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129화 (129/324)

129화

“이게 무슨 짓입니까?”

“굳이 물을 필요가 있는 일인가? 자네도 짐작하는 바가 있을 텐데?”

영천후의 모습을 한 환영이 웃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능글스럽게 웃는 게 어울리지 않았다. 최완이 아는 천후는 저런 모습을 쉽게 내비치지 않았다.

“감옥을 벗어나 빙의에 성공할 줄이야. 그가 실수하는 경우도 있군요.”

최완이 차게 내뱉은 말에 천후의 얼굴을 한 환영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입가에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아니지. 최완. 여지를 주었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겠나?”

“그런 식으로!”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잖나? 실제로 난 지금 이 몸에 깃들어있는데?”

가슴에 손을 올리고 거만하게 웃는 모습을 본 최완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열기가 어느새 잦아들었다.

“잘도 그 아이의 몸에 들어갈 수 있었군요. 그의 안배가 있었을 텐데.”

노려보며 하는 말에 그는 오히려 하하하고 소리 내어 웃었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오히려 반대지, 최완. 그 오랜 시간 동안 갇혀있는 동안 우리는 누구에게도 빙의할 수 없었네. 하지만 이 몸에만 가능하게 되어있단 것은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나?”

“…….”

“그의 뜻인 걸세. 우리 역시 그가 설정한 시련 중 하나인 게지. 이해하겠나?”

“사하르….”

침음성이 흘리는 최완을 마주 보며, 천후의 환영을 보이고 있는 남자. 사하르는 말을 이었다.

“우리라고 시도해보지 않은 게 아니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지. 우리가 깃들 수 있는 이가 한정되어있다는 것을. 그리고 간신히 그때가 왔고, 우리는 원하는 바를 행했을 뿐이지.”

“…….”

“아아. 육신을 가진다는 것은 멋진 일이군. 아직 염밖에는 내보낼 수 없지만 말이지.”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을 양팔로 끌어안은 남자는 황홀감에 젓은 표정을 짓다가 그대로 최완과 눈을 똑바로 맞췄다.

“자아. 난 그가 안배한 시련에 응하겠네. 그러니…. 그래. 방금 이들에게 말한 것처럼. 지킴이로서의 사명을 다 해주실까?”

윙. 윙. 윙. 윙. 남자의 말과 함께 회의장이 낮게 진동했다. 아니, 아니다. 최완은 이것이 회의장이 아니라 자신의 고막과 몸이 떨리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지러웠다. 시가를 다시 피워 마음을 가라앉힐까 했지만, 꺼내던 손이 떨려서 그것을 땅에 떨구고 말았다.

한계다.

콰악! 떨어진 시가를 발로 밟아버린 최완은 그것에 시선을 주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떠오르던 도깨비불은 일곱이었다.

7원로.

과거. 유그드라실이 발족하기도 전에 세계를 지배하려 들었다가, SA랭크들에게 패하여 그 힘을 잃고 영향력만 남은 이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어떻게든 여력을 남겨서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고 있었다.

마법사를 위해. 좀 더 마법사를 위해.

인간 위에 서라.

완전히 지배해서라도….

“…천후는 앞으로 마법사들을 위한 세상을 열어갈 핵심인물 중 하나입니다. 그래도 계속 하겠다는 겁니까?”

최완은 머리를 식혔다. 그의 말이 맞다. 과거. 패퇴하여 영체만 남아 갇혀있던 이들이 유일하게 깃들 수 있는 육체가 그 아이였다면, 이건 그들. 그리고 그의 뜻이리라.

그렇다면 다른 논리로 다가가야 한다. 그들의 논리로. 최완은 필사적으로 그것을 들이댔다. 하지만 천후의 얼굴을 한 남자가 노성을 내뱉었다.

“이놈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어! 이놈에게만은! 마법사에게도, 인류에게도 패악인 놈이거늘! 괴물 주제에 어찌 감히!”

“사하르!”

함께 노성으로 받아치는 최완을 남자가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서 최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아이러니를 느꼈다. 저 젊은 얼굴로 일백이 넘은 노인의 감정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한참을 그와 마주 보고 있던 남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그의 환영이 천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최완. 자네가 스스로 자네의 역할을 다하기엔 아무래도 정이 발목을 잡는 모양이군. 뭐…. 좋아. 자네가 나설 수밖에 없게 만들어주지.”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불길하다. 자기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린 최완이 외쳤다. 그 물음에….

“서울이었지? 이 나라의 수도 이름이. 이곳의 인구수가 좀 많다고 생각하지 않나?”

환영이 거의 다 흐려져, 목만이 남은 천후의 환영이 마지막 말을 내뱉고서 사라졌다.

*

이상하다. 명백히 이상하다.

천후는 최근 자신의 몸 상태를 보고 이렇게 판단을 내렸다. 뭄바이에 다녀온 이후부터 정상이 아니다.

희주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잠을 잔다는 듯이 이야기했지만, 천후의 입장에선 말 그대로 그냥 전원이 꺼졌다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자기는 말짱히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있는 것 같달까?

하지만 이게 잠든 것이든, 전원이 꺼진 것이든 어느 쪽이라고 해도 그에게 좋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천후는 증세가 계속되자 희주와 단둘이 있을 때 뭄바이에서 겪었던 일을 다시 한 번 자세히 이야기하며 하나씩 되짚어보기로 했다.

그래야만 그녀와 함께 이 앞일을 논하며 대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

“가장 의심 가는 것을 그 일이에요.”

그 뒤부터 한국에 돌아올때까진 괜찮았지만, 와서 며칠이 지나자 이런 상태가 계속되었다.

이야기를 들어본 바로는 기억이 끊어졌을 때 자신은 잠든 것처럼 쓰러져있다고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잠드는 시간은 굉장히 짧았다.

“이게 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요?”

“글쎄요….”

사람의 정신에 개입하는 마법은 금기에 가깝다. 모든 마법사가 일정 수준까진 가능하지만, 모두가 병적으로 사용하기 싫어했다. 그래서 관련된 데이터는 거의 쌓여있지 않았다.

그나마 유그드라실에서 실험적으로 마법사끼리 사용해보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것 역시 드물었다. 덕분에 어디서 도움이나 조언을 얻을 곳이 없었다.

평생 이렇게 살게 될지도 모른단 생각. 혹은 더 나빠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후도 인간인지라 이런 생각이 들자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그는 도피하고자 하는 욕망을 접고서 더 나빠질 가능성 쪽으로 생각의 가닥을 잡았다.

“뭄바이에서는 거의 몸을 빼앗겼었어요. 그럼 어쩌면 나중에 가선 제 의지와 상관없이 제 몸을 사용당할지도 몰라요.”

“…….”

끔찍한 가정이지만, 여기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아무런 해결책도 나오지 않았다. 천후는 생각을 이어갔다.

“그리고 몸을 지배한 놈이 저의 힘을 완전하게 다룰 수 있다고 한다면, 그걸 막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요.”

그의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추려져 갔다.

“SA랭크는 어디 있는지도 모르니 완전히 빼고.”

“국내 A랭크들도 드래곤 사태 때 나타나지 않은 이상 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 인구를 생각하면 국내에 A랭크가 3~5명은 있을 테지만, 그들이 나타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만이 아니라, 전투훈련을 받지 않은 A랭크는 그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런 전제를 깔고 가다 보니 금세 후보가 압축되었다. 천후의 머릿속에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아저씨. 그리고….”

거기까지 말한 천후의 입이 바르르 떨리다가 천천히 다물어졌다. 그 모습을 희주는 옆에서 눈을 깜빡이며 지켜보았다.

‘그’는 그 시선을 받지 못하고 천천히 말을 마쳤다.

“…아니. 아저씨 정도겠죠.”

“그렇습니까?”

여느 때처럼 무감정하게 대답한 희주는 그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며 눈을 깜빡였다. 흑진주 같은 눈동자. 조각 같은 흰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긴 속눈썹은 깜빡임과 함께 움직이며 미모를 돋보인다. 표정만 갖춰진다면 그 어떤 남자라도 한순간에 녹여버릴 인형 같은 인상의 여자. 남자는 가만히 웃음 지으며 그녀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

“…….”

하지만 그때. 그의 손길을 희주가 왼손을 들어 막았다. 손목을 쥐어서 그가 닿으려는 것을 막은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일인지라 그의 얼굴에 놀람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막았던 손을 놓아준 그녀는 천천히 양손을 뻗어서 그의 얼굴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길에 그의 얼굴이 가늘게 경련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희주는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가져와, 그의 코앞에서 멈추었다.

코와 코가 맞닿기 직전. 서로가 서로의 눈동자 말고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거리까지 접근한 그녀는 그대로 한참이나 머물렀다.

그 눈동자를 마주 보고 있자면 마치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온몸이 발가벗겨져 거리에 내던져진 것 같은 느낌도.

더는 마주 볼 수 없다. 자기도 모르게 눈을 피한 그는 당황해서 말했다.

“희, 희주 씨? 뭐 하시는 거죠?”

“…….”

대답이 없었다. 이 거리까지 다가오면 그래도 붉어지곤 했던 그녀의 안색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오직 단 하나.

감정 없던 눈동자에 싸늘함이 깃들었다.

그제야.

뒤늦은 대답이 돌아왔다.

“주인님의 몸으로 주인님의 흉내를 내고 계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헉?!”

남자의 몸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순간 안색을 굳힌 그는 바로 그녀를 밀쳐서 떨어뜨렸다. 그 움직임에 맞춰 자연스럽게 뒤로 몸을 날린 희주의 손에는 어느샌가 월하홍취가 들려있었다.

‘뭐야, 이년은?!’

사하르는 진심으로 놀랐다. 지금까지 한참을 고생하다가 이제 와서야 그의 몸을 완전히 탈취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놈이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 뒤부터 잠시 놈의 말투를 따라 했다. 그런데 그 잠깐 사이에 사람이 바뀌었다는 걸 알아내다니?

아무리 관찰력이 뛰어나다고 한들 가능한 행동이란 말인가?

“아니…. 잠깐. 네년…!”

“흑표.”

그에게서 무슨 말이 나오기도 무섭게 월하홍취가 검편으로 변하여 실내를 휘저었다. 뱀처럼 다가오는 그 움직임에 사하르는 미처 다 피해내지 못하고 몇 군데나 상처를 입었다.

“크윽!”

이놈의 몸은 날래고 강인하지만, 생전의 사하르는 이 정도 성능의 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덕분에 이 정도 거리에서 기습을 당하자 곧바로 대응할 수가 없었다. 남자는 몸으로 달려드는 대신 재빠르게 단축한 영창을 읊으며 수인을 맺었다.

티잉!

3초나 지났을까? 방 안을 미쳐 날뛰던 검편이 그의 몸 주변에 닿자 튕겨 나갔다. 희주의 눈썹이 아주 조금 세워졌다.

“공도.”

푸욱! 껍질처럼 씌워놓았던 방어막을 검편이 허공을 격해서 날아와 그의 몸을 찔렀다. 눈을 치켜뜬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크아아악! 네년의 지아비를 죽일 셈이냐!”

“…….”

이 몸을 탈취한 목적은 놈을 죽이려는 것이었지만, 이런 형태를 바라진 않았다.

‘애초에 이 여자로선 죽이지도 못할 것이고. 그럼 시간 낭비는 피해야지.’

순간, 남자는 희주가 월하홍취를 쥔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이제야 깨달은 건가?’

멍청한 계집 같으니. 남자는 혀를 차면서 상처를 돌보려고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다시 한 번 검편이 방어막을 뚫고 들어와 이번엔 양손을 꿰뚫어버렸다.

“끄아아아아악!”

“…지금의 제가 주인님을 죽일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니. 주인님께서도 용서해주실 겁니다.”

“무, 무슨!”

경악한 사하르는 손이 망가져 당장 수인을 짚을 수 없자, 즉시 시전 마법을 추가로 발휘해 껍질 안의 공간까지 완전히 벽을 둘렀다. 그때가 되어서야 그녀의 공격을 완전히 차단할 수 있었다.

‘대체 이년은…?’

미친년인가? 그의 몸으로 서울 인구수를 줄여버리려고 했던 그로서도 이해할 수가 없는 행동이었다. 대체 뭐하는 년이란 말인가? 판별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공격이 더는 통하지 않자 월하홍취를 접은 희주는 무감정한 눈으로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자신이 역으로 제압당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그를 두렵게 만들고 있었다. 표정없이, 광점조차 없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저 여자가 두려웠다.

‘대체 뭐하는 년이란 말인가?’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이상한 여자였다.

그래.

처음부터.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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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잘 지내셨나요? 아오. 전 배가 터질 거 같습니다요. 적당히 먹을걸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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