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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137화 (137/324)

137화

지직. 지직. 노이즈가 들려왔다. 언제나 들려왔던 소리. 의미를 알 수 없는 시끄럽기만 한 소리.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것이 왠지 불길해 피해왔다.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다. 무슨 말인지조차 알아들을 수 없는 잡음에서 눈을 돌리려 필사적이었다니.

아니 애초에…. 나는 왜 이걸 '목소리', '말'이라고 단정 짓고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이봐.'

잡음이 또렷해지며, 목소리로 변했다.

순간 나는 이 목소리가 매우 익숙하다고 느꼈다. 들은 적이 있다.

어린 시절에.

"이봐."

어느새 목소리는 더욱 또렷해져 귓가에 직접 울려 퍼지고 있었다. 선배에게 칼을 맞고 의식이 날아갔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이런 목소리가 들리는 거지?

"대답을 해. 들릴 텐데?"

"……."

눈을 떴다. 그것은 역시 의식 너머여서인지. 검은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다. 실제 내 육체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자빠져있겠지. 덕분에 약간은 냉정해질 수 있었다.

"넌… 뭐야? 사하른가 하는 남잔가?"

이렇게 물었지만, 나는 그가 내 몸에 깃들었던 악령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놈은 그런 게 아니다. 그런 잡스러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알면서 물어보지 마. 아. 얼마 만이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눠보는 게."

"……."

이야기를 나눴던 적이 있던가? 기억이 희미하다. 그런 내 마음을 읽은 것일까? 그가 답했다.

"아아. 됐어. 어차피 네가 어쩔 수 있는 영역이 아니지. 이런 잡스러운 이야기는 그만두자고. 이봐. 우리 좀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하자고."

"중요한 이야기?"

"그래. 너…. 살고 싶지 않냐?"

은근하게 잦아든 목소리가 마음속에 직접 퍼진다. 호수에 파문을 일으키는 것처럼 내 욕망을 자극했다.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내가 너를 살려주지. 대신에…. 아주 잠시만 몸을 빌려줘."

놈이 하는 말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지는 생존 욕구를 자극해왔다. 나라고 이대로 죽고 싶은 마음 따위 전혀 없지. 살고 싶다. 하지만…. 뒷내용이 마음에 걸린다.

"아아. 걱정하지 마. 네 여자들은 절대 건드리지 않아. 사흘 정도면 충분할 거야."

혹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다. 아주 잠시 몸을 빼앗긴 것만으로도 이 사달이 났다. 그런데 아예 몸을 맡기라고?

이번 사건으로 나는 정신 방어가 굉장히 취약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 이놈에게 몸을 넘기면 절대 다시 몸을 되찾지 못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읽은 걸까? 그것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번엔 조금 구슬리는 목소리를 내왔다.

"이봐. 그런 한가한 생각을 할 때가 아냐. 진리구현자에게 칼침을 맞은 거라고. 내 참. 주변에 대체 뭘 두고 사는 거야, 이대론 조금만 더 지나면 나라도 살릴 수 없어? 세 아이들은 아예 나오지도 못하고 있는데. 뭘 믿고 그렇게 딱딱하게 구는 거야? 이대로 죽고 싶어?"

처음엔 부드럽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조급하게 변해갔다. 나는 그 기색에서 초조함을 느꼈다. 아무래도 저 말은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도 나를 치료할 수 없단 말도. 그리고…. 내 몸을 빌리고 싶어 미칠 것 같다는 것도.

그럼 조금 여지가 생기지.

"…그럴 순 없어. 널 믿느니 죽는 게 낫지."

"너…."

"하지만 그래선 너나 나나 손해가 막심해. 그렇지? 그러니…. 너의 힘만 나에게 내놔봐. 그래야 너도 다음 기회를 노릴 거 아니겠어?"

"……."

의식 속이 침묵에 잠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점점 의식이 커피에 올린 크림을 수저에 저었을 때처럼 흐트러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이것이 죽어가는 감각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가 되어서야 놈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너…. 이대론 진짜 죽는다? 솔직히 나에겐 그렇게 아쉬울 게 없어? 이제 막 생긴 여자들이나 돈이 아깝지도 않아?"

이건 꽤 아팠다. 아깝다. 돈은…. 뭐 그렇게 심각하게 아깝진 않지만. 여자는 아깝지. 희주 씨…. 아이들…. 다른 사람들 모두….

'"죽으면 아무것도 아니야. 사흘이 너무 길었어? 좋아. 하루. 하루로 줄여줄게. 어때?"

녀석의 목소리는 이제 다급하게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목소리 속에서 위선을 읽었다. 내가 사람의 감정을 읽는 것에 도통해진 것이 아니라, 이 녀석에게 숨기는 재주가 별로 없는 거다.

이 녀석은 마치 꿍꿍이가 있는 어린아이처럼 뻔히 보이는 태도로 칭얼대고 있었으니까. 다그치고, 어르는 목소리를 내면서도 그 속엔 은근히 자신이 왜 이런 짓까지 해야 하는지에 대한 불만과….

그러면서도 거절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을 조금씩 흩뿌리고 있었다.

왜 불안해하는 거지?

생각의 방향을 그쪽으로 잡았다. 내가 죽어버릴까 봐? 아마 이게 가장 타당하겠지. 하지만…. 내가 죽는 걸 걱정하는 것치고는. 숙주를 잃을까 봐 걱정하는 것치고는 절박함이 너무 부족하지 않나? 뭔가 다른 걱정을 하는 모양인데.

"윽?!"

"역시."

생각을 읽나 보군. 하지만 어린애가 남의 생각을 읽어봐야 교활해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이런 장소에선 더더욱. 뭘 걱정하는지 알 것 같군.

"이, 이 자식! 얼마간 주고받지 못하는 사이에 혼자서! 차사하게!"

"무슨 소린지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다음에 보자구, 친구."

"크윽! 이 빌어먹을 트랩!! 두고 보자! 아무리 메이ㄱ-----------"

치익. 치지지이이이이익.

깨달은 그 순간, 목소리는 다시 노이즈로 바뀌고 귀를 시끄럽게만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어지러운 의식 속에서도 그 소리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대체…."

말려들어 가는 의식만큼이나 생각이 어지러웠다. 이번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 전체가 영문모를 것투성이다. 하지만 이것들을 생각하는 건 나중이다. 일단은…. 목숨부터 건져야겠지. 다행히 이건 정체 모를 목소리가 어느 정도 힌트는 줬다.

"그냥 놔둬도 살지도 모를까 봐 걱정한 거겠지. 분명."

놈이 말하는 뉘앙스를 들어보면 몇 가지를 알 수가 있었다.

놈이 몸을 지배할 수 있는 건 사하르라는 남자처럼 내 몸 하나라는 점.

놈은 사하르와는 달리 내 허가가 없으면 몸을 받을 수 없다는 것.

놈에게 나를 살릴 수 있다는 수단이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죽으면 모든 게 끝장이라는 점. 이렇게 네 가지였는데…. 보험을 두지 않은 상태에서 저렇게까지 여유로워질 수가 없는 법이다. 정말로 절박하면 지금보다 100배는 더 윽박질러야지.

상대가 어려서, 연기가 미숙해서 다행이다.

"후…."

의식을 집중한다. 당장에라도 생각을 그만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다. 살아야지.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

지금쯤 내 앞에서 세상 다 끝난 것처럼 울고 있을 사람도. 이대로…. 나자빠져 죽을 순 없어!

그렇게 생각하며 나-영천후는 눈을 떴다.

*

"……."

눈을 뜬 앞에는 흙바닥이 보였다. 시간이 지나질 않은 건지. 아니면 그 이후로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건지는 스스로 판단하기 힘들었다.

"으…!"

간신히 무릎을 꿇어 상반신을 일으키자 그와 동시에 입에서 피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검이 대체 어디를 꿰뚫은 건지 모르겠지만 이건 진짜 심각해 보였다. 한편, 그가 몸을 일으키자 옆에서 허망하게 주저앉아있던 강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천후야!"

"아……."

뭐라 말을 하고 싶은데, 도저히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결국 말로 뭘 하고자 하는 건 포기한 천후는 싸늘하게 식은 두 팔을 간신히 움직여 검 자루를 잡았다.

칼이 주요 장기 어딘가를 관통했다. 이 상태에서 칼을 뽑아내면 돌이킬 수 없어질 수 있지만, 천후의 본능은 어서 이 검을 뽑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외쳐댔다. 그 외침에 따라 그는 팔에 힘을 줬다.

“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뽑아낼 수가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얼음장처럼 얼어붙어 감각이 완전히 사라진 손과 당장에라도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손가락으론 그것에 그저 손을 올리는 것만이 한계였다.

하지만 그 순간.

머릿속에서 다른 생각이 들었다.

한계? 이게 내 한계라고?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렇잖아? 놈이 다뤘던 힘을 내가 다루지 못할 리가 없어!

그렇게 본능이 소리친 순간.

그의 몸에서 희미한 홍적의 기운이 맺혔다.

강호의 앞에서도 마지막까지 힘을 잃지 않고 있던 신위의 기운이…. 천후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흐어아아아악!!!!!”

푸칵! 그 힘을 빌려 간신히 몸에 박혀있던 검, 난정을 뽑아낸 천후는 숨을 헐떡였다. 그 순간 몸에서 피가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엄청난 기세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천후야!”

그것을 본 강호는 그가 정말로 마지막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급하게 다가와 그의 몸을 받아냈다. 그의 몸은 이미 시체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물컹.

“히약!”

“흐….”

어깨에 기대던 얼굴을 떨궈 가슴에 파묻은 천후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보았다.

“너!”

이 급한 상황에 무슨 짓을! 깜짝 놀란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지만, 그 순간 그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켈록, 켈록!”

질퍽…. 단숨에 그의 입과 환부에서 튀어나온 피로 그녀의 옷이 젖어 들어갔다. 그제야 강호는 이것이 그가 그녀를 위해 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한 방으로 자신은 무사하고, 그녀를 원망하고 있지도 않다는 것을 보여서 그녀가 정신을 차리게 한 것이다.

…꼭 그런 의도만 있던 건 아니지만, 어쨌든 적어도 강호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너! 이 와중에서까지!”

“후욱…. 후욱….”

그렇게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와중에서까지 내 마음을 신경 써주고 있단 말이냐? 강호의 눈에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조금 정신을 차린 그녀의 입에서 찢어지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지부장님!!!”

그 외침과 동시에 그녀의 앞에 큐브 엘리베이터가 내려섰다.

*

대수술이었다.

강호의 검은 심장 바로 옆을 완전히 꿰뚫어버렸다. 마법 치료가 전혀 통하지 않는 이상, 유그드라실 의료진이 할 수 있는 것은 최소한의 연명조치 외엔 없었다.

수술은 지상 병원에서 극비로 행해졌다. 유그드라실 측에서 완전히 다른 이들이 접촉하는 것을 차단했다. 그것은 그의 가족이나 다름없는 희주나, 칼을 꽂았던 이강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 최고의 병원이라 불리는 A대학 병원의 최고 의료진이 전부 붙었는데도 쉽지 않았다. 보호자 대기실의 환자 수술 예상 시간은 5시간 이상이 떴고. 실제로는 7시간 이상의 수술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그의 수술은 성공했다.

수술을 마치고 나온 의사는 가족과 보호자 신분으로 와있는 최완에게 수술 경과를 설명했다.

"굉장한 생명력입니다. 심정지가 한 번이라도 일어났다면 분명 죽었을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관통되었던 폐가-"

"……."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소견을 듣고 있던 최완이 그대로 그의 머리에 손을 짚었다. 그 순간 의사의 눈이 풀리며 그대로 입을 벌린 채 가만히 서 있었다.

"힉!"

곁에 있던 다른 의사는 그가 사람의 이지를 제압했다는 것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치려 들었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중년의 남자는 어느새 그의 앞에 나타나 이마에 손을 올리고 있었으니까.

금기 중의 금기. 하지만 최완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용서하게."

"!"

그 뒤론 순식간이었다. 수술실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간 그는 모든 의사들의 이지를 제압하였다. 그 중 한 명에게선 관련 문서와 데이터가 남아있는지까지 알아내 그것들까지 소거했다.

그뿐만 아니라 유그드라실 마법사들까지 협력하여 그가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우고 조작했다.

"후우…."

낮은 한숨을 흘린 그는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금기를 범하는 것은 아무래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작업이 남았다.

최완은 이제 안정만 취하면 된다는 판정을 받은 천후를 유그드라실의 메디컬 센터로 옮겼다. 놀라울 정도로 호전된 그의 상태에 감탄하는 회복 마법사들을 전부 내보낸 최완은 죽은 것처럼 누워있는 천후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장하구나."

장시간의 수술을 마치고도 제대로 수분 섭취를 하지 못해 말라붙은 입술이 안쓰럽다. 최완은 그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다가 그의 이마 위에 커다란 손을 얹었다.

"네가 마지막까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으니, 나는 그런 너를 도와주마, 천후야."

그가 낸 목소리에 답은 없었다. 최완 역시 바라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영창과도 같은 목소리가 흘렀다.

"메이거스 애플리케이션 실행. 개방된 A문 재폐쇄. 허용 마력 랭크 B에서 S. 특수 SA. 주 인격 유지. …정신 내 모든 불순물 제거."

"쿠헉…!"

순간, 누워있던 천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동공이 좁쌀만 하게 좁아진 그는 덜덜 떨며 최완을 노려보았다.

"최완! 네놈이…!"

"남아있을 줄 알았습니다, 사하르. 당신이 원한대로 지킴이의 역할을 해드리도록 하죠."

"아냐! 내가 원한 것은 이런 방향이!"

"당신의 의도까지 완전히 따라줄 필욘 없지 않습니까? …사라져라. 망령."

"크아아악! 네이노오오오옴! 이대로, 이런 소꿉놀이가 언제까지고 계속될 거라 생각하지 마라! 아아아아아아아아악!"

발작적으로 발버둥 치던 그의 몸이 마지막 비명을 끝으로 바르르 떨리다가 멈췄다. 그제야 천후의 이마에서 손을 뗀 최완은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센터에서 나왔다.

문 옆에 선 그는 늘 피우던 시가를 꺼내 연기를 내뿜으며 중얼거렸다.

"…저도 그렇게 낙관이기만 한 놈은 아닙니다."

연기가 덧없이 흩어진다. 그것을 쓸쓸히 바라보던 최완은 그러다, 안쪽에서 누워있는 자신의 양자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저 가능성이 보이기에 그것을 믿을 뿐."

의식을 잃은 채 누워있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그 자리를 떴다. 이제… 다시 그를 다른 사람들에게 돌려줘야 할 때니까.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쿠폰,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챕터 2 종료가 머지 않았네요.

치명적인 오타가 있어 수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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