 스물셋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
스르륵…. 옷감이 몸 위를 미끄러져 내리는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흘러내리는 흰색의 러닝셔츠. 가리는 것이 없어진 그곳에 희고 유려한 몸이 드러난다.
특히 셔츠 아래에 숨어있던 몸의 일부는 더욱 희다. 잘 여문 과실 같이 탐스러운 그것을 조심스레 팔로 받쳐 든 여성은 앞쪽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작게 한숨 쉬었다.
“또…. 커져 버렸나?”
여성으로서 당당해도 좋을 몸을 타고났으면서 왜 그렇게 한숨짓는가? 하지만 그녀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무武. 그중에서도 검에 일생을 바치기로 아주 예전에 결정을 내린 몸이었기 때문에.
짤칵. 작은 금속음과 함께 그녀의 손에 검이 들린다. 작은 빛밖에 새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 안에서도 싸늘한 푸른빛을 낸 그 검신이 천천히 그 가슴 아래까지 올라온다. 시린 철의 감촉에 분홍색 정점이 살짝 경련한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검의 날카로움에 대한 공포보다는 흰 백발에 도포를 입은 노인의 환영이 떠올랐다. 그 노인은 봉두난발 한 머리칼 사이에서 광기에 가까운 인광을 흘리며 입에서 쇳소리를 긁어냈다.
‘잘라라!’
잘라라. 잘라라. 그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진다. 그리고 그녀는 그 뒤의 말 역시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자르면 마지막 비전을 전수해주겠다. 이전부터 거짓만은 입에 담지 않던 조부의 그 말. 그 한마디를, 그녀가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얼마 전까지의 그녀라면 더 높은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 망설임 하나 없이 이 무겁고 거추장스럽기만 한 여성의 상징을 베어냈을 것이다.
허나….
그녀의 눈앞에 과거라면 절대 지워지지 않을 조부의 환영이 지워지고, 대신한 한 남자의 환영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가요.’
‘자, 잠깐!’
‘잠깐이고 뭐고가 어디 있어! 가자고!’
‘아…!’
조부의 속박에서 자신을 끌어내 준 그 남자의 환영이.
쿵. 쿵.
가슴 어딘가가 세차게 뛰었다. 그 두근거림 때문에 그녀는 가슴을 베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 마음의 정체는 알고 있다.
이전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한때는 그것을 부정하고자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속삭임을 들었다.
검은 속삭임. 그녀의 가치관을 부수고 유혹하는 속삭임을. 그 내용에 마음이 가버린다.
“…….”
방안은 어두웠다. 그 어둠에 기대어 그녀는 가만히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여자가 있었다.
얼굴에는 어느새 홍조가 맺혀있었다.
이전이었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자신을 여자라고 생각하다니. 하지만 지금 와선 다행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가만히 양손으로 자신의 흉하게 튀어나온 몸을 더듬어보았다.
문득. 그때의 생각이 났다. 그가 마구 탐하던 때의. 강호는 자신의 손이 조금은 그의 손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파르르….
낮은 떨림과 함께 그 끄트머리가 아주 조금 솟아올랐다. 얼굴이 조금 더 붉어졌다. 부끄러운 일이다. 아무리…. 아무리 그녀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한들….
하염없이 거울을 바라보던 강호는 회한이 담긴 음정을 조용히 내었다.
“천후야.”
무에 대한 향상심. 자신에 대한 정체성. 그리고 스스로는 주체하기 힘든 감정까지.
그 모든 것을 끌어안고서 자기도 모르게 뱉어낸 한마디에, 그녀의 분신이자 누이인 난정蘭情은 안쓰러움을 참지 못하고 구슬피 그 몸을 떨었다.
*
…꾸벅.
“아! 오빠 또 졸아!”
“일어나아!”
“아. 어어.”
매일 하는 훈련을 마치고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던 천후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흠칫하고 눈을 떴다. 고개를 아래로 내려다보니, 그의 양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아이들이 뿔이 났는지 볼을 부풀리고 있었다.
“오빠. 이상해요!”
“요즘 맨날 졸아!”
“그러게다.”
자신도 왜 그런지 알 수가 없어서 천후는 볼을 긁적였다.
뭄바이에서 되돌아온 이후. 그는 잠이 늘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의식을 잃고 잠들어버리곤 했다. 지금처럼 소파에 앉아있을 땐 괜찮지만, 어디 돌아다니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서 있다가 잠들면 그대로 고꾸라지곤 했는데, 그의 몸이 강건했기에 망정이지 보통 사람이었다면 크게 다쳤으리라.
이 때문에 천후는 요즈음 집 밖에 나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음. 너희도 어디 놀러 가고 싶을 텐데 이래서야.”
“응? 놀러…?”
“…별루.”
천후가 미안한 기색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둘은 서로를 마주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꺼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시끄러워서 무…아니 싫어요.”
“오빠네 집에서 노는 게 더 좋아.”
“…….”
사건이 있은 지 한 달가량이 지난 지금, 에바의 상태는 상당히 호전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주방에서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 정도에도 민감하게 반응했지만, 지금은 일상생활에서 나는 큰 소리 정도는 받아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아직 밖을 돌아다니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겼다. 특히 차에 타는 것은 극도로 꺼렸다. 이건 에바뿐 아니라 이브도 마찬가지여서, 정말 꼭 필요할 때는 그 앞에서 굉장히 오래 심호흡을 하는 등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빌어먹을.’
천후는 화가 났다. 활발하던 아이들이 아닌가? 방법만 있다면 금액 따위 아무래도 좋으니 치료하고 싶었지만, 마음의 상처란 카운슬링이나 사후조치만으로 완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자. 이번엔 오빠랑 나랑이야.”
“어. 응.”
그런 이유로 천후는 아이들이 놀 거리를 제공해주기 위해 집에 거치형 게임기를 몇 개 사들였다. 둘 다 가사에도 흥미가 있고, 집 안에 언니들도 많아 이야기만으로도 시간을 잘 보내긴 했지만, 그래도 놀 거리가 있어야 한단 생각에서였다.
둘은 처음엔 큰 흥미는 보이지 않았지만, 한 가지 게임은 하고 싶어 했는데 뜻밖에 자동차 게임이었다. 작은 캐릭터들이 카트를 타고 레이스를 하는 게임이었는데, 특수능력이나 아이템을 쓰면서 상대의 주행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아마도 이런 요소 때문에 그냥 완전히 게임으로 받아들여서 즐길 수 있는 듯했다. 그나마 다행이랄까?
둘은 이걸로 서로 내기를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즐겼는데, 오늘은 천후까지 끼게 되었다.
“전 공주님 할 거예요.”
“그래? 그럼 난 콧수염.”
이 게임에 콧수염 난 캐릭터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어차피 몇 번 안 해봐서 어느 게 어떤 캐릭터인지 잘 구분도 못 했다. 대충 콧수염 난 것들 중 제일 사나워 보이는 놈을 고른 천후는 스틱을 들고서 화면을 바라보았다.
흥분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난 에바가 히히히 하면서 허리를 앞으로 굽히고 있는 게 꽤 몰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러고 있을 땐 참 좋은데.
“안 봐줄 거예요!”
“흐. 그래.”
호승심 묻어나는 발언에 천후도 살짝 몸을 앞으로 숙이며 진지하게 스틱을 만졌다.
요 녀석들. 안 봐주면 못 이길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이런 게임은 내가 마음만 먹으면!
“…….”
달칵. 풀썩.
“아! 오빠 또 자!”
아이! 일어나아아!“
의욕을 발휘하며 숙이고 있던 자세 그대로 고개를 늘어뜨린 천후는 아이들이 흔들어대는데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던 스틱은 땅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
“괜찮은 거냐? 또 잠들어버렸는데.”
식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강호는 걱정스레 희주에게 물었다. 희주는 천천히 차를 마시면서 답했다.
“괜찮지는 않습니다만. 방법이 없습니다.”
“…….”
“유그드라실에서도 왜 그런지 전혀 모른다더군요.”
뭄바이에서 있었던 일을 들은 희주는 그에게 진료를 권했고, 천후 역시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았기에 두말없이 그 의견에 따랐다. 하지만 유그드라실의 진료론 해결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마법적으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정신과 주치의인 고인규에게 경과를 지켜보고 조심하란 말이나 들은 게 전부였다.
증상이 나타난 계기가 워낙 분명했기 때문에, 강호는 죄책감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미, 미안하다. 내가 같이 갔었는데도.”
“…….”
희주는 그 말에 침묵하며 차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소리 없이, 가느다란 목이 단 한 번 움직임을 보였다. 그 뒤. 희주가 입을 열었다.
“이미 일어난 일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시지요.”
“하지만….”
강호가 반론하려 하자 희주는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흠칫한 강호는 입을 다물고 살짝 뒤로 물러났다. 희주의 눈꺼풀이 열렸다 닫혔다. 유리알 같은 그녀의 눈동자엔 강호의 모습이 가득 들어있었다.
한없이 움츠러들어 있는 여자가 보였다.
“…좋은 얼굴입니다.”
“으?!”
강호는 단박에 페이스를 잃었다. 그녀의 얼굴 전체에 번져있던 심각한 걱정이 희주에게 고스란히 읽힌 것이다. 그것이 어떤 감정에서 기인하고 있는지야 이미 오래전에 알고 있을 터.
강호는 순간 부끄러워졌다. 이래서야 평생 가도 그녀에게 연장자 취급을 받을 길이 묘연해 보였다. 그렇게 부끄러워하고 있을 때, 희주가 시선을 천후에게 옮겼다.
“오빠, 제대로 하란 말야!”
“잠보! 잠꾸러기!”
“미안해. 아오. 왜 이러지, 진짜.”
그 사이 간신히 다시 잠에서 깨어난 천후가 이브와 에바에게 혼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눈이 잠시 가늘어지며, 눈꺼풀이 떨렸다.
그러다 눈이 감겼다.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뒤를 대비하는 수밖에요.”
“…….”
“그러니 조금 더….”
다시 뜬 그녀의 눈은.
“지켜보지요.”
진정으로 아무런 감정 없는 공허한 것으로 변해있었다.
*
불가시 공중요새 유그드라실. 성층권을 자유자재로 유영하는 마법사들의 요람 안에서 한 남자의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그의 이름은 최완. 유그드라실 한국 지부장이었다.
아무렇게나 기른 것 같지만 사실 매번 신경 써서 손질하고 있는 수염이 오늘따라 거추장스러웠다. 이렇게까지 격렬한 면도 욕구를 느껴본 적은 오랜만이었다.
시가를 입에 문 남자는 그대로 연기를 내뿜으면서 중얼거렸다.
“원로 분들이 많이 안 보이시는군요?”
“…….”
그가 있는 장소는 예의 회의실이었다. 사람이라곤 그 하나밖에 없는데 의자는 8개나 놓여있는 이상한 방. 하지만 사람 대신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있었다.
청색과 초록을 오가는 빛을 내뿜은 도깨비불들이 그것이었다.
“뭐라 말씀을 해보시지요. 7원로 중 다섯 분이 참석하지 않으셨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아주 약간 감정이 묻어있는 목소리에 두 개의 도깨비불 중 하나가 일렁였다.
“우리는 모르는 일이네.”
“하.”
잡아떼는 소리에 헛웃음을 낸 최완은 시가를 입에서 뱉었다. 그 순간. 그의 몸에서 열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장난이 지나치시군요. 서로서로 금제를 어기기 시작하면 저도 아쉬울 것 없는 몸입니다만.”
쿠구구구구…. 회의실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유그드라실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단숨에 회의실 상단의 LED 전등이 터져나가고, 유그드라실의 AI, 미미르가 비명과도 같은 경고음을 흘렸다.
“그 아이가 찾아왔었더군요. 계속해서 잠을 잔다고. …대체 악시스 문디에서 무슨 짓을 한 거지?”
“자, 잠깐 최완. 진정하게. 우리는 모르는 일….”
그들이 마지막까지 일렁이며 잡아떼자, 이윽고 그의 눈에서 흉성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제가 왜 지킴이로 지정되었는지. 꼭 보여드려야 말할 마음이 드시겠습니까?”
호르륵. 그의 노기에 긴장했는지, 도깨비불들이 크기가 손톱만큼이나 작아지며 애처롭게 빛났다.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그쯤 해두게. 최완. 그들은 정말 몰랐으니까.”
회의장 안에 강력한 염파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비어있는 의자들의 중앙에 흐릿한 인영이 나타났다. 마치 유령과도 같이 등 뒤가 그대로 비쳐 보이는 그런 인영.
그 인영에게 고개를 돌린 최완의 얼굴은 무참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사람 모습으로 대화해보긴 오랜만이군. 비록 이것조차 내 모습은 아니지만.”
그것은 영천후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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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보고 남자가 되라고 한 건 3살 때부터입니다만, 실제로 강호가 받아들이고 실행하기 시작한 건 7살때부터입니다.
선작, 추천, 쿠폰,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그럼 즐거운 한가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