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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138화 (138/324)

138화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병원 천장이었다. 심각한 상황이지만 천후는 한가롭게도 참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일만 생겼다 하면 병원 신세를 지니. 전용 병원이라도 하나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주인님!"

그때. 그녀의 곁을 지키던 희주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이 와중에도 의사를 부르는 콜버튼을 누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

안심시켜 주려고 입을 벌리자 입 근처의 숨결이 전부 흩어지지 못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야 천후는 자신이 산소 호흡기를 착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몸엔 드래곤과 맞서고서 정신을 차렸을 때보다 훨씬 많은 장비들이 붙어있었다. 그땐 그나마 외상이 전부 나아있기라도 했지, 지금은 가슴에 붕대가 감겨있었다.

'잘도 살아있군, 나.'

사람의 인체를 부수기 위한 무술을 익힌 만큼 인체에 대한 공부는 천후도 조금은 해뒀다. 그리고 강호가 찌른 자리는 심장은 간신히 피했지만 아예 관통되고도 살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의문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것들을 지금 당장 해결 보기엔 그의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간신히 의식을 회복했지만, 금세 다시 눈이 감기려 들었다.

"후우…."

입을 제대로 움직일 힘도 없었다. 하지만 일어나자마자 눈물을 보이고 있는 이 여자를 안심시켜 줘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천후는 자기 손 위에 올려진 그녀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주인님…."

그 뜻을 알아준 것인지, 희주의 동요는 크게 잦아들었다. 대신 그의 손을 양손으로 꼭 붙들고 말없이 그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보며 작게 웃은 천후는 다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조금은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라며.

*

천후가 정상적으로 의식을 완전히 회복한 건 그 후로 일주일이 더 지나서였다. 놀랍게도 그의 몸은 그 일주일 동안 놀라울 정도로 호전되었다. 검에 몸이 완전히 관통되었던 걸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환자인 천후는 물론 희주나 최완. 그리고 이미연까지 그것에 대해서는 서로 언급을 피했다.

미연으로부터 이젠 당분간 안정만 취해도 된단 이야기를 들은 희주는 아예 그를 집에서 모시려 했다. 어차피 마법 치료는 의미가 없는 이상, 이곳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그때. 최완이 말했다.

"이번 상처가 완치될 때까지에 한해서 천후를 일반 병원에 입원시키거나 진료를 받진 마시오."

"왜죠? 아버님."

"……."

순간적으로 날아든 아버님이란 호칭에 최완은 잠시 움찔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 넘어 얼음장처럼 차갑게 노려보고 있는 희주를 마주 본 최완은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귀찮아지니까. 약속하지 못하겠다면 내려갈 수 없소."

"…알겠습니다."

말과는 달리 불신의 시선을 내보인 희주는 천후와 함께 큐브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 뒤를 최완이 따랐다. 희주의 부축을 받은 채 강하를 기다리던 천후는 뻣뻣하게 굳어있는 최완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저씨."

"묻지 마라. 아무것도."

"……."

"아무것도 대답해줄 수 없어. 지금은."

"지금은…. 이죠?"

"……."

"언젠가 속을 터놓을 수 있는 날이 오긴 하는 겁니까?"

최완은 한일자로 입을 다물고서 다시는 열지 않았다. 다만 표정으로 그 역시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천후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입을 몇 번이나 어물거렸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말해주셔야 할 때가 올 겁니다. '아버지'. 오게 할 거니까."

아직 가누기 힘든 몸을 움직여 최완의 손을 꽉 잡았다 놓은 천후는 그렇게 말하고는 유그드라실을 떠났다.

그들이 떠난 자리를 바라본 최완은 몇 번이나 손을 움켜쥐었다 폈다. 온기는 사라졌지만, 의지는 그 안에 남았다. 허나….

"…기다리마."

가만히 눈을 감은 최완은 주먹을 굳게 쥐며 중얼거렸다.

*

자택으로 돌아오자 곧장 셀레나와 아이들이 반겼다. 특히 아이들이 반겼는데 몸 상태가 워낙 나빠 제대로 안아주질 못하자 엄청나게 걱정스러워했다.

난장판이 되어버렸던 집안은 그가 유그드라실에 누워있던 사이에 다시 깔끔하게 정리되어있었다. 셀레나의 이야기론 유그드라실의 마법사들이 파손된 기물을 전부 수거하고, 벽이나 바닥에 남은 상처만 그들이 보수. 그 뒤에 나머지는 인테리어 공사를 맡겼다는 모양이었다.

“철저하네.”

그냥 사람을 부르면 의심받는다 이건가? 인상을 찌푸린 천후는 그 외의 일처리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확인했다.

“노들 섬에서 일어났던 일은…. 화재 처리로 끝났다나 봐. 나랑 희주는 함구해달라고 경고를 받았어.”

“진리 구현자인 강호 씨에겐 마법이 통하지 않으니 그렇게 조치한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아마도….”

“…….”

천후와 그녀들의 기억 역시 변형되었을 거라고 짐작하는 희주의 말에 천후는 말문을 닫았다. 엄청난 규모의 인식 조작이다. 거의 유례가 없는 수준이 아닐까? 지금 와서 생각해도 왜 이렇게까지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천후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역시 유그드라실은 위험하다. 아니. 위험한 정도를 넘었다. 이 마법사들의 모임은 지금 당장이라도 인간 전체를 초자연적으로 지배할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 힘의 일부. 1/10도 안 되는 전력이 풀렸을 뿐인데도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난 사태를 지워버릴 정도의 힘이라니. 그 편린만으로도 공포를 느끼게 하기 충분했다.

저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데도 마구 휘두르지 않고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했지만…. 한편으론 어째서 이러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세상 전체를 뒤집어버릴 수 있는 힘을 손에 쥐고도 어째서 휘두르지 않는가? 단순히 그것이 마법사들의 본능이라서? 금제라서? 그런 영역이라면 자신을 지배했던 사하르는 뭔가? 군인들을 정신 지배해서 날뛰었던 박찬휘는 뭔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확신할 수 있는 건….

‘내가 가려는 길이 상당히 멀단 거지.’

과연 자신이 텔레포트 시스템 등을 정착시키고도 저만큼의 자제심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바로 확신할 수 없었다. 단지 감. 예감으로 그들의 행동을 어느 정도 벤치마킹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만 느낄 뿐이었다.

“후우…. 아 그런데 선배는?”

자리에 누워서 한참 생각을 정리하던 천후는 문득 강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친란이야 바빠서 오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강호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아. 그게….”

천후의 물음에 셀레나는 곤란하단 듯이 시선을 슬쩍 피했다. 뭐지? 천후가 고개를 갸웃하자, 함께 있던 아이들이 침울하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강호 서방 틀어박혔어.”

“나오기 싫어해요.”

“응?”

이게 무슨 소리야? 알아듣기 힘들어서 셀레나를 바라보니 그녀는 한숨을 내쉬면서 좀 더 정확히 설명해주었다.

“볼 면목이 없대. 도저히 얼굴 마주 댈 자신이 없다고 그러더라. 막 목소리도 다 죽어가고.”

“…….”

“중국 언니한테 방 따로 쓰게 해달라고 해서 요즘 각방 써요.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사춘기야!”

“옆방에서 밥 가져다줄 때 빼곤 안 나와! 게을러터졌어!”

아이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지 않은 덕에 그녀의 행동이 영 탐탁지 않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그 강호 서방이 내 가슴에 칼을 박았어’ 같은 소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천후 역시 곤란해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좀 찾아가서 이야기해보지 그랬어.”

“가봤어. 그런데 문을 안 열어주는 걸 어떻게 해. 억지로 따고 들어가 봐야 쇠고집이고 힘으로 끌고 나올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군. 몸이 좀…. 괜찮아지면 내가 가볼게.”

지금은 도저히 농담으로도 싸돌아다니겠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밤이 되어 셀레나와 아이들이 돌아간 이후. 그의 몸을 꼼꼼히 타월로 닦아주던 희주가 말했다.

“강호 씨가 틀어박힌 데는…. 사실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네?”

“주인님께서 의식을 잃고 계실 때 한 번 찾아오셨습니다만, 그때 미연님에게 메디컬 센터 출입을 금지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조금 크게 일이 나서….”

“일이요?”

“미연님의 강호 씨의 뺨을 때렸습니다.”

“…….”

그때 오고 갔을 이야기가 어떤 것이었을 지야 뻔히 짐작이 갔다. 천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심했다는 생각과 동시에 미연이라면 그럴 만 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완전히 신위를 연발로 갈길 수 있는 천후가 최완 및 유그드라실 마법사들과 전력으로 맞붙는 것보단, 이강호를 통해 피해를 최소화시키고 살아 돌아오기까지 한 지금이 가장 최상의 상황이지만….

경위라는 게 있는 법이고, 뭣보다 미연은 천후에 관련해선 예민해지는 게 당연한 사람 중 하나였다.

“어서 몸 좀 추스르고 만나러 가야겠네요.”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 너무 일이 크게 터졌다. 당장 수습할 수 없는 게 아쉬울 정도로. 이제 강호는 DS에 없어선 안 되는 사람이 되었다.

아니 일리미네이터 일을 제외하고서라도…. 천후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이 회복되는 동안 강호가 터무니없는 결정을 내리지 않았으면 하고 진심으로 걱정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다음날. 천후는 이브와 에바를 통해 강호가 한국을 떠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

“후우….”

공항에 도착한 강호는 여권과 중국행 비행기 표 시간을 확인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요 며칠간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들.

많은 생각들이 들었지만 강호는 이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그의 곁에 계속 있을 면목은 없었다. 그렇다고 그를 떠나고선 한국에서 머무르게 되면 결국 그의 배려를 받게 될 것이다. 자신에겐 그럴 자격이 없었다.

‘당신이 무슨 자격이 있다고!’

미연에게 맞은 뺨은 아직도 불이 난 것처럼 아팠다. 실제로 상처가 남아있기도 했지만, 그녀의 말이 말 그대로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를 결국 상처 입혀버린 자신에게 자격 따윈 없었다.

중국에서라면 근근이 일을 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녀에겐 평생 써도 남을 정도의 돈이 있었다. 오히려 기부를 하면서 살아도 남지 않을까? 그렇게 타국의 구석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자고.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강호 서방, 바보! 멍청이!’ ‘안 갈 거야! 어딜 가!’

하지만 아이들이 자신과 함께하는 걸 반대한 건 예상 외였다. 하지만 그 부분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 아이들이 자신의 서포터, 오퍼레이터가 아니라 할지라도…. 천후라면 분명 아이들을 끝까지 돌봐줄 테니까.

오히려 자신들이 원하는 환경에서 살아가니 더 마음이 편하지 않을까?

그렇게.

아이들이 울면서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강호는 자신을 속이며 이 자리까지 왔다.

비행기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강호는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국 게이트로 향했다.

“이렇게 가면…. 다시는 만나기 어렵겠지.”

자기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와 버렸다. 그녀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 그래. 이런 식으로 그에게서 멀어지면…. 이제 진정 그와 다시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마 학이 떨어지지 않을까?

그것은 아쉽다. 강호는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비명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무사히 회복한 그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다시는 그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귀를 덮어주던 딱딱한 손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아쉬움 투성이다.

어느덧 눈썹이 떨리고 있었다. 강호는 자신이 이전에 허세를 부렸음을 인정했다.

눈물이 헤픈 사람이 아니라고 한 것을….

“가자.”

이젠 정말 떠날 때다. 조용히 몸을 돌린 강호는 느린 발걸음을 옮기려 들었다. 아아. 하지만 마지막으로.

그의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다고 생각하며.

그때.

“선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념 속에서. 꿈에서도 그려왔던 목소리. 그녀의 발걸음이 멈췄다. 환청인가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다시 한 번 들려왔다.

“선배! 거기 서!”

“천후야.”

당황하여 몸을 돌리니, 환자복을 입은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상처가 벌어진 것일까? 가슴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그것을 본 강호의 표정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일그러졌다.

그동안 조금 더 그녀에게 다가온 천후는 손이 닿는 거리에서 멈춰 섰다.

“어디 가려고, 선배.”

“천후야, 난….”

“어딜 가려는 거냐고! 아이들까지 내팽개치고! 선배가 이런 사람일 줄은 몰랐어!”

“…….”

그 말에 강호는 어쩔 줄을 몰라 고개를 숙였다. 변명할 거리가 없었으니까. 그 모습을 바라보며 천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 진짜 이 허당. 사람 고생이나 시키고…. 나 절대 안정하란 소리 들었거든? 어쩔 거야, 대체. 사랑한다느니 어쩌니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해놓고서.”

“아, 아니. 그건….”

“됐어. 됐으니까…. 이리와.”

“…….”

아이들에게 소식을 듣자마자 희주에게 부탁해 공항까지 미친 듯이 차로 내달려오느라 천후의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하지만 할 건 해야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민 천후가 말했다.

“여러 번 말 안 해. 이리와.”

“아….”

강호의 눈꺼풀이 흔들렸다. 그 끄트머리에는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느리게 위로 올라왔다.

그의 손을 향해.

“바보 같은 여자.”

그것을 한걸음 더 앞으로 나와 콱 하고 낚아채서 잡은 천후는 그대로 팔을 당겼다. 그러자 그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의 품에 안겼다.

쇠 냄새. 그리고 남자의 냄새가 확 느껴졌다. 그녀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그것을 내려다보며 천후는 장난스레 웃었다.

“사람 이 꼴로 만들어놓고 어딜 도망가려고 해. 선배는 이제 아무 데도 못가. 종신 계약이거든.”

“그게 무슨 뜻…! 웁!”

놀라서 어물거리는 말이 더 나오지 않도록 입을 맞추며 허리를 세게 감아 안았다.

“으…. 으음….”

놀라서 한참을 눈을 치켜뜨고 있던 그녀는 이윽고 눈을 감았다. 눈가에 맺혀있던 이슬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입을 떼고서 그 눈물을 엄지로 훑어준 천후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런 뜻이지. 싫어?”

강호는 시선을 피하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어왔을 뿐.

그렇게….

해프닝 하나가 막을 내렸다.

============================ 작품 후기 ============================

최근 미숙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있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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