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엔체스터 호텔 웨딩홀. 평소에는 결혼식을 위해 쓰이는 이 공간은 오늘만큼은 파티용으로 변하여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오늘 이 자리는 대한민국 최초의 정규 공격대, DS 공격대의 출범을 알리는 자리였기 때문에.
"이렇게 보니 새삼 많네요."
"그러게…."
정장을 입은 채 그 자리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던 태원은 같이 입을 벌렸다.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일리미네이터 50인과 그들을 수행하는 서포터, 오퍼레이터까지 해서 150명가량이었다. 드래곤 사태로 사람들이 모이는 걸 자주보긴 했지만, 이렇게 전부 쫙 빼입고 모여있는 것은 또 처음이었다.
"이야기 들어보니까 일반 사원 대상으로 2차 파티를 또 가진다더라고."
"그땐 장소가 다르다던데?"
"그렇겠지, 아무래도?"
주변에서 쑥덕거리는 소리에 태원은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드래곤 퇴치로 번 돈이 많단 소리는 들었지만 이렇게 뻥뻥 내지를 거라곤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일리미네이터, 서포터, 오퍼레이터뿐 아니라 급식 업체, 프로그램 팀, 엔지니어는 또 따로 고용하고, 빌딩 관리나 주차 요원, 콜센터 직원 등까지 그냥 전부 정직원으로 채용해서 굴리는 걸 보고 그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외주나 파견이란 단어를 모르는 것 같았다. 그뿐만 아니라 마법사와 관련되면 위험할 소지가 있으니 경호 업체까지 그냥 사들이는 걸 보고서 그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 정도면 번 돈의 상당량이 다시 빠져나가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이렇게까지 할 줄이야…."
키메라를 단독으로 처리하는 장면은 모두가 보았다. 그는 사실 마음만 먹으면 혼자서도 세계에서 놀 수 있었다. 기업 따위 굴리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도 일부러 사람들을 죄다 고용해서 굳이 공격대를 만든다는 것은….
"정말로 혼자서는 상대할 수 없는 적을 대비하기 위해서…인가."
"응? 뭐가요?"
"아니. 아니야. 그냥…. 대단한 사장이라고."
"그쵸? 헤헤."
"……."
태원은 같은 테이블에서 싱글거리며 웃고 있는 키 작은 여자를 보고서 고개를 갸웃했다. 류호에서 근무하던 정소라라는 이름의 그녀는 어쩐 일인지 천후의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을 붉히며 좋아하고 있었다.
웃음 짓고 있는 것은 그녀뿐이 아니었다.
"후… 드디어 이런 날이 오다니."
흰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B랭크 일리미네이터, 하연은 자기들끼리 모인 테이블에서 감격에 젖은 목소리를 냈다. 일리미네이터 중엔 안정성을 중시하는 자들이 많았지만, 그녀는 향상심이 있었다.
여건만 된다면 좀 더 대단한 자신이 되고 싶단 마음을 항상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그것을 이뤄줄 남자가 나타났다는 것에 그는 하늘에 감사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의 공격대의 B랭크면 중역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눈매를 가늘게 뜨고서 립스틱이 발라져있는 아랫입술을 살짝 혀로 핥았다.
'좀 더 기회를 잡아야 해. 그러려면….'
인류 역사에 없는 공격대를 만든 남자다. 그렇다면 여자에게 주어진, 인생에 단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조커를 내밀 때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그녀는 어깨선과 가슴골을 고스란히 드러낸 드레스를 점검하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으흐흐흐…. 레이나드 씨. 오늘은 도망가지 못하게 해야."
"……."
나름 각오를 다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옆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자 소름이 돋아왔다. 각오를 다지다 못해 지나친 여자가 아예 입술에 침을 왕창 묻혀가며 양 주먹을 꾹 쥐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듣기라도 했는지, 저쪽 테이블을 돌고 있던 레이나드의 어깨가 흠칫 거리는 것이 하연의 눈에 보였다.
'부, 불쌍해.'
나이에 비해 최성아의 액면가는 굉장히 어려 보이는 편이다. 따지고 보자면 그녀 정도면 꽤 괜찮은 신붓감이긴 하리라. 모은 재산도 레이나드보다 많고. 하지만 어째선지 불쌍하다. 너무 노골적이라 피할 수밖에 없다.
하연은 눈에서 불꽃을 일으키고 있는 최성아를 흘낏 보면서 각오를 새로 다졌다.
'이렇게 질긴 여자는 되지 말자.'
응. 꼭.
"어이쿠. 뜨겁다, 뜨거워."
한편, 파티에 참가하느라 생전 입어본 적 없는 양복이 불편해 단추를 3개나 풀어헤친 남자, 주광현은 여자들을 보면서 코웃음을 쳤다. 그는 혀에 한 피어싱을 입천장에 대고 슬슬 굴리다가 말했다.
"이거 참. 이런 자리에 있자니 불편하긴 하네."
"그런 소리 말아. 저런 아량 발휘하기 쉬울 줄 알아?"
"킁. 그렇긴 하지."
마지막까지 로마이어를 보좌했던 남자, 차성준은 광현의 대답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 옆에서 풋 웃은 광현과 함께하던 다른 B랭크 여자가 광현의 앞 단추 하나를 잠가줬다. 그 꼴을 바라보며 성준이 낮게 말했다.
"당분간 입 닥치고 살고 있어. 그에게 우리 이미지가 좋은 건 절대 아니니까."
"알았어. 알았어. 너무 그렇게 날카롭게 굴지 말라고. 내가 애도 아니고."
이들 셋은 로마이어가 끝장나기 직전까지도 그에게 힘을 보태주던 B랭크들이었다. 그 외에도 두 명 정도가 더 마지막까지 그런 자세를 보였다. 총 5명.
그러나 로마이어는 끝장났다. 말 그대로 죽어버렸다. 마지막에 그를 배신하긴 했다지만, 그래도 그들의 입지는 완전히 박살 났다.
그중에서 그나마 성준이 로마이어 예치금을 균등분배하고, 자신들의 배당액에서 사망자 보상금을 크게 내는 제스쳐를 보내는 바람에 아주 간신히 수면 위에 빨대만 내밀고 숨만 쉴 정도는 됐었던 게 드래곤 사태 직후 그들의 입장이었다.
'당시에 그렇게 행동했던 건 이해할 수 있어요. 기분이 좋진 않지만. 대신 앞으론 그때 로마이어에게 하던 것처럼 저를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그 때문에…. 성준 일파는 떨어질 각오를 하고 DS에 지원서를 넣었을 때, 일부러 다섯 명을 전부 한자리에 모아 그렇게 천후가 물어오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B랭크라고 해도 외국에서 충당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싶어요. 그래서 한국인.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을 고용하고 있는 거고. 당신들을 제가 받아들이는 이유는 아직 이 정도입니다. 이 이상이 되려면 여러분들이 노력해야겠죠. 그럴 자신은 있습니까?'
대답은 하나였다.
"나도 사람 새끼야, 성준 씨. 그런 소리까지 듣고 생각 없이 굴 정도로 멍청하진 않아. 양복도 입고 왔잖아. 여봐."
"…그래."
팔에 팔찌랑 시계가 무슨 팔목 보호구처럼 주렁주렁 매달려있고, 양복바지엔 체인이 달렸지만…. 그가 양복을 입고 온 것만으로도 기적이긴 하다. 로마이어 땐 보통 회의할 때도 음악이나 들으며 껌이나 씹던 놈이니까.
"하여간…. 당분간은 좀 몸 사리자고. 그라고 해서 성인군자나 그런 게 아니야."
"흐응. 뭐. 그렇다 치자구."
광현은 웃었다. 글쎄. 어떨까. 그의 기준에선 이미 성인군자 급이다. 당시 얼마나 깝깝한 상황이었는지 떠올려보면. 자신이 천후 입장이었다면? 당연히 날려버렸다. 차성준이고 주광현이고 간에. 이제 입김만 불어도 날아갈 놈들이 되었는데 목숨만 붙여준 것만 해도 굉장한걸.
'조심해야지.'
웃으면서도 광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로마이어를 조지는 광경은 똑똑히 보았다. 그때 그는 천후가 진짜로 빡돌면 어떻게 되는지 확실히 느꼈다. 죽어도 곱게 죽어야지 그런 식으로 죽고 싶진 않았다.
폭력에 익숙한 짐승 같은 자인만큼, 더 위의 폭력을 보자 수그릴 마음이 드는 것이다.
파티장에 각자의 생각들이 맴돌았다. 그때였다.
"나온다."
누군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그 말을 신호로 파티장이 조용해졌다. 그와 동시에 임시로 만들어둔 단상에 한 여성이 올라섰다. 셀레나였다.
"DS 수석 비서. 셀레브리아 로즈 루셀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여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함께하게 되어 기쁩니다."
평소 천후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보이는 철없는 모습관 다르게 완전히 대외용으로 무장한 그녀의 목소리는 냉정한 기계와도 같았다. 한눈에 봐도 서양인 외모의 그녀가 한국어를 능숙하게 하자 다들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개 중에는 다른 이유로 놀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셀레브리아? …아! 정태 동생인가?"
"아. 그런가? 맞네…. 이야. 많이 컸군."
"어이구, 화상들아. 난 면접 볼 때부터 알아보고 있었다고."
연차가 조금 있는 일리미네이터들 사이에서 중간중간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녀의 눈썹이 아주 살짝 흔들렸지만, 곧 대외용 페이스로 돌아온 그녀는 준비된 식순을 진행해 나갔다.
"그럼 지금부턴 이 자리를 빛내주실 귀빈 여러분들을 소개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어렵게 시간을 내셔서 이 자리를 찾아주신 해명진 대통령님이십니다."
"켁!"
"푸헙!"
착석하고 있던 모든 사람이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버릇없는 광현 조차 다리에 용수철 달린 듯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기립해버렸다. 아무리 꼭두각시라는 말을 듣고 있다고 해도, 일국의 대통령. 그를 이런 가까운 거리에서 만나볼 기회는 흔치 않았다.
단상에 오른 해명진은 황망해 하는 얼굴들을 보면서 미소 지으며 손으로 앉으라고 표시를 했다.
"하하하. 너무 긴장들 하지 말아요. 오늘 이 자리는 저도 즐기려고 온 거니까. 국기에 대한 경례 같은 거 안 합니다?"
"아. 아하하."
"으헤헤…."
긴장을 풀어주려고 한 말이었지만, 아무도 긴장을 풀지 못했다. 그저 조크를 받아줘야 한다는 반사적인 웃음만이 회장에 조금씩 흐를 뿐이었다.
"국내에서 세계를 휩쓸고 있는 재앙에 맞서는 공격대가 국내에서 창설된 것은 정말이지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부디 여러분들의 명성을 세계에 떨쳐주세요. 할 수 있겠습니까?"
"네!"
한목소리로 답하는 모습에 기쁘게 웃은 해명진은 그러다 짓궂은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그리고 행정부 수장으로서 말하자면. 그때마다 세금도 잘 내줬으면 해요."
"으하하."
이번 말엔 많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웃었다. 그 말을 끝으로 해명진은 자리에서 내려갔다. 그 뒤로는 여, 야당 정치인. 디제스터 처부장 등의 코멘트가 있었다. 해명진이 짧게 끝낸 만큼, 그들도 긴 연설을 하진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회장을 빌려준 엔체스터의 친란이 직접 나와 고개를 숙인 이후….
"마지막으로. DS 공격대의 수장. 영천후 사장님을 소개합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박수갈채가 터졌다. 그 갈채를 받으며 양복 입은 남자가 회장 안에 들어섰다. 짧게 깎은 머리에 양복을 입었음에도 티가 나는 근육질의 몸. 180 중반에 달하는 키를 가진 남자였다.
그는 같이 회장에 들어선 여자와 함께 단상 위에 올랐다. 그녀는 그가 중앙 자리에 오자 자연스럽게 뒤로 빠지며 가만히 섰다. 순간 모든 이들은 그녀가 지금까지 대외적으로 거의 모습을 보인 적이 없던 그의 서포터라는 것을 알았다.
'아….'
그녀를 바라본 순간 하연은 기가 꺾였다. 긴 흑발에 잡티 하나 찾을 수 없는 흰 피부. 화장한 것 같지도 않은데도 확실하게 들어오는 붉은 입술이 그녀의 눈을 사로잡았다.
인간 같지 않은 아름다움이었다. 조형물? 인형이나 마네킹 같은 인공물의 아름다움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눈에 희미하게 감도는, 앞에 선 남자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그녀가 인간임을 증명하는 열기가 느껴졌다.
외양은 교복만 입히면 고등학생으로 보일 정도로 앳되다. 그러면서도 여성으로서 가질 무기는 전부 가지고 있는 그 여자는 단지 등장만으로 그를 노려보고자 생각했던 이들을 잠재우기 충분했다.
'역시 예쁘다.'
한차례 그녀를 만나본 적 있던 정소라는 양손을 꼬옥 쥐고서 그녀를 올려보았다. 그것은 동경. 천후 뿐 아니라 그녀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졌다.
그런 마음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흑발 여자의 눈은 오로지 자신이 사랑하는 이에게만 향해있었다.
그 시선을 받는 남자의 입이 열렸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DS 공격대를 만들게 된 영천후라고 합니다."
그의 허리가 한번 크게 숙어졌다. 다시 한 번 박수의 갈채. 고개를 든 남자는 이 자리를 찾은 모든 이들을 한 번씩 죽 둘러보았다.
많다. 귀빈까지 합치면 200명쯤? 익숙하지 않았다. 이런 많은 사람 앞에 서는 건.
하지만 어째선지 그렇게 무섭지 않았다. 가슴은 두근거렸지만 그건 긴장의 두근거림이 아니었다. 천후는 이게 어떤 감정인지 알았다.
즐거움.
천후는 그 순간. 여러 사람이 고심하여 만들어준, 암기하고 있던 대본을 머릿속에서 내려놓았다. 이건 아주 훌륭한 대본이지만.
'미안해요. 희주 씨. 셀레나. 친란. 레이나드 형. 그래도 여기선 나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게 맞는 것 같아.'
20살 청년의 밝은 목소리가.
"여러분들. DS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어쩌다 보니까 150명이나 받아버렸는데. 각오들은 하셨죠? 돈을 주는 만큼 확실히 부려 먹을 겁니다. 한 달에 네다섯 건 뛰고 쉬고 이런 꿈같은 나날은 끝난 줄 아세요."
파티 회장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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