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사박. 사박.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제대로 들리지 않은 작은 발걸음 소리. 하지만 그 발걸음을 따라 뱀처럼 날름거리던 불길들이 겁먹은 것처럼 사그라졌다. 매캐한 연기는 흩어지고, 가려져 있던 시야를 완전히 드러나게 하면 그녀는 그렇게 다가오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삿된 힘이 부정당하고 그녀의 앞에 무릎 꿇어 머리를 조아렸다. 어느새 그녀와 그 사이를 가로막던 불길들은 모두 사라지고 온전히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윽! 이년…!”
아직도 홍염을 두르고 있던 남자, 사하르는 그 광경에 놀라며 몸을 떨었다.
이야기는 들었다. 알고도 있었다. 저런 여자가 있다는 것을. 뭄바이 현장에서도 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르다.
절대적으로 다르다.
세계수를 향해서 검을 뽑았던 때와 지금은 전혀!
그 검극이 자신에게 향하자 단지 그것만으로도 남아있는 영혼이 흩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을 만큼이나.
자기도 모르게 탈취한 몸의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을 본 사하르는 그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제법 대단하구나. 진리구현자라는 것은-”
“닥쳐라.”
사하르의 말허리를 자른 그녀는 어느새 10m 거리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그의 머리끝이 쭈뼛 섰다.
언제? 언제 이렇게 다가왔단 말인가? 분명 저 끝에서 모습이 간신히 보일 정도의 거리에 있었는데 언제?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녀는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달려들면 검이 닿을 거리로.
그런 그의 감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왼팔의 환두태도를 쭉 뻗어 그 끝을 천후에게 향했다.
후욱.
단지 그것만으로…. 몸에 둘려있던 홍염의 일부가 날아갔다. 하지만 강호는 그런 것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런 건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부르는 것은 네놈이 아니다.”
“무슨-”
“알 텐데. 천후야.”
후우우웅. 잦아들 불길 너머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니 그것은 차라리 싸늘함이라 불러야 옳을 것이다. 닿는 것만으로 살이 애일 듯한, 갈라져 버릴 듯한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와 홍염의 몸을 훑었다. 그리고.
“하. 하하.”
뿜어져 나오던 얼마 안 되던 홍염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것이 순리인 양 흑색으로 변했던 그것은 달아오를 때의 역순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천천히 꺼져나갔다. 마지막으로 그 기운이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양 눈동자의 흉성조차 꺼트린 남자가 답했다.
“알지. 알고말고…. 선배.”
광기 머금은 무귀武鬼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
그녀가 신위의 불길을 흩어내고 이 자리에 나타났을 때부터 천후는 자신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 놈의 속박이 헐거워진 것을 느꼈다.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대적은 할 수 있게끔.
그리고….
그거면 충분했다.
“하하.”
역시 선배야. 정말 가당찮은 방법으로 자신을 끄집어냈다. 사하르와 육신의 정보를 공유하던 천후는…. 어처구니없게도 그녀가 발휘하고 있는 전의에 이끌렸다.
그녀가 발하는 싸우고 싶다. 싸우고 싶어 미쳐버릴 것 같다는 그 살기 어린 전의에 응하여 몸이 떨려오는 것을 느끼자, 그제야 자신을 통제할 수 있었다.
‘이. 이런 야만적인 놈이?’
일시적으로 통제권을 빼앗긴 사하르가 내는 말에 천후는 그 말이 실로 옳다고 여겼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다.
“넌 평생 모르겠지.”
알 수 있을 리가 없으리라. 웃음 지은 천후는 양팔을 축 늘어뜨렸다.
검을 든 선배는…. 분명 강하리라. 터무니없이. 아마도 그녀의 조부 이상이겠지. 그래서 천후도 장비를 사용하려고 했지만, 지금 환경에선 어쩔 수가 없다. 그렇다면 끌어올려야 한다. 한계까지.
검은 아직 닿지도 않는다. 그녀는 저 앞에서 더는 다가오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서 발해오는 기운이 살갗을 베어버릴 듯이 날카롭다. 그것이 즐거워, 어찌 참을 수가 없어 단숨에 그의 오감이 극한까지 끌어올려 졌다.
의식은 어느새 끝없이 고양되어 저 하늘을 걷는다. 그와 혼재되어있던 사하르의 의식은 그 끝도 없는 상승에 따라가지 못하고 소리쳤다.
'에에잇! 신위의 영향은 몸에 남아있다! 헛짓거리하지 말고 그 힘을 빌려서 저년을 제압해!’
그 외침에 그의 몸에서 다시 홍염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진리구현자인 그녀를 이 가까운 거리에 두고서도 그 마지막 불길은 쉬이 꺼지지 않았다. 지금 이 힘이라면 아무리 그녀라도 저항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디제스터와 싸울 때 인간 본연의 힘으론 싸울 수 없는 것처럼, 지금의 천후 역시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있으리라. 손을 수평으로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척추가 끊어지고 몸이 양단되지 않을까?
하지만.
“닥쳐!”
콰앗! 순간적으로 그의 몸에서 홍염이 크게 치솟아 올랐다가 사라졌다. 양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쥔 그는 노기 띤 목소리로 소리쳤다.
“끼어들지 마! 네놈은 여기에 끼어들 자격이 없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몸은 나의 것이야! 처박혀 있어!”
‘크악!’
고양에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그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사하르의 의식은 소리를 지르며 물러났다. 뇌 한구석을 점하여 그를 통제하고 있었지만, 눈앞에 저 이강호가 있는 이상 몇 가지의 키워드에 한해서는 그를 완전히 굴하게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 그중 하나였다.
‘미친놈!’
사하르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싸움의 어디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저렇게 광인처럼 구는 거지? 그가 생각하기엔 천하기 짝이 없는 감성이었다.
“넌 몰라. 알 리가 없지.”
그래. 알 리가 없지. 정진해보지 않은 놈은 알 수가 없어.
눈앞에 강한 사람이 있다.
저 사람을 도대체 어떻게 이길까? 어떻게 싸워서 어떻게 쓰러뜨릴 것인가? 그걸 생각하다 보면 너무나 즐거워진다고.
“선배.”
“아아. 그래.”
눈앞에. 한껏 상기된 얼굴을 한 검사가 보인다. 아마도 자기도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리란 걸 천후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하하. 이러니 아이들이 말리지. 이러니까 겁먹지. 자기도 모르게 이해했다.
그렇지만 말야. 아이들은 봐줄 수 있지만.
“방해하지―”
“마라!”
둘의 입에서 같은 말이 튀어나온 그 직후. 적색과 은색의 선이 천지 사방을 뒤덮었다. 그 순간.
“헉…!”
“미, 미친.”
천후의 신위가 가라앉은 틈을 타서 총화기로 그를 제압하려 했던 유그드라실 마법사의 손에서 총이 죄다 박살 나버렸다.
이미 광범위하게 펼쳐진 인식장애술 만이 아주 간신히 그 효력을 유지하고 있을 뿐. 그 외의 모든 마법은 근처에서 발동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간신히 생각해낸 궁여지책인데 그게 차단당하다니.
아니 그보다.
“주, 죽을 뻔했어.”
“제정신이 아니야.”
정말로 한순간이었다.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수백의 손아귀에서 무기만 베어내고 부숴버리는 동안, 다른 이들은 그것을 감지조차 하지 못했다. 그것이 총이 아니라 목이나 다른 곳이었다면? 이곳에 살아있는 이들이 있을까?
“한국지부장님, 이건!”
“…인식장애술 유지에만 집중하게. 어쩔 수 없지.”
지시를 내렸던 최완조차 미친 광경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들을 물렸다. 이미 둘이 극한의 고양상태에 들어가 버렸다. 이미 원래의 목적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으리란 걸 깨달은 최완은 식은땀을 흘리며 같이 뒤로 물러났다.
“하하. 이제야 조용해졌군.”
기꺼운 목소리에 천후는 함께 웃었다. 잿더미만 남은 섬 한가운데에서 두 사람만이 마주 보며 웃는다. 그것은 한없이 밝으면서도, 한없이 왜곡되어있는 것처럼도 들렸다.
한없이 어린아이와 같은 웃음. 하지만 다 큰 성인이 그런 미소를 지으면 그것은 광기가 들린 웃음이 된다.
강호가 말했다.
“미리 말해두마. 난 널 죽일지도 모른다.”
천후가 답했다.
“나도 선배랑 싸울 때 아니면 제정신이 아닐 거 같으니까 괜찮아. 그러니까 그것밖에 답이 없으면 죽여. 적당히 봐주질 못할 거 같거든.”
강호가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필요도 없다.”
천후도 웃었다.
“그래?”
“그럼.”
단언하는 강호를 보며 천후의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울렁울렁 솟아올랐다. 그것을 입 밖으로 낸다. 웃음이란 형태로.
“하.”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미친 것처럼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섬에서 울려 퍼졌다. 길게. 멈추지 않고.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새 배를 잡고 있던 천후도, 하늘을 올려보고 있던 강호도 다시 시선을 서로에게 맞췄다.
여전히 웃음이 지어져 있었지만…. 그 질이 달라져 있었다. 눈은 가느다랗게 변했다. 강호는 뒤 허리춤에 달고 있던 것을 천후에게 던졌다.
그것을 가볍게 받아낸 천후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강호가 말했다.
“희주가 너에게 주라더군.”
“하하. 완성됐었나?”
강호에게 건네받은 것은 두 자루의 톤파였다. 목재나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마치 철근처럼 완전히 통짜 쇠로 만들어진 강철 톤파.
그것을 양손에 쥔 천후는 가볍게 자세를 잡았다. 톤파의 긴 막대 부분이 팔목에 딱 붙었다.
“어때?”
“괜찮군.”
강호는 솔직히 평했다.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어중간하게 써본 적도 없는 무기를 들어봐야 발릴 거 같더라고.”
강호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의 말이 맞았다. 검과 비슷한 길이의 무기를 들었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그녀의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압도적으로 긴 사거리의 무기. 창이나 폴암 계열을 들었다면 또 이야기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천후는 그런 걸 들 생각도 없었고, 강호 그가 그런 걸 들고 올 리가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럼 톤파는 써본 적이 있는 거냐?”
“아니. 하지만 가드용도로 쓰는 법은 확실히 익혔어. 사실 그 외로는 쓰지도 못하겠지.”
“후후.”
강호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저 낮게 웃을 뿐이었다.
“자. 그럼.”
“아아. 기다려라.”
몸이 달아올라 달려드려는 천후를 제지한 강호는 순간 양손에 든 검을 땅에 떨궜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그녀의 입에서 감미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와라. 난정.”
목소리가 끝난 순간, 그녀의 손에는 한 자루의 검이 들려있었다. 그녀가 늘 들고 다니던 두 자루의 환두태도, 환도와는 다른 검 한 자루가.
검집과 검 손잡이에는 아름다운 난화가 가득 그려져 있었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강호가 그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시잉.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뽑아낸 검은 낮은 검명음을 흘리며 세상에 몸을 보였다. 그것은 곧게 뻗은 직검이었다. 그 검신은 1미터가 조금 넘었고, 검 손잡이도 양손으로 쥐는 것을 고려한 것인지 길었다.
그녀는 몽롱한 눈으로 천천히 그 검신을 처음부터 끝까지 손으로 훑었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연인이라도 되는 듯.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천후의 눈은 곱지 않았다.
“봐주겠단 거야?”
노기 띤 음성에 강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누가 그런 소리를 했지?”
“다 알아. 선배가 하수에겐 왼손만. 상대할만할 땐 오른손만. 그리고 진심으로 할 땐 쌍검 쓰는 거.”
“잘 알고 있군.”
“그런데 왜 지금 그런 걸 꺼내지? 쌍검 쓸 가치도 없단 거야, 난?”
“하하.”
짧게 웃은 강호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조금 다르지. 우리 가문 검술의 끝은 쌍검에 있지 않아. 진정한 검리는 한 자루만으로 충분한 법이지.”
“…….”
“이 아이의 이름은 난정. 내가 태어날 때 함께 제련한, 나 자신과도 같은 검이다. 그리고 나는 이 아이를―내 혼을 걸고 싸울 상대에게만 쓰기로 정했지.”
천후가 말을 잃자, 강호는 요염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이 아이를 써보는 건 네가 처음이다.”
“설마….”
“그래. 내가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허허.”
고양된 상태에서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과 동시에 천후는 가슴에서 치솟아 올라오는 열기를 느꼈다.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영광이군. 좋아. 그러면 해볼까?”
“그래. 하지만 그 전에.”
사람을 홀릴듯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그렇게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다음 순간.
카앙! 티팅……. 천후의 왼손에서 톤파가 뽑혀 나와 바닥을 굴렀다. 손잡이를 잡고 있던 그의 손아귀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있어봐야 의미 없는 것은 제하고 시작하지.”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이 희열에 젖어있었다. 당장에라도 범해주기를 바라는 듯한 음탕한 여자의 얼굴. 하지만 천후는 그것에 흥분할 수 없었다.
온몸에서 경고음이 들려왔다.
‘안 보였어.’
그녀와 그의 사이에 있었던 10미터의 공간을 좁히고 들어와 톤파를 날려버린 그 일련의 동작이.
전혀.
“이 괴물이.”
천후의 얼굴에 그녀와 똑같은 희열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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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정은 마도병장이고, 소환 기능이 부가되어있습니다. 저 사이 모드를 잠시 껐다 킨 거죠.
내일 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