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뭣?!'
천후의 놀람이 의식 속에서 울려 퍼지는 것도 무색하게 그의 몸에서 일어난 검은 불길은 천천히 적색으로 변화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몸에선 홍염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와 주변에서 캐스팅을 막으려고 하는 이들을 흩어버렸다.
'어떻게 이런?'
이건 영천후 자신도 할 수 없는 활용법이었다. 애초에 신위라는 기법 자체가 그냥 마법이 아니라 A랭크 주문들을 몸의 각 파트별로 걸어서 그것을 육체 반동으로 일부러 격발, 쏴 재끼는 일종의 기술. 사도다.
덕분에 세이브 되어있는 A랭크 주문들을 온몸에 분산시키고 전부 발동시킨 후 발사할 때까지만도 20초 가까이 걸리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그만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남자는 몸에 파트별로 마법을 걸지도 않고 그저 스펠 세이브에 저장된 주문을 치환만 시켜서 발동하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몸이 풍선처럼 터질 각오를 하고 쓰던 그와는 다른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의 몸을 지배한 사하르는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끌끌. 어리석구나. 이게 정식 사용법이다. 네놈이 하던 방법은 비정상적으로 신역神域에 닿으려고 버둥거린 것에 불과하고. 그 불완전했던 몸의 성능으로 끌어내려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어느새 주변에는 화염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과연 이 흉흉한 기세에는 다가올 수 없는지, 유그드라실의 마법사들도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빙그레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남자는 천천히 손을 들어서 한쪽을 가리켰다. 그 순간, 딱히 몸을 뒤틀지 않아도 발끝에서부터 기운이 소용돌이치며 손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의식의 주도권은 빼앗겼지만 오감은 공유하고 있던 천후는 그것을 느끼고는 소리 질렀다.
'안돼! 그쪽은 서울 한복판이라고!'
드래곤의 브레스를 밀어냈던 힘이다. 발사되는 폭은 그것보다 좁은 편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이 도심지에 날아가면 어떤 꼴이 될지는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하지만 사하르는 껄껄 웃으며 답했다.
"그래. 바로 그 서울 한복판에 쏘려는 거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젠 주변에 휘몰아치던 화염 폭풍까지 손끝에 모여들었다. 사하르는 그것을 망설임 없이 쏘았다.
'안돼!!!'
피잉…. 키유우우우우우우웅!
천후의 외침도 덧없게 그의 손에서 한 번의 섬광이 일더니 홍적의 빛이 뻗어 나갔다. 그러자 주변을 돔 형태로 감싸고 있던 유그드라실 마법사들의 방어막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적색 광선은 그대로 한강을 둘로 찢어 갈라버리고 강 너머로 날아갔다.
목적지는 청와대. 지금까지 줄곧 대기권 밖으로만 날려 보냈던 이것이 지상에 꽂히면 어떤 참사를 불러일으킬지는 상상도 가지 않았다. 천후는 절망을 느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카아아아아앙!
귀가 찢어질 것만 같은, 쇠를 때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신위의 전진이 한강 너머에서 멈췄다. 적홍이 허공에서 무언가에 막힌 듯이 더는 나아가지 않았다. 그렇게 몇 초가 지나 힘의 폭사가 끝날 때까지 계속.
"흐흐. 왔군."
낮게 웃은 사하르는 손을 내려놓고선 신위가 막힌 곳을 바라보았다. 한강 너머였지만 이 육체의 성능은 상당히 좋았던 덕에 알아볼 수 있었다.
멋대로 기른 수염에 시가를 문 남자. 최완이었다. 그를 본 사하르는 영천후의 몸과 얼굴을 하고서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자아. 인류의 지킴이여. 지금 이 자리에서 사명을 다 해주겠나?"
*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의식을 되찾은 천후는 사하르가 내뱉는 발언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악시스 문디에서 처음 그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부르는 호칭도 마찬가지였다.
별의 적자.
천후 자신이 신위를 캐스팅할 때에 입에 담는 첫 구절이긴 했지만, 그것은 그저 무의식이 자아낸 단어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하르는 일관적으로 저 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저씨.'
의아한 것은 자신의 몸을 지배한 사하르 뿐 아니었다. 최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뭄바이를 찾아갈 때 이강호를 붙여준 시점에서 그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말을 안 해준 거지? 제대로 된 언질만 해주었다면 최소한의 대비를 하거나, 찾아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부족했다. 정보가. 턱없이! 하지만 그런 상태에서 사건은 멈추지 않고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이 천후를 미치게 했다.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이 정도의 인식장애마법은 본 적이 없다.'
그의 눈에 노들섬이 불바다로 변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한강대교를 건너고 있는 차들이 보였다. 그것을 보면서 천후는 의식만 남았음에도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드래곤 사태 종반. 군인 몇 명에게 정신지배를 건 것만으로도 로마이어와 박찬휘는 공적으로 지정되어 주살을 당했다. 일반인의 정신에 개입하는 주문의 사용은 마법사들 사이에서 그만큼 커다란 금기였다.
그런데 지금 이건 뭔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유그드라실의 총력조차 아니건만 근처 수 km의 모든 인간들의 심령이 제압당하여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만들고 있었다. 유그드라실의 이런 조치는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로부터 마법사의 폭주나 일탈에 대한 처리는 유그드라실이 맡아왔다. 발족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그래 왔다. 그러니 천후 자신이 이렇게 폭주를 일으키는 걸 유그드라실이 직접 나서서 처리하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그것을 이렇게 숨기려고 작정하고 나선 적은 없었다.
몇 달 전 있었던 베이징 공항에서 수백의 피해자를 냈었던 메지션 레이지도 그대로 공표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건 뭔가?
그의 영향력이 크니까? 단지 그 이유로? 이 정도의 인식장애가 가능하다면 아예 국가 전체를 공깃돌처럼 가지고 놀 수가 있으리라. 그런데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의 내규가 그만큼 엄격하다는 것을 뜻했다.
이걸 역으로 짚어보면 이것은 '그래야만 하는 상황'인 것이다. 천후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그의 의식이 내면에서 절규했지만, 그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
한편 사하르의 이야기를 들은 최완의 표정은 담담했다. 아니 담담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주변을 확인하며 현재 상태를 점검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평소의 헐렁한 아저씨 같은 인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로지 엄숙하고 엄정한 얼굴을 한 남자만이 있을 뿐이었다.
투입된 유그드라실의 마법사가 다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아직 인식장애술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최완은 고개를 굳게 끄덕이고는 사하르에게 말했다.
"사하르. 다시 생각해보시오. 당신이 깃든 그 남자는 앞으로 마법사들에게 빛을 가져다줄 사람입니다. 지금 그를 잃는 건 너무 큰 손실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최완의 얼굴에 절박함 혹은 기대감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얼굴인 이유는 사하르가 몸소 보여주었다.
"닥치게! 나는 이놈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자네들의 그런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어! 무슨 정신으로 이런 괴물을 인간처럼 대해주고 있는 건가?"
"……."
"이보게, 최완. 인류의 걱정거리부터 치워야 할 게 아닌가? 마법사들의 문제는 아주 간단해. 인간들의 인정이 무슨 소용인가? 유그드라실이 있는데! 당장 지금 이 자리에서 자네들의 힘을 보이고 있군!"
"사하르."
"뒤집어버리면 될 문제네! 힘으로 지배하면 되는 거야! 그걸 위해 주어진 힘이 아닌가!"
넘실넘실…. 천후의 몸에서 다시 한 번 붉은 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최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문을 열었군요. 제정신이십니까?"
"하하하하!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차피 자네가 나서면 의미가 없는 것이었어! 아직도 이 녀석이 자네의 아들로 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
"꿈도 꾸지 마! 이미 모든 건 끝났다! 내가 이 몸을 취한 이상! 하지만 자네는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푸확! 다시 한 번 홍염이 터져 나와 구름을 꿰뚫었다. 화염의 폭풍이 휘몰아치며 설치해놓은 결계를 찢어발겼다. 그걸 보며 만족스레 웃은 사하르는 최완을 향해 손을 가볍게 뻗었다.
"이해시켜주는 수밖에. 어디. 몇 번이나 막을 수 있는지 보도록 할까?"
그 말과 함께 다시 한 번 섬광이 터졌다. 광선이 날아오는 것을 본 최완은 이를 악물고 마찬가지로 손을 앞으로 치켜들었다. 그 순간 다시 한 번 적홍이 허공에 부딪히며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크흡!"
두 번째 신위를 막은 최완의 입에서 한줄기의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눈이 파리하게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본 사하르가 어린아이처럼 깔깔 웃어댔다.
"하하하하! 그 남자가 남긴 아티펙트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힘든 모양이지? 자네의 주특기는 방어마법도 아니니까 말야."
"크으윽!"
입안에 가득 고인 핏물을 들이 삼킨 최완은 충혈된 눈으로 천후의 몸을 탈취한 그를 노려보았다. 그 뒤. 그의 입에선 생각지도 못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천후야! 정신을 차려라! 대체 언제까지 네 몸을 넘기고 있을 거냐!"
"흠?"
"그 몸은 네 것이다. 네가 하고자 하면 그런 지배 따윈 벗어날 수 있어! 스스로 떨쳐내라!'
'아저씨!'
절박한 목소리에 천후가 소리를 질렀다. 사하르는 그 순간 육체의 지배권을 다시 쥐려는 시도를 느꼈다. 하지만.
"흐흐. 근성론이 지나치군. 최완. 세상엔 불가능한 것도 있다네."
마음만 먹는다고 그런 게 쉽게 된다면 이미 진작에 몸을 다시 빼앗겼으리라. 천후 역시 의식이 돌아왔을 때부터 꾸준히 시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이 몸'의 본질에 대한 이해도의 차이가 워낙 컸기에….
'아아아아아아악!'
"크흐흐흐. 네 아들이 애를 쓰는구나. 하지만 안되는 건 안되는 거라네. 최완. 아. 이러는 동안 또 시간이 좀 지났군. 어디. 다시 한 번 해볼까?"
화륵. 다시 한 번, 이번엔 흑염이 그의 몸을 감았다. 놀랍게도 이 잠깐 사이에 A랭크 주문들이 상당수 쌓여있었다. 신위를 발동시키고도 남을 만큼!
"몸과 통로 자체는 아주 잘 갈고 닦아놨군. 덕분에 다루기 아주 편해. 내 생전에도 이 정도까지 캐스팅을 자유롭게 해본 적이 없었거늘."
그것이 점점 색을 바꿔가며 홍색으로 변해갔다. 그것을 본 최완의 얼굴이 굳었다.
"결계 해제! 인식장애술 최대화! 그리고 대피!"
"하지만 한국 지부장님!"
"가라!"
절박한 외침에 유그드라실의 마법사들은 안색이 변하여 그 자리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결계는 풀어버리고, 그것을 전부 인식장애로만 돌리는 지시를 한 최완은 주먹을 틀어쥐었다.
사하르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흐흐흐흐! 마음을 먹었나! 그래! 그래야지! 신위!"
키이이이이…. 광소를 내뱉은 천후의 한 손에 붉은 광점이 모여들었다. 그와 동시에 최완의 몸에서도 오오라가 터져 나오며 한강 둔치의 지면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순간.
"늦었습니다."
"!"
등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최완의 눈이 커졌다. 그 목소리와 동시에 한 줄기의 파란색 섬광이 한강 위를 달리며 황무지로 변한 노들섬 위에 내려앉았다.
"방해하지 마라!"
감히 다 이루어진 일을 막으려 들다니! 노기를 내비친 사하르는 그대로 섬광을 내쏘았다. 그것은 그 형태 그대로 빛과 같은 속도로 인영에게로 날아갔다. 그리고-베였다.
나타난 인영의 앞에서 은색 섬광이 번뜩인 그 순간. 신위의 홍적이 양 갈래로 갈라지며 마치 실타래처럼 흩어져갔다.
사하르의 눈이 치켜떠졌다.
발사한 신위에 그치지 않고 그의 몸에서 방사되어 휘몰아치던 화염의 폭풍 역시 가라앉았다. 하늘까지 치솟던 홍염 역시 잦아들어, 오로지 그의 몸을 간신히 감싸고 있을 뿐이었다.
세상에 이런 일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았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그중 하나가 있었다.
푸른색의 도복을 몸에 두르고, 긴 머리카락을 뒤로 땋아 이마를 훤히 드러내고 있는 여자.
이강호.
이 섬에 발을 디딘 그 시점부터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그녀는 천후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천후야."
아주 약간 상기된, 색정적이기까지 할 정도의 요염한 미소로-
"싸우자."
신의 위광조차 베어낸 검신劍神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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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작, 추천, 쿠폰,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어제오늘 콧물감기가 너무 심해서 거의 하루 종일 끙끙거렸네요. 추석연휴 껴있었기에 망정이지...
자고 일어나서 한 편 더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