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155화 (155/324)

155화

천후가 DS를 만들기 전. 세상에는 4개의 정규 공격대가 있었다.

미국의 월드 리버티와 머니 크래프트.

일본의 라이징 선.

EU의 컨퀘스터가 그것들이었다.

그 중 '월드 리버티'의 수장. 패트릭 스튜어트와 마주한 천후는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서로 술잔을 비웠다. 소주와는 차원이 다른 독주였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라면 마실 수 있었다.

"영상 많이 봤어요."

"오. 그런가?"

패트릭은 천후의 말에 두꺼운 입술을 씨익 끌어올리며 웃었다.

패트릭 스튜어트. 세계 최초의 정규 공격대인 월드 리버티를 이어받은 A랭크 일리미네이터. 셀 수도 없는 경급 레이드를 치르고, 멸급 디제스터 역시 처리한 또 하나의 세계적이 영웅이라 할 수 있었다.

라즈베리의 말마따나 아메리카의 검은 태양이라 불릴만한 자격이 있는 남자. 일리미네이터들 사이에선 '아메리칸 워치프'라고 불리기도 했다.

"드래곤 사태 때는 미안하게 되었어. 도저히 갈 수가 없더군."

"어쩔 수 없는 일이었죠. 이해해요."

그의 공격대는 드래곤 사태 때도 대한민국에 구원을 오려고 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의 손익계산 때문에 결국 무산되었다.

대한민국에서 마지막에 가선 폭군처럼 굴었던 천후와는 달리 미국과 월드 리버티의 관계는 정부 쪽이 좀 더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면이 있었다. 미국은 월드 리버티를 자국의 제 2 군사력처럼 다뤘다. 세계에 출현하는 경급 디제스터를 무난하게 처리할 수 있는 정규공대의 존재로 세계에 압박을 넣고, 이득을 챙겨온 것이다.

월드 리버티는 이를 용인했고, 덕분에 미국 중심으로 설정된 세계의 체제는 여전히 공고하게 다져져 있었다.

"차가운 이야기이지만, 세계에서 일리미네이터에 대한 취급이 가장 좋은 것도 미국인 게 현실이지. 그러다 보니 우리도 국가에 어느 정도 협조할 수밖에 없어. 나도 그걸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안소니의 후계가 되기로 한 거였으니까."

천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월드 리버티 자체, 그리고 패트릭 본인도 미국 체제를 옹호하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관점에서 정부 측에서 필사적으로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것을 마지막까지 거절하고 나설 수는 없었으리라.

"그렇지만 드래곤 사태를 마지막까지 모니터링 해본 결과… 이런 말 하면 미안하지만 안 가길 잘했단 생각도 있어."

"왜죠?"

"공격대원 태반이 다쳤을 것 같으니까. 대한민국의 일리미네이터들은 우수하더군. 보면서 정말 깜짝 놀랐어. 배울 점이 많아. 특히 사망자가 적은 부부분에서 말야."

"열일곱 분이나 세상을 뜨셨습니다만…."

그 소리에 패트릭은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주먹으로 툭 치며 말했다.

"우울해 하지 마. 버디. 다른 곳이었다면 50이 넘어도 이상하지 않았어. 멸급 레이드에 '겨우' 60명이 참가해놓고 열일곱이면 기적 같은 생존율이네. 알 텐데? 자네들은 대단했다고."

드래곤까지 합쳐서 10년간 단 9체가 출현한 멸급 디제스터. 그 하나하나는 지독하게 강했다. 한 번 나타나면 그 국가의 총력이 투자되었고, 그것은 미국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나타날 때마다 늘 던전화가 불가능하기만을 하늘에 빌었고, 불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되면 100이고 200이고 전부 때려 부어 잡아냈다. 마법사만 투입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모든 병기가 쏟아 부어졌다.

그렇게 한차례 전쟁을 치르면 수십이 넘는 이들이 희생되곤 했다. 그것은 경급 디제스터를 상대하기 위해 엄격하게 훈련을 받는 월드 리버티 멤버라고 다르지 않았다.

"미국에서 나타났던 멸급 디제스터 '사파이어 길로틴'을 알고 있나?"

"월드 리버티가 중심이 되어서 잡아냈었죠? 영상은 여러 번 봤습니다."

"그때 조국이 잃은 일리미네이터가 40이 넘어. 200명이 투입되었지. 놈의 초기 패턴을 파악하기 위한 결사대에서 13명이 죽고. 2번째 진짜 레이드에서 27명이 죽고…. 하지만 데이터를 보니 드래곤의 패턴이 놈보다 훨씬 악랄하더군. 사파이어 길로틴은 범위가 넓고, 위력이 강력하긴 했지만, 광역 공격이 그렇게 많진 않았어. 그런 공격이 가장 위험해, 우리에겐."

패트릭은 잠시 그때를 회상했는지 술잔을 매만졌다. 순박해 보이는 그의 눈가는 어느새 일렁이고 있었다.

"패트릭."

"끄하아. 아니야. 친구. 괜찮다구. 이미 몇 년 전이야, 그게? 하여간… 돌아와서. 자네의 시도는 대단하다고 하고 싶은 거야. 자네의 존재는 이미 세계에서 독보적이야."

"……"

미소 지은 큰 몸집의 남자는 다시 한 번 건배를 나누며 입속에 술을 털어 넣었다. 그러다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쉰 패트릭이 말했다.

"그런데…. 음. 내가 이런 말을 해도 괜찮을까 모르겠어. 자네가 싫어할지도 몰라."

"괜찮아요. 당신은 나에게도 영웅이기도 합니다. 말씀하세요."

"그럼…. 실례를 무릅쓰고 묻겠네. 왜 하필 대한민국에서 시작했나?"

"……."

천후는 입을 다물고 패트릭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미소와 우울함의 경계를 오가던 그의 표정은 이제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변해있었다. 표정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대한민국. 좋은 나라지. 조국의 우방이고, 수십 년이나 우리와 길을 함께해온, 자신들의 손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쟁취해낸 이들의 땅.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일본보단 한국이 훨씬 마음에 들어. 개인적으론 말야. 비록 위쪽에 조금 이상한 놈들이 있긴 하지만."

"많이 이상하죠."

"그래. 많이 이상한 놈들이 있긴 하지만 말이야. 아직도 미국 정부가 대한민국의 케이스를 민주주의 전파의 롤 모델로 삼고 있다면 믿겠나? 그러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내 개인적으론 자네 조국에 대해 나쁜 인상이 전혀 없다는 거야, 오케이? 하지만…. 단점이 딱 하나 있어."

그건 쉽게 알 수 있었다.

"작죠."

"그래. 작아! 너무 작다고! 땅덩어리부터 사람 수, 그리고 국제사회 영향력까지 전부! 이봐, 영. 왜 하필 한국에서 정규 공대를 만든 거야? 그것도 멸급을 목표로 두고서. 지금 당장에라도 미국, 우리 아메리카로 오게. 분명 사람들이 모일 거야!"

패트릭의 목소리가 커졌다. 탁자를 술잔으로 내리찍으며 하는 말을 천후는 담담히 받아들였다. 문득 주변을 돌아보니, 많은 사람이 둘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중 상당수가 패트릭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다는 것을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미국은 안보에 대해선 엄청나게 예민하게 대응해. 무조건적으로 안전한 사회를 원하지. 일리미네이터 기본 체계가 미국에선 반년 만에 만들어졌을 정도니까 자네도 이해하겠지. 자네가 만든 그 텔레포테이션 시스템. 미국은 벌써 하고 싶어 해. 하지만 유그드라실에서 나에게까지 허가를 안 내려주고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구경만 하고 있다고. 당장 오면 훨씬 그 시간을 좁힐 수 있어! 이미 미국은 마법사 인권 신장을 위한 모든 준비를 끝내놓고 있다고. 몸만 와! 자네만 오면 돼!"

그 목소리는 절실했고, 그 눈동자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천후도 잠시 흔들렸다. 이렇게까지 무조건적인 구애를 받을 줄은 몰랐다.

패트릭이 하는 말에 거짓은 없었다. 일리미네이터의 기본 수준 차이는 있겠지만, 딱 그것만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한국이 미국보다 나을 점이 전혀 없다. 세금 면제? 미국이라고 안 해줄까? 당장 경급만 상대하는 월드 리버티도 세금 면제 혜택은 받고 있었다.

인구수가 더 많으니 일리미네이터 수 자체도 많을 테고, 마법사들에게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환경의 국가였다. 초자연적 능력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도 긍정여론이 많은 것도 컸다.

영토가 넓으면 텔레포테이션 시스템을 갖추기 힘들지만, 유그드라실과의 연동도 가장 원활한 국가이니 어느 정도 대체도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천후가 대한민국에 대한 애국심이 엄청난가에 관해서 이야기하자면…. 절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안 좋은 쪽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가 제3 인류라는 설명에 그를 유그드라실에 넘겨버렸고, 자국민임에도 그 이후로 반환요구는커녕 어떻게 보호되고 있는지에 대한 단 한 번의 확인도 하지 않았다.

드래곤 사태가 한창 진행될 땐 대체재가 없음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로마이어를 지지해 그를 엿 먹였고, DS 공격대를 창설하고 나선 그 대가에 대해 언급할 정도로 인식력이 바닥이었다.

국가 자체뿐 아니라…. 국내 어딘가에 살아있을 자신의 친인척 역시 그를 유그드라실에서 찾아갈 시도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과연 자신의 부모님에 대해서 생각이나 하고 있을지나 의문이다. 이러니 있던 애국심도 날아가리라.

뭣보다 애초에… 그는 기억이 존재하는 그 시점부터 평생을 한국 땅이 아닌 성층권에서 지낸 인간이다. 국가에 소속의식이란 것 자체가 관념적으로나 느낄만한 것이지, 그의 몸에 새겨져 있질 않았다. 그나마 가까이 지낸 사람이 한국인이 아니었다면 아예 한국이란 나라에 관심이나 보였을까 모르겠다.

"미국으로 오게, 미스터 영. 자네가 바라는 모든 것이 열릴 거야."

"후…."

천후는 잠시 힘들게 한숨을 쉬었다. 이런 진심을 상대하는 것은 꽤나 어렵다. 천후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입을 열었다.

“대한민국을 거점으로 둔 이유는 여러 가지 있습니다. 일단 텔레포테이션 시스템을 최초로 실현했을 때, 큰 문제 없이 바로 돌릴 수 있는 지역이 필요했어요. 미국에서 허가를 내준다곤 해도, 영토가 너무 넓은 곳에서는 쉽지가 않죠. 그리고 전 타국에선 인지도가 떨어지니까요. 가장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는 곳이 대한민국이었어요. 인종 문제도 있고.”

“아아. 그건….”

패트릭은 뭔가 반론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마법사이기 이전에 평생을 흑인으로 살아온 그였기에 인종 문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훤히 알고 있었고, 천후의 말마따나 일본인 정도를 제외하면 황인종, 아시아인에 대한 인식 개선이란 시일이 필요한 일이었다.

21세기를 맞이한 이 시점에도 아메리칸 히어로로서 황인종을 받아들이는 건 이민자 국가인 미국조차 쉽지 않았다. 정부와 일리미네이터는 전적으로 천후를 받아들이겠지만, 일반 시민들의 눈은 또 다를 것이다.

“그리고…. 기회를 줘보고 싶단 생각도 했어요. 저와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에게. 사람 마음이 그렇더라고요.”

“그건 이해하네.”

패트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후의 배경을 잘 알지 못했지만, 자신의 고국을 빛내고 싶다는 생각은 당연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자신 역시 그 때문에 미국이 공격대 파견 여부를 두고 타국을 흔드는 걸 방치하고 있었으니까. 온전히 자신의 의도는 아니라지만 말이다.

“저라고 한국에서 모든 걸 끝낼 생각은 없습니다. 아마 안정권에 들면 미국 쪽과 정식으로 접촉할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일단 공격대가 제구실을 하는 영역까지 끌어올리는 것만으로도 바빠서.”

“그렇군. 그럼 그때가 되면 꼭 한번 이야기해주게. 그럼 내 쪽에서 정부 인사를 초청해두지.”

“그땐 부탁하죠.”

“음. 아. 그리고 멸급 트라이를 할 때 도움이 필요하다면 노블레스 클럽 멤버들에게 이야기를 한번 해보게. 분명 참가자가 많이 나올 거야. 사실 클럽도 그런 용도로 운영하고 있는 거거든.”

“그런가요?”

“그렇지. A랭크 일리미네이터라고 전부 공격대를 운영하거나 공격대에 소속되어 있는 게 아니야. 모두가 자네나 나 같은 강심장은 아니니까. 미국에 몸을 두고서 파급만 잡는 경우가 오히려 많지. 하지만 멸급 레이드엔 동참해줄 거네.”

“미국의 허락은 필요하겠지만?”

패트릭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천후는 쓴웃음을 지었다.

막대한 권한과 자금을 풀어줌으로써, 이들을 미국에 상주시켰다. 그들이 평소에 어떻게 지내든, 미국 본토에 위협이 일어났을 때 A랭크 일리미네이터를 최대한 많이 동원하기 위해서.

클럼 멤버 전원이 미국인은 아니었지만, 상당수가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굳이 자신이 태어난 조국에 돌아가지 않고 미국에서 지내는 이들도 많아 보였다. 그렇다면 그들의 조국은 미국이나 다름없었다.

‘강력하군.’

이 클럽을 만든 안소니 크라우저의 아이디언지, 아니면 다른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체제대로라면 미국은 정말 절대 안전 국가라고 할 만했다. 미국은 그들에게 레이드 참여를 강요하진 않겠지만, 분명 당시의 분위기 등에 이끌러 스스로 나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지내는 정원의 사실상 관리인이 바로 이 남자였다.

‘이 정도라면….’

천후의 머릿속에 빠르게 생각 하나가 번뜩였다. 그는 잠시 주변을 돌아보다가, 패트릭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패트릭. 멸급 이상…. 천, 신급 디제스터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습니까?”

흠칫. 순간 패트릭의 얼굴이 굳었다. 그것은 곧 경악으로 물들었다가 되돌아왔다. 그는 천후와 마찬가지로 주변을 돌아보다가, 어깨동무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속삭였다.

“사람 눈이 있는 곳에서 할 이야기가 아니군.”

그 말에 천후는 두말할 것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쿠폰,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일어나서 한 화 더 올릴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