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135화 (135/324)

135화

내 기억의 시작은 검과 함께했다.

이제는 사진을 보지 않으면 얼굴을 쉬이 떠올리지 못하는 나의 아버님. 그분이 나에게 내 키보다도 큰 검을 손에 쥐여주며 했던 말이 지금도 생각난다.

'이 아이는 난정이라고 한단다. 네 동생과도 같은 아이니 잘 돌봐주렴.'

동생치곤 너무 컸지만, 나는 그저 신이 나서 그 검집과 검등을 만져보았던 기억이 남아있다. 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그 나이에 이미 나는 검에 익숙해서, 날 위에 손을 대는 것을 전혀 겁내지 않았다.

'강호야. 이 칼은 정말 소중한 사람에게만 뽑아 보여주렴.'

'소중한 사람?'

'응. 시집갈 때도 함께 가져가는 거야.'

'시집?'

'그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자상했지만 병약하셨던 나의 어머니. 세상을 뜨기 전까지 나를 여자아이로 길러주신 그분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에게 과연 여자라는 자각이 한 움큼이라도 남아있었을까?

행복한.

행복한 삶이었다.

엄격한 집안에서 분가해서 나온 아버지는 나와 어머니를 자신의 품에 안고 단란한 가족을 꾸려나갔다. 그 비호 아래서 나는 세상모르고 그저 칼 놀이를 좋아하는 아이로 자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날이 찾아왔다.

비행기 사고였다.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던 그 사고는 대한민국 사회의 안전 의식에 경종을 울릴 정도로 큰 사고였고.

그 사망자 안에는 나의 양친도 섞여 있었다.

어머님이 선천적으로 앓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미국으로 향했던 두 분은 그 뒤로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고 말았다.

'어리석은 것. 사람의 천수를 거스르니 그렇게 되는 것이다.'

'쯔쯔. 몸 약한 것을 들일 때부터 짐작을 했는데.'

'어떻게 한대요. 명맥이 끊겼는데?'

아직 부모의 죽음을 받아들이기엔 어린 나이였던 나는 장례식장에서 어른들이 나누는 대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았을 때. 도대체 얼마나 울었던가?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일이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커다란 전환점이 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섯 살이었던 나에겐 저세상으로 떠나 다시는 볼 수 없다는 말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부모님들께서 남기고 간 다섯 밤만 지나면 돌아오겠다는 약속이 깨지고. 열 밤. 스무 밤이 지났을 때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어느덧. 더는 손으로 셈하는 것이 어려워졌을 무렵. 나는 그제야 관념적으로 이해했다.

두 분을 다시는 뵐 수 없다는 사실을.

그때가 되어서야 장례식 때도 보이지 않았던 눈물을 펑펑 흘렸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 뒤.

부모님이 내 곁을 떠난 뒤 2년이 지났을 무렵.

'저는 세계최강의 검사가 되고 싶습니다.'

강해지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검이 좋았다. 검은 몸의 일부. 검은 나의 친구. 검은 나 자신. 그러니 검사가 되고 싶다는 것은 어린 마음에 당연히 품을 수 있는 소망이었다.

강해지면 다시는 그런 슬픔을 겪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 어린 마음을 담아 별에 빌었을 때.

조부가 다가왔다.

그가 말했다. 평생을 남자로 살겠다고 맹세한다면 그 꿈을 이루어주겠다고.

그때의 나는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몰랐다. 조부는 내가 남자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말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것의 연장 선상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나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겠다고 답해버렸다.

그리고 그 날이.

내가 여자아이로서 살 수 있었던 마지막 날이었다.

그날로.

부모님이 나에게 남겨주었던 어여쁜 색동저고리도.

좋아하던 동물 모양 머리핀도.

종아리가 드러나는 예쁜 치마도.

모두 모두 빼앗겨, 불타버리고 말았다.

어리석고 어리석던 나는 그럼에도 울음을 보이지 않았다.

그 어느 것도 더는 나에게 필요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강해지려면 필요 없다고. 그 맹목성이 눈을 가렸고.

그렇기에 베어냈다.

나는 그날 이후로 남자가 되었다.

그것이 내가 스스로 내 마음을 벤 최초의 날이었다.

*

‘도련님. 식사 준비가 되었습니다.’

‘네. 곧 가겠습니다.’

그 날 이후. 나는 정식으로 조부에게서 검을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려웠다. 칼 놀이를 좋아했던 만큼이나 인형 놀이도 좋아했던 나의 손은 무기를 잡기에는 턱없이 여렸다.

아니. 남자아이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제 한창 크고 있는 그 나이의 검술 수업이란, 사실상 가혹하기만 한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나는 조부의 가르침에 홀린듯이 빠져들어,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검 실력도. 실제 키도.

‘할아버님. 교실에서 제 키가 두 번째로 커요.’

‘하하하하! 좋다! 좋구나!’

초등학교에 들어가 또래 중 손꼽히게 큰 키였다는 것을 듣고 기뻐했던 조부의 얼굴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 시절. 내가 남자로서 자라던 그 시절. 그에게선 쉬이 미소를 찾아볼 수 있었다. 나 역시 그에게 칭찬을 받는 것이 좋아, 그럴 때마다 힘을 내는 조부의 모습이 좋아 더욱 기뻐하도록 노력하곤 했다.

식솔들은 모두 나를 도련님이라고 불러주었고, 조부의 아집과 나 자신의 고집. 그리고 주변 환경까지 합쳐져 내 성 정체성은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나는 자신을 남자로 여기는 것에 적응하였고, 이내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다.

신체가 또래보다 컸던 덕에 초경이 빨리 왔음에도 전혀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것은 나에게 한 달마다 찾아오는 ‘이상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학교에서 아이들이 나를 이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조부의 방침으로 생활 한복을 입고, 땋은 머리를 계속하고, 남자인 양 행동하고 다닌 것이 문제였다.

초등학교 시절은 어떻게든 넘겼지만, 중학생이 되어서부터는 그렇게 넘어갈 수 없었다. 나는 고립되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무력으로 나를 당해낼 사람은 또래에 아무도 없었다. 검을 사용하지 않아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나는 강하다. 고독해도 강하다. 그러니까 괜찮다고 되뇌었다.

놀랍게도 그런 나에게도 친구가 생겼다.

순수한 아이였다. 내가 남자라고 우겨도 생글생글 웃으며 받아주던 여자아이. 그녀와 함께하고 있다 보면 마음이 편해졌다. 중학교 들어서 처음 사귀었던 나의 친구.

아아. 하지만.

속삭임이 나를 사로잡았다.

‘사람과 인연을 맺어봐야 너에게 약점만 늘어날 뿐이다. 너에게는 검만 있으면 되지 않느냐?’

‘또 그때의 슬픔을 다시 겪어볼 셈이냐?’

‘잘라내거라.’

따랐다.

친근하게 다가오는 그녀에게 침묵으로 대응하는 것은 나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사흘이 지나자 그녀가 눈물을 보였다. 이레가 지났을 때 그녀는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열흘이 지났을 때.

그녀는 더는 나에게 다가오지 않게 되었다.

그때를 마지막으로 그녀와는 이야기를 나눠보지 못했다.

이제는. 그녀의 얼굴조차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멍청하게도…. 그 당시의 나는 신경 쓰이는 일이 줄었다고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역시 조부는 굉장하다. 이걸로 나는 한층 더 강해졌다고. 멍청이 같은 생각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그것은 조부가 그녀에게 영향을 받아 내가 여자처럼 행동하게 될까 봐 막으려고 든 것에 지나지 않았다. 어째서 그 시점에선 눈치채지 못했는지.

그러나. 놀랍게도.

나는 정말로 강해져 갔다.

부모를 여읜 슬픔을 베어내고. 간신히 생긴 청소년기의 소중한 친구와의 우정을 베어내고. 병약하던 병아리를 돌보는 것을 식솔들에게 맡기고 그 정을 베어내면서.

나는 점점 강해져 갔다.

나의 마음은 다른 뻗어 갈 갈래를 모두 잃고 단 한 점으로 집중되었다. 그것은 성과로 이어졌고.

‘크흐흐. 되었다. 너는 이제 완전히 나를 넘어섰구나.’

학교조차 그만두고 검에만 매진한 지 수년. 16세가 되었을 때. 나는 조부를 넘어섰다.

*

그 뒤론 세계를 돌았다. 중국, 동남아, 유럽을 떠돌며 검의 고수라고 소문난 이들과는 어떻게든 만나 겨루었다.

그리고.

‘대체…. 그런 몸으로 어떻게.’

‘…….’

3년. 19세가 된 그 해.

나는 더는 세상에 나와 같은 선상에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100여 번이 넘는 살상을 전제로 한 검투 끝에.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고서야 알았다.

눈앞에는 결투에서 패한 노신사가 두려워하는 눈으로 나를 올려보고 있었다. 무엇을 보는가 싶어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이 나를 향하는 눈빛임을 안 나는 그 순간 이제 무의미한 일은 그만두자고 생각했다.

이런. 결과가 뻔한 일은.

‘지루해.’

누구와 싸워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들이 뭘 하려는지 뻔히 보인다. 그것은 나를 가르친 조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 사람을 상대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내 눈은 이제 몇 년 전 나타난 괴물과 폭주한 마법사들에게 향했다. 망아의 나날이었다. 베고. 베고. 또 베고. 돈 따윈 아무래도 좋으니 싸울 수 있는 상대만 있으면 된다.

학교조차 제대로 다니지 않고 일생을 검에 바친 내게 싸움을 빼면 남는 것이라곤 없었으니까. 이제 와서 다른 가치를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날.

그 눈보라 치던 날.

쉘터 안에서 눈물 흘리던 아이들을 보기 전까지는.

처음에는 잘라내고자 했다. 그것은 내겐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나와 관련 있던 이들도 아니었다. 어디 보육원에 맡기고 잊어버리는 것이 오히려 당연했다.

하지만….

검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마음 어디에 인간의 정이 남아있었는지 모르겠다. 아이들을 돌봐줄 사람을 찾아주는 것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부조리에 대한 분노가 들끓어 올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아이들을 떠맡아버렸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아마 나 자신도 잘 모르겠지만, 아마 별것 아니었던 거 같다. 이 아이들도 사고로 부모님들을 잃었으니까. 거기에 나를 대입했었던 것뿐이었다.

단지 그것뿐이었지만…. 그 단 한 번의 곁눈질로.

내 눈에는 세상이 다시 들어왔다. 내 몰골이 눈에 들어왔다. 부조리하게 일그러져버린 한 마리의 검귀가.

등 뒤를 돌아보면 오직 내가 지금까지 베어온 수많은 사람의 절규와 그들에게서 흐른 피. 그리고 나에게서 잘라낸 수많은 어릴 적 소중한 것들이 피 웅덩이 위에 둥둥 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바보나 하는 짓인지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다.

나에게 절대로 벨 수 없는 것이 생긴 것은.

조부와 처음으로 검 외의 것으로 다툰 것도.

스물하나가 되던 해.

나는 가문을 뛰쳐나왔다.

*

그 뒤는…. 큰 실수가 있었다.

내가 개척한 검의 경지는 나에게 완전히 생소한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여했고, 나는 그것에 대해서 전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항상 인력이 달린 탓에 민간 일리미네이터 자격은 손쉽게 취득할 수 있었다. 경력도 있었고, 랭크도 B였던 덕에 모든 이들이 모셔가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러다 파급 디제스터를 잡는 의뢰가 들어왔고….

실수가 터졌다.

솔로잉에 익숙하던 나는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지 못했고, 인근의 모든 마법이 일시적으로 지워지는 바람에 파티플레이를 하던 모든 C랭크들이 크게 다쳤다.

나의 특성은 만천하에 알려졌다. 그리고 그 사건 이후로…. 나는 사실상 매장당했다.

완전히 배척받게 된 나를 간신히 받아준 사람은 셀레나였다. 로마이어의 마크를 받고 있어 제대로 된 활동을 할 수 없었던 그녀였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굴러간 게 용한 조합이었다.

그래도…. 퍽 즐거운 시간이었다. 입장 상 한국에 길게 머무르긴 힘들었지만, 그때마다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내 내면의 검귀는 여전히 피를 바랐다. 그 마음을 달랠 길은 세상에 없었다. 디제스터를 찾아 해메고, 유그드라실의 직속 의뢰를 받아 외국을 떠돌며 폭주한 마법사들을 제압하고 다녔다.

그렇게 삼십 명을 넘는 마법사들을 베어버리고 나니, 마법사들은 나를 메이지 슬레이어라 부르며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접근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나는 더더욱 고립되어갔다.

그렇게….

그러다가.

천후. 너를 만났다.

============================ 작품 후기 ============================

짐작은 하셨겠지만 강호 이름은 영감이 지어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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