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상상도 못 한 일에 천후가 어이가 없어 그저 웃었다. 솔직히 톤파 연습을 할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쓰고자 했던 실물도 지금 막 왔으니까. 그전까지는 나무 톤파 등으로 형을 잡아보는 것 정도 외에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톤파의 손잡이란 것은 맷돌 손잡이처럼 생겨먹은 덕에 쉽게 무장해제 할 수가 없는 무기다. 천후 본인의 악력도 수준급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데 그중 하나가 이렇게 허무하게 날아가다니.
그보다 더 문제는 인 아웃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단 거다. 그녀와의 거리는 다시 10미터 가까이 벌어져 있었다. 거기서 거의 자세의 흐트러짐도 없이 깔끔하게 무기만 떨어뜨리고 빠져버리다니?
"어떻게 한 거지?"
너무 놀라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 물음에 강호는 빙그레 웃으며 검을 다시 중단으로 가져왔다.
"애초부터 버림 패로 생각한 걸 떼어줬을 뿐이다. 의식을 집중하지 않았었으니까. 편했지."
"이 괴물이…."
그녀 말마따나 천후는 왼팔로 검을 가드 하며 접근할 생각이었다. 그 덕분에 왼팔에 오는 공격에는 약간 무감각해질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런 심적 요인을 그냥 보고 파악이 된단 말인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웃음이 절로 지어진다. 그녀는 이미 발동이 걸렸다. 이제 어떤 행동을 보인다 한들 공격이 날아오리라.
그래. 우리 사이에 공은 필요 없지.
"간-"
피잉! 입에서 말이 나오기도 전에 머리카락 한 뭉텅이가 날아갔다. 머리를 옆으로 젖히지 않았다면 머리카락이 아니라 목이 끊어졌을 공격을 피해낸 천후는 그대로 오른손에 들고 있던 톤파를 왼손으로 옮겼다.
"다!"
그 잠깐의 동작 사이에 다시 한 번 은선이 날아들었다. 아주 잠깐 손에서 떨어졌던 톤파를 땅에 떨구려 왔다. 이런 미친 여자 상대로 막을 물건 하나 없이 맞붙는 건 죽여줍쇼 하고 목을 내미는 것이나 마찬가지!
카앙!
작은 불꽃이 뒤며 간신히 검격보다 빠르게 교차해 받아낸 톤파가 선을 막는다. 하지만 거기에서 전해지는 감촉이 작은 것을 느낀 천후는 그 즉시 생각할 것도 없이 몸을 뒤로 날렸다.
핏! 단박에 톤파를 치고 튕겨 올라온 검날이 그의 안면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것 역시 원래 궤도 그대로 들어왔다면 턱 아래를 꿰뚫고 입안을 꼬치처럼 꿰어버렸으리라.
"하!"
하지만 검귀의 공격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미 자세가 흐트러진 그를 향해 지면을 스치듯 달려오며 제 3격을 날린다. 올려 찌른 자세에서 바로 떨어지는 베기. 거의 최소 동작으로 펼쳐지는 검격이라 위력은 크지 않지만 피하기가 쉽지 않다.
"큭!"
그것을 왼팔의 톤파로 간신히 막아낸 천후는 그 무게를 그대로 받아 몸을 완전히 뒤로 젖혀 오른팔 하나만으로 백 텀블링을 하며 자세를 회복했다.
"허억! 허억!"
이 동작을 취하는데 그녀의 연속 공격이 없을 리 없다. 천후의 눈이 강호를 찾았다. 다행히 그녀는 앞에 있었다. 이제는 5미터 앞. 한 달음 만에 검만이 일방적으로 닿는 자리에.
앞에 서 있는 그녀는 웃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서, 상기된 얼굴로.
"제법이구나."
"…!"
그 말. 그 기색을 듣고 본 순간 천후는 알았다. 방금 그것은 그녀가 '논'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톤파 위치를 스위칭하는 그 잠깐 동작 사이에 공격을 가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고. 아주 잠깐 시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당연하지만…. 그건 전혀 전력이 아니다.
'예상은 했지만….'
천후는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던 예상을 수정했다. 그녀를 그녀의 조부보다 조금 위에 있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격이 다르다.
상대가 되지 않는다. 비교 대상이 되는 것 자체가 수치인 수준이다.
그의 몸이 자기도 모르게 떨려왔다.
이전. 그녀의 조부와 겨룰 땐 다치더라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 여자는.
'진짜 괴물이다.'
사람 수준이 아니다.
아니. 아니지. 이건 그녀에 대한 모독이다.
그녀의 검은 어디까지나 사람 수준이다.
사람이 넘을 수 없는 영역. 그 끝자락에 완전히 닿아있을 뿐….
콰악! 찢어져 피투성이가 손아귀로 톤파를 강하게 움켜쥔 천후는 가드를 올렸다. 그녀의 공격은 절대 전부 다 피해낼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막아야 한다. 그 의식을 끌어올린 천후는 쓰게 웃었다.
이제야 좀 더 확실히 실감이 났다.
'오늘 진짜 죽을지도 모르겠군.'
눈앞의 인영이 어느새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
검도삼배단이라는 말이 있다. 검을 든 사람을 맨손으로 상대하려면 그보다 단이 3배는 더 높아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말이다.
3배 정도가 아니다. 실제론 훨씬 더 엄청난 격차가 존재한다. 도저히 메우지 못할 정도로.
검을 들었다는 그 자체만으로 사람은 압도적인 리치를 얻는다. 게다가 칼이 날붙이인 이상 한번 맞았을 때 입은 상처는 훨씬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주먹처럼 막을 시도를 할 수조차 없는 공격들이 날아오게 된다.
당장 천후 역시 강호의 조부를 상대할 때 죽기 아니면 살기의 도박 수로 제압했었다. 그 정도가 아니면 신체조건 차이가 그렇게나 나는데도 상대할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 역시 강호와의 대련을 대비해 검을 막을 수라도 있는 무기를 준비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평생 검을 연마한 사람이다. 비슷한 길이의 무기를 들었을 때 그녀를 제압한다는 것은 꿈이나 마찬가지. 그것은 희주가 거의 초마다 한 번씩 제압당하는 모습을 보고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익숙한 권각술에 그대로 응용할 수 있는 톤파를 준비했다. 막을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접근할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결론적으로.
그건 그냥 꿈이었다.
"크윽!"
캉! 카캉! 카캉! 살벌한 쇠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천후의 몸이 조금씩 앞으로 다가갔다. 부딪히는 충격을 어떻게든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썼다. 하지만.
"윽!"
톤파 하나가 날아가 무방비가 된 오른쪽으로 파고드는 움직임을 보이자 천후는 신음을 내지르며 측면으로 돌 수밖에 없었다. 후면으로 피하면 거리가 벌어지니까 측면으로. 하지만 그것을 기회 삼아 그녀의 신형은 어느새 다시 말짱히 검만 일방적으로 닿는 거리로 빠져나가 있었다.
"아!"
움직임이 거의 사람이 아닌 수준이다. 분명 지면을 걷고 있는데 상체가 흔들리질 않는다. 그 때문에 지금 이 사람이 움직이고 있는지 아닌지 파악하는 게 너무나 힘들다.
그걸 어떻게 따라잡으면 이번엔 검격이 문제다. 중단 혹은 우반신만 내민 상태에서 튀어나오는 검격은 그 사전 동작이 제대로 보이질 않는다.
검을 든 자세 그대로 일직선으로 찔러오거나, 오른쪽으로 돌아 오길레 보려고 고개를 돌리는 그 순간 이미 베기 동작에 들어가 검을 뿌리고 있었다.
사람이 아니라 유령과 싸우는 기분이었다. 특유의 동작, 버릇 같은 것도 없다. 있다고 생각했더니 그건 일부러 인상을 남기려고 몇 번 보여줬던 가짜였다. 덕분에 팔에 긴 자상이 남았다.
'강하다…!'
신체능력은 분명 천후 쪽이 위다. 압도적으로 위다. 힘도 민첩성도 어느 것도 그녀에게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따라갈 수 없다. 몸동작에 군더더기라곤 전혀 보이질 않았다.
공격을 어떻게든 받아낼 순 있지만, 반격으로 연결할 수가 없었다.
'젠장!'
보통 이런 노모션 동작들은 아무리 대단한 무술의 고수들이라도 정적인 상태에서 갑자기 행동할 때나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이강호는 다르다. 모든 행동을 예측으로밖에 파악할 수가 없었다.
감으로 피하고, 감으로 막는다.
이딴 식이니 앞으로 나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러자니 완전 거북이 꼴. 언제 등딱지가 떨어나갈지 몰라 전정 긍긍하는 우스운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후."
그 모습을 지켜본 강호는 가늘게 웃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그녀가 보기에 천후의 행동은 현명했다.
톤파를 다루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단순히 잡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휘두름과 동시에 긴 막대를 앞으로 돌려서 턴으로 공격하는 방법도 있고, 아예 손잡이가 아니라 막대 부분을 손으로 잡고서 무기로 사용하는 방법도 위협적이다.
강철 막대기인 톤파를 그렇게 사용하면 굉장히 무서운 흉기가 된다. 그것만으로도 검과 비슷한 길이를 얻게 되니까. 괜히 미국 경찰들이 소지하는 무기가 아닌 것이다.
조금만 성질이 급한 사람이었다면 분명 금세 톤파를 그런 식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상황이 너무 불리하니 비슷한 사거리를 얻고 싶어 했을 테니까. 하지만 천후는 절대 함부로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톤파를 방어용으로 사용하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비록 지금까지 단 한 발자국도 제대로 가까이 붙어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참고 있었다.
'현명해.'
이런 면이 아주 현명하다. 강호는 최초 초격에서 왼손의 톤파를 날려버린 걸 지금 와선 약간 후회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그의 '쓸데없는' 시도를 유도할 기회를 망쳐버렸으니까.
그때 그 무장해제 이후로 그는 톤파를 손에서 놀리는 것을 완전히 집어치워 버렸다. 아예 세게 쥐고 있는데도 날아가는데 이상한 짓을 하면 바로 끝장이란 걸 눈치챈 것이다.
긴 막대를 앞으로 세우지도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맞부딪혔을 때 면적이 넓어져서 날아갈 수 있으니까. 턴은 뭐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래서는 전혀 나에게 손을 댈 수 없을 텐데. 어쩔 거냐, 천후야.'
복부를 찔러 들어가는 척하면서 거기서 바로 가슴을 노린다. 스웨이로 피할 것을 예상. 제대로 힘을 주지 않고 그대로 돌아 다시 오른쪽 옆구리. 스텝으로 회피. 그것을 따라가 좌상으로 올려치면 그것을 몸을 돌려 피해낸다.
여기에서 다시 강호도 자세를 회복해 세 번 찌르기. 머리. 명치. 어깨. 전부 다 궤도를 읽힌다. 어느 정도 눈이 적응했군. 대단하다. 하지만 읽혔을 뿐이지.
스칵!
"크윽!"
어깨 옷깃이 베이자 천후의 입에서 분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강호의 입가에서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아아. 정말이지.
'잘 움직이는 허수아비군.'
지금 상태론 단지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 난정을 뽑은 것이 후회될 정도의 나약함. 하지만 이 정도가 아니겠지. 슬슬 때가 됐을 텐데? 절감하고 있을 거다. 난 이 거리를 절대 쉽게 좁혀주지 않아.
네가 나를 읽은 만큼. 나도 너를 읽었지.
이대로라면 얼마 버티지 못하겠지. 지금 난 일방적으로 널 공격하고 있고, 넌 일방적으로 맞고 있을 뿐. 난 전혀 지치지도 않았지만, 넌 어느새 피투성이구나. 그런데도 시간을 끌 거냐? 응? 으응?
강호의 얼굴에 감돌던 홍조가 싸늘하게 식어, 그 자리에는 냉정한 얼음의 기색이 대신했다. 그것을 본 천후가 쓰게 웃으며 그녀의 안면을 노리는 찌르기를 목만 까닥여 피했다.
'어쩔 수가 없군.'
어떻게든 이 거리에서 다치지 않고 이기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방법이 없다. 외통수. 이 거리를 유지하는 한 그녀는 무적의 괴물이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의 차이일 뿐, 그가 이긴다는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미래를 보려면…. 결의가 필요했다.
단호한 결의가. 그리고 그건 이미 초저녁부터 되어있었다. 안 그래도 갑갑했다.
'애초에…. 막기만 하는 건 성미에 안 맞는다고!'
카앙!
왼 어깨를 노리는 찌르기를 원을 그리며 퉁겨낸 천후는 아주 약간 그녀의 균형이 무너진 그 짧은 시간 동안 숨을 크게 내쉬고는 몸을 앞으로 숙였다. 가드를 약간 내린 자세.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했다.
길이 외통수 속에 밖에 없다면 뛰어들 수밖에!
찌릿찌릿. 머리카락이 타들어 가는 감각에 강호는 다시 홍조를 피워 올렸다.
'올 테냐? 응? 올 거냐?'
그 거리에서도 고전했다. 지금 나에게 들어오면 베일 거다. 분명 죽을 게다.
그래도 올 테냐? 정말로 그럴 거냐?
하. 하하하하하.
"정말…. 남자답군."
강호는 균형을 추스르며 맞받아칠 준비를 취하며 그렇게 말했다. 그 눈엔 이미 자신이 무엇을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는지 모두 잃어버린 듯이 무심밖에 비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무심 넘어. 그녀가 말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미리 말해두마."
"뭘?"
"사랑한다."
"……."
"너를 정말 사랑하고 있다."
방심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저. 마음속에 품어두고 있던. 평생 내보이지 말고자 했던 진심. 하지만 이 자리에서라면 말할 수 있다.
말할 수 있고말고.
지금 이 순간만은. 자신의 분신인 애검 난정을 들고도 여인의 모습을 취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아름답게 웃으며 말한 그녀는 그러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벨 거다."
무신으로 돌아와 엄정히 선언했다.
그에게 안기고 싶은 미숙한 여자의 마음.
드높은 검의 다음 경지에 들고 싶은 검귀의 마음.
둘 모두를 담아.
"하하하. 하하하하하."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웃음밖에 안 나온다. 엉망진창인 여자. 정말 제멋대로군.
하지만 뭐…. 좋아.
싸움에 미친 선배가 좋아. 그렇지 않았으면 오히려 실망했을 거야.
그건 내가 아는 이강호가 아니지.
당신은 그게 어울려.
그러니. 어디.
"할 수 있으면 해봐!"
그의 몸이 앞으로 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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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주가 이러라고 부탁한 게 아니더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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