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한국으로 돌아온 천후는 일단 몇 가지 조치를 취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미국에서 건진 두 가지 키워드에 관해 알아보는 것이었다. '엘모세와트‘. 그리고 알자드란 남자에 대해.
이 중 전자는 쉬이 나오는 것이 없었지만, 후자는 금세 알아낼 수 있었다. 정보의 출처는 친란이었다.
"현재 아랍권에서 큰일이 터지고 있는 건 알고 있겠지. 그쪽에서 난민을 받아서 난민 보호소를 운영하고 있는 사람이더군."
"흐음…."
천후는 살짝 인상을 썼다. 사람을 외관으로 판단하는 것은 실례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던 기색은 그런 온건한 것이 아니었다.
"해당 국가에 직접 들어가는 게 아니라, 빠져나온 이들만 해당 국가의 허락을 받아서 보호소를 운영하는 모양이야. 일종의 자선사업이고. 터키,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 꽤 크게 활동하고 있는 모양이더군. UN에서 정식으로 지원자금도 얻어내고 있다."
"그렇군. 혹시 모르니 좀 더 자세히 알아봐 주겠어? 그 사람 개인과 그 보호소에 대해서."
"왜 그렇게 신경 쓰지? 뭔가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나?"
"조금. 감에 가깝지만."
천후의 대답에 친란은 살짝 인상을 굳혔다. 영천후는 종종 놀라운 직감을 발휘하곤 했다. 디제스터나 싸움, 위험 등에 관련해서 특히 그랬는데, 지금도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한 것이다.
애초에 평소엔 타인의 인적사항에 대해서 굳이 이렇게 깊게 파악해달라고 할 사람이 아니었다. 문제가 심각할 수도 있단 느낌을 받은 친란은 부채를 접었다.
"알았다. 최대한 자세히 알아보지."
"고마워."
천후는 그렇게 친란의 도움을 얻어내면서, 동시에 라즈베리에 대한 신경도 함께 썼다. 그는 일단 그녀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강사를 구해서 붙였다.
공격대의 모든 구성원이 한국인, 혹은 한국 국적을 가진 이들. 덕분에 모든 의사소통이 한국어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다.
다행히 그녀는 의욕을 보였다.
보이긴 했는데….
"싸부. 한국어 어렵습니다."
"……."
처음 익힌 말이 이거였다. 라즈베리는 기본 상식(일본해 아웃. 동해 오케이 등)을 가르친 이후로 천후를 보고 티쳐라고 부르다가, 애매하다 느꼈는지 마스터로, 그 뒤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후엔 싸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대체 왜 그렇게 부르냐고 묻자 대답이 가관이었다.
"미스터 영은 앞으로 저에게 레이드 방법도 다른 것도 많이 가르쳐줄 겁니다. 라즈베리는 미스터 영을 존경합니다. 그러니까 싸부입니다."
"으으음…."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지만 본인이 그렇게 부르겠다니 교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혀를 찬 천후는 그러라고 허락을 내려줬다. 뭐 여기까진 괜찮았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싸부! 오늘도 왔습니다."
"흐으으으으음…."
천후의 얼굴에 수심이 들이찼다. 한국에 들어온 후. 천후는 엔체스터 호텔 방 하나를 빌려서 그녀에게 내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하루가 멀다고 천후의 자택에 찾아왔다. 너무 자주, 게다가 아침 댓바람부터 저녁까지 있다 가니 도무지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걱정된다."
그건 데려온 게 귀찮다거나, 뭐 그런 감정이 아니었다. 그보단 야간에 그녀가 이동한다는 점. 그리고 혼자 지낸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었다. 그녀의 서포터와 오퍼레이터는 따로 고용했지만, 천후나 강호와는 달리 정말 그냥 고용관계라 사적인 접점이 없어서 그녀는 완전히 천후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천후 자신도 고양이나 병아리 키우는 기분으로 그녀를 대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야 일부러 노사관계라는 틀을 가지고 가기 위해서 따로 지내게 했지만, 이쯤 되면 의미가 없었다.
때문에 천후는 넌지시, 아주 조심스럽게 희주의 의사를 물었다.
"저기. 희주 씨."
"괜찮습니다."
주먹을 내뻗기도 전에 카운터를 맞은 느낌에 천후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희주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홈스테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오히려 따로 두는 편이 좋지 않습니다. 주인님의 자택엔 아이들도 있으니, 한국어 숙달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깃솔깃솔. 팔랑귀가 쫑긋거렸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래선 날이 갈수록 식객이 늘어나는 게 조금 미안했다. 하지만 그 점을 솔직히 말하자, 희주는 오히려 살짝 책하는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런 정 없는 말씀 하지 마세요…."
"네."
쿵. 쿵. 자기도 모르게 안방에서 입을 맞춘 천후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몸은 차가웠지만, 그 마음은 놀라울 정도로 따뜻했다. 그것이 너무나 고마웠다. 희주가 속삭여왔다.
"사람이 느는 것은 아무렇지 않습니다. 그것 역시 주인님의 아량을 보이는 방법 중 하나이니까….“
희미하게 그녀의 바람의 그의 머릿속으로.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그것은 언령이 되어서 그를 사로잡아, 뜻대로 행하게 했다.
다른 사람이 그를 멋대로 통제하려 들었다면 분명히 불쾌했겠지만…. 그녀의 말은 다르다. 오히려 되고 싶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해준 만큼, 그녀가 바라는 자신이 되고 싶단 마음이 강했다. 채워준 만큼 돌려주고 싶었다.
"고마워요…. 정말로."
"아…."
희주는 다시 한 번 겹쳐오는 입술을 가만히 받아들였다.
*
그렇게 라즈베리는 빠르게도 천후의 자택에 입성하게 되었다. 그녀는 바로 째지는 기쁨의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천후는 고개를 저었다.
"잠깐. 라즈베리. 좋아하긴 일러요. 집에 들어오려면 일단 몇 가지 조건이 있어요."
"넵, 싸부! 뭡니까? 다 하겠습니다."
의욕 넘치는 모습에 쓴웃음을 지은 천후는 희주에게 고개를 돌렸다. 집주인이야 천후지만, 실제 관리를 하는 건 그녀였다. 때문에 천후는 라즈베리를 집에 들이는 건에 있어선 완전히 그녀에게 맡기기로 했다.
희주와 눈을 마주친 라즈베리는 단숨에 들떴던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긴장된 얼굴로 말을 기다렸다. 그녀를 바라보며 희주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일단…. 들어오게 되면 라즈베리에게도 몇 가지 일을 시킬 생각이에요."
"네, 언니!"
긴장된 목소리로 답하는 모습에 천후는 속으로 놀랐다. 그동안 몇 번인가 보긴 했지만 정말 놀라운 태도변화였다. 라즈베리는 천후의 자택에 들락거리면서도 아주 자연스럽게 생활하고 있었지만, 희주에게만큼은 유독 이렇게 확실하게 상하관계를 두고 대하고 있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고…. 우리 집에 아이들이 둘 있어요. 일리미네이터 일을 시작하기 전까진 그 아이들이 통학할 때 함께 해주세요. 집에선 같이 어울려주고. 방도 같은 2층에 마련해뒀습니다."
라즈베리의 고개가 빠르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생활할 땐 모든 말은 한국어로 하세요."
"네? 언니, 그건…."
"하세요."
"으…."
강경한 기세에 라즈베리는 천후에게 구원 요청의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저 눈빛을 정통으로 바라보면 아무래도 마음이 움직이긴 하지만, 희주가 정한 방침을 자신이 어그러뜨릴 순 없었다. 게다가 궁극적으론 그녀를 위한 일이기도 했고.
결국 어쩔 수 없단 걸 깨달은 라즈베리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답했다.
"네에."
그 답에 고개를 끄덕인 희주는 마지막 조건을 말했다.
"마지막으로…. 이건 아이들도 지키고 있는 조건입니다만…. 9시가 넘으면 1층으로 내려오지 말 것."
"응? 그건 왜…."
반문하려던 라즈베리는 그러다 아 하고 탄성을 지르며 양 볼을 손으로 감쌌다. 아으아으 하고 입을 우물거리던 그녀는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안 내려갈게요. 절대!"
"착한 아이군요."
가볍게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은 희주는 더 조건을 달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그 한 조건으로 어느 걸 조심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식은 확실히 라즈베리에게 각인시킨 것 같았다.
라즈베리는 희주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언니. 지금까지 화났었어요?"
"뭐가 말이죠?"
"그. 싸부 팔짱 끼고 그랬던 거…."
천후와 희주 사이의 관계를 몰랐던 것은 아니었지만, 아주 대충 생각하고 있었던 라즈베리는 이제 와서야 그녀가 지금까지 기분 나빴을 수도 있단 점에 생각이 미쳤다. 하지만 희주는 그 질문에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전혀…. 그런 건 없습니다만…."
"진짜요?"
"물론입니다. 왜 불쾌해야 하죠?"
“오오….”
담담한 반문에 라즈베리는 동경의 눈빛을 희주에게 보냈다. 정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그 태도에 감명받은 듯했다. 사실 그 대화를 듣고 있던 천후는 조금은 신경 써줬으면 하고 있었지만.
“그럼…. 오늘부터 지내도록 하세요. 방 준비는 되어있습니다.”
“네~.”
라즈베리는 활기차게 대답했다.
*
쾅. 콰쾅!
이른 새벽. 라즈베리는 사전에 희주에게 함께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리에 부탁해둔 TV를 바라보고 있었다.
밤새 천후의 전투화면을 돌려보던 그녀는 그러다 새벽이 다가오자 아직 정리되지 않은 짐 상자에서 무언가를 꺼내 재생시켰다. 그것은 일본 애니메이션 블루레이였다.
하지만 한 10분 정도 보았을 때. 그녀는 화면을 꺼버리고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하아…. 이제 이런 거 재미없어. 미스터 진구지는 짜증 났어. 일본인, 쪼잔해. 밝히기만 하고.”
뒹굴. 한차례 침대 위에서 몸을 굴린 그녀는 다시 천후의 화면을 틀었다. 그녀의 눈에 금세 생기가 돌아왔다.
“미스터 영은 역시 내가 생각했던 사람다웠어. 멋져….”
멍하니 중얼거린 그녀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널찍한 침대에, 그녀를 위해 놓아둔 TV에 블루레이, 다채널 스피커들이 라즈베리를 즐겁게 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소리는 최소화시켜두었지만, 시험해본 결과 상당히 볼륨을 올려놔도 밖에선 전혀 들리지 않는단 걸 확인했다. 방음이 확실한 집. 그녀에겐 천국과도 같은 환경이었다.
아직 가치가 판명되지 않은 그녀에게 이 정도의 시설을 제공해주다니. 게다가 집에 들어오게 해주다니. 호텔도 나쁘지 않았지만, 역시 그의 집에서 함께 사는 게 훨씬 꿈꾸던 상황에 가까웠다.
“확실히 통이 커. 역시 많이 벌면 이 정도는 해줘야.”
음음 하고 혼자서 고개를 끄덕인 라즈베리는 화면을 마지막까지 뚫어져라 보다가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밤새 영상을 봤지만, 별로 피곤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들떠서 기운이 넘쳤다. 이대로는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싸부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까?”
시계를 확인해보니 5시 반. 아직 사람들이 활동하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긴 했다. 옆방에 있는 두 백발 여자아이는 당연하고, 다른 이들도 움직일 시간은 아니다.
“으음~.”
들떠서 어쩔 줄 모르던 라즈베리는 약간 고민했지만, 결국 방에서 나와 1층으로 내려왔다. 밤에야 내려오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새벽까진 거기에 포함되지 않으니까.
‘기껏 DS랑 같이 살게 되었으니 새벽엔 어떤지도 보고 싶어!’
흠! 하고 콧김을 내쉰 라즈베리는 슬금슬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 나쁜 짓을 하려는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아주 약간 장난기가 발동했을 뿐.
일어나 있다면 아침 인사를 해주고, 자고 있다면 살짝 얼굴만 보고 나올 심산이었다. 아이돌과 동거를 막 시작한 팬의 심정이랄까? 그의 자는 얼굴은 어떤지 궁금한 걸 참을 수 없었다. 잠시 희주 쪽을 생각했지만, 분명 그녀는 그 정돈 용서해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후후.”
안방 앞까지 다가간 라즈베리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옷매무새와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곤 심호흡을 했다. 안쪽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직 자고 있는 걸까? 아니, 아마 안방 역시 방음이 잘되어있으니 뭘 하고 있어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으리라.
‘뭘 하고 있어도?’
쿵. 쿵. 라즈베리는 스스로 생각한 시츄에이션에 잠깐 가슴이 뛰었다. 마침 이걸 열었는데 현장이면 어쩌지? 침을 꿀꺽 삼킨 라즈베리는 한참을 고민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문고리를 잡고서 슬쩍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진행 중’인 상황은 아니었다. ‘다들’ 잠들어있는지 조용했다. 하지만….
“히익….”
자기도 모르게 새된 비명을 내지른 라즈베리는 문고리에서 손을 놓치고 그 자리에서 굳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천후는 잠들어있었다. 그 곁에는 희주 역시 팔에 안겨 잠들어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끝이 아니었다.
다른 한쪽에는 몇 번 얼굴을 마주쳤던 장신의 미녀 역시 나신으로 그에게 안겨있었다.
셋은 모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는데, 문을 열자 단숨에 남녀의 체향이 뒤섞여 그녀의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방 안에서 느껴지는 미지근한 공기, 습한 수증기가 바로 얼마 전까지 이곳이 전장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것만 해도 라즈베리는 기겁했지만,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을 그것뿐 아니었다.
‘세상에….’
그 한가운데. 동경하던 남자의 아래쪽. 자기도 모르게 시선이 간 그곳엔 괴물이 우뚝 서 있었다. 분명 모든 일이 끝난 상황인데도 아직도 갈구한다는 듯이 새빨갛게 빳빳이 서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와중에도 손가락 틈새로 그것을 똑바로 바라본 그녀는 놀란 나머지 입만 빠끔빠끔 거렸다. 바로 그때.
“…….”
인기척에 잠이 깬 걸까? 인형과도 같은 백옥의 피부를 가진 여성이 가만히 눈을 뜨더니 라즈베리와 눈을 마주쳤다.
“!!!”
깜짝 놀란 라즈베리는 어깨를 튕기며 눈 둘 곳을 찾지 못해 방황했다. 하지만 그 순간, 희주는 아주 약간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그녀에게 손짓했다.
마치…. 이곳으로 오라는 듯이.
“~~~!”
자기도 모르게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은 라즈베리는 그대로 문을 닫고는 곧장 자기 방으로 달려가 버렸다. 그 모습을 보며, 희주는 천천히 다시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귀여운 아이….”
오늘은 주인님께서 악몽을 꾸지 않은 것 같다. 그랬다면 벌써 기침하셨을 테니까. 그런 날에 그는 오전 내내 잠들어있곤 했다. 그것이 기뻐, 희주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
오후. 오랜만에 깊게 잠들었다가 일어난 천후는 라즈베리가 자신을 보는 눈빛이 더욱 강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싸부! 존경합니다. 사나입니다!”
“응? 왜, 왜 그래요?”
“끝내줍니다! 그런 건 처음 봤습니다!”
그로선 도저히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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